##연인들을 위한 시간(2)##

양은이파 작성일 06.10.27 01: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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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급하게 슬립을 접수하여 CT 촬영을 마치고 응급실로 돌아오니 흉부외과 의사가 이진의

X-Ray를 View box에 건 상태로 확인하고 있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찬규에게 흉관 삽관 준비가 되었다고 말을 건네고는 이진에게 안심시키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진은 한시라도 그에게서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날것처럼 그의 옷자락이나 그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 점차로 숨쉬는 일이 버겁게 느껴졌으나 이진은 그가 있는 한 걱정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흉부외과 의사가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상처는 많이 남지 않을 거야, 이진아. 너무 걱정하지마."

이진이 두려움으로 흉부외과 의사의 설명을 들으며 찬규를 힐끗 쳐다보자 찬규가 웃음을

보이며 이진의 곱슬 거리는 이마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어디 가지마, 찬규씨."

이진이 의사가 지시하는 대로 침대에 누우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소독 장갑을 끼며 자세를 확인하던 흉부외과 의사가 그 말을 듣고는 이진의 불안한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안심시켰다.



"김이진 씨, 믿어야 할 사람은 정찬규 선생님이 아니고 바로 접니다. 너무 걱정 말아요.

원래 VIP에는 제가 좀 약한 편이지만 미인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괜시리 힘이 나니 잘

될 겁니다."

"저 VIP 아닌 걸요."

"그런가요? 그래요 그럼 미인으로만 대할 겁니다. 그런데 정찬규 선생님이 옆에 있으면 제

손이 떨려서 제대로 안될 거 같은데 어쩌죠?"

"......그래도....찬규 씨가 옆에 있었음 좋겠어요."

이진이 다시 불안스럽게 찬규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해보죠. 제 손이 떨지 않기만 바래야 겠는데요?"

그러나 엄살 섞인 그의 말과는 달리 그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흉관 삽관을 시행했다.

그러는 15분 여 동안 이진은 옆에 선 찬규의 손을 꼭 쥐고 입술을 깨물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아픈 표정을 바라보는 찬규의 표정 또한 일그러지는 걸

본 후부터 이진은 소리내어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정성스럽게 드레싱을 마친 흉부외과 의사는 이진을 바라보더니 안심하라는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자, 다 됐습니다. 많이 고통스럽진 않았죠?"

"네, 괜찮아요."

"그래요, 숨쉬는 건 어때요? 좀 편해 졌나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느낌이..."

"겁먹지 말고 숨 크게 쉬세요. 기침도 좀 해야 할거고 심호흡도 자주 해야 할 거예요.

물론 김이진 씨 개인 주치의가 더 잘 아시겠지만.."

장난스럽게 찬규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이진도 웃음을 보였다.



응급실에서 병실로 옮겨오고서 이틀이 지났다. 그는 낮 시간 동안의 잠깐을 제외하고는

거의 밤낮으로 이진의 곁에 있었다. 통증도 어느 정도 참을 만 했고 숨쉬는 것도 편안해진

이진은 어젯밤 오랜만에 쉽게 잠들 수 있었다. 잠들 기전 떠오른 생각에 이진이 혼자

키득거리며 웃자 보호자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듯 했던 찬규가 이진을 쳐다보았다.

"뭐야, 뭐가 그렇게 즐거워?"

"찬규 씨, 요즘 들어서 우리가 같이 있었던 날 중에 제일 많은 날인 거 같애. 이럴 줄

알았으면 꾀병이라도 부려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건데 그랬어."

잠시 굳어진 표정이었던 그가 피식 웃었다.

그건 네가 몰라서 그래, 이진아. 네가 모르는 시간이 많이 지났어. 지금이니까 이 정도의

여유 시간이 있는 거지 인턴이나 일년차 때는 어림도 없는 일이야.



다음날 오후에 갑자기 들어선 찬규의 말에 이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벗어, 어서."

이진은 낭패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찬규의 얼굴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무..무슨..."

