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 곳에...]-2

삐리리리리리 작성일 06.12.20 17: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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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순간을 간직하자면 추억의 앨범정도로 부족했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오히려 가난이 우리의 가족을 슬프게 하지는 못했다.

가끔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투시는 장면을 목격하기는 하지만, 은근히 아버지께서 져 주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나중에 어머니와 단둘이 산책 나가시는 것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래도 천생연분처럼 보였다.

늘 싸움 끝에 보이는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드시다가 만 오징어와 땅콩을 집어 들고 오시곤 하였다.

비록 먹다 남은 것이긴 하였지만, 그것마저 형과 나는 서로 더 먹으려고 혈안이었다.

항상 결과는 내가 더 많이 먹긴 하지만, 형과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장난은 오징어 와 땅콩 그 이상의 맛이었다.

오늘은 형이 장학금을 타는 날이다.

손재주가 많은 형은 공부까지 잘 할 줄은 몰랐다.

나야 뭐 공부와 담 싸 놓은 놈이기 때문에 형을 벗 삼아 자랑하는 일밖에 없었으니, 형의 그 솜씨마저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가장 자랑스러운 형이 있어 든든하기도 하다.

내 나이 10살.. 하루 종일 놀아도 시간이 그렇게 짧게 느껴졌던 하루하루는 지루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노는 시간을 빼서라도 우리 형이 장학금을 타는 것을 봐야겠다. 아무리 노는 시간이 좋

다 한들 우리 형이 상을 타는 것과 비교 하리오.

솔직히 지금 할일이 없다.

달리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었던 것이다.

다들 어디로 가고..

“ 쳇 ”

학생들로 우글우글 거리는 운동장에는 할아버지 같은 교장선생님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뭐 학교의 발전 어쩌구 저쩌구.......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

“그래서 결론이 모야..” 투덜투덜 거리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 어느덧 우리 형의 이름이 들리기 시작했다.

“위 학생은 교내 성적 우수 학생으로 이에 장학금과 상장을 수여함”

“1989년 10월 15일 성일초등학교장 고태호”

곧이어 수많은 학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 했고, 우리 형은 멋쩍은 듯 고개를 숙이며 그 자리를
인사로 대신하며 내려 왔다.

“아이고, 경진아... 끝났냐?”

뒤 늦게 찾아오신 어머니는 아직 앞치마를 벗지 못하고 찾아 오셨다.

부끄러운 나는 제일먼저 어머니의 앞을 가려 서 있었다.

“ 엄마는 맨날 늦게 와. 다 끝났잖아.”

“ 아이고, 이렇게 뛰어 왔는데, 끝나 부렀네..”

“ 그냥 집이나 가자고, 우리 형 수업 마치고 가야 된데.. ”

“ 그려? 사진기라도 있었으면, 찍어 놨을 텐데.”

아쉬운 듯 어머니의 손은 주먹을 꽈악 지고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카메라 정도는 있어야지.. 모든지 못 마땅한 것처럼, 아니 어린아이처럼 실제로 어린아이지만, 혼자 중얼거리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 엄마, 먼저 가서 저녁 준비 할테니깐. 나중에 와라.”

“ 내 저도 곧 집에 갈게요.”

오늘 우리 형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둘 우리 집을 찾아 올 것이다.

이미 그 사람들을 맞이하러 우리 어머니가 분주하신가 보다. 솔직히 도와주러 가야 하는데,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고, 오히려 어디서 놀 것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내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것은 우리 형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상장을 받는 모습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나중에 저녁 먹은 맛있는 음식 또한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오늘 저녁은 정말 행복한 가정에 태어난 사람처럼 나 자신마저 어린 마음이지만, 잘 태어 난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되었다.

“ 참, 좋아... 헤헤... 정말 좋아.. 헤헤 ”

유치하지만, 내 어릴 적 시절은 언제나 철부지 없는 나의 하루로 시작 되었다.

막내이기도 한 나는 사랑을 더 받아서 인지 모르지만, 모든 것이 다 이루어 질듯 한 착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아버지와 어머니는 손님들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우리 형의 멋진 상장을 보며 웃음을 끊이지 않으셨다.

그와 더불어 맛있는 것이 많았던 나 또한 웃음을 끊이지 않았다.

줄줄이 이어지는 칭찬과 형의 빛나는 상장은 우리 가족을 그렇게 화목하게 만들었다.

역시 우리 형이다.

비록 그 중에 내가 껴 있어, 가족의 수준을 낮추긴 하지만 말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 다고 나 말고 누가 또 자랑스러워 할 녀석이나 있겠어?

스스로 위안을 삼 아 보고 격려를 주고받지만, 어딘가 부족한 나로서는 늘 채우지 못한 아쉬움이 자를 채우곤 하였다.

부모로써는 자식이 최우선이라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식도 자식 나름이라는 비천한 나의 철학마저 느낄 정도 이니 오죽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게 여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 가정만큼 행복하고 하루를 아쉬워하는 가족은 없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아마 그때까지만 이라도 난 행복에 잠들어 있으리라!

하지만 그러한 행복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 때 이후로 시간이 멈추어졌더라면 이러한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 후 한통에 전화가 걸려왔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릉~~”

어머니께서 받으셨다.

