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뱀파이어 지배의 중심지, 황도 브리디아.
대도시급의 넓이를 원형의 형태로 성벽이 둘러싸고, 그 안에는 과거 중세부터 21세기 양식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의 건축형식이 모두 뒤섞여 있는 듯한 풍경으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것들은 작게 보면 바둑판 같은 느낌, 크게 보면 방사형의 모양으로 모여 있었고, 그 모든 건물들이 바라보는 한 가운데에서 높다란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하얀 색조의 궁전, 브리디아 궁이 우뚝 서 있었다. 이 곳이 바로 뱀파이어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건설한 여황 카르밀라의 궁전이었다.
그 안에서도 한 가운데 있는 '태양의 정원'.
궁의 가운데 안쪽 오목한 곳에 자리를 잡고 햇빛이 한가득 따스하게 내리쬐는 구조였다. 해가 떠있는 동안은 언제 어느 때라도 그림자가 조금도 들지 않도록 거울들을 사용하여 특수하게 설계한 정원이었다. 정원의 한 가운데에는 건장한 남자 열 명 정도가 팔을 양옆으로 뻗어야 겨우 둘레를 감쌀 수 있을만한 활엽수가 서있었다.
그 아래에, 두 명의 여자 시종을 거느리고, 보기에도 안락해 보이는 큼지막한 안락의자에 눈을 감은 채로 앉아있는 여자가 있었다.
단아하게 틀어 올린 밝은 금발, 검은색과 붉은 색이 조합되어, 단순한 듯 하면서도 나름 몸매에 달라붙으며 위압감마저 풍기는 옷의 라인과 맵시, 갓 구운 하얀 도자기 같은 느낌의 얼굴, 호리호리하면서도 아주 작지 않은, 많이 봐줘도 열여섯을 넘기지 못할 것 같은 나이처럼 보이는 몸집. 표정 없는 인형이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 같은 분위기.
그녀가 바로 이 왕도를 비롯해 지구상 모든 세상의 여왕으로 군림하는,
여황 카르밀라였다.
느긋한 시간의 끝을 느끼기라도 한듯 그녀는 미동이 없는 채로 눈을 반쯤 떴다.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고, 그 기척은 익숙한 자의 것이었다. 궁전의 큰 발코니로 나가서 대중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신민 알현의 시간까지는 아직은 조금 남아있는 때의 짧은 휴식. 그것을 방해하듯 찾아온 것은 그녀의 측근 지크베르트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정원을 가로질러 그녀에게 다가왔다. 붉은 후드를 뒤집어쓴 안으로 은발의 머리카락들이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카르밀라는 조금 눕혀놓았던 몸을 일으켜 꼿꼿이 세웠다. 시종들은 그를 자주 보기라도 했던 듯 별다른 기색 없이, 카르밀라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고 물러섰다. 이런 식으로 미리 기별을 하지 않고 다가갈 수 있는 자는 지크베르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만약 그러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둘 중의 하나일 것이었다. 카르밀라가 가진 뱀파이어로서의 강대한 '이능'과 힘을 모르고 함부로 덤비는 자거나, 알더라도 목숨을 걸고 그녀를 제거하겠다는 자이거나.
"황제 폐하."
카르밀라는 눈을 뜨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크베르트가 지금 이 때에 왜 찾아왔는지 정도는 카르밀라 자신도 알고 있었다. 다만, 죽음이 없는 영겁의 시간과 그동안 겪은 수많은 일들 속에서, 이 정도의 무심을 사치처럼 부리고 싶은 것도 여황의 마음.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다 되었군. 가면서 이야기하지. 내 곁에 이 자 외에는 아무도 없게 하라."
여자 시종들은 고개를 숙이고 태양의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여황이 갈 길을 근위병들과 함께 앞서 움직이며, 여황이 움직이는 통로를 전부 비워두려 분주하게 움직일 것이었다. 카르밀라는 그들보다 더 천천히 몸을 움직여, 지크베르트와 함께 황궁의 통로로 향했다.