"간지럽지 않아? 드레싱을 해줄 테니까 웃옷을 벗으라고."

"..그..그래도..."

"좀 있으면 흉부외과 팀 회진하러 들이닥칠지도 모르는데 그러고 있을 거야?"

"찬규 씨..."

아직도 달아오른 얼굴에 커진 눈으로 이진이 그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스쳤다.

치료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이진의 망설임에 접하자 처음 그도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점차로 그녀의 수줍음이 더하자 그는 장난스러워졌다.

"어서 옷을 벗어. 소독을 해주겠다는 거지, 니 몸을 보겠다는 게 아냐. 이상한 상상하지

말고 말 들어."

"누..누가 들어오면 어떻게 해?"

"문 잠궜어."

마지못해 환의 단추로 손을 옮기던 이진은 생소한 수줍음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잠깐동안은 치료하려고 그러는 거라고 이해하지만 니가 이렇게 시간 끌고 오래 걸리면

다른 사람들 오해한다. 그래도 좋아?"

겨우 되찾아 가던 이진의 얼굴 색이 다시 발그레하게 물들어 갔다.

"찬규 씨...근데 좀 이상한 느낌이 들지?"

"무슨 느낌이?"

이미 2년여의 결혼 생활을 해 오면서 그의 앞에서 이런 수줍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는지도 몰랐다. 그를 약올리고 유혹하기 위해 그의 앞에서 옷을 벗었던

기억도 있는 그녀였지만 웬일인지 지금은 아주 낯선 수줍음이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

"몰라, 웬일인지....좀 꺼려지는 느낌이 들어. 좀 우습지?"

"아마 이런 환한 대낮에 네 맨 살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몰라."

그가 낮게 말했다.이진이 그런지도 모른다고 수긍하며 그에게서 돌아서서 천천히 웃옷

단추를 풀자 이진에게 보이지 않은 채로 긴장했던 그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진의 하얀 등이 드러나고 여전히 수줍어하며 가슴 부분을 가리자 그가 쓰게 웃으며

다가가 조심스럽게 반창고를 떼어 내며 소독을 해주었다.

차가운 느낌에 이진이 가끔씩 움찔거릴 때마다 그가 멈칫했다.

수십 번도 넘게 해 온 일이었지만 이진에게는 유독 다른 느낌이 든다고 그도 생각했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심정을 안다고, 환자의 입장이 되어 저염식도 먹어 보고

죽도 먹어 보고 피마자 기름도 먹어 보고 주사도 달아봐야 진정으로 환자의 불편을 이해할

수 있다고 인간미 넘치는 의사를 강조하던 과장의 말이 그에게 와 닿았다.

이진이 환자로 다가선 순간부터 그는 평소 아무렇지 않게 해 왔던 의료 행위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드레싱을 마치고 옷을 입으려는 이진을 돕는 그의 시야에 예쁜 가슴 선을 그리며 솟아

있는 이진의 탐스런 젖가슴이 들어왔다.

작지만 그의 손안에 감싸 이는 느낌이 좋던 희고 부드러운 가슴이었다. 순간 그는 치솟는

열망에 숨을 삼켰다. 이진의 아기 살결처럼 부드럽고 탐스러운 젖가슴을 만지고 키스할 수

있다면...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조금만 손 내밀면 그가 원하는 만큼 만져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충동을 억눌렀다.

그러고도 스스로가 못미더워 그는 두어 걸음 이진에게서 물러섰다.

이진인 아직 환자야. 그것 말고도 우린 풀어야 할게 많이 있다고, 정찬규.

우린 좀더 조심스러워야 해.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새나 마찬가지야, 이진인.



"답답하니?"

책에서 눈을 떼어 창 밖을 내다보는 이진을 살피며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이진이 그녀의 마음을 이미 읽고 있는 그를 향하며 씨익 웃어 보였다.

"밖이 참 따뜻해 보여."

