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놈을 처음 만난 건 중학교 때였다.
지금의 어두운 나와는 반대로 중학교 때의 나는 놀기 좋아하는 사춘기 소녀였다.
그때는 사람 만나는 것이 좋았고, 특히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가 끝나면 노래방에 가서 신 나게 놀아 재끼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때는 지금 그림이 채워주고 있는 것을 노래가 채워줬다고 할까.
하지만 사람을 흥분시키는 장소에는 위험한 것들도 모이기 마련이다.
노래방은 그 말 그대로 노래를 부르는 방이기도 하지만,
떠도는 중 고등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방이기도 하다.
차라리 억지로라도 학원을 다닐 걸 그랬다.
그랬다면 그들을 만나지 않았을 테니까.
당시 방음이 잘 안 되는 노래방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방에서 친구들과 노래를 부를 때면 밖에 있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춤도 추고 고음도 시원하게 올리면서 나름 친구들과 신 나게 놀았다.
마이크를 들고 마음껏 노래할 수 있는 공간은 나와 친구들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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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우리가 유일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작은 방 안에서 소소한 일탈을 즐겨왔다.
그런데 그 노래방에 자주 출입하는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거슬리게 보였나 보다.
나름 진짜 놀 줄 안다는 무리들이 나에게 접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날도 나는 친구들과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누군가 턱- 문을 열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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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준.
그놈이다.
나는 그놈이 그렇게 유명세를 가지고 있는 일진인지 그 당시에 알지도 못했다.
별로 내 스타일이 아닌 투 블럭 머리에 뭔가 거만한 놈이었다.
유난히 하얀 피부가 예뻐 보이기보다는 귀신처럼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놈이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노래를 멈췄고, 순간 반주만이 정적을 채웠다.
“같이 놀자?”
그 말과 함께 그놈 뒤에 있던 녀석들이 따라 들어왔다.
퉁명스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나와 친구들만의 목소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에 다른 목소리가 노크도 없이 침범했다.
당연히 나는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스트레스를 풀려고 왔고, 우리끼리만 공유하는 소중한 방이다.
비록 돈 2만 원 내고 1~2시간 잠깐 빌리는 공간이지만,
그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공간인 것이다.
“싫은데?”
나는 그놈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중한 거절이었다.
나는 우리의 영역을 침범한 놈에게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었지만,
내 눈앞에 있는 하얀 호랑이는 작은 염소의 울음소리 따위에 미동도 하지 않는 듯했다.
그놈은 나의 말을 무시하고 리모콘을 들더니 노래를 골랐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놈이 고른 노래가 시작되는 동시에 기계로 가서 취소 버튼을 눌렀다.
“나가.”
“이년이 미쳤나...”
그 말은 뒤에서 촌스럽게 고데기로 머리를 만 여자가 한 말이었다.
“미쳤으니까... 미X년한테 당하기 싫으면 빨리 나가.”
지금 생각하면 나에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이란 정말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남에게 빼앗겼을 때 두려울 것이 없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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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잃을 것이 없다고 느낄 때 인간은 강해진다.
“이게 X발 진짜 미쳤나!!!”
그년이 나에게 손찌검을 하려고 할 때 그놈이 손을 막았다.
가까이서 보니 하얀 얼굴에 쌍꺼풀이 짙은 눈이 더 가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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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기운이 내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 것 같았다.
“귀엽네. 가자.”
긴장감이 최고조로 올랐을 때 그놈은 그 말 한마디를 내뱉고 문을 열고 나갔다.
그놈 뒤를 따라왔던 놈년들도 그 무거운 명령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따라 나간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떨리는 심장을 움켜쥐었고,
아무 말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던 친구들은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한참 뒤에야 내가 얼마나 무서운 일을 했는지 알게 됐다.
그 녀석들은 동네에서 꽤 유명한 일진이었다.
그리고 그놈과 얽히면서 내 인생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참 모르는 것이다.
