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ind - 프롤로그

나는꼼수다 작성일 18.04.17 13: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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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오늘처럼 화창했던 그 날.

 

내가 이 길을 그 날에, 그 시간에,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마음으로 걷고 있지 않았다면.

 

내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같을 수 있을까.

 

그 날은 마치 오늘처럼 화창하고 봄의 향기가 나는 날이었다.

 

 

 

나는 이제 막 사회에 뛰어든 새내기이다.

 

남들과 같이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 입사하게 되었다.

 

나의 삶은 특별할 것 없는 건조한 삶이다.

 

매일 아침에 항상 다니던 길을 다니고 같은 노선의 버스를 타며 같은 시간에 출근한다.

 

항상 다니는 익숙한 길과 풍경이 그렇게 특별할 것은 없을 것이다.

 

시간에 쫓겨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과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 모르는 일찍부터 일하고 있었던 것 같은 사람들.

 

나도 그들 중 한명임에는 틀림없다.

 

나를 포함한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 변화를 주기가 쉽겠는가.

 

그냥 내 인생이 이렇구나 생각하고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이 이야기는 내가 신입으로 입사하고 몇 달이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진성씨, 오전에 얘기했던 데이터는 다 정리 됐어요?”

 

점심을 먹은 게 소화도 되지 않았는데 다그치며 과장이 물었다.

아뇨..거의 다 했으니 점심시간 끝나고 바로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째려보듯 쳐다보더니 한숨 한번 쉬고 가버렸다.

 

, 재미없다.’

 

회사에 입사한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일이 정말 재미가 없다.

 

여느 회사에서 흔히 보이는 단조로운 일들.

 

나는 이대로 중년까지 버텨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고 있을 때였다.

 

하던 일들을 오후 일찍 정리해놓고 아프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조퇴를 했다.

 

어디가 아프지는 않지만 그냥 하고 싶었다. 이제 봄인데 나도 바깥 공기좀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조퇴하고 정처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30분쯤을 걷다보니 꽤 멀리 나와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작은 공원이 분명 처음 오는 곳인데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지방 소도시 출신이라 도시로 올라온 건 대학 때이고 더구나 이 동네는 내가 다니던 대학이랑 멀다.

 

그냥 TV나 인터넷에서 지나가다 봤겠지 하고 넘겼다.

 

공원이라기에는 단출하고 그리 넓지 않은 곳이라 기분도 낼 겸 공원 산책을 시작했다.

 

조금 걷다보니 작은 벤치와 자판기가 보여서 커피나 한잔 하고 가자는 생각에 잠시 발길을 멈췄다.

 

그런데 주머니와 가방을 뒤져도 현금이 없었다.

 

..어제 현금좀 빼놓는다는 걸 깜빡했네.

 

나는 이내 한숨을 푹 쉬며 털썩 벤치에 앉았다.

 

요즘 사람들이 공원 벤치에 앉는다고 해서 누가 책이나 신문을 보겠는가. 나도 요즘 사람들처럼 그냥 쭈그리고 앉아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5분이 채 안됐는데 누군가 나에 말을 걸어왔다.

 

,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커피 한잔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굵직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웬 봄에도 어울리지 않은 검은 정장에 검은 중절모를 쓴 남자가 보였다.

 

, . 근데 저를 아시나요?”

 

나는 혹시나 사이비종교나 피라미드같은게 아닌가 싶어서 경계하듯 날카롭게 대꾸했다.

 

아아, 아까 저쪽에서 보니까 동전이 없어서 커피를 못 드시는 것 같아서요.”

 

이내 그 남자는 커피 두 잔을 뽑아 하나를 나에게 건네고는 내 옆에 멀찍이 앉았다.

 

날씨 참 좋죠? 이런 날에는 어디 놀러라도 가야하는데 말이죠. 애인이랑.”

 

친근하게 말을 거는 남자에게 나는 신경이 더 곤두선 말투로 대답했다.

