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가디언 - 6화 이젠, 결심한거야 (2)

NEOKIDS 작성일 10.07.01 0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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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천천히 정신이 들려고 하는 국정원 요원을 어깨동무하듯 부축하면서 나갔을 때는 이미 양동작전에 제대로 당한 반정욱과 나머지 요원들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어. 급히 그 요원을 병원으로 보내고 나머지 요원들과 함께 차를 타고 다시 이모님 집으로 이동하는 길.

 

반정욱은 오던 때와는 달리 완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어. 나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반정욱이 속삭이듯이 말했어.

 

“뭐 좀, 물어봐도 되겠십니꺼.”

 

고개를 끄덕이자 반정욱의 예리한 질문이 이어졌어.

 

“분명히 양동작전을 했다는 건 지후씨를 노리기 위해서 였을끼라예. 그런데 오히려 요원 하나만 당하고 지후씨는 멀쩡하게 있더라카면, 지후씨가 저 같으면 어떻게 생각하겠십니꺼?”

 

난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어.

또 다른 내용을 접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아직은 드라켄 야거와 나눈 이야기를 전부 다 말해주면 안될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내 판단이 딱 설 때까지 트러블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싶었지만, 이렇게 정공으로 나오면 나도 할 말은 없는 거지. 나는 반정욱에게 사실을 모두 이야기하지는 않기로 마음먹었어.

 

“드라켄 야거들과 만난 건 사실입니다. 그전에 정욱씨가 구해주었을 때처럼요. 하지만 그들은 용들과 만나지 말라고 위협만 했을 뿐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어요.”

“위협만 했다?”

“네.”

 

나 역시 눈에 힘을 주어 말을 했지. 정욱씨는 그런 내 눈을 맞받아보다가 말했어.

 

“좋십니더. 믿어드리지예. 하지만 한 가지만 명심하이소.”

 

반정욱은 단서를 달았어.

 

“만약, 지후씨 때문에 이모님이나 수영 아기씨댁에 불상사가 생긴다면, 그건 지후씨가 책임져야 할 일입니더. 그것만큼은 제발 생각하고 행동하이소.”

 

그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어. 반정욱은 바깥 풍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어.

반정욱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날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지경까지 오면 내가 모를 리는 없었지. 난 내 바지주머니 속에 있는 명함의 감촉을 예민하게 느꼈어.


이모님의 집, 그 방으로 돌아와서 나는 그 명함을 들고 한동안 서성거렸어. 그들의 말이 맞다면, 나는 당장 연락을 하는 게 맞는 말일거야. 그러나 이들, 용들의 말이 맞다면, 나는 이들에게 돌이키지 못할 큰 실수를 하는 게 될 거야.

 

은빛 반짝이를 섞어 만든 조그만 종이짝 하나가 내 머리를 이렇게 혼돈스럽게 만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상황.

 

그 때 누군가가 목소리를 냈어.

 

“지후씨, 들어가도 되겠십니꺼.”

 

반정욱이었지. 

 

“예, 예!”

 

난 황급히 그 종이를 바지주머니에 집어넣었어.

 

“소화 마님께서 찾십니더.”

“소화.....마님이요?”

“아, 이래 말하면 아즉 몬알아듯제. 수영 아기씨 어머님 말입니더.”

“아, 예!”

 

미닫이문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반정욱이 말했어.

 

“아까는, 실례가 많았십니더.”

“예?”

 

반정욱은 다시 한 번 멋쩍은 듯이 말했어.

 

“마, 지킴이 노릇을 하다 보니 이것저것 의심하는 버릇이 떨어지질 않는 기라예. 하지만 우야겠십니꺼. 이모님이나 어르신 내외분께서 지후씨를 좋게 보고 있다 하시니. 이모님이나 어르신 내외분이 아직까지 사람 보시는 눈은 틀림이 없으셨지예.”

 

“저를......좋게 보고 계신다고요?”

“예, 그리 말씀하셨십니더.”

“..........”

 

달리 또 할 말이 없더라. 이젠 뭐 완전히 나를 믿고 있는 눈치의 사람들. 하지만 그렇게 그들이 믿고 있는 사람의 주머니 속에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전화번호가 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했지.

 

“찾으셨다고요.”

“오, 어서 와요.”

 

수영씨 어머님은 혼자서 신이 나 계셨어.

 

“저기, 이거 좀 입어 봐요.”

“네?”

“이거 좀 입어 봐요. 어서.”

 

나는 수영씨 어머님의 손에 들려있는 트레이닝복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았어.

 

“이거, 지후군 사이즈를 잘 몰라서 대강 사본 건데, 맞을려는 지 궁금해서요.”

“저, 이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이, 사양하지 말고, 응?”

 

저기 어머님....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좀 사양을 해야 되겠는데요......이걸 입으려면 지금 입은 걸 벗어야 되는데,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추태를 부릴 수가 있단 말이옵니까......

 

“왜? 신경 쓰여서 그래요? 나 신경 쓰지 말아요. 그냥 아들하나 있는 셈 칠거니까.”

 

그 말에 정신이 확 들고 말았어.

 

“아들....이요?”

“아, 아하하하. 사실 내가 딸 하나 밖에 없잖아요. 이젠 자식도 더 가질 수 없고 하다보니, 아들이 있는 기분은 어떨까 싶어서 실례를 많이 하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성인이라는 딱지 아래서 형제자매도 없이 나 혼자서 모든 것을 꾸려가는 삶이 고단했던 건 아냐.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나쁠 건 없었지. 모든 것이, 어쩔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체념하는 법도 터득해야 했고.

