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이 욕실을 가르쳐 주길래 목욕재계 하고 나서 부엌 쪽으로 나왔지. 뭔가 맛있는 냄새들로 그득한 주방에 뭔가 신난 듯이 어머님 한 분이 요리를 하고 계시더군. 그녀의 아버님이 식탁에 앉아서 내게 앉기를 권했어.
정신을 차려서 보니 그 토굴방 같은 곳 외에는 거의 엔간한 부잣집 아파트는 저리가라 할 정도의 크기와 모양새로 꾸며진 집이었어. 부엌에서도 유리벽이라서 밖이 보였는데, 마당에는 정원과 인공폭포 같은 것이 있고, 심지어 아주 조그만 사당채 같이 생긴 구조물도 하나 있었지.
이상하다 싶었지. 산 속에 이렇게 큰집이 떡하니 서있는데 왜 나는 어제 그렇게 산 속을 헤매면서 불빛 하나 못 본 걸까? 뭐 이건 어차피 조금 지나면 알게 될 사항이고.
음식을 하시던 어머님이 뒤를 돌아서 날 보는데, 난 그녀인 줄 알고 잠시 착각해서 일어나서 인사를 했지. 어쩌면 그렇게 핏줄 아니랄까봐 쏙 닮았는지.
"수영이 엄마 되는 사람이에요."
수영이? 아, 그녀 이름이 수영인가?
"이 집에 손님이 찾아온 게 하도 오래되어서 조금 들떴는지 음식을 많이 했네요. 차린 건 없지만 맘껏 들어요."
네에에.....하고 멍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나서 아버님 눈치를 봐가며 한 젓가락 떴는데, 와우, 이건 뭐 둘이 먹다 지구가 멸망해도 모를 맛이었어. 그래서 젓가락질 속도를 맘 크게 먹고 늘려보려는 순간,
부동자세가 되어버렸어.
그녀가 나와 있더라고.
잠에서 방금 깬 건지 부스스한 머리와 함께, 어제 달빛에 빛나던 아름다운 나신은 키가 작아서 꼭 여염집 중딩 애가 트레이닝 복 입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차림으로 감싼 채였고, 도무지 왜 그렇게 그녀에게 홀렸는지 모를 정도로 어려보이는 모습의 그녀가 날 쳐다보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 아기 젖비린내 같은 아련한 냄새는 여전하더라고.
왠지 모르게 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다시 젓가락질을 하려는데 그녀가 털썩 앉아서는 날 노려보기 시작하는 거야.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잡채의 당면이 입에서 턱 걸려서 넘기지를 못할 정도로.
"어머, 천천히 먹어요~ 호호호~"
어머니는 진짜 신이 나셨는지 이것저것 챙겨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셨어.
"여보, 내가 뭐랬어요?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말했죠?"
흠. 나쁜 사람이라.......죄송합니다.......전 따님의 육체 냄새에 홀려서 쫒아온 그저 변태일 뿐........이런 식의 죄책감이 살짜기 들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아버님이 숟가락을 턱 내려놓더니 그러는 거야.
"여보, 수영아. 놀라지 말고 들어라."
그러시더니......
"사실, 김지후라는 이 사람......수영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쫒아왔다고 하더군......."
순간 식탁이 쩌억 하고 얼음장으로 변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어. 난 입에서 당면줄기를 다련장 미사일처럼 발사할 뻔 했지만 그걸 턱 힘만으로 막느라 죽을 맛이었고.
또 이 미친 듯한 상황에서 나의 눈치파악 스킬은 빛을 발했지.
1초, 수영씨는 완전히 얼어붙었고,
2초, 어머님은 뭔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표정이었어.
굳이 표현하자면 온갖 희노애락이 얼굴에 다 터져 나와 도무지 뭘 읽을 수가 없는 표정?
흑......그럴 만도 하지........딸내미 몸냄새 쫒아서 온 변태자식을 즐겁게 음식을 먹이고 맞아주었으니.......그래도 제발 다시 토굴방으로 골인해서 고문퍼레이드 시작, 그것만은 참아주시기를.
난 당면다발을 입에 한 다발 문 채로 그런 생각하면서 정말 감정이 복받쳐서 막 울먹울먹 하기 일보직전의 지경이 되어버렸고.
역시나 1차로 반응을 보인 건 수영, 그녀였어.
"난 인정 못해요!"
그리고 또 역시나 식탁을 거하게 박차면서 가버리셨고, 이제 어머님만 남았는데, 어머님은 뭔가 점점 격한 감정들에서 현실세계로 돌아오시는 듯한 표정이더라고.
"저런저런.......그랬군요......."
갑자기 어머님이 나를 확 쳐다보시더니,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하시는 거야. 어찌나 따갑게 나를 쳐다보시는지 내가 그만 얼굴의 핏줄들이 회선 오픈해서 화끈거리기 시작했어. 그런 시선공격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내리 깐 채로 입에 넣었던 당면다발을 살그머니 내려놓았지.
"왜 그래요? 얼른 먹어요."
어머님의, 느낌을 알 수 없는 그 말씀에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시선을 돌려 마당의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바라보며 나의 신세를 잠시 한탄하다가.......
응? 아침햇살?
내 눈에 그 마당의 앞편 들판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게 보인거야.
아까 전에도 말했지만 가방 안에는 다음날에 브리핑할 기획서류가 있다고 말했을 거야. 의뢰한 회사와 함께 하는 중요한 회의도 있다고 했고. 그게 아침이었다고까지 말해줬지?
나는 말 그대로 뭉크의 그림 꼴이 되었어. 절규우우우....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