 

여자친구 없는데요.”

 

남자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미소만 지었다.

 

제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방금 전의 여자친구 얘기 이후 몇 분 동안 정적이 흐르다가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얘기를 꺼내려는 남자를 쳐다봤다.

 

제가 이 공원을 오늘 처음 와봤습니다. 제 생에 처음 보는 공원이지요. 그런데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처음 보는 장면인데, 처음 와보는 곳인데 마치 와본 것 같은 그런 느낌. 그걸 데자..뭐더라 그 있지 않습니까.”

 

데자뷰요?”

 

. 그걸 기시감이라고 하는데 아직까지 밝혀진 건 없는 것 같더라고요. 무의식중에 지나친 기억의 단편이거나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를 머릿속에서 조합하다 생긴 기억의 조각같은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알 수 없는 얘기를 늘어놓는 남자를 쳐다보니 표정이 꽤나 진지해 보였다. 이런 얼토당토 않는 얘기를 듣고 있는 나도 참 이상했지만 다음 얘기가 조금 궁금했다.

근데 만약 이런 데자뷰 현상이 어떤 현세의 기억이 아니라 전생이 기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전생에 분명 사람이었고 여길 왔었다는 그런 기억.”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느껴졌다. 나도 언젠가 비슷한 생각은 한 적이 있고 오래전 TV를 통해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본적이 있으니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얘기였다.

 

연배가 꽤 되어보이시는데 전생에 여길 와보셨다고 해도 이 동네는 신도시라 이 공원은 없었을 텐데요?”

 

그렇다. 지금 나와 이 남자가 대화를 하고 있는 이 공원은 재개발 후 신도시에 조성된 작은 공원이다.

 

이 남자가 전생에 와봤을리 없을 장소다.

 

쓸데없는 망상에 일일이 대답해주고 있었지만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또 몇 분의 정적이 흐르고 커피를 다 마신 나는 조금 더 걷다가 집에 가기위해 일어났다.

 

혹시 윤회라고 들어보신 적은 있으시죠?”

 

사이비 종교가 확실했다.

 

윤회라 함은 불교에 기원이 있다고 합니다. 한 중생이 죽은 후에 그 중생의 업()에 따라서 육도(六道)의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한다는 것을 천명한 사상이지요. 생명이 있는 것은 여섯 가지의 세상에 번갈아 태어나고 죽어 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나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모처럼 큰맘 먹고 조퇴까지 써가며 얻은 나만의 시간을 방해받는 것 같았다.

 

, 별건 아니고 아까 하신 말씀과 관련이 있어서 그냥

 

내 퉁명스러움이 통했는지 남자는 말을 흐렸다.

 

나는 당황한 듯 아쉬워하는 그 남자를 뒤로하고 인사치례도 없이 그 자리를 떴다.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에 기분이 쳐져 낮술이나 한잔 할까 싶어 집근처 호프집으로 향했다.

 

공원을 떠나오면서부터 별 쓸데없는 얘기를 다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뭐야. 인터넷 사전에 있는 내용이잖아.”

 

그 남자가 윤회가 어쩌니 불교가 어쩌니 했던 얘기들은 다 인터넷 사전에 그대로 있었다.

 

혼자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다가온 호프집 사장이 조금은 놀란 듯이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누가 회사에서 괴롭히나?”

 

아뇨. 아까 △△공원에 갔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 남자 이야기를 술술 털어놨다.

 

그거 혹시 도를 믿으세요 그거 아냐? 진성씨가 순진해 보여서 덤볐나본데.”

 

호프집 사장은 실실 웃어가며 놀리듯 얘기했다.

 

, 됐고. 빨리 안주나 좀 줘요.”

 

기분이 더 가라앉은 나는 그냥 빨리 술 한 잔하고 싶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쯤 지났을 때 나는 취기가 올라와서 집에 가기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님도 조심해요. 이 동네에서 그런 사람 처음 보는데.”

