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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한다며?"
"매년마다 하던건데 왜 호들갑이야?"
"왜 호들갑이냐니, 이번은 딱 졸업할때 하는거잖아! 왠지 더 의미있지않냐?"
요즘 학교에선 위와 같은 대화들로 가득하다. 가만보면 졸업파티인 프롬(prom)으로
오해할수도 있겠지만 프롬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그게 뭐냐면
바로 이 학교의 신데렐라를 뽑는 제라드의 19번째 생일파티이다.
생일 파티 하나 가지고 왜 이렇게 난리냐고 물어보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제라드는 학교에서 남녀 불문하고 가장 인기있고, 잘 놀고, 잘생기고, 언제나
상위그룹에서만놀며 부모님께 큰 호텔을 물려받을 상속자 이기때문이다.
제라드는 자기 생일때마다 특별한 이벤트를 하는데 바로 그게 앞에서 거론되었던
그의 신데렐라를 뽑는것이다. 물론 신데렐라라는 호칭은 제라드가 집적 지은것이
아니다. 그는 그냥 자신의 생일때마다 전교생을 자신의 저택에 초대한뒤 성대한
파티를 벌인다. 그러다가 12시가 다가오면 가장 마음에 드는 여학생과 춤을 추다가
정각 12시가 되면 그 여학생에게 키스를 한다. 그럼 그 여자는 제라드의 여자친구가
되고 아무리 학교에서 못나가던 존재였어도 곧바로 인기스타가 되는것이다.
실제로 제라드가 10학년때는 무슨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평범하다 못해 왕따였던
니콜이라는 애를 선택해서 화제가 된적이 있었다.
그 뒤엔 어떻게 됐냐고? 니콜은 하루만에 스타로 급부상하고 니콜을 괴롭히던 애들도
니콜에게 들러붙고... 결국 니콜은 왕따로 입학하고 학교의 거물급 존재로 졸업하게됬다.
정리하자면 제라드에게 선택받은 여학생는 학교신문 제일 앞면에 '올해의 신데렐라' 라는
신문부가 붙여준 호칭이 기사로 올라가고 그 여학생은 엄청난 스타가 된다... 라는것이다.
솔직히 제라드 정도의 남자라면 일년에도 몇명, 아니 몇십명이 되는 여자들을 갈아치울수도
있겠지만 1년동안 한여자를 사귄다는건 멋진일이 아닌가? 게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나면 그런 파티는 그만둔다고 하니 내생각에 제라드는 완벽하다.
(물론 졸업할때까지 그런 여자를 못찾아 계속 파티를 하고있지만)
그렇다고 1년만 사귄뒤 해어지는, 나쁘게 말하면 버려지는 여학생들이 그리 불쌍한건아니다.
그들은 학교의 스타라는 명성을 얻게되니까.
사실 제라드를 좋아하지 않아도 스타의 야망을 꿈꾸고 제라드에게 선택받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이상한점은 제라드의 신데렐라들이 모두 제라드와 사귄지 얼마 안되서 비실비실
해지고 자주 쓰러진다는것이다. 게다가 우연인지 운명인지 첫번째 신데렐라인 미셸은
사귄지 약 3개월만에 갑자기 쓰러진뒤 결국 죽고말았다.
그게 왜 그런지는 당사자인 제라드의 신데렐라들도 모른다니 의아하지만 여학생들은
건강을 담보로 걸고 제라드의 신데렐라가 되려고 애쓴다.
소문에 의해면 밤마다 제라드와 너무 화끈하게 놀아서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파티가 이번주에 열린다고 하니 학교는 그야말로 신데렐라 이야기에
푹 빠져있다. 나는 어떠냐고 물어본다면 나도 물론 다른 애들처럼 가고싶다.
일단은 나도 평범한 이 학교의 여학생이니까.
하지만, 찢어질듯이 가난한 우리집에선 그 파티에 걸맞는 옷을 찾을수도, 살수도 없다.
게다가 이번엔 해야할 숙제들이 산더미이니... 선생님들은 아마 그 파티때문에
학생들이 학업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거라고 생각해 일부러 이때 숙제를 많이 내주는듯
하지만 신데렐라가 되고픈 여학생들에게 그런건 아무런 장애물도 될수없다.
하지만 난 아이비리그라는 꿈을 가지고 있으니 뭐 하나 포기할수 없는 상황이다.
우선 아이비리그에 들어가서 찢어지게 가난한 우리집을 살려야하니까...
"린지!" 저 멀리서 내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드는 에비게일이 보인다. 에비게일은 내
절친한 친구중 하나로 이번 신데렐라가 되기위해 애쓰고 있는중이다.
자꾸 나를 파티에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어쩌겠어, 갈 형편이 안되는걸...
"어때 좀 생각해봤어?"
"왜 만날때마다 물어보는거야? 말했잖아 갈수없다고"
"제발! 제발 같이 가주라 나 친구 별로 없는거 알잖아"
에비게일이 내 팔을 잡고 늘어진다. 사실 에비게일도 우리집 형편을 잘 몰라서
이러는것이리라. 그 사실을 안다면 이렇게 조르지도 않을텐데...
에비게일은 이곳으로 이사온지 얼마 안되 친한 친구도 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닥 내 집안사정을 알리고 싶지않아서 공부 핑계로 거절하고있지만 사실 나도
돈만 아니면 가고싶은 마음이다. 딱 하루만인데...
졸라대는 에비게일을 보낸뒤 집으로 향했다. 딱히 할것도 없는데 공부나 해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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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과 같이 우편함을 확인했는데 조금 특별해보이는 편지가 보였다.
햊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색 봉투에 펄이 들어간 파란색 훈장모양의 스티커로
입구가 봉해져 있었는데, 딱 봐도 다른 편지와는 차별화가 되는듯했다.
조심조심 스티커를 때고 내용을 확인해보니 제라드의 파티 초대장이었다.
전교생 모두에게 날아가는 편지라지만 이런식으로 받고보니 내가 특별하진 느낌이다.
초대장에는 파티를 하는 장소와 일시가 적혀있었다. 이번주 금요일 8시에
제라드 소유의 저택에서 열린다고 한다.
그 저택은 이 동네 주민이라면 모두 알만한 저택이었다. 하얀 벽돌로 지어진 2층짜리
저택인데, 제라드의 부모님이 마음대로 쓰라면서 줬다나 뭐라나.
초대장을 받으니 가고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지만 모두들 예쁘게 꾸미고올텐데
나만 티셔츠에 청바지같은 차림으로 가봤자 창피만 당할게 뻔하다.
다른애들은 하나씩 가지고있는 치마하나도 없다니, 자꾸 내 자신이 초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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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이 쇼핑가자!" 에비게일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하긴, 이제
제라드의 파티가 3일밖에 안남았으니 그럴만도 하지. 에비게일뿐만 아니라
학교의 거의 모든 학생들이 친구들과 쇼핑 약속을 잡은듯 했다. 여학생뿐만 아니라
남학생들도 파티 열기에 후끈 달아올랐다. 물론 남학생들은 제라드의 신데렐가가
되려는 목적은 눈꼽만큼도 없고, 단지 파티 분위기에 취해있는 여학생들을 낚아서
어떻게 해보려는 목적이었다. 게다가 가본사람 말에 의하면 파티장 안에는 대마같은
약들이 이곳저곳에 즐비하다고한다. 여자도 낚고, 공짜로 약을 할수있다는데
가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에비게일은 날 데려가기로 한 계획은 포기한듯싶었다. 우선 가서 친해지고 보는거지!
하는 생각같아 보였다.
에비게일의 간절한 부탁에 의해 같이 쇼핑을 가기로 했다.
"나 이번에 입을 옷 사려고 용돈도 안쓰고 아르바이트까지 한거 알어?"
그렇게 말하며 지갑을 꺼내 살짝 보여주는 에비게일. 에비게일의 말대로 지갑엔
지폐가 수두룩했다.
"도대체 뭘 사려고 그렇게 모았어?"
