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카이의 기억

콜필드홀든 작성일 20.09.23 11:02:47 수정일 20.09.23 11:05:21
댓글 7조회 5,726추천 11

보라카이, 

 

2016년, 나는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그녀)와 함께 해외여행을 전화 통화로 계획한다. 그녀는 나보다 6살이 어렸으며, 누가 봐도 사랑스러울 만한 그런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표정은 만화 같은익살스러운 표정과 모든 감정을 얼굴로 이야기하는 그 풍부함, 건강미 넘치고, 무엇보다 유머감각과 쾌활함은 내 전체적인 인생관을 더 밝게 만들 지경이었다.

그 통화하던 중 사소하게 싸웠던 기억이 있다. 돈을 누가 낼지에 대해서, 나는 대기업에 입사한지 1년이 조금 넘었고, 돈을 모아 놓지도 않았지만 없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다 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었지만(큰 돈도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돈 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드리고 있었다. 이제와 어렴풋이 남아있는 기억이지만, 분명히 내 그 당시 느낌은 기억하고 있다. 나는 혼자 살고 있고, 월세, 차량유지비, 데이트 비용 같은 것을 모두 해결하면 정말 빠듯하게 돌아가는 와중이었다. 그래도 그녀와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 돈을 충분히 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만 그녀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드리는 순간 정신적으로 내가 이 사람과 평생 할 수 있을까. 내 입장은 조금도 고려하고 있지 않구나란 생각을 했다.

 돈 때문에 구차하게 구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내 섭섭한 느낌을 전했다. 

 

호주나 미국, 세부 여러가지 후보 중 보라카이로 결정하게 되었다. 사진 속에 바다를 보는 순간 액션영화에 주인공이 여주인공과 긴 여정을 겪고, 레몬에이드를 마시며 키스하는 그런 광경이 눈에 자연스레 펼쳐졌다. 그리고 이제와 생각해보면 내 삶과도 잘 맞는 타이밍이었다. 기대하던 회사에 입사하고 나를 밀어내려는 인간들과 10개월을 죽을힘을 다해 버텼었고, 입사하기 전에는 입사를 위해 공부를 3년 넘게 했었고, 또 그 전에는 노래방이며, 서비스업 등 별의 별을 다 하며 희망 없는 삶을 살았었다. 그러니까 내 삶에 여유가 있었던 적은 정말이지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 나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 전에도 도피성으로 해외를 몇 번 다녀오긴 했지만, 이때처럼 내 삶이 만족스럽고, 안정감이 있을 때 떠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더 기대되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내 마지막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여자와 떠나는 여행이니 더 기뻤다. 

 

저녁이 되서야 도착했다. 호텔은 가격에 비해 너무도 쾌적했고, 럭셔리 했으며 사람들도 그렇게 많지 않고 적당했다. 밖으로 나가 저녁이라 해변은 들어갈 수 없었지만, 해변 펜스 안쪽에  그 분위기는 지금도 잊지 못하겠다. 해안가를 따라 가게들이 끝없이 보이고, 대부분 앞이 완전히 열린 형태였다. 그리고 각각의 가게 앞마다 야자수 사이로 의자와 테이블등이 있고, 전세계의 모든 인종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노래를 하고, 기타를 치고 술을 마시며 환호했고, 그냥 지나가던 사람들도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845b5c1f2c93432bdbfc193daf943331_616487.JPG

 

다음 날 배를 타고, 어떤 작은 섬에 잠깐 간 적이 있었다. 몸이 피곤해 가기 귀찮았고, 별로 기대하지 않았었다. 섬을 둘러보던 중 섬의 윗 부분에 돌로 된 부분에 왠 구멍이 있고,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가는게 보였다. 가보니 계단이 동그렇게 설치되어 있고, 그곳으로 조심조심 내려가니 섬 안쪽에 동굴이었고, 바닷물이 아래쪽에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물을 따라 바깥으로 나가니 푸른 바다였다. 너무 경이로워서 그녀와 함께 연신 감탄하던 중 다리가 자꾸 간지러운 것이었다. 무엇인지 내 다리 쪽을 보았더니, 완전히 안이 다 보이는 바다 속에 각종 열대어들이 너무 많아서 내 다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건 거의 사람 죽이는 일이었다. 우리는 기쁨에 젖어 너무도 신나하다가 조금 정신을 차리고 주위에 사람들을 보았다. 

 

거기에는 모든 인종의 신혼여행온 커플,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부, 친구들끼리 온 무리들, 여대생들, 중년의 부부들 모두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게 보였다. 그들의 얼굴은 나처럼 웃고 있었고, 행복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삶은 나에게 ‘그동안 고생했다’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넷째 날쯤 이었을까? 그녀와 스노쿨링을 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함께 수영하는데 무슨 일인지 새로 산 내 물안경 아래쪽으로 물이 자꾸 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것과 바꿔준다고 했다. 바꾼 물안경도 처음에는 안 그러다가  또 물이 샜다.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내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계속 나도 모르게 웃고 있는 바람에 코 양쪽 사이로 물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이 행복한 여행중에 마냥 기뻐하지 만은 않았다. 한편으로 슬프기도 했다. 왜 이런 좋은 경험을 나는 살면서 누리지 못했을까? 

그리고 나는 욕심이 생겼다. 

이런 여행을 연차를 모아서, 있는 돈을 박박 긁어서 가는게 아니라, 내가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떠나고 싶다. 그리고 그녀가 함께 있다면, 나는 어디든 함께 가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 하고, 바뀌어야 한다고. 

그리고 나는 여행을 하고 5개월이 지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고, 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를 위해 위기를 자초한 위태로워진 나에게 그녀는 떠나게 되었고, 나는 가슴 아팠지만 선택한 내 삶을 위해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언젠가 다시 삶이 나에게 ‘그동안 고생했다’ 라고 말해주기를 마음으로 염원하며.. 

 

 

027dadb27e02f2115cb4490de565c036_143484.jpeg

 

콜필드홀든의 최근 게시물

짱공일기장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