"귀족 회의는 끝났는가?"
"예."
"내가 귀담아 들어야만 할 이야기가 있기에 이리 급하게 온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지크베르트는 정식으로 그 자리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아니, 할 수도 없고 할 일도 없었다. 그가 하는 일에 정식이라는 딱지가 붙은 일은 거의 없었다. 그것이 '바르바스', 뱀파이어의 혈통이 어디냐에 관계 없이 실력만으로 전투와 암살, 정보 수집에 임하는 뱀파이어 비밀암살집단에 속한 자의 운명이었다.
인간의 피보다 뱀파이어들의 피를 주로 마시며, 뱀파이어의 귀족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소문 정도로만 그 정체를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인, 그리고 그나마도 그 정보의 진위가 파악되지 않는 흑막의 조직. 그 조직원 중에서도 오랜 세월을 같이 해왔고 총애를 받는 지크베르트는 카르밀라의 눈과 귀, 손과 발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카르밀라 자신조차도 바르바스 소속이었던 만큼, 그 조직원들의 충성도에 대한 신뢰는, 그들을 시종으로 위장시켜 자신의 호위로 둘 만큼 각별한 것이었다.
"이야기 해보라."
카르밀라의 명을 들으면서도 지크베르트는 주변을 한 번 더 살폈다. 시종들이 일을 잘 해놓았는지 통로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확인이 끝난 후, 지크베르트는 낮은 음성으로 말한다.
"이번에 열리게 될 피의 축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카르밀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피의 축제'라면 분기별로 한 번씩, 인간들을 사육하는 섹터들 중 하나를 골라, 날짜를 정하고 밤이 드리워진 시간대에 뱀파이어들이 섹터로 침입해 야수성을 발현하고 인간의 피와 목숨을 취하는 행사. 룰은 간단하다. 인간은 최선을 다해 숨고, 뱀파이어는 최선을 다해 찾아낸다. 잡힌 인간은 죽는다. 그날 밤만 허락된 샤낭을 하는 것이다.
제국의 법으로 뱀파이어들이 인간을 제멋대로 죽이는 짓은 뱀파이어 귀족이라 할지라도 금지되어 있었다. 인간들을 다스린다는 측면에서도, 뱀파이어들을 통제한다는 면에서도 이러한 법령은 필요했던 것이었다.
뱀파이어들이 인간의 피를 마시기 위해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야수성'. 그것을 너무 발현시키게 되면 통제를 따르지 않는 자들이 나오고, 또한 인간들은 절망에 휩싸여 더이상 아이를 낳으려 들지 않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뱀파이어들이 오랫동안 가져왔던 본성을 제한한다는 것 또한 반발이 있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규정과 법률에 따라 마치 스포츠같은 느낌으로 야수성을 발현시켜 주고, 인간들이 가진 공포를 유지해 다스리겠다는 의미들을 안고 있는 일종의 중요한 제전같은 행사가 바로 이 피의 축제였다.
처음에는 물론 어느 정도의 반발이 있었다. 뱀파이어의 귀족들 중에는 인간을 그런 식으로 대할 필요가 없다는 과격파들도 당연히 있어, 표면적으로는 카르밀라에게 반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관할하는 섹터 내에서는 인간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던 역사도 있었다. 그러나 카르밀라의 의지는 굳건했고, 그런 귀족들은 쥐도새도 모르게 '바르바스'에 의해 암살되거나, 공개적으로 죄명을 묻고 황도의 군대를 동원해 처리해왔기에, 피의 축제는 한층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언급하는 것은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 카르밀라는 말을 꺼냈다.
"피의 축제 진행이 어찌되었다는 것인가?"
"이번 피의 축제를 61번 섹터에서 주최하자는 이야기가 자꾸 여론화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재가의 서류상에서 자세한 내용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만......"
"61번 섹터의 상태는 어떠한가?"