"무조건 이쁜거! 근데 이 학교에 온지 얼마 안되서 제라드 취향을 모르겠어"
울상 지으며 말하는 에비게일을 보고 지금까지의 신데렐라들을 짚어보니 이미 하늘로 가버린
첫번째 신데렐라 미셸과 세번째 신데렐라인 에슐리 모두 성숙하고 섹시한 스타일이었다.
왕따였던 두번째 신데렐라 니콜은 스타일은 안좋았어도 나중에 꾸미고 보니 그래도
꽤 그럴듯한 몸매와 얼굴을 가지고있었다.
결론은 제라드는 섹시한 여자를 좋아한다는것. 에비게일에게 말해주니 오히려
더 절망에 빠진다.
"뭐 섹시한 여자? 휴... 망했다 망했어 난 절대 섹시해질수 없다고!"
사실 에비게일이 낙담할만 했다. 에비게일도 예쁜 얼굴이었지만 귀여운 외모였고
몸매도 빼빼 마르기만 한 체형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도 그닥 제라드의 취향에 맞는 여자는 아니었다. 에비게일은 귀엽기라도 하지,
내 스타일은 아무리봐도 공부벌레 스타일 이었다. 그래도 어렸을땐 예쁘다는 소리
많이 들었는데... 관리의 소중함이 절실히 느껴지던 때였다.
파티에 대해 실컷 떠들다보니 어느새 한 옷가게에 도착했다.
에비게일은 옷가게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파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고른것은 가슴이 많이 파이고 등은 아예 없어 뒷부분을 끈으로 묶는
스타일의 아주 짧은 원피스였는데 아무리봐도 마른 에비게일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다른것을 골라보다고했지만 기어코 그걸 산다는 에비게일.
결국 옷을 계산하고 우리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신발, 귀걸이, 목걸이등 어마어마한양의
물건들을 샀다.
둘러보니 나도 사고싶은 옷이 하나 눈에 띄었는데 집에 돌아올때도 자꾸 그 옷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파티 당일-
오늘은 바로 거의 모든 전교생들이 기다라던 제라드의 파티가 있는날이다.
학교에서도 그 예기로 수업이 안될정도였으니 아마 다들 흥분해있나보다.
휴... 자꾸 생각하니 더 가고싶어진다.
파티에 대한 생각을 뒤로하고 책상에 앉아 책을 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이
파티 장소와 시간으로 보이고 책에 삽입된 그림은 제라드의 얼굴이 보이니 전혀
집중이 되지않았다.
창문을 바라보니 벌써 어둑어둑해졌고, 시계는 7시를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50분 남았군. 에비게일은 미용실에 간다던데 잘 됐나 몰라.
이번 신데렐라는 누가 될까, 아마 우리학년인 제니퍼가 될것같은데... 걔는
내가 봐도 섹시하니까...
자꾸 파티에 관련된 생각을 하고 시계를 보니 벌써 10분이나 지나있었다.
가지도 못하는데 계속 그런생각을 하다니... 진짜 바보같군...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시작하려는데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집엔 아무도 없었기에 나가보니 왠 가면을 쓴 남자가 서있었는데 느닷없이
내 팔을 낚아채고 달리기 시작했다.
"누... 누구세요!"
"글쎄요 우선 따라오시죠"
"지금 이게 따라가는걸로 보여요? 강제로 끌려가는거지!"
겨우 팔을 뿌리치고 쎄게 요동치고있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집은 저만치 멀리 떨어져있었다.
"누구신데 마음대로 사람을 끌고 달리는거에요!?"
"한마디로 당신의 마법사라고나 할까요?"
뭔 마법사? 대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나는 있는대로 얼굴을 찡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그 의문의 남자가 다시 손목을 움켜잡는다.
"아 뭐에요! 자꾸 그러면 신고 할거..."
"가고싶었잖아요. 파티에."
파티라는 말에 나는 미처 말을 끝마치지도 못한채 의문의 남자를 말없이 쳐다봤다.
"제가 도와드릴께요."
"그런데 그 쪽이 누군지 알고 도움을..."
"그런건 아무 상관도 없어요.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다는 사실에 다급해져 일단은 그의 말을 믿어보기로 하고 그의 손에 이끌려 달렸다.
그리고 멈춘곳은 전에 에비게일과 왔던 옷가게.
문뜩 정말 가지고싶었던 옷이 생각났다.
"아무거나 고르세요"
"정말.... 그래도 되요?"
그가 대답 대신에 작은 미소로 답한다. 난 바로 생각해둔 옷을 고르고 그 옷을 입어봤다.
"괜찮아요?"
"네 예쁘네요. 그럼 빨리 다른데로 가죠!"
순식간에 그가 카드를 꺼내들어 계산을 하고 바로 신발가게로 향했다.
이번엔 그가 아무거나 고른뒤 내게 신발을 건냈다.
"신어봐요"
내가 집에서 신고 왔던 누추한 슬리퍼를 벗고 구두를 신어보니 정말 신기하게도 딱 맞았다.
"제가 안목이 좋은가보네요. 그냥 고른게 맞다니"
또 다시 그가 계산을 하고 나가서 귀걸이와 목걸이, 그리고 좋은향이 나는 향수까지 샀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멈췄다.
"이제 드디어 다 샀네요. 아, 머리는..."
그러고보니 모든게 완벽했는데 머리는 아직도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였다.
"시간이 없으니 머리는 그냥 푸르도록 해요. 그것도 이쁠테니. 파티 잘 즐기세요. 그럼 안녕히..."
그 말으 남기고 그가 반대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기요! 도대체 누구신데 이런걸 사주시는 거죠? 이름이라도 알려주세요!"
그가 살짝 고개를 돌려 말한다.
"그냥 마법사라는것만 알아두세요. 늦겠네요. 벌써 8시가 다 되가는데..."
그리고 그는 정말 떠났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에 대호 소리쳤다.
"누군지 안 알려주셔도 제가 꼭 알아낼거에요! 이 은헤는 꼭 갚을게요! 고마워요!"
힘껏 소리치고나니 이제 그의 모습은 정말로 보이지않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왜 나를 도와주는지는 몰라도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정말로 언젠간 알아내서 은혜를 갚아야지...
그런데 이러니까 나 진짜 신데렐라가 된것같잖아? 마법사도 나타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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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 당일: 제라드의 저택-
늦지않으려 뛰어오다보니 곧바로 쓰러질것만같이 숨이 찼다. 그래도 시간에 맞춰
오다니 다행이었다.
제라드의 저택에 들어서기도 전에 저택 주변은 쿵쾅거리는 시끄러운 음악소리로 가득했고,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은 화려한 조명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고있었다.
'이거 완전 클럽분위기잖아? 한번도 안와봐서 몰랐는데, 이런거였구나...'
원래는 초록색이었겠지만 창문사이로 쏟아지는 조명빛으로 인해 이색저색으로 바뀌는 잔디가
깔린 정원을 지나 거대한 저택의 문앞으로 들어섰다.
물에 뛰어들기 전의 수영선수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고 문을 열었다.
처음 본 저택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벌써 여자를 낚았는지 같이 수업을 듣는
동급생인 크리스가 한 여자애를 끼고 열렬히 키스를 퍼부어대고 있었다.
보기 민망해 재빨리 발걸음을 돌렸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그건 얌전한편이란걸 깨닫게됐다.
거의 술에 떡이 된 남자와 여자들 모두 화려한 조명 밑에서 서로의 몸을 맡긴듯 비벼댔는데,
놀랍게도 그 중에 내 친구 에비게일이 눈에 띄었다.
평소에 거의 말도 하지 않던 남자애와 노골적인 스킨쉽을 벌이는 에비게일...
'술이 사람을 바꿔놓는군. 평소엔 그래도 얌전한 편이었는데...'
하지만 술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 방의 문이 활짝 열려있었는데 그곳에서 유독 심한
연기가 흘러나오고있었다. 작은 불이라도 났나싶어 가보니 그 방엔 온통 대마를 종이에
말아 피우고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곳 역시 안면있는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이미 대마에 취해서인지 나라는 존재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것같았다.