“ 여보세요? ”

“ 임 순 설 씩 댁이죠. ”

“ 여기 남편이 이 석 중 씨 맞으시죠. ”

갑자기 어머니는 주저앉으셨다.

여자들의 직감은 틀리지 않는 다는 것이 어머니가 증명해 주는 듯 하였다.

“ 지금 시급히 병원으로 와 주셔야겠습니다. ”

“ 남편 되시는 분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

그 즉시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끊이질 않으셨다.

어찌할 바를 모르셔서 어리둥절하고 계셨을 때, 어머니는 우리의 눈을 한번 씩 쳐다보시고는 눈물을 흘리시며 병원으로 달려 가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슨 큰일이야 있겠어.’ 라며 안심하려 했을 때 우리 형에 큰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을 때 마지막 운명하시는 모습마저 보질 못하고 장례식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뭐야? 뭐가 이리 복잡해..”

“ 냥 간단한 일 같았다. 아버지가 다치셨고, 다시 고치면 되고, 그리고 병원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오면 되는 거 아냐..”

“ 엄마는 또 왜 이렇게 울어? ”

“ 형은 또 왜 바보같이 울고만 있냐? ”

“ 바보 같은 형.. ”

다들 서글픈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간단한 생각으로 얼버무리려 하고 있을 때, 아버지의 관이 나
오기 시작했다.

“ 엄마 여기에 아버지가 있어? ”

“ 여기 아버지가 있으면, 나오라고 하면 되잖아..”

“ 그냥 나오시라고 해.. 모가 이렇게 복잡해.. 그냥 나오시라고 하란 말야.”

어머니는 그저 나를 안고 울고만 계셨다.
나는 그 손을 뿌리치며, 오히려 어머니 품을 빠져 나왔다.

솔직히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내가 어리다고 놀리는게 아냐.

누가 몰라?

근데, 왜 관에서 안 나오시냐고, 왜 아직도 여기 안에 계신 거냐고..

왜... 왜

빨리 나오시란 말야..

도데체 뭐가 좋다고 그 안에 있단 말이야..

빨리 나와 아빠~!!

아빠..~~!

이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울음소리에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울음은 끝이 없었고, 어머니는 형과 나를 끌어안으시며

앞으로 행복하게 같이 살자,

아빠 없어도 행복하게 잘 살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지... 세진아 경진아..

“아빠 없이도 행복하게 잘 살자.. 할 수 있지?”

그렇게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잃게 되었다.

내 나이 겨우 10살에 아버지를 잃게 되었다.

집에 돌아 왔을 때는 아버지의 빈자리가 정말로 크게 느껴졌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운전자가 자기 가족을 위해 우리 아버지가 있는 쪽으로 핸들을 돌렸다고 한다.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가족을 보호 하려는 욕망은 참으로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아버지를 잃은 우리 가족에게서는 원수를 낳는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생명은 다시 돌릴 수도 다시 살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볼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다시 불러 올 수 있단 말인가!

실패 뒤에 겪는 좌절감 보다 몇 배 이상 뼈아픈 고통을 치러야지만, 해결 될 수 있는 문제이다.

아니 해결 되더라도 깊게 패인 상처와도 같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날 사오 신 다는 강아지마저 잊어버린 채 우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왜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겪어야만 했을까?

뒤 늦게 생각해 본다면 아버지의 품을 좀 더 안겨 있었더라면 후회라도 되질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따뜻한 품이 이제는 형의 따뜻한 품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어머니가 대신했어야 하는데, 형마저 아버지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여전히 막내였던 것이다.

누구 하나 도와주질 않는 다면 혼자서 이뤄낼 수 없는 듯 보였다.

여전히 다니는 학교에서도 아무 일 없는 듯, 예전부터 그렇듯이 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내 왔다.

하지만 슬프게도 어머니께서 예전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더 힘든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나날이 손이 트는 것을 보면 매우 힘든 일을 하시는 것 같다.

힘드신 어머니에 비하면 꽤 좋은 환경에서 자란 것 같다.

그렇게 어머니의 손이 부르틀수록 우리의 길은 여전히 저마다 가고 싶은 곳으로 목표를 향해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지나갔다.

5학년 1반, 여기가 내 교 실이다.

이미 우리 형은 졸업해서 중학생이고, 뭐 워낙 낙천적인 성격에 문제가 생길 것이 있겠냐마는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오히려 낙천적인 성격이 다른 사람에게는 문제시 된다는 것을...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 인 것이다.

그렇게 살아오지 못한 아이들의 죄의식 같은 것이 폭발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보상을 받지 못한 분풀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들의 눈에는 내가 가시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필요한 것은 단지, 그 아이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들과 상관하지 않는 것이 목적이다.

그것이 만약 필요에 따라 가릴 수만 있었더라면, 고생과는 거리가 멀었을 텐데.

사고방식이 어두운 뒷골목으로 변해 버린 슬픈 현실이, 가슴을 꽉 쥐어짜듯 보였지만, 한줄기 빛은 늘 비추고 있었다.

그만큼 나에게는 형이 가장 큰 존재감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지만, 형에 자리만큼 큰 자리를 매 꿔 주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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