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100-002
제스는 몸을 돌린다.
장갑병에게 몸을 돌린다는 것은 익숙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옷을 받을 때 제스는 그런 훈련조차 받지 못했다. 그저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고,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있다. 그 속에서 터득한 장갑의 조작술. 단 한순간이라도 밸런스가 무너지고, 몸이 쓰러지면, 그것은 죽음과 마찬가지이다. 그의 모습을 드론 카메라가 조금 거리를 두고 추적하고 있다.
적은 마침 돌격 동작으로 들어섰다. 낮은 등급의 밸런서는 인간의 동작을 모두 컨트롤하지 못한다. 그건 제스도 그의 적도 같은 사정이다. 중세시대의 갑옷을 두른 기사 같은 불편한 꼴, 그러나 이것을 컨트롤해내야만 살아남는 전장.
죽어줄 것 같으냐. 이런 곳에서.
제스의 손에 들린 거대한 배틀액스. 그 날붙이가 지구의 6분의 1 중력 안에서 자유롭게 흘러간다. 센서가 적을 감지했고, 그다지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돌아서자마자 연계기로 들어가지 않으면 이후가 곤란해진다. 적을 발견하고 움직이는 것은 지구 중력 속에서도 늦은 일이다. 이 달의 분화구에서는 동작은 먼저 실행하고 있는 편이 안전한 것이다.
적이 다가오는 순간 몸을 굽히며 제스의 다리를 노린다. 제스는 그 팔을 향해 배틀엑스를 내리찍는다. 하지만 그걸 감지하기라도 했다는 듯 적의 가벼운 발이 툭 하고 지면을 찬다. 배틀엑스는 내려가 있는데 덮쳐오는 건 위쪽. 그렇다면 올려치기인가?
그러나 제스는 그 선택을 외면한다. 올려치기는 내려치기보다 훨씬 힘이 줄어든다. 치명상을 입힐 수 없는 대신 적이 가까이 붙는 상황이 온다. 세 발 밖에 주어지지 않는 대장갑용 캐논. 적은 그걸 아끼고 있었다. 왼팔에 장착된 캐논의 총구가 제스쪽을 향한다. 하지만 제스쪽의 리듬은 그보다 한 템포 더 빠르다.
안 죽는다고!!!!
에이미에게 돌아가기 전에는!!!!!!!!!!
땅바닥에 배틀엑스를 내리꽂은 상태로 제스의 장갑복을 입은 몸이 그걸 지렛대 삼아 장대높이뛰기라도 하듯 솟아오른다. 당황한 적이 허둥거리는 사이 제스의 발차기가 캐논 위로 질주한다.
중력 6분의 1 공간이라고 해도, 장갑병의 발차기는 기계의 질량과 조종자의 가속도를 더해 에지간한 총기류 같은 건 단박에 박살낸다. 대장갑복 캐논도 그 꼴이 된다. 되려 약실 안에서 탄이 유폭하는 바람에 적이 부상을 입는다.
진공의 공간 안으로 핏방울이 튄다. 장갑복의 자동밀폐시스템이 그 이상의 산소와 혈액 유출을 막는다. 제스는 생각한다. 적의 장갑복 안에서 터진 만두속 꼴이 되었을 상대의 팔 상태와, 저 피가 장갑복 안으로 스며들면서 더 지옥같은 환경이 될 적의 상태를.
숨이 차는군. 아직 산소는 많을텐데.
그 모든 광경을 드론 카메라는 여전히 찍고 있다. 이 살육을 방송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네트워크에서 입수했던 날, 제스는 긴급체포령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리고 비밀스런 이송 끝에 이 프로그램의 참여자가 되어버렸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참여자가. 그리고 자신을 이런 살육의 참여자로 만든 자들이 바로 그 드론 카메라를 조종하고 있는 중이다.
신경 쓰이는 그 놈을 제스는 배틀엑스로 내리쳐 부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항상 어느 정도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기계니까.
제스는 잠깐 거리를 두면서 배틀엑스를 다시 손에 든다. 피가 많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다. 적은 캐논을 더 이상 쓸 수 없다. 어떻게 나올 것인가? 적의 장갑복이 진통제와 아드레날린을 주사하는 신호가 그의 어둑한 헬멧 안에 보인다. 그와 동시에 멀쩡한 오른손이 등 뒤에서 무언가를 꺼내드는 것이 보인다.
까다롭겠어.
적이 가진 것은 로켓기관이 장착된 배틀해머. 무기를 하나 더 받을 수 있다면 제스가 당장 챙겨놓았을 그것이다. 로켓기관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이 전장에서는 동작의 속도를 더 높일 수도 있다. 적이 얼마나 숙달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적의 정보가 전혀 뜨지 않는 것이다. 햇빛을 차단하는 바이저가 올라가 있다면 얼굴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곳은 바이저를 올릴 수가 없다. 그랬다가는 실명할 것이다.
무슨 속셈이지. 아무것도 정보를 주지 않다니.
대부분은 장갑복 내부에 표시된 모니터를 통해 일정 정도 적의 정보가 포함된다. 장갑복 일련번호, 적의 성별, 잘 다루는 무기 같은 정보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놈은 장갑복 일련번호부터 시작해서, 어떤 정보도 모니터에 표시되고 있지 않다.