"근 20년 정도 피의 축제가 없었던 곳입니다. 또한 유일하게 인간이 섹터장으로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그 부분을 물고 늘어지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인간이 섹터장으로 있다는 것에 대한 탐탁치 않음, 꽤 오랜 시간 피의 축제가 없었기에 인구수를 조절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로 굳어지고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카르밀라는 계속 걸으면서 잠시 사이를 띄우다 말했다.
"20년이라. 너무 형평성이 없었군. 귀족들의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그대로 진행할 수 있게, 간섭하지 말고 내버려두도록. 61번 섹터라면 저항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모범적인 곳이지 않았는가."
지크베르트는 더욱더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러운 저음으로 말한다.
"다른 문제가 또 있습니다."
"무엇인가?"
"61번 섹터에 피의 축제가 그동안 없었던건......그 아이가.......거기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카르밀라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버렸다. 지크베르트도 따라 멈췄다.
지크베르트로서는 고민 끝에 한 말이었다.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던 카르밀라의 속마음을 헤아리고 있던 건 지크베르트 뿐이었다. 그렇기에 말해야 된다는 생각이 강해진 것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반응을 보이든 그런 건 두렵지 않았다. 그녀가 죽으라면 죽을 것이고 화를 낸다면 뒤집어쓰고 침묵을 지키는 것. 그것이 산업혁명 시절의 어두운 파리 뒷골목에서 그녀를 만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에게 충성을 바쳐왔던 지크베르트 자신이니까.
카르밀라의 발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그를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그녀는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내 명에 변함은 없다, 지크베르트."
대형 발코니 쪽을 향해 계속 걸어가는 카르밀라의 등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인 지크베르트는, 곧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카르밀라는 그늘져 어두운 복도의 끝, 발코니로 가는 것이 평소보다 더 길게만 느껴졌다. 망설임이 자꾸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것을 뿌리치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는 발걸음을 의식적으로 빠르게 놀렸다. 발코니의 안쪽 방에 다다르자, 태양의 정원에서 미리 발코니 쪽으로 와있던 여자 시종들에 발코니에 대기하고 있던 여자 시종들까지 합세해 그녀의 주위로 다가와 그녀를 치장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망토를 걸쳐주고,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다시 정돈하고, 어딘가 잘못된 것이 없는가를 돌아보는 시종들의 눈길과 손길이 바쁘게 오갔다.
분주한 손길들에 몸을 내맡긴 채 눈을 감고 카르밀라는 생각했다.
그 아이. 그 갓난 아기. 그 아이는 어떻게 자랐을까.
그 아이는 과연, 피의 축제속에서 죽어줄 것인가, 살아남아 명을 이어갈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 아이는 정말 전설의 '카르마나'인 것일까.
시종들이 모두 뒤로 물러나 카르밀라의 양옆에 늘어섰다.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카르밀라는 천천히 발코니 쪽으로 나갔다. 날씨가 너무 맑아 온 사방이 찬란한 햇빛으로 빛나고 잇었고, 황궁의 바로 앞에 위치한 광활하고 눈부신 광장이 한 눈에 보이는 발코니의 난간, 그 밖의 온 세상이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덕으로 햇빛을 이겨내는 체질을 얻고 인간들의 세상을 정복한 뱀파이어들과, 그들에게 충성하는 인간들의 계급인 브랜치로 구성된 황도의 신민들이 그 광장을 한 시간 전부터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 군중은 열광했다. 아니, 그것은 열광을 넘어 유혹에 모든 것을 내맡긴 광기에 가깝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었다. 그녀에게 보내는 군중의 감탄과 함성은 건물을 무너뜨릴법한 기세로 울려퍼졌다. 사방은 그녀의 미모와 그녀가 이룬 것에 대한 존경과 찬사와 감동으로 부글부글 끓는 거대한 도가니가 되어가고 있었다. 준비된 꽃잎들이 휘날렸고, 관악기의 음색이 힘차게 들려왔다. 사람들은 웅장함과 그녀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혼을 빼앗겨버렸다.
