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스압) 스타트업에서 힘들었던 기억

담당_일진 작성일 20.12.11 15:33:01
댓글 9조회 3,514추천 17

그 회사의 문제점은 여러 가지였는데, 쓰다 보면 한도끝도 없을 것 같다. 가장 생각나는 거 하나만 써야겠다.

 

 

처음엔 자율출퇴근제, 탄력근무제 등 여타 선진적인 직장 문화롤 표방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변질됐다.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다. 스타트업 생존률이 워낙 낮은 데다 투자금만 까먹는 와중에 실적도 없고 큰 한 방도 없으니 심리적으로 쫄리고 직원들을 더 채찍질하고 싶었을 것이다.

 

 

형식상 대표는 ㄱ이었지만, 실질적으론 ㄱ과 ㄴ이 공동대표인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둘이 함께 사업 구상을 시작하여 회사를 차린 것이기도 했다. ㄴ은 엘리트의 전형이면서 인간을 인간답다고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결여된 것 같은 사람이었다.

 

 

ㄴ이 언젠가부터 직원들의 근태 관리를 하게 됐다. 아마 당시에 사무실에서 최소 5시간 이상 있어야 한다는 내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업무 특성상 평일주말, 밤낮 구분 없이 일하기 때문에 사무실에 5시간만 머문다고 근무 시간이 모자랄 일은 없었다.

 

 

ㄴ은 오전 10시 30분경 출근하는 편이었으며, 그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직원은 A와 B 두 명이었다. A는 집이 멀었기 때문에 일찍 출근해 일찍 퇴근하는 것을 선호했다. 어느 날 A가 오후 5시에 퇴근하자 ㄴ이 B에게 메시지를 보내 A가 오늘 아침 몇 시에 출근했는지 물어봤다는 얘기를 들었다.

 

 

관리직이 확인하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싶겠지만, 알아서 양심적으로 하라고 해놓고 뒤에서는 하나하나 예사로 안 보고 체크하고 있다는 게 꺼림칙했다. 처음부터 감시하고 예의주시하고 관리할 거라고 했으면 그런가보다 했을 텐데. 차라리 출퇴근 기록기를 설치해서 카드로든 지문으로든 체크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말도 해 봤다. 돌아온 답변은 “그런 시스템은 출근해서 시간만 채우고선 자기 일 다했다는 느낌을 주므로 안 된다” 였다. 이놈들은 사람이 무한동력기인 줄 아는 건가….

 

 

지금 생각해 보면 출퇴근 기록이 없어야 “너희는 여전히 적게 일하고 있어. 그러니 더 해야 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렇기에 시스템을 개선하려는 생각 없이 계속 말로 조지고 정신적으로 압박했던 것 같다. 위에서는 자꾸 우리가 적게 일한다고 했는데, 나만 해도 주 2일은 아침 8시부터 새벽 2~3시까지 일했다. 그 사이에 밥도 먹고, 화장실도 다니고, 내근 시간 채우려고 왕복 1시간을 이동 시간으로 쓰긴 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근무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날이라고 별반 다를 건 없었고.

 

 

출퇴근 기록기가 있어서 출근에 아침 8시, 퇴근에 다음날 2시 찍혀있으면 더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증거가 없으니 가스라이팅하듯이 너희 지금 해이해, 퍼졌어, 사무실에서 일찍 나가고서 집에서도 일 안 하잖아, 너희는 일 안 하고 있어, 만 반복했던 것.

 

 

 

이후 스타트업은 손절하고, 굉장히 관료적이고 보수적인 조직에 들어가 지문인식기로 출퇴근 찍으며 일했다. 모든 기록이 있으니 출퇴근을 가지고 피곤하게 시비털리는 일 없이 정해진 시간 동안 내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직장을 고를 때 나 스스로가 자유분방한 사람이니까 스타트업이나 (외국 기업 문화 따라하는) 신식 기업에 맞을 거라고 임의로 추정해서 확신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짱공일기장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