그곳엔 별볼일 없다고 생각해 반대로 발길을 돌리다보니 제라드의 얼굴이 보였다.
제라드는 평소에 잘 어울리던 애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있었는데 살짝 어두운곳에 있으니
제라드의 얼굴이 한층 더 빛을 발하는것같았다.
그의 모습에 이끌려 그를 빤히 쳐다보고있으니 제라드도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는지
내가 있는쪽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고, 그 순간 제라드와 나의 눈이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순간적인 둘만의 교류. 하지만 말그대로 순간적인 교류였을뿐 계속 그 상태가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는 철저히 무너져버리고말았다.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제라드는 내게선 별 관심 없다는듯,
아무런감정이 담기지 않은 듯 바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하긴, 내가 봐도 매력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수없는 나였다.
그래도 정체모를 마법사의 도움을 받기도했는데... 날 위해 꾸며준건 고맙지만 내가 이정도
밖에 안되는 애라서... 그 마법사라는 사람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제라드의 관심을 받는건 기대도 안했던거지만 그래도 이런식으로 무관심을 받고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괜히 상심해서 평소엔 마셔본적도 없는 술에 손을 댔다. 사실 술이라는 느낌보다는 그냥
알코올 농도가 낮은 가벼운 음료같은거라고 생각해 기분전환을 할겸 잔을 들었는데
마셔보니 생각보다 알코올 농도가 높은 진짜 술이다. 원래 술이랑은 거리가 먼지라 단 한모금을 삼키고는
술잔을 내려놓으려 할때 그나마 친하게 지내는 남자인 닉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뭐야 너 술도 마시는거야? 넌 술같은거 전혀 못할것같은데"
닉의 그 말에 왠지모를 오해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두손을 사용해 완강히 거부하며 말했다.
"아, 아니! 난 술같은거 먹어본건 이게 처음인데..."
"그냥 말해본건데 너무 크게 반응하는거아니야? 오히려 그러니까 웃기다고, 술을 먹던
안먹던 그건 자기 마음이니까 눈치 볼 필요 없잖아? 요즘엔 그런거 거의 기본으로 통하니까..."
닉이 웃으며 말한다. 너무 크게 웃는바람에 살짝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크게 웃을건 없잖아?"
"설마 삐진거야?"
"아니"
"거짓말, 너는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난다고. 뭐 어쨌든 미안해 사실 나 칭찬해주려고 온거라고"
"칭...찬?"
"응. 너 오늘 예뻐보인다고...너도 여자라고 꾸미니까 그래도 괜찮은데? 앞으로 좀 꾸미고다녀!"
닉이 여전히 얼굴엔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닌채 그말을 남기고 떠났다.
닉이 남긴 그 한마디가 닉이 떠나고 나서도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예뻐보인다는 소리... 평소엔 전혀 꾸미지 않다보니 몇년만에 들어본 그 말의 효과는 대단했다.
이상하게 가슴이 요동치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계속되는 그 증상으로 빨리 진정시켜야할
필요성을 느낀 나는 바람을 쐬려 밖으로 향했다.
밖을 향해 뛰어가던 찰나 술잔을 들고다던 누군가와 부딪히고말았다.
"아... 죄송해요"
나는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버린 술잔의 유리 조각들을 하나하나 줏어들었고,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나가려다보니 날카로운 유리조각하나에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작은 상처일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외로 상처가 꽤 깊었나보다.
손끝에서 시작된 붉은 피가 점점 손등과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리는게 보였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피가..."
잔을 들고있던 사람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상처가 심해서인지 주위에선 온통 피로
물든 내 손에 관심을 보이며 아프겠다라는 말을 연발했지만 오히려 당사자인 나는 빨리
이 순간을 벗어나고싶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주 경미한 통증만이 느껴질뿐이었다.
급하게 유리조각들을 처리했지만 내손에 흐르는 피는 처리하지 못한채 밖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끊이지를 않았다.
그런데 유독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을 향해 잠시 눈길을 돌리니 그 끝엔 다름아닌
제라드가 서있었다.
아까만해도 나에겐 어떠한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제라드였는데 지금은 그 누구보다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있었다.
그 눈빛은 뭔가를 갈망하면서도 꼭 뭔가에 매혹된듯 흐리멍텅한 느낌의 눈빛이었는데 단지
피때문에 내게 그런 눈빛을 보낸다는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않았다.
갑자기 내게서 주목할만한 어떤것을 발견한 것일까?
여자로서 기분 나쁘지 않은 제라드의 시선을 계속 받고싶은 마음에 걸음을 살짝 늦췄지만
더이상은 지체되선 안된다는 생각에 밖을 향해 뛰었다.
물로 피를 씼어내니 시간이 좀 지났는지 흐르던 피는 이제 손가락 끝에서 조그만 방울을 이루고있을뿐이었다.
뒷처리를 끝내고 다시 저택안으로 돌아가려 방향을 바꾸니 제라드가 내쪽으로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상처는 어떻게 됬어?"
제라드가 달려오자마자 내 손을 낚아챈뒤 상처를 살피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상처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상이 없다는걸 깨닳았는지 내 손을 살며시 놓으며 말했다.
"다행이다. 피가 빨리 멎어서..."
제라드는 약간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채로 내 곁을 떠났다.
'제라드가 내손을 잡아주다니...' 아직 손에는 제라드의 촉감이 남아있었지만 그 상황이
꿈만 같았다. 순간 혹시 제라드가 내게 관심이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라드가 나뿐만이 아닌 모든 여자들에게 잘해준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겨우 그거하나에
큰 의의를 두면 안될것같았다.
실제로 저번에 학교에서 한 여자애가 열사병으로 쓰러진적이 있었는데, 제라드는 그 여자애와 전혀
안면이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애를 등에 업어 양호실에 데려간적이 있었다.
그런면에서 제라드가 내게 보여준 친절은 아주 일상적이고 아무 의미 없는것일게 뻔했다.
'바보... 제라드는 별 생각 없이 한건데 나 혼자 과대망상에 휩싸이다니...'
괜한 기대에 차있던 내가 바보스러워서 헛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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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 한 구석에 앉아 사람들을 보고있으려니 시간이 벌써 11시 30분을 지나고있었다.
몇몇 친구들이 다가와 같이 춤추자고 꼬시기도 했으나 역시 그런건 내 취향에 맞지않았기에
거절한뒤 테이블위에 즐비한 쇼트케이크만 축내고있는 나였다.
간혹 혼자 앉아있는 나에게 다가와 작업을 거는 남자들이 있었지만 단번에 거절한뒤 떠나보내기를
반복하고있었다.
그런데 몇분후 닉이 다가오더니 내옆에 앉은뒤 웃으며 말을 걸기시작했다.
"린지, 아직도 짝을 못찾은거야? 인기 없나보네?"
"그러게 내가 매력이 없나봐"
"매력이 없다라... 나랑 춤출래?"
"뭐야 갑자기"
"자고로 여자애들은 춤출때 매력이 보인다 이말이지"
닉의 진지하면서도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말에 웃지않을수없었다.
내가 계속 웃자 닉이 묻는다.
"왜 웃는거야?"
"웃기니까. 그냥 웃기니까 웃는거지 사람은 자고로 웃길때 웃는다 이말이지"
내가 닉을 따라하며 던진 말에 우리는 둘다 호탕하게 웃어넘긴뒤 아무말 없이 댄스플로어로 향했다.
닉과 나는 제대로 된 춤이라기보다 애들이나 추는 춤을 추며 서로 웃었고 그러는 사이
시간은 11시 55분을 향해 흘러가고있었는데,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 모두가 춤은 추듯 말듯
하면서 제라드를 향해 눈길을 보내고있었다.
이제 바로 5분 후면 제라드의, 아니 학교의 4번째 신데렐라가 탄생하게 된다.