그녀의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압도적인 힘의 모습이기도 했다.
황도를 중심으로 인간들을 다스리는 뱀파이어들의, 고결하고 우월한 힘의 모습.
그녀는 양 팔을 들어올렸다. 너무 과하지 않게, 그러나 너무 소극적인 것처럼 보이지도 않게 적절히. 그 제스쳐에 열광과 열기는 한층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카르밀라 황제 만세!!!!"
"우리의 여황 전하 만세!!!!!"
"우리를 영원히 지켜주소서!!!!"
카르밀라는 그 함성과 열망의 눈길들 속에서, 자신 앞에 펼쳐진 압도적인 광경 속에서, 그 아이를, 그 아이에 대한 걱정을 지워버리려 애썼다.
오랜 시간을 들여 일으켜 온, 자신의 제국. 자신의 대륙. 자신의 행성을 바라보며.
그런 운명쯤, 얼마든지 와보라는, 자신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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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는 반쯤은 넋이 나간 채로 앉아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다시 자신에게 온 공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건.....이럴 수가.....”
피의 축제가 61번 섹터에서 열린다는 공문이었다. 밑에는 여황 카르밀라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그의 혼란해진 머릿속은 어디서부터 갈피를 잡아야 할지조차 모를 상황이었다. 그런 로이드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데스틴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버지?”
로이드는 옆에 선 데스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로이드에게서 잊혀진 의미가 되살아났다. 데스틴을 맡아서 키운 것. 그것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거래의 의미도 있었다. 로이드는 즉시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할 틈도 없을뿐더러, 데스틴은 지금의 자신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이지 거래의 대상 따위가 아니었다.
로이드는 양손으로 머리를 싸쥐고는 어떻게든 모든 것을 받아들여보려 애썼다. 지금 그 거래는 일방적으로 깨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전의 방문에서, 지크베르트는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도 어떻게 손쓸 수가 없이 급하게 이루어진, 그리고 그 뒤에 카르밀라의 의지가 개입된 일이라는 것이분명한 것이었다. 이제 모든 것은 정리가 되었고, 급해진 마음과 해야 할 일들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데스틴.”
“예, 아버지.”
“오늘부터 너와 나는 할 일이 아주 많다. 각오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피의 축제가 벌어진다는 소식은 61번 섹터의 모든 사람들을 뒤흔들었다. 그것도, 이제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피의 축제를 경험해본 장년층 이상의 인간들 중 몇몇 사람들은 그 소식을 접한 순간 공포스런 기억으로 인해 땅바닥에 주저앉기도 했다. 중년층들은 전부 해야 할 일들을 위해 이리저리 바삐 움직였다. 그 해야 할 일은 숨을 곳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피의 축제는 보통 그 섹터의 섹터장인 뱀파이어 귀족 세력들은 참가권이 없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으로서의 입장으로 축제를 주관할 책임이 있었고, 섹터 내에서 인간들이 숨어있을 만한 곳을 너무 잘 알고 있는 탓에 사냥의 맛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 탓이었다.
하지만 61번 섹터는 상황이 달랐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섹터장이 인간인 섹터였다. 뱀파이어들은 철저하게 유린하면 되는 것이고, 인간들은 철저히 숨어야만 하는 것이다.