내가 그놈이랑 사귀게 될 줄도 몰랐고,
헤어진 후에 그놈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 씨x년이 될 줄도 몰랐다.
‘우리 애기’에서 ‘씨x년’으로... 참으로 역동적이면서도 이중적인 변화였다.
어쨌든 나는 옥상에서 그놈을 만났다.
그놈은 사진 한 장을 들고 있었다.
.
.
.
그것은 나의 벗은 사진이었다.
4.
내가 그 말 한 마디를 한 이후에 모든 것은 지옥으로 바뀌었다.
누군가에게 맞거나 욕을 먹는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오히려 쉽다.
어려운 것은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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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짓된 행복에 빠져 살았던 시절을 떠올릴 때 가슴 한편에서 피어오르는 배신감은
나를 나로써 존재하지 못하게 만든다.
지금은 이렇게 원수처럼 지내지만...
.
.
나는 그 당시에 그를 정말 사랑했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때의 내가 느꼈던 감정은 모두 진짜였으니까.
그놈이 그 당시에 나를 진짜 사랑했었는지, 거짓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남의 마음이기 때문에 알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진짜였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사실이고 진실이다.
진실이기 때문에... 내가 더 아픈 것이다.
어쨌든 과거는 과거이고, 그놈은 지금 내 앞에서..
그리고 남들 앞에서 나의 맨몸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수치심.
그 순간엔 수치심이 드는 것이 옳은 감정일 것이다.
나의 나체의 몸이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적나라하게 공개되고 있고,
친구라는 인간들은 배꼽이 빠지게 웃어재끼고 있었다.
그 순간에 나는 그 웃는 모습들이 왜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는가 알 수가 없다.
보통 시간과 공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은 죽기 직전 주마등의 순간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 순간에 그들의 말, 웃음, 숨소리 하나하나가
.
.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분명히 들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 하나하나를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평생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사진.
그 사진 속의 나는 발가벗은 채로 서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 사진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누워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눈은 감고 있는 채였다.
자고 있는 사진이었다.
나는 잠들어 있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
잠들어 있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것은 내가 평생 가져가야 할 비밀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일을 당했다는 것에 대해서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나는 더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사실은 원망스러웠다.
당한 것은 나이고, 슬퍼해야 하는 것도 나이며, 모든 것을 감수하는 것도....
.
.
왜 나 혼자뿐일까.
그놈과 마주하는 옥상 위에도 수많은 학생들이 있었지만,
결국 나 혼자뿐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고립.
모두가 나를 향해 창과 화살을 들이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한 가운데 고립되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 창과 화살이 내 신체를 뚫고 지나갈 것이다.
그놈이 입을 열었다.
“이 사진.. 인터넷에 올리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
그 순간에 그놈 친구들은 왜 웃었을까.
내가 상우의 말을 듣고 놀란 얼굴이 웃겨서 웃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인터넷에 나의 나체 사진이 돌아다니는 것을 상상하니,
그것이 재밌다고 느껴져서 웃은 것일까.
전자인지 후자인지에 대해서 알 길은 없었지만,
나는 그 순간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 한 줄기가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냐?”
그놈의 차가운 말. 그 말이 내 가슴을 후벼팠다.
그 남자는 한때 나의 연인이었다.
“왜 울어. 니가 울면...”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더 X 같아져. 왠지 알아?”
그놈이 나를 바라본다.
그의 미동도 없는 눈동자와 나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교차된다.
무섭다.
그놈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내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더욱 더 주체할 수가 없었다.
헤어진 남자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슬퍼서 눈물이 나는 게 아니었다.
정말... 무서웠다.
지옥.
이곳이 지옥일까 생각했다.
나는 내가 지옥에 떨어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는 상우가 나를 왜 이렇게 가혹하게 만드는 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우리 헤어지자.”
내가 그 말 한 마디를 한 이후에 모든 것은 지옥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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