지금 제라드의 상대는 내 예상대로 동급생인 제니퍼였다. 그냥 티에 청바지 하나만 입어도
매력이 넘치는 제니퍼였는데 오늘은 아찔한 탑을 입어서인지 더욱더 섹시하고 매력있게
느껴졌다. 남자애들의 관심은 아까부터 오로지 제니퍼의 현란한 몸놀림인것같았다.
여자애들은 단 5분 밖에 안남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제라드 옆에 붙어 춤을 추기도
하고, '나를 뽑아줘!' 하고 텔레파시를 보내듯 제라드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했다.
그리고 약 3분후 제라드에게 이상한 낌세가 보였다.
열심히 춤추고있는 제니퍼에게 약간 소홀해지는것같더니 곧바로 제니퍼에게 벗어나버렸다.
순간 저택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구에게 가는거야?" 따위의 대화가 오고가고, 제라드가 한발 한발 내딛을때마다
점점 말소리는 자취를 감춘채 음악만이 시끄럽게 저택을 울려대고있었다.
한걸음, 두걸음, 세걸음...
이상했다. 제라드가 나에게로 향해오는것같았다.
"제라드가 너한테 오는것같은데?"
이때만큼은 닉도 웃음을 감추고 긴장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설마... 설마 나한테 올까... 제라드가 내게 더 가까워질때마다 내 심장은 터질정도로
뛰어댔고 손은 땀으로 흥건했다.
하지만 내 기대는 역시 빗나가고말았다. 제라드는 바로 내 앞에 있는 여자애에게 말을
걸었던것이다.
"저기 잠깐..."
제라드가 내 앞의 여자에게 하는 말에 잠시나마 착각했던 내가 스스로 창피해져 고개를 숙였다.
"비켜줄래...?"
'잠깐...? 비켜줄래라니...? 앞에 여자애한테 춤추자고 한게 아니었나? 근데 비켜달라니...설마...'
내 앞의 여자애가 민망한듯 옆으로 살짝 비켜서자 제라드가 나와 30cm도 떨어지지 않은곳에서 말한다.
"시간이 없어서 춤은 신청못하겠다. 미안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라드의 입술이 내 입술을 부드럽게 덮었다.
그리고 시끄러웠던 음악이 꺼짐과 동시에 12시를 알리는 시계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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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신데렐라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곧바로 학교의 스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내가 지나갈때마다 "쟤가 린지라며? 이번에 신데렐라가 된 애" 라고 떠드는 소리들이
들렸으며 간간히 "나보다 안이쁜데"하며 질투의 시선을 보내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않는다. 제라드가 내 손을 잡아준것부터 시작해서 키스해준것,
신데렐라가 된것, 학교의 스타가 된것...
이제 얼마안있어 권력에 굶주린 애들이 내 곁에서 온갖 아부를 떨어댈것이다.
그리고 역대 신데렐라처럼 방탕한 생활을...
아니! 생각만해도 끔찍했다. 신데렐라가 됐건 어쨌던간에 난 아이비리그에 들어가야만한다.
고작 스타라는 유혹에 넘어가 꿈을 포기한다면 그처럼 바보같은일이 어디있겠는가?
그런생각에 빠져있을때 갑자기 누군가가 내 뒤에서 날 껴안았다.
"누... 누구야?!"
놀랐던 나는 재빨리 날 껴안고있던 팔을 뿌리치고 뒤를 바라보았다. 내 뒤엔 다름아닌
당황한듯한 표정을 한 제라드가 서있었다.
"그렇게 놀랐어? 미안, 잘 놀라는줄은 몰랐네"
"아니, 괜히 소란스럽게해서 내가 미안하지"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제라드가 내 남자친구라는게 실감이 나지않아 뒤를 돌아봤을때 제라드가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않았다. 고작해야 닉인줄 알았는데... 이제 빨리 익숙해져야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이따가 저녁에 시간있어?"
"시...간?"
그 순간 어떻게 말해야할지 몰라 뜸을 들이게 됐다. 사실 저녁엔 이번 대학에 넣을 에세이를 연습해보려
했기때문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제라드의 부탁을 거절할수도없고...
결국 고민끝에 에세이는 내일 쓰기로 하고 제라드와 약속을 잡았다.
"고마워~ 7시에 우리집에서 보자~"
그가 내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남긴 뒤 사라졌다.
제라드가 떠난뒤에도 나는 내 입술을 매만지며 멍하게 서있었다.
'도대체 언제쯤 익숙해질수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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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드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자 난 서둘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후줄근하게 가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몇분동안 옷장을 뒤져봤지만 나오는거라곤
역시 티에 청바지뿐, 입을만한옷은 어제 파티때 입은 옷 하나였다.
'그렇다고 입었던걸 바로 또 입을수도 없고...'
하지만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어쩔수없이 어제 입었던 옷을 입을수밖에 없었다.
제라드의 저택에 도착하자 어제 제라드에게 키스를 받았던 밤이 생각나는것같아 잠시 얼굴을
붉히고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저택안으로 들어서려하는데 제라드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린지! 2층이야!"
제라드는 2층 창문중 하나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미소로 답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는데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깜짝놀라고말았다. 어제는 분명 클럽으로 써도 무방할정도의 분위기였지만
오늘은 고풍스러움이 느껴지는 그야말로 부잣집 저택이란게 실감이났다.
댄스플로어가 있던 자리에는 화려한 자수가 놓인 카펫이 대신하고있었고, 어제는 어둡고 화려한 조명에
자려져 몰랐던 샹들리에게 눈에 띄었다. 벽면의 몰딩은 단순한것같으면서도 아름다운 '절제의 미'를
보여주는것 같았다.
저택안의 모든것에 한눈팔고 있으려니 제라드가 2층에서 내려오고있는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까부터 기다렸는데 안오고 뭐해?"
제라드가 묻자 살짝 창피해진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바꾸려 말했다.
"그냥 좀... 그런데 나는 왜 부른거야?"
"왜 부르냐니? 넌 이제 내 여자친구니까 같이 있고싶어서 그런건데 뭐 안될건없잖아?"
"그... 그렇지"
"어? 그런데 너 옷이..."
난 옷이란 말에 순간 놀라고말았다. 똑같은 옷을 연속 두번이나 입었으니 제라드가 날 뭐라고 생각할까.
그가 날 비웃지나 않을까 생각하며 고통스러웠지만 제라드는 한동안 미소만 지은 뒤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착한곳은 한 방이었는데 그 방의 문을 열자 수많은 옷들과
장신구들이 깔려있었다.
'이...이게 말로만 듣던 드레스룸이라는건가...'
그 장대한 규모의 방에 놀란 나는 한동안 드레스룸에 넋이 나가있다가 제라드의 한마디에 정신이 돌아왔다.
"이 방에 있는거 마음대로 써도 좋아"
"뭐라고?"
"마음대로 써도 좋다고"
"그렇지만 어떻게..."
"괜찮아 넌 내 여자친구니까"
제라드가 팔로 내 허리를 감으며 말했다.
제라드의 여자친구가 된다는것은 이렇게 하루하루가 놀라운 일로 가득차는것일까?
우선은 좋기도 했지만 한순간 사치의 길로 빠져버리는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제라드가 잠시 마실것을 가져온다며 1층으로 내려가고, 그 동안 나는 드레스룸을 둘러봤다.
드레스룸엔 옷부터 시작해서 모자, 시계, 신발, 목걸이, 향수, 화장품 등 치장에 사용할수 있는것들은 모두
모아놓은듯했다. 게다가 옷은 평범한, 그러나 비싸보이는 간단한 티에서부터 파티에 입는 드레스까지 온갖
종류의 옷들로 가득했다.
차마 입어보지는 못하고 구경만 하고있을때 제라드가 시원한 아이스티를 가지고 들어왔다.
"우선 뭐좀 마시는게 좋지않을까?"