 

되도 않는 조언을 내놓고 집으로 향했다.

 

낮술을 먹어서인지, 이제 진짜 봄이 와서 해가 길어진 건지 아직 어두워지지도 않았다.

 

, 재미없다

 

객지생활이 몇 달 되었지만 집에 가는 길이 너무 재미없고 건조했다.

 

집에 가면 뭐하지. 잠이나 일찍 잘까

 

지금 생각해보면 이 날은 정말 이상했다.

 

집에 도착해서 씻지도 않고 옷만 갈아입은 채 바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이상한 기척에 부스스 잠에서 깼는데 창가 쪽에 희미하게 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이 덜 깼나 싶어 휴대폰을 들고 시계를 보면서 그쪽을 비췄는데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까 공원에서 얘기를 나눴던 남자가 내 방에 서있었다.

 

, 당신 뭐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마네킹처럼 내 고함에 반응조차 안하고 물끄러미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당황해서 신고할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휴대폰을 든 손은 벌벌 떨고 있었고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른 것 같았다.

 

윤회하게 될 거야. 결국 모두 윤회하게 되어있어.”

 

그 남자는 아까 공원에서와는 다르게 낮은 중저음으로 말했다.

 

너도 곧 윤회할 수 있어. 때를 기다려라.”

 

공포심을 느낀 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남자를 향해 손에 잡히는 건 다 던졌다.

 

눈을 감고 죽어라 던져대다보니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참 별 이상한 꿈을 다꾸네

 

괜한 생각만 들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쯤 되었다.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어서 인터넷만 하다가 출근했다.

 

이렇게 그 날을 기점으로 나에게는, 내 삶에는 아주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진성씨, 오늘 팀 전체 회식인거 알지? 이번엔 이사님도 오시니까 꼭 참석해.”

 

나는 회식이 싫다.

 

불편한 자리이며 술도 제대로 안 넘어가고 여러 사람들이 윗사람에게 아부하는걸 보는 것도 구역질이 난다.

 

최근 몇 번 작은 회식은 핑계를 대며 참석을 안했는데 오늘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퇴근시간이 되고 나 이외에 다른 직원들은 모처럼 전체 회식이라는 말에 들떠있어 보였다.

 

, 오늘 이 자리는 이사님이 특별히 쏘신답니다. 그러니 양껏 드시고 올해도 파이팅 합시다. 자 이사님의 실적과 우리 팀의 실적을 위하여!”

 

듣기 싫은 저런 멘트. 이래서 회식이 싫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갈 사람은 가고 몇몇 뭉쳐서 서로 술주정을 하고 있었다.

 

나도 꽤나 술이 됐는지 다른 팀으로 발령 난 동기와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 넌 회사 온지 반년이 다 되어가는데 여자친구 안만드냐?”

 

여자친구도 돈 있고 능력 있어야 만드는 거야그리고 우린 시간이 없잖아?”

 

회식 참여도 짜증나는데 여자친구 얘기라니. 정말 집에 가고 싶었다.

 

갈 사람들 다 집에 갔고 나도 슬슬 가려고 일어났다.

 

이번 달 월세와 생활비 지출이 컸던지라 버스를 타려고 했었는데 이미 막차가 끊겼다고 한다.

 

택시타기에는 너무 비싸고 걷기에는 조금 멀지만 하는 수 없이 걸어가기로 했다.

 

걸어가다가 찜질방이라도 보이면 들어갈 기세였다.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걷다보니 절반은 와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골목에 접어들었을 때 멀리서 자동차 불빛같은게 보였다.

 

에이쒸왜 쌍라이트를 켜고 지X이야.“

 

눈이 부셔 앞도 잘 안보이고 짜증이 나서 길 옆으로 피하려는데 갑자기 불빛이 가까워지는 것 같아보였다.

 

, !!!!!!!!”

 

순식간이었다. 피할 새도 없었다.

