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최소한 드라마에 나오는 핸섬하고 돈 많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을 바란 것도 아니었어. 하지만 그에 비교했을 때 최소한 어느 정도라도 비슷한 사람은 원했다고. 여자라면 당연한 거 아냐? 한국 땅에서 여자 혼자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줄 알아?
남자들은 모르지. 여자들은 필요한 게 얼마나 많고 가지고 싶은 게 얼마나 많으며 그만큼 살아남기 위해 참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지를.
현실은 똑같은 독신 남자에 비하면 급여는 쥐꼬리만하고 독신으로 살려면 오만가지를 생각해놔야 하고 없는 돈에 저축도 해야 하고 골치아픈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라고. 오죽하면 방송에서 나 같은 여자가 솔직하게 키 작은 남자들은 루저라고 그랬겠냐고. 그건 솔직히 사람을 고르는 눈이라든가 기준에서 말한 게 아냐. 같은 여자가 보기엔, 단순히 생존의 기본적인 문제를 이야기한 것뿐이야. 그런 것도 모르면서 남자들은 걸핏하면 여자들이 과소비의 주범이네 된장녀네 입에 거품을 물지.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 하지 말라 그래.
아무리 귀엽고 깜찍한 외모에 달콤쌉사름한 애교를 부리던 나도 서른 넘어가니까 쳐다봐주지도 않더라. 결혼기념일이라고 선물하는데 꽃 좀 골라주지 않겠냐고, 나보다 어린 남직원이 그러기에 따라갔던 꽃집에서, 시들어서 버려지는 꽃들을 보는데 정말 환장하겠더라. 딱 내 상황 같아서.
그래서 소개팅을 한 거야. 결혼한 내 친구의 바깥사람 선배라는데 정말 좋은 사람이래. 사진도 받아봤어. 나름 생긴 건 괜찮아 보였지. 그리고 도대체 뭐가 괜찮은지도 모르겠지만 계속 괜찮다고 말하는 친구 때문에 호기심도 동했고. 무엇보다도, 이제 나도 안정이란 단어를 향유하면서 살고 싶다고. 적어도 혼자서 이 원룸에 처박혀서 궁상맞게 혼자서 늙어가면서 밤마다 삼겹살에 소주를 혼자 기울이는 짓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마흔이 다 되어 가도록 그러고 자빠진 아는 언니네 집에서 술마시다가 나 체하는 줄 알았어. 진심.
그래서 나온 자린데, 솔직히 남자 딱 보는 순간 그랬지.
아, 젠장. 루저네.
키는 난쟁이 똥자루가 비웃을 듯한 165의 키. 그 남자는 그 숫자를 웃으면서 말하더라. 예전엔 콤플렉스였는데 지금은 별로 그렇게 안 느낀다고. 차림새는 최악의 센스. 아마도 자기는 그게 괜찮다고 생각하고 차려입은 거겠지만 길거리에서 딱 같이 다니기 싫은 옷차림 있잖아. 모자를 벗는데 머리카락 가운데가 비어 있는 거야. 사진은 4년 전 거라고 머쓱해하면서 예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렇게 됐대. 그래도 친구가 사람은 괜찮다고 했다, 그 말을 되뇌이면서 나는 내 선입견을 지우려고 노력했어. 정말이라구.
그래서 이야기가 시작됐고, 뻔한 호구조사들이 이어졌지. 어느 대학 나왔냐니까 서울의 괜찮은 대학은 나왔는데 중퇴래. 헐. 그래, 뭐 거기까지는 괜찮다 싶었지 하며 또 한 번 삭혔어. 그런데 갈수록 점입가경.
직업은? 직업이 없대. 기껏해서 하는 게 삼류소설 쓰는 게 꿈이래. 어차피 글쓰는 일로 대성하긴 하늘의 별따기 만큼 힘드니 그걸로 최소한의 밥벌이라도 하면 좋겠다나. 그럼 당연히 차는 없으시겠네요. 물어봤더니 아, 차는 제가 좋아해서 중국이나 동남아 등지에서 사온 갖가지 차가 있댄다. 아니 굴러다니는 차를 왜 그런데서 사오나 싶었더니 이런 젠장. 물에 타먹는 차를 말한 거였어. 그 의미를 수정해줬더니 대답이 더 가관이야. 전 운전하는 게 싫어서 면허도 없음. 다만, 부인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면 태워줘야 하니까 그 때는 반드시 다 할 거래. 이 답답한 사람아. 당장 연애할 때는 어쩌란 말이야?
좋아하는 데이트 코스가 자료를 모을 수 있는 도서관, 쉴 때 하는 일이 돌아다니면서 풍경사진 찍기, 돈버는 직업이 없으면 그런 선비같은 (진짜 이렇게 말했다)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뭐 어떻게든 되고 있다고 얼버무리다가, 서른 여섯이 넘도록 부모님 집에서 얹혀살고 있고 그게 또 자기가 장남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모셔야 해서 동생들은 다 시집가고 그렇게 되었다나?