제라드가 표면에 물방울들이 맺혀있는 컵을 건냈고 마침 갈증이 나던 터라 재빨리 아이스티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차가운것을 갑자기 마시다보니 머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서서히 눈이 감기고 쓰러졌다는것
외에는 기억이 나질않았다.
"린지! 좀 일어나봐! 괜찮은거야?"
제라드가 내 몸을 흔들어 깨우자 난 그제서야 눈을 뜰수있었다.
"혹시 몸이 좀 안좋은거야? 그렇게 갑자기 쓰러지다니..."
제라드의 말에 아까의 기억을 되살려봤다. 제라드가 건낸 아이스티를 마시고 쓰러져버린게 마지막 기억
이었는데 평소에는 꽤 건강한 체질이어서 갑자기 쓰러져버린게 나로써도 납득이 가질않았다.
침대위에 누워있던 나는 시간이 꽤 지났다는것을 알고 서둘러 몸을 일으켰는데, 일어나자 어지러운느낌이
들어 한동안 벽을 잡고 가만히 서있었다.
"괜찮아?"
비틀거리는 나를 잡으며 묻는 제라드. 괜한 걱정을 끼친것같아 스스로 걸어보려했지만 이상하게 어지러운
내 몸을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집에 도착하니 벌써 새벽 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평소엔 늘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왔고
좀 늦어도 8시 안에는 들어왔는데... 엄마가 아시면 무슨 말을 하실까.
다행히 엄마는 새벽에 들어오시기때문에 들킬염려는 없었지만 내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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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됐어? 어디까지 나간거야?"
평소에는 단짝인 에비게일만이 묻는 말이었겠지만 오늘은 별로 친하지도 않은 애들이 내 주위를
따라다니며 묻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안했어' 라고 말하자 주위의 애들이 거짓말! 하며 더 들러붙는다.
정말 아무것도 안했는데 나보고 어쩌라는건지.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향하니 제일 잘나간다고 하는 무리중 한명인 에이프릴이 내게 다가와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한다.
내 곁엔 에비게일이 있는터라 정중하게 거절하니 자존심 상한듯 표정 구기며 돌아가는 에이프릴.
이런게 스타가 되는길이라면 난 사양하겠다. 저런애들과 어울리며 권력을 휘어잡는다해도 학생시절일때
애들의 부러움을 사는게 전부이다. 차라리 저애들과 어울려 꾸미고다닐시간에 공부를 한자라도 더하지.
그렇게 되면 사회에 나가서 죽을때까지 모든이들의 부러움을 사는게 더 좋지않을까?
아무리봐도 난 학교의 스타라는 체질은 아닌것같다.
"그런데 요즘 닉이 안보이는것같지 않아?"
에비게일이 점심을 먹다말고 물었다. 그러고보니 맞는말이었다. 닉은 에비게일과 내가 뭘하고있던간에
자주자주 등장하는 애였다. 그런데 요즘들어 닉이 안보이기 시작했다. 수업을 들을때도 평소같으면 근처에
앉았겠지만 오늘 보니 저만치 떨어진 구석에서 앉아있고... 이상했지만 닉에게 안좋은 일이 있어서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다.
다 먹고 일어서니 제라드가 뒤늦게 점심을 가지고 내자리로 왔다.
"어, 벌써 다 먹었네,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내일 같이 먹으면 되지 뭐"
"그래 뭐 어쩔수없지... 그건 그렇고 오늘도 우리집에 오는거 어때?"
"오늘도? 그렇지만 오늘은..."
"그럼 이따가 보자!"
제라드는 그렇게 내 말은 들은채도 안하고 가버렸다. 오늘은 진짜 대학준비로 에세이를 써봐야하는데...
이미 한 약속을 취소할수도 없고... 역시 남자친구라는게 생긴다는건 좋은점도 있지만 나쁜점도 있다는게 몸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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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들어서게된 제라드의 저택. 에비게일이 오늘은 진도좀 팍팍 나가고 오라며 충고를 해줬다.
내 나이대가 되면 갈때까지는 가는게 기본이라고는 하지만 어째 영 내키지가 않는건 어쩔수 없다.
그래도 난 아직 학생신분인데... 내가 고지식한 사고를 가지고있는건지 다른애들이 너무 빠른건지 모르겠다.
이제 서서히 가을로 접어드는지라 해가 짧아지는게 확실히 보였다. 하늘은 벌써 파란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달도 모습을 보인것을 보니 조금있으면 깜깜한 밤이 될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집이아닌 이곳에 서있다니,
이렇게 가다간 아이비리그는 저 멀리로 날아가버릴것만같다. 딱 오늘까지만 오고 다음부턴 공부에 전념해야지!
문을 열자마자 제라드가 나와 반갑게 맞아주며 인사를 한다.
"어서와"
그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제라드는 나를 벽으로 리드한 후 본격적인 키스를 하고 나는 제라드의 입술과
혀에 순응하며 본능을 따른다. 키스는 어느새 입에서 목, 어깨로 향하고 더이상 키스를 퍼부울때가 없자
그가 내 옷을 위로 올려 벗겨내려고 했다.
"잠깐!"
위로 올라가버린 옷을 다시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아직 여기까지는 아닌것같은데"
약간 어두워진 내 얼굴을 바라보며 제라드가 웃으며 말한다.
"너 아직 순수하구나?"
그가 옷을 다시 벗어 던져버리고 그의 입술이 가슴으로 향한다.
뭔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자친구가 생긴다는것은 곧 이런것도 허락한다는뜻으로
받아들여지는게 현실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나도 그렇게 싫지 않고...
독백을 깨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현실세계로 돌아왔을땐 길고 긴 키스가 끝나있었다.
제라드는 나를 쇼파로 이끌었고 그가 내 위에 드러눞다싶이 올라탔다.
"앗 잠깐만"
갑자기 제라드가 일어서더니 테이블에서 초콜릿을 집었다. 그리고 자기입으로 초콜릿을 넣은뒤
살짝 굴리다가 내 입으로 초콜릿을 넘겨주었다.
"같이 먹는게 뭐든지 더 맛있으니까"
정말 제라드의 말처럼 같이 먹어서 맛있는건지 원래 맛있는 초콜릿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더 달게 느껴지는 초콜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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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3편이구요. 뒤에 내용이 너무 야해서 지웠습니다-_-...(갑자기 작가개입 죄송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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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드의 신데렐라가 된지 벌써 한달이 넘었다. 처음엔 제라드와는 조금만 만나고 공부에만 전념하자고
결심했었지만 역시 그 결심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계속 만날수록 제라드의 배려깊은 성격에 끌리게 된것이다. 게다가 외모까지 출중하니 내가 제라드를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공부에 소홀해진게 걱정은 됐지만 사랑의 힘이란... 수업을 들을때도 제라드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고
학교가 끝나고도 거의 제라드의 저택으로 출근하듯하니 공부에 손쓸새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들어 역대 신데렐라와 같이 내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는게 느껴졌다.
비틀비틀 걷는 내 모습을 보고 주위에선 '신데렐라의 저주'가 시작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자꾸 어지러워지고 창백해지는 내 얼굴의 원인이 궁금했지만 역시 나 조차도 알수가 없다.
이 현상이 정말 제라드와 관계된것일까? 하지만 왜?
그 이유는 여전히 풀수없는 수수께끼이다.
사실 제라드의 집에서 자고올때마다 상태가 악화되는것은 사실이지만 원인을 알수가 없으니...
"요즘 왜이렇게 건강이 안좋아보여?"
아주 오랫만에 닉이 다가와 내게 영양제를 쥐어주며 말했다.
"닉이구나? 요즘에 왜이렇게 안보인거야?"
"어... 그럴일이 있었거든. 어쨌든 그거 먹고 힘좀 내라"
"고마워 정말 너밖에 없다"
"근데 건강이 왜 안좋아진건지 너도 이유를 모른단말이야?"
"응. 신데렐라의 저주라는데 그게 진짜 맞나봐"
농담으로 던진말에 평소같으면 닉과 나 모두 웃었겠지만 이번에 닉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제라드하고 헤어져"
"뭐라고?"