 

눈을 떠보니 어딘지 모르는 곳에 있었다.

 

옷에 먼지를 털어내고 일어났는데 아직 술기운이 남아있는 듯 휘청댔다.

 

안개낀 새벽 같은 침침한 장소. 어디가 어딘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목소리 같은 게 들렸다.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아 자세히 듣기위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꽤 온 것 같은데 어디야 대체.’

 

좀 더 걸어가니 희미한 불빛과 함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 ……야돼.”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할머니로 보이는 실루엣이 보였다.

 

가자. 돌아가야 돼.”

 

돌아가신 친할머니였다.

 

할머니!”

 

반가움 반, 무서움 반으로 할머니에게 소리쳤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나를 보고 하는 말씀이신지 아닌지 분간이 어려웠다.

 

진성아돌아가. 어서!”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 내가 죽은 건가.’

나는 이내 체념하고 할머니에가 가기위해 걸음을 재촉하는데 갑자기 플래시처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은 빛이 나타났다.

 

눈을 비비며 다시 할머니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고 예전에 공원에서 만났던 그 중년 남성이 내 앞에 있었다.

 

기억해라. 기억해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지난번 꿈에서와 같이 알 수 없는 말을 하고는 사라졌다.

 

또 한 번 밝은 빛이 번쩍이고는 눈을 떴는데 부모님 댁에 있었다.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일단 부모님을 찾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집안을 뛰어다니고 있는데 어디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구 우리 막둥이 일어났네.”

 

할머니!”

 

돌아가신 할머니가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셨다.

 

우리 막둥이 밥 먹어야지. 쪼매만 기둘러라.”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마룻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

 

몸이 가벼웠다.

 

내 몸을 이리저리 만져봤다. 얼굴도 만져봤다.

 

작다. 어린아이처럼 작아졌다.

 

소스라치게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있었다.

 

아직 꿈인가.’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하기 시작했지만 꿈이라면 빨리 깨고 싶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게 꿈이라면 빨리 깨야하고, 진짜라면 내가 시간여행이라도 하는 건가? 유체이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거울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 남자가 떠올랐다.

 

저승사자였나

 

검은 옷에 검은 중절모. 누가 봐도 저승사자다.

 

나는 아마 그 날 차에 치어 죽게 되고 지금의 상태가 된 것 같다.

 

그나마 그 저승사자 같은 남자가 나를 배려해준 것 같았다.

 

내가 정말 돌아가고 싶었던 시절로 나를 보내줬으니 말이다.

 

진성아, 밥 먹어라.”

 

할머니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마루로 나갔다.

 

흐뭇한 표정으로 내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할머니였다.

 

밥을 다 먹고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대문 밖으로 나갔는데 어릴 적 뛰어놀던 그 시골이었다.

 

돌로 쌓은 작은 담장과 넓게 펼쳐진 논밭. 정말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참을 마을을 걸으며 둘러보고 있는데 멀리서 시커먼 차가 한 대 오는 것이 보였다.

 

어릴 적 기억이지만 이 동네에 저런 차가 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검은 차는 논길을 한참을 돌고 돌아 우리 집 앞에서 멈춰 섰다.

 

나는 괜히 겁이 나서 아버지라도 찾아보려고 했지만 어릴 적 기억만으로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멀찌감치 숨어서 지켜보는데 차에서 내리는 한 남자가 보였다.

 

검은 옷에 검은 중절모.

 

또 저승사자? 나를 잡으러 온 건가?’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내가 만났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얼굴은 닮았는데 훨씬 젊어 보였다.

 

굳게 마음을 먹고 이 상황에 대해서 묻기 위해 성큼성큼 그 남자 앞으로 걸어갔다.

 

진성? 기억했구나!”

 

무슨 소린지 몰랐지만 나를 보고는 매우 들떠보였다.

 

할머니는 그 남자를 아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집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그 남자도 따라 들어왔다.

 

시원한것좀 내올 테니 잠깐 기다리시오.”

