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나.” Y는 문을 열어주면서 인사했다. 더러운 벽지와 어둑한 공간들이 보이는 문 안쪽의 공간으로 들어오며 D는 말했다. “여전하군.”“다를 일이 뭐가 있겠나.” D가 코트를 벗어주는 것을 Y가 옷걸이에 걸쳐주었다. 곧 이어 안쪽으로 들어가자 싱크대와 테이블이 바로 보이는 조그만 공간으로 통했다. Y는 미리 끓고 있던 주전자 밑의 불을 끄고, 두 개의 찻잔을 준비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멎고 Y는 차를 내 왔고, D는 Y와 함께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나.”“아직은 차를 몰 수 있다네.”“시력은 괜찮은가?”“여전히, 젊은 시절 같지.”“무리하지 않는게 좋아.” Y는 천천히 차를 들어 마셨고, D도 Y가 마시는 것을 주시하면서 찻잔을 들었다. “왜, 독이라도 탔을 것 같은가?”Y는 눈가에 미소를 남기며 말했다. D도 푹 파인 주름살을 한층 더 구겨 웃으며 말했다. “독이 들었나?”“아니.”“들었음 또 어떤가. 우린 이제 죽을 때가 다 된 퇴물들인데.”“그런가.” 찻잔의 김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그것은 온통 그들의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였다. 눈부시게 빛났고, 앞뒤 돌아볼 것도 없었으며, 오로지 국가를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던 젊은 시절을. 그들은 이야기 도중 간간히 웃기도 했다. D는 궁금해 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그 땐.”“내가 이미 카친스키를 빼돌린 뒤였지.”“그게 가능했다고? 우리 팀의 포위망을 어떻게 뚫고 말인가?”“우리나 자네들이나 한창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만 찾지 않는가. 오히려 나와 카친스키는 경찰관의 옷을 훔쳐서 달아났다네.”“그런 방법이었군. 그러니 찾지를 못했지.”“그나저나 내가 설치한 폭탄은 어떻게 찾아냈던 건가?”“밀고자가 있었다네.”“그래?”“자네가 자주 가던 식당의 여종업원이었지. 이름이 뭐였던가.....타샤였던가.”“그녀였었군. 허허. 난 그녀랑 자기도 했는데.”“그래? 나 역시 마찬가지였었지.”“이런 젠장.” 차의 김은 이미 더 이상 오르지 않았고, 미지근해진 차를 홀짝인 후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Y는 물었다. “왜 전화까지 하고 온 건가? 보통은 그냥 몰래 찾아와도 되지 않는가?”“우리가 젊었던 그 때처럼 말인가?” D는 찻잔을 내려놓고 바라보았다. “더 이상 그렇게 되지는 않지.”“그 말엔 동의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궁금하네.” Y는 천천히 시선을 맞추었다. “자네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역시, 베스 때문인 건가?” D는 Y의 말에 잠시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찻잔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베스. 그들에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의 이름이었고, 그 이름이 Y의 입에서 너무도 스스럼없이 나오는 것을 D는 저주했다. “자네와 나 사이에 수많은 앙금이 남을 일이 있긴 했지만, 나라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전부 흘려보낼 일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직접 찾아왔다는 건.......”“그래, 맞아. 베스 때문이지.” D는 순순히 인정했다. “내가 한 모든 일은 국가와 안정을 위해서였지. 하지만 베스의 일은 아니었어. 그건, 마치 일생동안 딱 한 번 찾아오는, 마치 내가 나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던 단 한 번의 기회였달까.......우습군. 이 나이가 되도록 죽은 여자를 잊지 못한다는 게. 나라에서 준 돈과 자동차로 하루에 몇 번씩 여자를 갈아치우기도 하던 인간이......”“나 역시, 베스에 대해서 자네가 느끼는 점에 동의하네. 나도 그랬거든.” D가 Y를 광채가 나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데, 왜 그녀를 죽인건가?” Y는 그 눈빛을 마주보았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표정과 태도의 여유에 속아 넘어갔을 테지만, D는 마치 동굴처럼 휑하니 뚫려진 그의 눈동자 속에서 직접 느끼고 있었다. 공허함이라는 것을. “그녀가 이중스파이였던 걸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알고 있었다네.” D는 말했다. “그건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녀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했을 정도였네. 그 정도로 그녀와 나는 진심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날 받아들였어.”“나 역시 마찬가지였다면 어쩔 텐가.”“그녀가 우리 두 사람을 모두 선택했었다고?”“그래.” Y는 말했다.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았다네. 어차피 죽고 죽이고 정보를 수집하고 누군가의 미래를 없애는 것에 신물이 나 있었으니까. 어차피 내가 노리는 사람이 안 죽으면 또 어떤가. 그런 사람들 중에는 그다지 해가 될 것도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때로는 무고한 시민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네. 임무라곤 해도 그런 일들을 해야 한다는 건 어지간하지 않으면 힘들지. 그녀는 그런 나를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네. 