61번 섹터 내에 있는, 피의 축제에 대비한 벙커들은 20년 동안이나 사용되지 않았기에 전부 낡아서 새로이 보수해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중장년층 중에는 그 벙커들을 안전한 곳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무리 잘 위장했어도 인간의 최소 열 배 정도 힘으로 뚫고 들어온 뱀파이어들이 인간들을 마치 닭장에 갇힌 닭들을 잡아먹는 것처럼 하던 그 끔찍한 광경을 몸소 겪어본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섹터 내의 인간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에 들키지 않았던 벙커들을 보수하고 새로운 벙커들을 만들어 그 안에 숨든가, 자신과 가족들만의 은신처를 따로 만들던가. 젊은이들은 그저 막연히 어른들이 무서워 하는 걸 바라보고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속으로는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냐고 생각하며. 그 와중에 피의 축제에 대한 정확한 정보들이 전달되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 속을 더 뒤숭숭하게 만드는 소문들만 잔뜩 퍼져 나가는 상황은 덤이었다. 심지어 인간들은 서로 멱살을 드잡이질하며 혼란들을 부추겼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로이드와 데스틴은 함께 이리저리 다니며 사람들을 독려하며 은신처들을 마련하게 만들었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여 뜬소문을 잠재우는 한 편으로, 20년 전의 기록들을 살펴보며 잘 들키지 않았던 벙커들을 보수하게 하고, 잘 들키지 않을만한 지형을 선택해 벙커를 만들게 했다. 데스틴도 아버지에게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들은 후 아버지를 도와 사람들을 만나며 이곳저곳 바쁘게 움직였다. 효과가 있었고, 뜬소문과 드잡이질은 빠르게 사라졌으며, 인간들은 급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의 축제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하지만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너무나도 촉박한 것이었다.
인간들이 교대를 하며 밤샘으로 만든다고 해도 그 벙커들이 제대로 효과가 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어설프게 만들었다가 들켜서 죽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개인적으로 집에 은신처를 만드는 사람들의 경우들도 돌아보아야만 했다. 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 같았지만, 시간은 화살같이 가는 것 같았다. 로이드도 데스틴도 조바심이 잔뜩 올랐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미리암의 출산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데스틴을 한층 더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얼추 힘든 준비가 겨우겨우 끝나려 할 즈음,
끝내 피의 축제 당일의 해가 밝아왔다.
해가 높이 뜨려는 때의 61번 섹터는 이미 사람들이 모두 숨어 바람 소리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 유령의 도시처럼 변해 있었다. 그 조용함을 깨는 시끄러운 소리들이 저 멀리서부터 다가왔다. 뱀파이어의 귀족들을 비롯해, 피의 축제에 참가하고자 하는 뱀파이어들이 달려오는 소리였다. 차량을 이용하지 않는 하급 뱀파이어들은 달려서 이동하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그 달리기의 속도는 일반 차량보다 훨씬 빨랐다.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서 상체를 낮추고 망토들을 펄럭이며 다가오는 그 광경은 주변의 모든 것을 압살하는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인간의 섹터장이 관할하는 곳이라서, 귀족에 대한 체면치레 따위를 생각할 것도 없다는 정보에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뱀파이어들이 모여들어 그 수는 2천을 넘기고 있었다. 그들이 달려오는 맨 앞에는 50여 대의 SUV 차량들이 빠른 속력으로 길을 인도하고 있었는데, 이 차량들은 피의 축제 때마다 섹터장을 맡고 있는 뱀파이어들을 비롯한 지체 높은 자들이 황도 브리디아의 허가 하에 대여를 해주어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 SUV의 선두 쯤에는 43번 섹터를 관장하는 귀족, 펜델하임 프란츠하이머 백작이 타고 있었다.
“흥.”
그는 운전을 하고 있는 센델과 함께 가까워지는 61번 섹터의 벽을 바라보며,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바람을 세게 냈다.
카르밀라 황제 폐하의 의지 하에 인간들과의 공존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마련되었던, 인간들이 섹터장으로 있는 섹터는 이제 저것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눈에 띄게 나서지 않으면서 섹터들을 모조리 없앴던 것이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댄 모함은 갖가지였다. 인간들의 저항심이 드러났다는 둥, 황도에 대한 모반을 획책하고 있었다는 둥, 인간들이 서로 짜고 뱀파이어를 죽였다는 둥, 여러 가지 공작들이 실행되고 그것들은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저 61번 섹터는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공작도 모함도 죄다 실패하는 난공불락이었다. 섹터장인 인간 로이드 프리드먼의 충성심은 이미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두텁기에 뜬소문을 퍼뜨리기도 힘든데다, 공작이나 모함을 진행하려 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에 의해 방해받고 아예 시작부터 싹이 도려내지는 것이었다.
