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에서 고등학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그리 가슴 뛰는 일은 아닌 것 같다.
학교 수업은 마음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자극한다.
물론 그 지적인 자극에 흥분하는 극소수의 우등생이 있긴 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그리고 생각해봤을 때 대부분의 내 주변 녀석들도
그러한 자극에 관심도 없는 경우가 태반인 듯하다.
나는 언제나 칠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창문 밖을 보는 것이 좋았다.
검은 칠판에 흰 분필 두 가지 색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는
창가 밖의 다채로운 색으로 그려진 세상이 주는 심상과는 확연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유치원에 다닐 때가 가장 좋았던 것 같다.
유치원은 칠판과 분필이 없는 교육기관이니까.
물론 내가 이런 말을 늘여놓는 것을
공부하기 싫은 고등학생의 푸념 정도로 생각하고 넘겨주어도 좋다.
누군가에겐 내가 지금 풀어놓는 이야기가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글 쓸 시간에 수학문제 100문제를 풀면 모의고사 점수가 몇 점이 올라갈까...
그렇다면 대학의 급간은 또 얼마나 올라가고 너의 인생이 얼마나 다른 사람보다
높아질 수 있을까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뭐 아무래도 좋지만...
나는 지금 누군가를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나를 그렇게 허용하지 않는다.
언젠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글을 써본 적이 있다.
학교나 지역에서 하는 백일장 따위의 것이었다.
학교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보는 모의고사로 평가받는 것도 지겨운데...
나는 글을 쓰면서도 누군가에게 빌어먹을 평가를 받고 있었다.
평가의 연속
그것은 이 작은 반도 땅에서 태어난 이들의 숙명인 것일까.
도대체 이 평가는 언제 끝나는 것일까.
.
.
죽으면 끝나는 것인가?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가고 있음을 나는 고3 때쯤에야 직감하고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했다고 쳐도...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위에 있는 누군가의 행복이 될 것 같았다.
내가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나만 이상한 건가?
나의 눈에 세상은 거대한 감옥이 겹겹이 쌓여있는 공간으로 보였다.
가족, 학교, 직장, 국가로 확장되어 가는 거대한 감옥 안에서 나는 언젠가 쓸쓸히 죽을 것만 같다.
책상 위에 있는 문제지에 있는 서정주 시인의 시가 보인다.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이며 나는 왔다..."
나는 그 문장에 공감했다.
2.
갈증이 났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현실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다.
햇볕은 쨍쨍 내리쬐며 나를 무지막지하게 괴롭히고 있는데, 물 한 모금 나오지 않는다.
선생님들은 말한다.
니가 지금 공부를 하면 나중에 잘 될 수 있다고.
하지만 내가 아직 어려서일까.
나는 이 텁텁한 사막 땅 아래를 계속 파고들어 간다 한들 우물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우물을 찾기 위해서는 땅을 파는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도저히 나중을 기약할 수 없는 성질머리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흔히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로 시작해서
허무한 현실로 결말지어지는 헛된 공상 혹은 망상에 불과하다.
나는 지금 사각으로 턱 막힌 교실 안에서 대머리 수학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졸려 죽어라 하고 있다.
라는 것이 바로 내가 직시해야 할 현실이다.
.
.
빌어먹을 현실이다.
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탈출할 수 있는 세계가 있었다.
그 세계는 나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어쩌면 나와 가장 가까운 세계다.
그것은 바로 종이였다.
나는 만화를 그리는 것을 참 좋아했다.
만화를 그리고 있을 때면 지금의 답답한 세계와 분리되어
어디론가 떠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웹툰 작가의 꿈을 가지고 있다.
내가 그리는 그림이 누군가에게 잠깐이라도 휴식과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행복하지 않을까.
하지만 세상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너무나도 많고
내가 그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두렵기만 하다.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그리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
개인적으로 모의고사 수리영역 시간에 그림 그리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모두가 시험지에 수식을 채우고 있을 때 혼자만 그림을 채워 넣고 있다는 것으로 느끼는
.
묘한 변태적 쾌감이랄까.
어쨌든 나는 그림을 좋아하고 나중에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다.
다만 요즘 드는 생각은 그림으로 꿈을 꾸지는 말자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쏟아져 나오는 TV 오디션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하고 있다.
내가 가수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정이입이 되면서
작은 무대 위에 서 있는 어느 누군가와 내 자신이 동일시될 것이다.
정말 놀라운 천재와 동일시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웃음거리가 되는 사람과 자신이 비슷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후자의 사람들을 볼 때가 가장 슬프다.
분명 자신은 노래를 잘 부르는 것 같고 그 노래로 꿈을 이루고 싶은데
그것이 처참하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서 오는 괴리는 아마 천당과 지옥의 간격보다도 클 것이다.
나도 어쩌면 저런 사람이 아닐까.
아무에게도 나의 그림을 보여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 그러한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이 소중한 꿈을 지키고 키워나갈 것이다.
.
.
꿈이란 내가 그래도 이 답답한 감옥 안에서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게 하는 창이기 때문이다.
수학 선생님의 수업이 끝나고 종이 치면서 점심시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점심을 먹지 못한다.
흔히 양아치라고 불리는 친구들에게 끌려가야 할 시간이다.
잠시 꿈을 꾸었고,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야 이 씨x년아.”
그놈은 나를 항상 그렇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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