그런 그녀에게서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나는 화가 났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네. 그녀를 데리고 떠나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어째서......”“명령이, 떨어졌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잖아. 자네라도.” Y는 자신의 손을 잠시 들어보였다. “내가 내 손으로 내 미래와 내 모든 것을 죽이는 기분이 편했을 것 같나?”“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살고 있는 건가?” D는 과장된 몸짓으로 두 팔로 활개를 쳐 주변의 공간을 가리켰다. “이렇게 살고 있는 게 자네의 속죄였나?”“속죄가 아닐세. 자격이 없는 거였고, 자격 없는 만큼만 살고 있는 거지.” D는 Y를 응시했다. “그래서, 솔직히 자네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편했다네.”“어째서?”“올 것이 왔구나 싶은 거지. 삶의 마지막이란 놈이.” Y는 자리에서 일어나, 찻잔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나는 숨어살고 있었네. 이런 나를 찾아냈다는 건 아직 자네가 정보부에 있단 얘기고, 당연히 나를 죽이러 올 거라고 생각한 거지. 자네 손에라면 나는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네. 같은 여자를 사랑했던 사람에게 죽는다, 괜찮은 거 아닌가.”“생각보다 로맨틱한 사람이었군, 자넨.”“뭐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은 거 아닌가. 어차피 자네 품 속에 있는 그 두툼한 권총이 날 죽일 것인데.” Y가 찻잔들을 테이블 뒤쪽의 싱크대로 가져가며 남긴 말에, D는 잠시 가슴께로 손을 가져가 그것을 숨기려는 듯 감싸다가, 체념한 듯 천천히 총을 꺼냈다. 그리고는 소음기를 천천히 돌려 끼우고는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Y는 등 뒤로 그 모든 소리들을 들었다. 테이블에 권총이 덜그럭, 하고 놓여질 때, 그는 움찔하며 싱크대 앞의 쪽창에 비친 세상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는 싱크대에서 물을 틀고 정성들여 찻잔의 손잡이들과 입을 대는 가장자리들을 맨손으로 문질렀다. 그리고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증거가 될 만한 놈들은 모두 없앴다네.”“사실, 난 오늘 퇴직 당했다네.” D는 말했다. “퇴직 날짜 잡아놓고 3개월 동안 자네가 있을 만한 곳들의 데이터베이스들을 뒤졌지. 우리 쪽은 자네를 이제 위협인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네. 그 정도의 등급으로 분류되어 있는 자네의 위치를 보고 있는 순간 그렇게 깨달았지.”“고마워해야 하는 건가?”“그럴 필욘 없겠지.” D는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Y에게 눈길을 던졌다. “삶을 정리하고 있는 입장에서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것이 있었지. 그게 자네였어. 그리고 정리를 하려고 찾아왔는데, 맘먹기가 쉽지 않군.”“간단하잖나.” Y는 읊조렸다. “예전처럼, 들고서, 겨누게, 그리고 당기면 되는 거야.”“벌써, 정리가 다 된 건가?”“걱정 말게. 다 됐다네. 나로서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지.” Y의 눈빛을 받으면서 D는 총을 천천히 집어 올려 겨누었다. D의 결심을 더 쉽게 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Y는 그 총구에 윗몸을 숙여 자신의 미간을 총구에 대주었다. “잘 가게.” D의 말에 Y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총구에서 납덩이가 뿜어지는 순간, Y의 몸은 뒤로 크게 젖혀졌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젖혀지는 자신의 몸과 멀어져 가는 것들을 느끼면서, Y는 미소를 지은 채로 죽었다. D는 품에 다시 총을 챙겨 넣고서는 천천히 그 집을 나와서 우중충한 거리를 걸었다. 그는 잠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리하지 못한 것을 정리한 그였지만, 여전히 기분은 떨떠름했고, 뭔가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것의 정체를 그는 깨달을 수 없었다. 코트 안쪽을 파고드는 추위에 그는 코트 깃을 여미고는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뭔가가 잡혔다. 조그맣고 반듯하게 접은 쪽지. D는 그것을 펼쳤다. ‘가는데 친구가 필요하네. 자네라면 괜찮을 것 같아.’ Y가 자신의 코트를 받아들고 잠깐의 사이에 넣어두었던 그 쪽지. D는 쪽지를 구겨쥐며 미친 듯이 웃었다. 그제서야, 그는 그 떨떠름한 기분의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 역시 Y처럼 베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였다. 그것을 못내 인정하지 않은 자신의 비겁함. 그것을 D는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저승길 가는 동무라. 그것도 Y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D는 쪽지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했다. Y가 죽은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 D는 새까맣게 오염된 눈의 구덩이 속에서 시체가 되었다. 부검을 통해 그는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주사 같은 것으로 강제주입 당하거나 하지는 않고 구강으로 투입되었으며, 먹은 지 두 시간 정도 지나야 효과가 나오는 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