펜델하임 백작은 그 실패들 뒤에 분명히 카르밀라가 손을 쓰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을 능가하는 정보망과 힘이 있지 않고서야, 이제까지의 모든 일들이 그렇게까지 실패할 까닭은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그런 사람은 카르밀라 한 사람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는 카르밀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방법을 썼다. 61번 섹터만 20년이 넘도록 피의 축제를 하지 않았다는 데 대한 불공평함. 그것을 주변에 서서히 퍼뜨려 귀족들에게 문제로 삼게 만든 것이다.
기회는 만들어졌고, 펜델하임은 그것을 꿀떡같이 덥썩 집어먹어야만 했다. 저기에 무엇이 있길래 그렇게 감싸고 돌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겐 지금은 그걸 알고 싶은 호기심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늘 부로 저 곳은 인간의 자치라는 것이 끝장나는 곳이기에.
펜델하임은 운전을 하고 있는 센델에게 말을 걸었다.
“준비는 다 되어 있겠지?”
“예. 이미 한 놈 골라놨습죠. 그놈과 제가 직접 움직일 겁니다.”
“우발적인 사고로 보일 수 있게 만전을 기하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펜델하임이 미소를 짓는 가운데 차량들의 속도가 서서히 줄고 있었다. 뒤따라 달려오는 뱀파이어들도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들은 61번 섹터 앞의 널따란 황무지 앞에서 완전히 정지했다. 그들이 일으킨 흙먼지가 가실 줄을 모르는 가운데, 펜델하임 백작은 SUV의 지붕으로 올라가 뱀파이어의 무리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수고가 많으셨소, 동족 여러분들이여.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해가 지면 찾아올 우리의 즐거움, 사냥의 밤을 위하여!”
뱀파이어들이 주먹쥔 한 손을 들어 화답하는 소리가 61번 섹터의 벽을 타고 반사되며 사방에 메아리쳤다. 뱀파이어들이 전부 캠프를 설치하느라 분주해지는 가운데, 센델은 텐트를 치느라 바쁜 가브릴을 불렀다.
“가브릴! 나와 잠깐 얘기 좀 하자.”
“예.”
뱀파이어들이 없을 만한 한 켠에 이르러, 센델은 온갖 자잘한 금속들이 요란하게 박힌 가죽옷으로 치장한 가브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는 축제의 밤이 시작되면 나와 같이 움직여야 한다. 맛있는 피가 있는 데를 알 것 같으니까.”
“정말요? 역시 센델님이야. 으허허헐~”
“바보같이 쳐웃지 말고, 하여간 시작되기 전부터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알겠냐?”
“네, 알겠슴다! 으헤헤헤~”
쳐웃지 말라는데도 쳐웃으며 내놓는 어리숙한 대답에 센델은 입꼬리를 올렸다. 가브릴이란 이 놈은 센델이 축제 이전부터 공을 들여 키워왔던 놈으로, 야수성의 억제도 제대로 못하는 짐승같은 놈이었다. 피냄새만 맡으면 이성을 잃고 사고를 치고 다니는 멍청한 녀석. 센델은 바로 그 점 때문에 가브릴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센델에게는 오늘 일이 성공한다면 다가오게 될 장밋빛 미래가 보이고 있었다. 펜델하임만큼이나 자신에게도 이것은 기회의 순간이었고, 이걸 최대한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펜델하임의 신용을 얻는다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작게나마 권세를 누리는 삶이 보장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비밀을 잘만 활용하면, 더 큰 권세도 넘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센델의 장밋빛 희망을 까맣게 모르는 가브릴은, 자신의 철퇴에 묻게 될 인간들의 살점을 상상하며 헤죽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