"헤어지라고. 진짜 이상하지않아? 제라드랑 사귀는 여자들은 전부 건강이 악화되는거 말이야"
"에이, 설마 그것때문에..."
"잘들어 린지. 이건 그렇게 웃어넘길 일이 아니야. 저번에 첫번째 신데렐라였던 미셸 기억안나?
결국 죽어버렸잖아"
닉이 의미심장하게 그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그러니 나도 왠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으로* 닉의 말을 들어야하는지, 제라드를 믿어야하는건지 도저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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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야말로 내 건강이 악화되는 원인을 밝혀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제라드의
집에선 항상 잠들었다가 온다는게 마음에 걸린다. 제라드를 의심하면 안되지만 혹시 내가 잠들어있는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게 아닐까? 이렇게 따지고보니 제라드의 집에서 항상 잔다는것에도 의문이 들기시작했다.
혹시나 제라드가 내게 수면제를 먹이는거라면... 그러고보니 잠이 들기전에는 꼭 뭔가를 먹었던것같다.
제라드의 짓이 아니라고 믿고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할수록 이 모든게 제라드의 소행이라는것이 뚜렷해질
뿐이었다.
단단한 각오를 하고 여느때처럼 제라드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제라드의 언제나 같은 행동 패턴을
눈여겨본다. 우선 들어오는내게 키스를 한뒤 자리로 안내한다. 그다음엔... 먹을것을 가져온다.
오늘은 차였다. 평소같았으면 아무 의심없이 마셨겠지만 이번엔 제라드가 잠깐 안보이는 사이에 싱크대에
버린다. 하지만 들키지 않기위해 억지로 졸린척을 하고, 자는척을 해야했다.
이제부터였다. 제라드가 잠든 내게 무슨짓을 하는건지.
눈은 감고있어서 몰랐지만 제라드가 2층으로 올라가는것같았다. 몇분뒤 그가 뭔가를 손에 듣채 내려왔다.
'아- 저게 뭔지 확인만 할수있다면...!'
넘치는 호기심에 살짝 실눈을 뜨고 보니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날카로운게 보였다.
제라드가 다가올수록 그 물체가 점점 확실해졌다. 그것은 바로... 주사기였다.
설마 저 주사기를 이용해 내게 무슨짓을 하려는건가? 제라드와 나의 거리가 가까워질때마다 내 긴장은
극에 달해갔다.
드디어 그가 내 앞에 서있다는게 느껴졌다. 눈을 감고있어 몰랐지만 제라드가 손으로 내뺨을 쓸어 키스를
했다. 그리고...
아앗- 팔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팔에 날카로운것이 깁숙히 박힌다. '뭐... 뭐야, 설마 내 피를 뺀건가?'
극도의 긴장상태에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주사바늘로 추정되는 날카로운것이 빠졌다.
도대체 무슨일인가싶어 또다시 실눈은 떴는데 내앞에 벌어지고있는 일에 내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제라드가 내 피가 담긴 주사기를 입에 그대로 넣은 채 피를 마셔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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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내가 알아낸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것같았다. 제라드의
신데렐라들이 왜 모두 비실비실해지고 창백해졌는지... 그녀들은, 그리고 나까지 모두 제라드에게 피를
뺐긴것이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도대체 제라드는 왜 피를 마시는것인가?
혹시 그가 뱀파이어라도 된다는것인까? 아니, 그건 정말 말도 안되는 상상이었다. 뱀파이어라니...
그딴건 고딕소설에나 나오는거잖아? 게다가 뱀파이어가 실존한다고 쳐도 뱀파이어는 밤에밖에 활동하지 못한다고.
생각해보니 아무 매력없는 내가 제라드에게 선택받은 이유도 알것같았다. 제라드는 그날 밤 유리조각에
배여 줄줄 흐르는 피를 보고 내게 피에대한 강한 충동을 느낀것이다.
끔찍했지만, 제라드라면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어제는 자는척을 한뒤 간신히 빠져나올수있었지만 이제부턴 어떻게 해야하지?
이제는 제라드를 볼 용기가 나질않는다.
그때 제라드가 내게 다가오는게 보였다. 나는 그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반대로 빨리 걷다가 너무
긴장했는지 발이 뒤엉켜 넘어지고말았다.
'아- 하필 이럴때에...' 게다가 이건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넘어진곳엔 깨진 유리병이 있어서 손가락에선
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괜찮아?"
제라드가 걱정된듯한, 아니 걱정된듯 연기하며 다가왔다. 빨리 피야해했다. 하지만 내가 일어서서
뛰어가기도 전에 제라드가 앞질러 내 손가락의 작은 상처를 살폈다.
"피가 나잖아?"
제라드가 눈빛이 바뀐채 덜덜 떨리고있는 내 손가락을 응시하다가 상처의 피를 혀로 핥는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듯한 끔찍함과 혐오스러움에 내가 소리쳤다.
"무...무슨짓이야!"
"아니 상처가 났길래..."
"꺼져! 꺼지란말이야!"
기겁한 나는 제라드에게 소리치고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주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드디어 학교 공식 커플이 깨지기라도 하는건가?" 하고...
그 날 이후 나는 노골적으로 제라드를 피해다니기 시작했다. 학교는 온통 나와 제라드 예기로 술렁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반응은 나같은애가 제라드에게 무슨 불만이 있냐는것들... 제라드의 본성에 철저히
속고있는 학교의 모든 애들이 안타까울뿐이었다.
에비게일도 정확한 사정을 묻기는 커녕 왜 제라드같은 남자를 버리냐고 할뿐이니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닉밖에 없었다.
닉은 진심으로 걱정된듯 무슨일이냐고 묻기도 하고, 아무말 없에 곁에 서서 위로해주기도 했다.
처음부터 닉의 말을 믿었어야하는건데... 닉에게 한없이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닉이 내 남자친구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그 전엔 닉이 이렇게 좋은 남자였다는걸 몰랐을까...
제라드를 피해다닌지 얼마 안되서 제라드가 낌세를 눈치챈것같았다. 학교를 끝내고 집으로 향하는데
제라드가 다가왔다.
"안녕 린지?"
"제...제라드"
내가 도망치려했지만 제라드는 날 뒤에서 꼭 껴안은채로 내가 도망갈수없게 만들었다.
"또 도망치면 곤란한데, 그동안 많이 도망다녔잖아?"
"소... 소리지를거야!"
"질러 봐. 너가 소리 지른다고 누가 나와줄것같아? 요즘사회가 그렇게 착하고 정많은 사회가 아니어서말이지"
"도대체 뭐때문에 이러는건데?!"
"그건 너가 더 잘 알텐데. 너 눈치 챈거지?"
"눈치 채다니 뭘..."
"내가 뱀파이어리즘 이라는거말이야"
"배...뱀파이어리즘?"
"그래, 만약 그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린다면... 널 죽여버릴테니 그렇게 아는게 좋을거야. 그렇다고
바로 겁먹지는 마. 옛날에 미셸은 내가 뱀파이어리즘이라는걸 알아챘을때 바로 죽여버렸거든"
"미셸...? 죽여버렸다고? 그렇다면 나는 왜..."
"그야 간단해"
제라드가 나를 감고있던 팔을 풀며 말했다.
"니 피가 제일 맛있거든"
제라드가 떠나자 한순간에 긴장이 풀려버린 나는 그대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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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보니 난 한번도 와보지않은곳에 누워있었다. 내가 누워있는곳은 한 침실이었는데 꽤 깔끔하게 정리된
방이었다. 잠시후 놀랍게도 닉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고있었다.
"닉?!"
"아 깼어? 놀랐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거야?"
"집에 가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웅성거리더라구. 가보니까 너가 쓰러져있더라"
"아 맞다... 그랬었지... 아무튼 고마워"
"고맙긴. 그런데 도대체 왜 쓰러져있던거야?"
"그... 그건..."
그때를 기억하니 내가 엄청난 사실을 알았다는것과 제라드에게 협박을 받고있었다는 상황이 생각났다.