 

할머니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그 남자에게 말하고는 부엌으로 가셨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제가 왜 어린 시절로 돌아온 건가요? 죽었어요? 당신 저승사자야?”

 

그 남자는 진정하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내게 말했다.

 

윤회야.”

 

윤회요? 그건 환생이지 시간여행이 아니잖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윤회는 환생으로 생각들을 하지. 하지만 진짜 윤회는 지금 네가 겪고 있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됐다.

 

내가 그때 차에 치어 죽은 건 분명한 것 같은데 이게 윤회라니.

 

가끔 어떤 사람들을 보면 경험해보지 않은 걸 기억하고 마치 미리 삶을 살아본 것처럼 느끼는 경우가 있지. 이걸 데자뷰라고 하고.”

 

그때 공원에서 했던 이야기다.

 

그런데 그게 사실 잘못 알려진 게 있어. 그래서 내가 오늘 여기 오게 된 거야.”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좀 해주세요. 저 초딩이라구요.”

 

일단 사람은 언젠가는 죽게 되어있어. 그렇지? 그 후에 세계를 사후세계라고 하고. 그 사후세계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없지. 당사자가 죽어서 아무 말을 못하니까. 그런데 만약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후세계라는게 존재하지 않고 삶의 반복이라면?”

 

황당했다. 삶의 반복이라니. 그럼 사람 인생은 딱 한번이라는 소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개인은 계속 그 개인의 삶을 반복한다는 거야. 예를 들어 네가 그 날 차에 치어 죽게 되고 다시 환생하면 예전 과거로 돌아가 산다는 거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이 다 부자겠다. 로또번호라도 외웠다면 대박나는거 아닌가요?”

 

이 말을 들은 남자는 비웃는 듯이 미소를 띠며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설명하는 윤회의 개념으로 볼 때 개인이 죽어서 인생을 반복한다고 해도 기억하지 못해. 기억을 하더라도 단편적이라 마치 데자뷰처럼 느끼는 거고.”

 

그럼 저는요? 그리고 당신은? 왜 기억하고 있는 거죠?”

 

사이비종교가 신도들 꾀는 느낌을 여전히 지울 수 없었다.

 

너와 나의 경우는 아주 특이한 케이스지. 우리는 그런 개인을 각성자(覺醒者)라고 한다.”

 

우리요? 무슨 종교인가요?”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과거의 나로 돌아와있는건 차치하더라도 설명이 너무 부실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종교같은게 아냐. 우리도 마찬가지로 윤회를 하지만 한 개인의 삶일 뿐.”

 

그렇다. 이 남자의 말을 종합해보면 모든 개인은 자기의 인생만 반복해서 살게 되어있고 그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히틀러가 그 시대에 독재자로 전쟁을 일으켰고 언젠가 죽었다. 그리고 윤회했을 때 다시 히틀러의 삶을 살게 된다는 얘기다.

 

그럼 이 남자가 말하고 있는 각성자라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어차피 반복되는 삶이지만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나는 왜 각성자인지 궁금했다.

 

다시 물을게요. 좀아까 우리라고 하셨는데 저나 당신 같은 사람들이 또 있다는 얘긴가요? 그럼 그들은 서로를 어떻게 알아보죠? 말 안하고 있으면 모를 것 같은데요. 그리고 저는 어떻게 찾았어요?”

 

자자, 진정하고 일단 마음을 좀 추스를 시간이 필요할거야. 이제 여기부터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남자는 내가 상기된 모습을 진정시키려는 듯 말을 흐렸다.

 

이것좀 드시고 마저 얘기하시오.”

 

할머니께서 퉁명스러운 말투로 수박을 내오셨다.

 

아닙니다.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남자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이 남자를 아는 것 같았다.

 

물어볼게 산더미지만 일단 나도 생각 정리도 해야 하고 상황파악을 해야 하기에 조금 미루기로 했다.

 

 

- 다음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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