"그래....좀 걸어 볼래?"

"그래도 돼?"

"그럼, 너만 괜찮으면..."

"사실은 찬규 씨가 먼저 말해 주길 기다렸어."

"왜?"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이진을 바라보았다.

"여긴 찬규 씨 병원이잖아. 아는 사람도 만날 테고, 동료들도 있을 테고 내 모습이

좀...그렇잖아."

"이런 바보. 그런 염렬 했단 말야? 자, 어서 일어나. 데이트하던 기분을 좀 내보자."

이진이 좋아라고 머리를 매만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 몸에 남아 있는 튜브로 인해

배액병이 상체보다 아래로 내려져 있어야 했으므로 그가 다가와 걸대를 들어주었다. 이진이

그의 팔을 다정하게 끼며 걸음을 옮겼다.

3월의 햇살이 정말 따스했다.

이진은 그가 이끄는 대로 느린 걸음으로 잔디밭을 지나며 주위를 살폈다.

멀리서 한강 고수 부지가 보였다.

이진은 작은 행복감으로 벅차 올랐으며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가끔씩 이진의 얼굴을

살피는 그의

표정이 낯선 사람을 보는 듯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진의 웃는 모습을 본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던 것이다.

식물원 안을 둘러보던 이진과 잠시 벤치에 앉았던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오늘 오후에....정신과 외래 다녀왔어?"

"음..."

이진이 약간은 풀죽은 얼굴로 대답했다. 찬규는 하루 종일 조바심 내며 궁금해하던

질문들을

한꺼번에 쏟아 놓지 않도록 자신을 조절해야만 했다.

"....좀....기억이 났어?"

"아니."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가 이진의 얼굴을 살폈다.

조그만 표정의 변화나 찡그림도 그를 겁나게 하는 것이었다.

"나...바보 같지, 찬규 씨?"

이진이 그와 마주보며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니가 왜?"

"바보가 된 거 같애. 처음에 그 얘기...듣고 어이가 없어서 웃어 버렸어, 한참 동안. 정말로

내가 미쳐 버

린 줄 알았을 거야, 아마."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지."

"다른 사람도 아닌 왜 내가..."

"너만 피해 가는 것도 우습잖아."

"하지만 찬규 씨, 이런 일은 아무에게나 있는 일은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그가 담배를 꺼내 물며 투명한 유리 천정 위로 푸르고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진의 커진 눈이 놀람으로 가득 차 찬규를 바라보았다.

"왜?"

"찬규 씨, 여기 식물원 안이야. 담배 피우면 쫓겨날 거라구."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아쉬운 듯 담배를 도로 집어넣었다.

"찬규 씨, 나....이렇게 영영 기억이 안 나면 어떻게 해?"

이진이 불안한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잠시 후 그가 피식 웃으며 이진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난 상관없어."

"정말?"

"음. 잠깐의 기억이 없다고 해도 넌 그대로의 너야, 이진아. 완벽하고 싶어하고 공부 욕심

많은 너보다는 약간은 부족한 듯한 네가 난 더 좋아."

"내가 그렇게 보였어?"

"음"

"난 자주 잊어버리고 다닐지도 몰라. 집도 잊어버리고 찬규 씨에게 찾으러 오라고 할지도

모르고"

"연락처 적어 꼬리표 해서 내보내면 되지."

"음식 만들다 소금을 안치거나 간장을 안 넣을지도 몰라. 아님 모르고 또 넣을지도

모르고.."

"그래도 맛있게 먹어 줄 수 있어."

"다른 남자를 찬규 씨로 착각하고 따라갈지도 몰라."

"그것도....뭐라고?"

이진이 그를 놀리다가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가 이진의 놀림에 당한 것을 알고는

장난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한동안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놀리며 장난을 쳤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이진의 시선이 은연중에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는 것을

그도 놓치지 않았다.

키스를 바라는 이진의 바램을 알아채고도 찬규는 일부러 이진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그만 일어날까?"

이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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