난 쉽게 말문을 열수없었고, 그 상황에 처한 나를 보니 왠지 눈물이 흘렀다.
"뭐야? 왜 울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무슨일인지 말 해봐. 제라드에 관계된거지?"
닉이 내 옆에 앉아 내 눈물을 닦아줬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제라드가 누구에게라도 말해버린다면
죽여버린다고 협박하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닉이 옆에서 위로해주니 울음이 터져버렸다.
"나 진짜 어떡하면 좋아?"
닉을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내 모습이 추했을텐데도 닉은 아무말없이 날 안아주었다. 그리고 눈물이
멈춰갈때쯤 닉의 입술과 내 입술이 포개졌다. 그것은 제라드와 비교할수없는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그 후로 닉과 나는 서로 사귀자는 말은 안했지만 서로가 여자친구, 그리고 남자친구라고 암묵적인 인식을
하고있었고, 우리가 같이 붙어다니는 모습들을 보이자 학교의 여자애들이 제라드를 버리고 바람을
핀다는둥, 나쁜년이라는둥 귓속말로 내 험담을 해댔다.
하지만 지금 닉과 함께있는 이 순간이 내겐 더 없이 행복했다. 그러면서 한동안 내 앞에 모습을 보이던
제라드는 새까맣게 잊고있었는데 오늘 그가 내앞에 나타나고말았다.
"나 없는 동안은 잘 지냈어? 설마 그동안 내 비밀을 발설하지는 않았겠지?"
매혹적인 말투로 바로 귀앞에 속삭이는 제라드. 그 어느때보다도 소름이 끼쳐 아무말도 할수없었다.
"뭐 안했다고 믿을게. 그나저나 오늘 8시에 우리집에좀 와줘. 내가 금혈(禁血)현상이 나타나서 말이지.
더 이상 피를 못마시게 되면 나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꼭 와야해"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떠나는 제라드를 보며 내 다리는 후들거려 곧바로 주저 앉을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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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시간이 왜이렇게 빨리 가는지 지루하던 수업시간도 눈깜짝할새에 가버리고 말았다.
학교를 끝마치고 집으로 오니 벌써 6시를 훌쩍넘기고있었다.
뱀파이어리즘(vampireism)에 대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뱀파이어리즘이란 피에 성적 욕구를 느끼는
성도착증 중 하나로, 피를 마시며 성욕과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실제로도 뱀파이어리즘에 사로잡힌
살인범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처음엔 토끼나 고양이와 같은 동물들의 피를 마시다가 동물의 피로
만족하지 못하게 되면 사람의 피에 손을, 아니 입을 대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피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배를 가르고 심지어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채 피해자들의 피 섞인 내장까지도
먹어버린다고 한다.
뱀파이어리즘에 대해 보고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혹시 나도 저런꼴 나지 않을까하니
구역질이 나오려고했다.
'어쩌다가 제라드같은놈한테 걸리게 된건지, 내 이전의 신데렐라들도 모두 이런 역겨운 짓을 당했을까?
너무 속이 메슥꺼워서 인터넷 검색창을 닫고 msn을 켜서 닉에게 도와달라고 쪽지를 보냈지만 닉은
들어와있지않았다. '이럴때 닉이 내 곁에서 도움이 되어준다면...'
초인종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자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럴수가! 얼써 제라드와의 약속시간인 8시를
훌쩍 넘기고말았다. 그렇다면 지금 문 밖에 서있는 사람은 제라드일게 뻔했다. 그냥 제라드가 아니라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데에 분개한 제라드...
열어주리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고 그저 갈때까지 숨어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상 밑에 들어가
웅크린채로 숨어있었다.
'제발 가라, 제발 가버려...'
그렇게 벌벌 떨며 제라드가 포기하고 가버리길 빌었는데 '철컥'하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아까 들어올때 너무 긴장해서 문 잠구는것을 깜빡한것이다!
자책할 시간도 없이 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로 긴장의 끈을 놓을수가 없었다.
'아- 제발 하나님, 제라드가 저를 못찾고 그냥 가버리게 해주세요 제발...'
눈을 꼭 감고 평소엔 믿지도 않던 하나님을 불러대며 기도를 외웠다.
그 기도가 효과가 있었던걸까? 이제 더 이상 발소리는 들리지않았다.
약간의 희망에 차서 꼭 감았던 눈을 뜬 순간,
내 공포심 어린 눈은 제라드의 광기 어린 눈과 마주치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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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제발 살려줘"
제라드의 눈과 마주치고나자 그 무의식중에 그 한마디가 나와버렸다.
내 떨리는 목소리에 제라드가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선 쿡쿡거리며 웃기시작했다.
그리고 그칠지 모르는 웃음은 몸이 뒤로 넘어갈듯 고개를 젖힌채 더 커지고있었다.
"미안한데, 넌 어차피 조만간 알게모르게 죽을목숨이었어. 말했잖아, 니 피는 정말 맛있다고.
그 소름끼치면서도 흥분되는... 그걸 언젠간 다 마셔버릴거였으니까... 그래 뭐, 한꺼번에 마시는것도 좋지.
파티라고 생각할까? 너같은 피는, 아니 더 맛있는 피는 이세상 어디엔간 있을테니까"
"아무한테도 안말할게, 그러니까 제발..."
어느새 난 제라드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채 빌고있었고 제라드는 그런 나를 보며 더 가소롭다는 웃어댓다.
"아참, 그러고보니 주사기를 안가져왔잖아?... 잠깐 여기서 기다려.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말고"
그리고 제라드가 내 방을 나섰다. 뭘하려는거지...? 혹시 자신의 저택에 가서 주사기를 가져오려는걸까?
그렇다면 그동안 탈출을 할수있다. 그래, 이때 빨리 도망가버리는거야.
제라드의 집과 우리집은 별로 멀지않으니 10분정도 밖에 시간이 없는셈이다.
최대한 빨리... 빨리 가야한다. 그리고 제라드를 피해 이 동네를 떠나버리는거야. 그가 절대 찾지 못하게...
난 곧바로 내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한쪽 다리를 창문에 올렸다.
하지만 내가 경솔했다.
왜 언제나 나는 한번 더 생각하지 않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것일까.
상황이 긴급해서 그냥 탈출해야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은 내가 원망스러웠다.
방문 앞엔 제라드가 다시 돌아와있었다. 바로 칼과함께...
그래, 제라드는 주사기 대신에 칼을 생각했던것이었다. 이미 자책해도 게임은 끝났다.
난 이제 죽은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한쪽 다리가 창문에 걸쳐있어 곧바로 뛰쳐 나갈수 있었겠지만
극도의 긴장으로 몸은 움직일 생각없이 뻗뻗하게 굳어있었다.
"지금... 설마 도망가려고한건가? 내가 분명 그런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제라드의 눈이 날카로운 식칼의 끝과 함께 빛났다.
"미...미안해..."
"미안하다라... 아니 뭐 용서해주지. 그대신... 넌 더 빨리 이 세상을 떠날거야. 죗값으로 말이야"
제라드가 칼을 올려세우고 천천히, 그러나 빨리 다가왔다.
'아- 죽더라도 그냥 기절해저버렸으면... 이런 상황이 너무 싫어... 끔찍해...'
"린지! 무슨일있어?!"
그때 현관문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닉이었다.
닉이 msn에서 내가 보낸 쪽지를 보고 걱정이되 달려와준게 틀림없었다.
그때 수십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닉이 와줘서 다행이라는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닉이 걱정됐다.
나뿐 아니라 닉까지도 제라드에게 당할수가있다. 제라드는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수있는 무기를 가지고있으니까...
닉이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그냥 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공존할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라드는 깜짝놀란 기색도 없이 인상을 구기고는 닉이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닉이 나와 제라드 앞에 나타났다.
"린지, 도대체 무슨일이야? 아무 대답없어서 그냥 들어오긴했는데... 어? 제라드도 있었네? 넌 여기 왠일..."
