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23 글연습 “사람이 지식을 왜 쌓는다고 생각하나?” 노인은 물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겠죠?”“물론 그러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그게 뭡니까?”“자랑하기 위해서야. 그럼으로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지.” 노인은 화로의 숯들을 불쏘시게로 뒤적거리며 말했다. 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불똥이 뜨거운 공기를 타고 잠시 치솟았다. “누구도 그것을 피해갈 수는 없다네. 혼자 살지 않는 한.”“그래서, 이런 곳에 살고 계신 겁니까?”“반쯤은 맞다네.” 노인은 말했다. 그는 잠시 자신의 의도가 어긋난 것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꼈다. 사실은 노인을 비꼬기 위해서 던진 말이었지만 노인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 머물고 있는 이유는 또 다른 것이 하나가 있지.”“그게 뭡니까?”“내가 옳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지.” 노인은 화로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아지랑이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수많은 지식은 언제나 옳을 수 없어. 그럼에도 지식을 얻은 사람들은 스스로 옳지 않을 수 있는데도 옳다고 믿고 있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네. 사람 자체가 그럴진대 나라고 그렇지 않다는 보장은 없지.”“그건 너무 회의주의적인 것 같은데요.”“회의주의적이란 건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항상 증거를 원하며 의심하는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이라네. 나같은 경우는 자가당착적이라고 불러야 맞겠지.” 노인은 책더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누구나 매력적인 생각들을 펼칠 수 있네. 누구나 어떤 생각을 옳다고 지껄일 수도 있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반성이라네. 그것이 없는 삶이란 그야말로 끔찍한 괴물의 형상이지.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괴물들이 빚어낸 촌극들을 목도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통의 연속이라네. 자네 나이때쯤엔 그것을 뜯어고쳐보려고 노력해보기도 했었지. 하지만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네.” 그는 문득 영화 하이눈의 늙은 전직 보안관을 떠올렸다. 그 역시 그 무엇도 소용이 없다고 했었다. 그는 그 전직 보안관이 싫었다. 그런 무기력함과 지금 이 노인이 다른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기 계시는 겁니까?”“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그렇습니다. 사회를 위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고 계시지 않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책의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만큼이나 읽으셨고 깨달았으면 그것을 뭔가를 위해 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하진 않으십니까?”“그래서, 자네에게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는 어이가 없었다. 이제 더 이상 노인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노인은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자네에게 말한 그 사실은 자네가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 할 보물이라네. 그것은 어떤 행동을 하든 자네에게 도움이 되면 됐지 소용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네. 그래서 말했잖은가. 자가당착적이라고. 그런 자신을 깨닫는 것만 해도 자네는 대단한 사람이 되는 거야.”“됐습니다. 더 이상은 얘기를 나눌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그렇겠지. 허허허” 노인은 너털웃음을 내보이며 말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지금의 자네로서는 절대 알 수 없다네.”“네. 네.”“한가지만 더 말해주지. 자네는 다시 날 찾게 될걸세.”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빈정대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는 노인의 처소를 빠져 나왔다. 사막같은 풍광과 모래가 그의 발을 자극했고, 그의 등 뒤로 책더미가 빼곡이 들어찬 노인의 방이 멀어져 갔다. 그 방은 기계장치에 연결되어 치솟았다가 이내 천장의 한 구석 어딘가로 사라졌다. 수많은 방들이 그렇게, 정처 없이 어딘가로 오고 가는 것을 반복하는 광경을 보면서 그는 다짐했다. 저 노인처럼 살지는 않겠노라고.
그 후, 40년이 지나서, 그는 다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젊었던 그의 육신은 한없이 쪼그라들었고, 얼굴과 손에는 움푹 패인 주름살이 밭고랑처럼 선명했다. 그가 그 곳을 떠나면서 가졌던 원대한 포부와 행동에의 열망은 이미 40년 전 노인이 쏘삭거리던 화로의 불똥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그런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노인의 말이 맞을 때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저항하고 밤을 새며 노력하고 활동했다.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겨우 설 수 있도록 하는 지팡이 하나와 초라한 육신뿐이었다. 한 때는 많은 것을 가지며 떵떵거렸다. 한 때는 수많은 사람들에 호령하며 거들먹거렸다. 수많은 산해진미를 맛보고 수많은 귀한 술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곳을 빠져나와 보면 주위의 시공간은 여전히 지옥불 속에서 타들어가고 있는 잿더미 꼴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탄식에 탄식을 거듭하던 순간, 그는 다시 노인의 처소를 떠올린 것이었고, 그래서 거기에 서 있었다. 여전히 기계장치들은 방들을 분주히 나르고 날랐다. 그의 발을 간질이는 사막 같은 모래도 여전했다. 그는 문득, 그 때로부터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다고 생각했다. 노인은 살아있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그렇다면 여기에 올 의미가 없었는데도, 그는 거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신이 죽기 전에, 방이 내려와 준다면 참으로 고마울 터이지만, 그런 행운이 과연 자신에게 일어날까, 그는 의심했다. 쓸쓸히 발걸음을 돌리려 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노인의 처소가 기계장치를 타고 그의 앞으로 내려왔다. 그는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노인은 마치 40년 전부터 한 살도 먹지 않은 듯한 모습으로, 책에서 눈을 떼며 그를 돌아보았다. “여행은 재미있었는가.” 그는 방석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글쎄요.”“미리 말해두지만, 자넬 비웃을 생각은 없다네.”“........”“달리 할 말이 생길 때까지는 난 이 책을 좀 더 보고 있겠네. 괜찮겠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눈을 감았다. 노인은 책을 계속 보고 있었고,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그 방을 가득 채웠다. 화로의 숯들은 이미 재가 되어 한 번 비워야 했지만 비워져 있지 않았다. “알고, 계셨던 거죠. 제 삶이 이렇게 될 것을.” 노인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노인이 듣고 있건 말건 그는 말을 이었다.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군요.”“자넨 아직도 깨닫지 못한 듯 하군. 내가 그 때 건네준 보물에 대해서.” 그는 그 말을 기억해보려 애썼다. 하지만 벌써 40년 전의 일이었다. 권력과 향락은 이미 그 머릿속에서 노인의 말을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그것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네. 모든 것은 올바름과 그름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른 것은 키우기 쉬운 반면 올바른 것은 키워내기가 어렵지. 우습게도, 그 올바름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많다는 이유뿐으로.” 노인은 천천히, 양장본의 책표지를 턱 덮으며 고개를 돌리고는 그에게 물었다. “이제, 자네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그는 더듬더듬 기억을 헤쳐 나가며 천천히 입을 열었고,노인은 웅크리고 앉아서, 다시 화로에 불을 피우려고 재들을 비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