좋을 구석이 대체 어디가 있어. 누가 요즘 시부모님 모시고 살아. 누가 요즘 차 안타고 데이트 하냐고. 적어도 나 정도로 자신을 가꾸는 사람에게 이런 사람이 합당하기나 하냐고. 성격도 맘에 안 드는 것 같았어. 난 활동적인 걸 좋아하는데 이 사람은 글쓰기니 사진찍기니 너무 정적인 걸 좋아하는 거야. 텔레비전도 안 봐, 정치 얘기만 나오면 쓸데없이 진지해져, 쓰고 있는 소설은 완전히 만화 같은 내용이라 이해해줄래도 정도 안가고.
내가 가면 당장 소개해 준 년이랑 한바탕 해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난 내 앞의 그 속알머리 비어있는 사람을 봤어. 정말 눈웃음 하나는 좋더라. 사진으로 본 것보다 예쁘시더라는 허황된 공치사 정도도 그럴싸했고. 여러모로 매너도 좋았고.
하지만 그런 게 밥 먹여주니. 진짜 밥 말야. 그런 거에 넘어가서 날 낳은 어머니는 절대로 남자의 그런 행동들에 속지 말라고 내가 중학생 시절부터 신신당부했고, 그래서 그런지 나도 남자들이 여자들 보면 으레 하는 행동들에는 관심도 안 갔고,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그렇게 사는 꼴이 맘에 안 들어서 절대로 우리 어머니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면서 서른까지 살아온 난데, 이런 게 내 눈에 차겠어? 응?
없는 꼴에 계산도 지가 다하고 또 주제에 매너라고 버스 타는 데까지 바래다주면서 애프터신청을 하더라.
난 그래서 면전에 대고 쐈지.
“저,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 쪽 맘에 안 들거든요. 막말로 하시는 일도 없고 부모님한테 그 나이 되도록 얹혀사는 거 창피하지 않으세요? 차도 없고 가진 거 무일푼이시네요. 전 그런 사람이랑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제 자신을 생각하거든요. 전 지금보다 나아지려고 남자를 만나길 원했던 거지 지금보다 더 피폐해지려고 만나는 거 아니거든요. 오늘은 감사했어요. 하지만 다시 볼 일은 없으면 좋겠네요.”
남자의 벙 쪄있는 표정을 보면서 난 그 소개팅 자리에서 삭혀도 삭혀도 없어지지 않던 당황스러운 감정들이 통쾌함으로 변하는 걸 느꼈어. 뭐 내 말이야 좀 심했어도 틀린 건 없잖아? 이걸 계기로 그 남자가 잘 변화해주면야 나쁠 건 없지만, 그게 뭐 하루 이틀에 될 일도 아니고, 그렇게 변해있을 때쯤엔 난 이미 행복의 나라로 바이바이~라는 거지. 생각할수록 그런 자기변호에 맛 들어서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내가 된 그 자부심에 잠까지 달게 오더라.
다음날, 아니나 다를까 친구가 전화를 해왔어. 일자리에서 전화를 받은 나는 콧김을 씩씩대며 회사 비상계단 쪽에서 핸드폰을 붙잡고 화를 냈어. 뭐 그딴 인간을 나한테 소개시켜 주냐고. 너 나름 베프였는데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실망이라고, 하여간 어제의 그 남은 감정까지 깨끗이 비워내려고 별의별 소리를 지껄였어. 그런데, 걔가 아무 소리도 안하고 듣고 있는 거야. 그러더니 조용히 말하더라?
“너, 그래서 어제 그 분한테 그런 말까지 하고 쫑낸거야?”
“그래. 이 년아.”
“하아...........”
내 친구는 갑자기 절망이 가득한 한숨소리를 내더니, 곧 그 절망을 분노로 바꾸었어.
“야이 돌은년아. 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알아? 글쓰기로는 이미 인터넷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람이고 100억 로또 혼자서 당첨된 사람이야. 자기 명의로 부모님 집 사드리고 자기는 작업한다고 오피스텔 따로 구입해서 부모님이랑 살면서 글 쓸 때만 거기 있다고. 그런 사람이 차도 안사고 돈도 안 굴리고 그러고 있는 거야. 사람은 또 얼마나 착한지 아니? 후배내외 놀러간다고 선배, 그것도 남자가 애기까지 봐주는 사람이 어딨니? 니가 내 친구란 게 더 창피해진다. 넌 사람 보는 눈은 둘째치고 이미 속물이야! 이제 다신 너 안 봐 이년아!”
난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어.
새로 산 터치폰의 액정이 깨져나가도록.
심심해서 오만가지 상상해보다가 막 찌끄렸습니다 ㅋㅋㅋ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