 

하지만 그 때 어머님의 그 말은 확실히, 내 속에 있는 뭔가를 건드렸어.

 

내 마음 속이 그 말로 휘저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어머님은 여전히 신이 나 계셨지.

 

“저기, 지후군? 이거 별로 맘에 안 드나 봐요?”

“아......아닙니다. 조금 얼떨떨해서......”

 

그러면서 그냥 몸을 돌리고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었어. 신기하게도, 아무려면 어떠냐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 그 때만큼은 완벽하게 주머니 속의 명함도 잊어버렸어.

그렇게 다 갈아입고서 뒤를 돌아봤을 때, 어머님은 이런 저런 내 모습을 살펴보셨어. 그 다음 벌어진 일에 난 상당히 당황해야만 했고.

 

갑자기 어머님이 날 와락 껴안으신 거야.

 

“아, 좋구나, 아들의 품이라는 건.”

 

그리고 어머님은 끝내, 계속 맴돌고 있던 내 맘의 한구석 기억을 결국 수면위로 떠오르게 만들었어.

내 어머니에 관한 기억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어. 어머니라는 존재를.

어린 시절엔 그 품이 너무나도 좋아서 떨어지질 않으려고 투정부리다 아버지에게 혼나던 기억, 여름철 선풍기 바람을 맞으면서 어머니가 불러주는 노래에 달콤한 선잠이 들던 기억. 아이스크림과, 손을 붙잡은 어머니와, 길을 같이 걸어가면서 그리 신날 것도 없었는데, 마냥 행복했던 기억.

 

그리고, 조금씩, 대가리가 커가면서 투정밖에 부릴 줄 몰랐던 기억.

몹쓸 노릇이었지. 스물한 살 때쯤, 그렇게 두 분이 사고로 한꺼번에 세상을 떠나실 거란 걸 알았다면 그렇게는 못했지. 시신을 확인할 때도, 장례식장에서도 실감이 나질 않는데, 어른들은 숙덕대더군. 저 자식 저거 외동아들놈이 부모님이 죽었는데도 울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어. 그걸 인정하고 울면, 그렇게 후회하기 시작하면, 내 삶과 정신이 송두리째 부서질 것만 같았어.

그러면 안 된다 싶었지. 이를 악물고 완전히 맘속에 감춰두었던 거야. 목 놓아서 울고 싶었던 감정을. 오로지 앞으로 살아갈 날들만을 생각했어.

현실을 생각했고, 먹고 살아야 할 일들을 생각했어. 학교를 그만두고, 일자리를 구하고, 어리다고 업신여김 당하거나 구박받고 당하면서도 그냥 일하고, 그러다 군대 가고. 나와서 다시 이를 악물고 공부 시작해서 전문대나마 졸업하고, 지금까지 일하던 곳에 자릴 잡고.

 

그렇게 생존이라는 명제가 부르는 악다구니 속에서 굴러다니면서, 완전히 지웠다 믿었던 그 때의 슬픔들. 마치 약한 것에 대한 경계라도 하려는 듯이 떠오를 때 마다 억눌러왔던 그 감정이,

어머님이 포옹해주시는 단 한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피어 오른 거야.


“지후군.......?”

 

어머님이 포옹을 풀고 나를 바라봤을 때, 나는 급히 눈을 비벼 눈물을 닦아내고는 말했어. 

 

“하아.....저.....죄송합니다......이젠 방에 가볼....께요.....”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 나는 옷가지들을 챙겨서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어.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소리 내서 미친 듯이 울었다. 뭐가 서러운지도 모른 채 그냥 막 울었어. 마치 그동안 울지 못했던 것들을 한꺼번에 다 치워내기라도 하려는 듯. 막아놓았던 둑을 터뜨려 한 번에 물을 온 사방으로 쏟아내기라도 하듯.

얼마나 그렇게 울었을까.

누가 내 머리를 손으로 다독이고 있었어.

살며시 이불을 치워봤을 때, 거기엔 수영이가 있었지.


“울지 마, 바보야.”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어. 수영이는 자신도 위로를 받아야 할 처지에 그렇게 위로를 해주고는 방을 나섰어.

그제서야 바지의 그 명함이 생각났어. 난 그 명함을 꺼내서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에 구겨쥔 채로 마당으로 나섰지.

 

밖은 벌써 어둠으로 휩싸였고, 이모님의 한옥집 마당에는 촛불로 만들어진 색색의 미등이 곳곳에 켜져 있었어. 그 미등들은 마당의 꽃나무들과 어우러져 아늑한 풍취를 자아냈고.

미등에 꼬인 벌레들이 자아내는 희미한 그림자들과 꽃향기, 어지러운 색채 사이로, 수영이가 있었어. 수영이는 어두움 속에서, 그렇게 미등을 의지한 채로 꽃나무를 바라보고 있던 거야.

 

수영이가 있는 풍경을 보면서, 나는 그 혼란스럽던 말들의 향연을 일순간에 정리했어.

이게 한 때의 싸구려 감정이라도 욕해도 좋고, 이성적이지 않은 즉흥적인 생각이라고 폄하해도 할 말은 없어. 그 때만큼은 그 생각이 무척 소중했으니까. 그 생각을 위해서라면, 뭐가 어떻게 지옥같이 돌아가도 다 견뎌내겠다고 생각했어.

이 존재들이라면, 이 존재들이 내 가족이 된다면.

그 생각 하나.


그런 수영이를 보면서, 나는 명함을 미등의 촛불에 가져다 댔어. 그것은 내 손 안에서 순식간에 타올랐고, 바닥에서 완전히 재가 되었지.  

 

순간이지만, 내겐 일생일대의 결심이었어.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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