닉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닉의 시선은 제라드가 쥐고있는 칼을 향해있었다.
"뭐... 뭐야 너! 지금 칼들고 뭐하는거야?!"
"귀찮은놈이 하나 등장했군... 너도 죽고싶은가보지?"
"뭐라고? 너 미쳤어? 무슨짓을 하려는거야?"
"그렇게 나한테 흥분하지 말라구. 일을 크게 만든건 저쪽이니까"
"너 혹시 칼로 누군가를 찌른다던지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 찌를 생각은 아니야. 그러면 의외로 피가 별로 안나오거든. 회를 뜨듯 것에서 부터 살살 도려내야
더 많은 피를 얻을수있지"
닉이 얼굴이 굳어져버렸다. 아마 제라드의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래...
이 상황에 충격을 받지 않는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우선 저 애를 맛보고 넌 나중에 손봐줄게. 너도 도망치는 허튼짓은 하지마.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마.
넌 한번에 죽여줄거니까. 그리고 도망가도 내가 널 못찾는단 생각도 하지마. 잊은건아니겠지? 내가 호텔
상속인 이라는거. 돈으론 못하는게 없지. 불쌍해서 어쩌나. 너같은 남자는 취미없지만 내 비밀을 안 이상 어쩌겠어"
제라드의 소름끼치는 말에 닉은 다시 정신이 돌아온것같았지만 여전히 어떠한 미동도 않고 서있었다.
그러는 사이 제라드는 몸을 틀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사악한 미소, 그리고 날카로운 칼과 함께...
그때였다. 닉이 제라드한테 달려들더니 재빨리 칼을 뺐었다. 하지만 제라드가 즉시 알아차리고는 닉의
복부를 강타했고, 칼은 닉의 손에서 미끄러져 저 멀리로 떨어지고 말았다.
두명의 남자는 칼은 주을생각도 안하고 서로 분노에 차서 주먹질을 해댔다.
처음엔 막상막하였던 싸움이 계속 될수록 제라드가 주도권을 쥐게되었다.
"니가 미쳤군, 너따위가 날 이길수있을거라 생각해? 넌 어느 면에서나 내 발끝에도 못오는 존재야, 알기나해?!"
제라드가 닉 위에 올라타더니 사정없이 얼굴에 주먹을 날려댔다.
상황이 역전되기도 했지만 잠시뿐, 다시 제라드가 닉의 위에서 군림하고있었다.
그런 장면을 보고있자니 뜨거운 눈물이 눈에 차올라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괜히 나때문에 닉이 저렇게 된거야... 나때문에... 미안해.. 내가 도울수있는게 없어서... 미안해..."
그 광경이 너무도 보기 괴로웠다. 그래서 눈을 감아버렸다.
'내가 일을 벌려놓고 내가 이 상황을 회피하려해. 난 진짜 어쩔수없는 애야, 내가 도와달라고 닉에게
쪽지만 보내지 않았어도...'
싸움이 조금 멈춘것같아 눈을 떠보니 닉은 거의 실신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얼굴은 부어오르고 입술은 입술은 터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제라드는 닉 위에 올라탄채로 닉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닉의 입술에 흐르고있던
피를 응시했다. 그리고 점점 닉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더니, 키스하듯 닉의 입술에 흥건한 피를 핥기시작했다.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는지 닉이 눈을 떳는데도 제라드는 역시나 전혀 놀라지 않고 말했다.
"남자 피는 안마셔봐서 몰랐는데... 의외로 맛있던걸?... 오해하지는 마. 게이는 아니니까"
닉은 혐오스럽다는듯 곧바로 일어나 제라드를 밀쳐냈고 제라드는 뒤로 밀렸지만 그의 바로 옆엔
아까 떨어트린 칼이 있었다.
제라드는 사악한 미소를 짓고 칼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닉에게 다가갔다.
"널... 아니 너의 '피'부터 먼저 먹어주지"
더이상 움직일 힘이 없던 닉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구석으로 뒷걸음질을 칠뿐이었다.
제라드가 닉에게 가까이가서 한손으론 닉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머리를 뒤로 눕혔다.
그리고 또 다른 한손으론 들고있던 칼을 닉의 목에 갔다댄뒤 아주 살짝 그었다.
칼로 그은 자국을 따라 피가 흘러내렸고, 재빨리 제라드가 피로 입을 가져다댔다.
아무런 저항도 할수없던 닉은 칼로 목을 그을때보다 지금 더 혐오감과 공포감이 얼굴에 드러나있었다.
"한번 맛을 보니 단지 맛보기보단 들이마시고 싶어지는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라드가 칼로 닉의 손목을 내리쳤다. 그리고 엄청난 비명과 함께 닉의 손이
바닥으로 잘려 떨어졌고, 그 장면을 본 순간 나는 곧바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눈을 떳을땐 아까 겪은 모든 일이 꿈이길바랬다. 익숙한 내방의 천장이 보이자 조금 안심이 됐지만
눈길을 돌리자 내 방은 그야말로 피의 축제를 연상케했다.
온 벽면엔 피가 튀어있었고, 바닥은 피바다를 이루고있었다.
그리고 닉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닉의 머리가 있었다...
내 옆에 있는 닉의 머리는 눈을 뜬채 잘려있었다. 마치 날 원망하는 눈빛으로...
순간 내가 할수있는거라곤 또다시 우는것뿐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어... 정말 너무 미안해서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어... 나같은애가 너같이
착한 애 앞에 있었다는게 미안해...'
눈물과 함께 흐느끼자 제라드가 소리를 듣고선 날 쳐다봤다.
그때 제라드는 정말 너무나도 역겨웠다. 피범벅인 입은 쾌감의 절정에 달한 듯 웃어댔고 온몸은 피로
물들어있었다. 뭔가를 해치다가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는데 제라드가 일어나자 그게 뭔지 알수있었다.
바로 닉의 몸이었다. 닉의 몸은 칼로 파해쳐진채 내장이 다 드러나있었고, 그 주위엔 몸의 장기로
보이는것들이 널부러져있었다. 아아- 너무 끔찍했다...
'이제 나도 닉을 따라가겠지. 차라리 제라드에게 저렇게 죽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죽어버리는게 나아...'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세워 칼을 찾았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그나마 운이 좋게
제라드가 아무렇게나 던져놨는지 피에 묻힌 칼이 내 앞에 있었다.
제라드가 오기전에 칼을 집어들고 내 스스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 심장을 행해 찔어넣었다.
점점 통증과 함께 정신이 혼미해질땐 밖에서 경찰차의 싸이렌소리가 들렸고, 의식을 잃어가 마지막
생명의 끈을 잡고있을땐 경찰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제라드를 체포하고있었다.
............................
만약... 만약 내가 조금 더 늦게 정신이 들었거나 조금 더 늦게 칼을 심장에 찔러넣었다면 난 살아있었을까?
아니... 산다고 해도 그건 내게 의미가 없어... 내 정신과 마음은 이미 병들고 죽어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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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뭐하세요?"
"아.. 이번 사건에서 뭐 도움될거 있나하고... 피해자 msn좀 둘러봤지. 요즘애들은 이런 매신저 많이 하잖아?
혹시 뭐가 나올지도 모르지. 범인이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뭐 수사에 진행이 안돼네, 주변애들도 범인놈을
무슨 신처럼 생각하던데? 잘나가던 애였나봐 어쩌다 저런건지...
어 잠깐... 제일 최근에 보낸 메세지? 시간보니까 사건시간이랑 별로 차이 안나는구만.
사건 현장으로 가기 전에 보낸것 같군"
"뭐라고 써있는데요?"
"잠깐... '혹시 무슨 일 있는거야? 무슨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갈게,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줘.
난 이런거엔 마법사같으니까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라고 써있는데?" 받는사람은 사건현장에서
자살한 또 다른 피해자야"
"꽤나 로맨티스트같네요 많이 좋아했나봐요"
-the end-
출처 : 다음 - 니콜라스홀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