제스는 배틀엑스를 움켜쥐고 적보다 먼저 달린다. 조금 있으면 아드레날린이 효과를 보일 것이다. 산소도 이제 20여 분 분량밖에 남지 않았다. 소모량으로 봐서는 그보다 더 짧은 시간만 남아있다는 게 분명하다. 정말 위험해지기 전에 동작을 봉쇄해야만 한다.
그러나 제스의 공격 타이밍은 조금 늦어 있었다. 배틀액스가 닿으려는 사이 적이 뒤쪽으로 잠시 피하는 듯 싶더니, 갑자기 눈앞으로 다가온다. 로켓기관이 작동된 것이다. 간발의 차로 제스는 몸을 숙인다. 바닥에 엎드린 사이, 적의 동작이 휘청거린다.
익숙하지 않은 거였어!!!!
제스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적은 재빨리 동작을 수습하지만, 이미 자신의 실력을 들켜버린 채이다. 적이 무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이 제스에게 자신감을 부어준다. 제스는 다시 몸을 날린다. 이번엔 굉장히 낮게 몸을 유지한 상태로. 해머가 위에서부터 내리꽂히면서 제스는 공포로 널뛰는 심장과 날카로와진 신경 사이에서 타이밍을 잰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
바로 지금!
제스는 몸을 회전시키며 배틀액스를 내민다. 해머가 배틀액스에 부딪히며 또다시 진로를 잃어버렸다. 그 충격을 장갑복의 힘으로 받아 넘기며 다시 무기를 휘두른다. 두꺼운 세라믹의 도끼날이 적의 장갑복을 짓이기듯 파고든다. 진공의 공간에서 쇠가 긁히는 소리가, 장갑복 안을 타고 넘어온다.
됐어!!!
손에 감각이 분명 있었다. 적은 우그러진 장갑복 안에서 적어도 폐의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다는 듯, 적의 장갑복이 서서히 달의 모래바닥으로 쓰러진다. 제스도 같이 뒹군다. 누워있는 제스의 눈에 지구가 보인다.
에이미, 오늘도 살아남았어.
넌 날 아직도 사랑하고 있니?
다른 남자를 만났다고 해도 할 수 없지만,
너의 얼굴만은 보고 싶어.
제스는 잠시 든 감상을 접고 남은 산소량을 체크한다. 이제 정말 몇 분밖에 남지 않은 상태다. 제스는 쓰러진 상대로 다가가, 적이 가진 산소량을 체크한다. 아직은 많이 남아있다. 이렇게까지 날뛰어본 적도 처음이고, 이렇게까지 산소가 모자랐던 적도 처음이다. 베이스로 돌아갈만한 양은 된다는 판단이 들자, 제스는 급히 쓰러진 적의 산소탱크의 파이프 부분을 찾아 자신의 산소탱크 외부연결 파이프를 끼운다. 피비린내가 스며든 산소가 제스쪽으로 옮겨져 온다.
그런데 누구지?
일단 급한 불이 꺼지고 나자, 제스는 적의 얼굴이 궁금해진다. 이것이 좋지 않은 징조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한 번 일어난 호기심은 사그러들지 않는다. 제스는 자신의 이 나쁜 버릇을 다시 생각한다. 그렇게 우두커니 적의 시체를 감싸고 앉아있는 자신을 저 드론 카메라는 여전히 기계답게 찍고 있다. 그 뒤에서 그걸 조종하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이빨이 뿌드득 갈린다.
호기심. 그 호기심 때문에 자신은 이 달의 한구석까지 온 것이다. 이 방송은 사실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권력과 금권을 가진 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비밀스런 프로그램. 제스는 이것을 폭로하기 직전에 잡혀버렸다. 에이미의 얼굴조차 한 번 보지 못한 채로. 그럼에도 아직 이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의 그 맑고 푸른 눈,
작지만 예쁜 입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해.
에이미. 난 돌아갈 거야. 반드시.
이런 사람들을 몇 번이나 죽이고서라도, 반드시.
제스는 손을 들어 적의 헬멧을 만지작거린다. 외부에 바이저를 조작하는 버튼. 그것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찾은 제스는 그것을 누른다.
그리고 제스는 소리를 지른다.
사람이 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소리를.
그 소리가, 드론 카메라와, 거기에 연결된 네트워크를 타고, 지구의 사람들, 더러운 자들이 미소를 지으며 보고 있는 화면 속에서 울려 퍼진다. 그들은 박수를 친다. 그들은 환호를 올린다. 그들은 기뻐하고 있다.
바이저 속의 얼굴은,
절망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버린 에이미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제스가 알아낸 그 순간을, 실시간으로 바라보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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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쓸까 하면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봐도 아무것도 안나오다가
그냥 우연히 손가락이 움직여 장갑병이란 단어를 치고 나서,
그것의 행동 묘사를 하다가 이거 저거 튀어나와 마무리한 단편입니다.
이런 류를 전에도 해괴한 망상의 둥지로 써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플롯이나 습관은 버리라고 했는데, 슬슬 버려야 되려나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