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저런 일로 바뻤어.
- 그래, 그럴 수 있지.
- 왜 이렇게 시큰둥해?
- 시큰둥하긴 지금 수업중이니까.
- 됐다.
- 그래, 내가 다시 연락할께.
- 아니
그녀의 차가운 답변에 어떤 말을 써야할지 손가락이 핸드폰 키판에서 주저했다.
- 그래, 너 편한대로 해.
찰나의 순간 다시 그녀의 톡이 들어았다.
- 알겠어.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
그녀가 연락하지 말라고 할 때의 순간적 멍때림.
다시 연락하라는 그 말에 안도의 한숨.
뒤이어 이 상황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나.
내가 원해서 내가 좋아서 이런 상황을 만들고 나 뭐하는거지?
기계적으로 수업을 마쳤다.
'으아, 끝났다.'
'강선생님, 오늘 술 한 잔 어때요?'
'어?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집에 가기 아쉬워서.'
'어쩌나, 선약이 있는데.'
'괜찮아요, 오늘 왜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지.'
'가을바람 드는거 아냐?'
'가을바람이요?'
'일교차가 심해지면 가슴이 허전하고 뭐 그런다데. 뭐 그냥 가을남자 이런거 있잖아.'
'아아.'
'전화온다, 나 먼저 갈께. 오늘도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어요.'
학원을 나서자 서늘한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집에 가기 싫다.
누구 만날 사람 없나?
전화기의 주소록을 눌렀다.
낯익은 사람들의 이름들
하지만 쉬이 손이 눌러지지 않는다.
내리막길처럼 흘러가는 화면 스크롤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불러낼 사람이 없다.
불러내면 불러낼 수 있지만 불러내고 싶지 않다.
불러낼 수 없다.
촘촘하다 못해 빡빡한 자체 검열에 전화를 걸 사람이 아무도 없다라는 걸 새삼 깨우쳤다.
인생 별거 없구나.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타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수 많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건물의 유리창에 아름답게 비췄다.
그리고 그 속에 앉아 있는 수 많은 사람들.
난 그 곳에 없었다.
평일에도 없었고 주말에도 없었다.
버스는 무심히 비워진 정거장을 하나하나 훓어보며 지나갔다.
오늘도 하루가 다 끝났네.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바탕화면에 널려있는 학년별, 학교별, 기출문제 폴더.
문득 사진첩이 궁금해졌다.
2008년 6월 13일까지
그 속엔 참 해맑게 웃고 있는 나와 옛 그녀가 있었다.
동물원에 있는 나
시청앞 광장에 있던 나
기차에서 계란 까먹는 나
정신없이 골아떨어진 나
그리고 날 찍어준 그녀
지운 줄 알았는데 지우지 않았던 추억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정말 내가 변한걸까?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가?
거울 앞에 서서 본 나는 그 때와 다를게 없는데, 왜 난 혼자일까.
깊은 사색에 빠지다 못해 이젠 우울해질 것만 같았다.
'반짝'
- 뭐해?
- 멍때리고 있어.
- 술 한 잔 할까?
- 너 어딘데?
- 근처야.
- 어디?
- 손가락 아파, 볼꺼야, 말꺼야?
- 나갈께.
- 00호텔로 와, 방 잡아놨어.
- 그래.
컴퓨터를 그대로 끄려다 사진 폴더를 빠르게 낚아챘다.
삭제
휴지통 비우기
다신 우울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듯 사진을 지웠다.
이젠 나에게 2008년 6월 이전의 나는 없다.
그냥 오늘의 나만 있고 오늘만 있다.
'어디가니?'
엄마의 부름에 잠깐 볼일 보고 올께요.라는 말이 툭하고 나왔다.
볼 일.
참 우습다.
나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