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20대 초, 중반대의 혈기왕성한 청년들이 젊은 끼를 발산하지 못하고 몇 년간 좁다란 강의실에서
공부만 주구장창 하니, 자투리 시간에 스트레스를 풀 방법은 존재해야겠지
남자들은 보통 운동을 하거나 게임을 한다. 나는 밴드를 했고 친한 동기들은 봉사활동을 했다.
종교 활동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연애를 하는 친구들도 당연히 있었다.
다만 총알처럼 쏟아지는 과제와 시험의 압박 속에서 그런 건전한 여가활동 으로도 스트레스를 풀기는 부족할 수 있었고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누적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게 조금식 새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도 아마 그런 날이였을 것이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시험 성적 발표로 인해 아침부터 강의실 게시판은 성적 확인을 위한 학생들로 북적북적 했고,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기 성적을 확인 한 후 똥 씹은 표정으로 자리를 뜨거나 바닥에 절규하며 현실도피를 하고 있었다. 1학년 강의실과
2학년 강의실은 바로 옆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복도에서 선후배끼리 절규하며 쏘주콜을 외치는 훈훈한 광경을
찾아 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물론 게시판에 붙은 성적표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자기가 미리 정해놓은) 별명으로 기재되지만 대충 점수대를 보면
상위권대는 대충 누구인지 어림짐작이 가능했다.
보통 점수는 80점 만점이지만 상대평가로 만점이 없고 1등의 성적을 기준으로 점수가 정해지는데 1등과 2등의 격차가 크면
편차가 커져서 꼴등의 경우 F를 받을 확률이 커진다. 물론 그런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학습위원장의 경우처럼
사기캐가 등장하면 상황이 조금 애매해진다.
학생회장의 경우 교외 업무가 많아지면 상대적으로 공부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성적이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번에는 조금 위험했던 건지 학생회장의 표정이 조금 좋지 않아 보였다.
익명제인지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학생회장의 심기는 불편해 보였고,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 하는 모습을
잠깐 보고나선, 나도 내 강의실로 갈 길을 향했다.
이때 이후 벌어지는 일들은 직접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고 사건 이후에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서 내린 이야기이다.
아직 강의가 시작되기 직전 점수를 확인한 학생회장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돌아가는
와중에 자신의 성적을 확인하러 가는 학습위원장과 눈이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이였지만 서로는 눈빛을 교환했고 둘 사이에는 뭔가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가 맴돌았다고 한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야 하나?
학습위원장의 표정이나 모션에서 어떤 뉘앙스가 담겼고(찰나의 순간이라 누구도 보진 못했지만 추측할 뿐)
거기에 평정심이 터져버린 학생회장의 입에서 뭔가 입에 담지도 못할 말이 나왔었다고 한다.
추측성 발언
1. 옷도 ㅊㄴ같이 입은게… 어디서 야리냐
2. 컨닝한 주제에 어디서 잘난 척이냐(근거 없음)
3. 눈 그따위로 뜨지마라 ㅅㅂㄴㅇ
등등의 도발성 발언이 시작돼었고, 마찬가지로 한 성깔 하는 학습위원장의 입에서도 좋은 말이 나왔을 리는 만무했다
둘 중 누가 먼저 멱살을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멱살을 잡은 상태에서 손이 날아가기 일보 직전까지 상황이
대치되었다.
슬슬 상황이 커지기 시작하자 둘 사이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말리려는 사람들이 둘 사이를 에워쌌다.
그 상황에서도 입에 서로 담지도 못할 쌍욕을 날리는 와중, 학생회장이 감춰두었던 궁극기를 꺼내들었다.
키가 학습위원장보다 머리 반 개 정도는 크고 손도 왕뚜껑만큼 튼실했던 학생회장이 잡았던 멱살을 풀고
학습위원장의 목 울대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그대로 교실 앞쪽까지 밀어버린 후, 땅바닥에 패대기를 쳐버린 것이다.
프로레슬링에서도 보기 힘든 고급 기술이 시전되고 육체, 정신적으로 데미지를 입은 학습위원장은 희한한 괴성을
지르며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소싯적에 운동하면서 껌 좀 씹었던 건지 학생회장은 그 순간을 틈타 학습위원장의 긴 머리채를 움켜잡고 좌우로
귀싸대기를 후려갈겼는데 당시 그 장면을 직관했던 선배의 증언에 의하면 학생회장의 표정은 일본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오니의 표정과 흡사했었다고 했다.
강의실 분위기가 개판이 되고 다른 학년들도 이 소동을 보러 몰려들었는데(그 중에 나도 있었다) 막상 벌어진 광경은
피칠갑을 한 현장이 아닌 파운데이션 가루가 흩날리는 강의실 가운데서 복날 개패듯이 사람을 패고 있는 악귀를
말리는 사람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였다.
그 와중에 학습위원장도 정신을 차렸는지 학생회장의 단발 머리끄덩이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머리털 뽑아져라 잡아당기며
강의실이 떠나가라 쌍욕을 시전하고 있었다.
중고딩도 아니고 20대 중반을 넘긴 성인 둘이서, 그것도 여자들이 대학교 강의실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일은
내 인생에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였고, 그 결과 역시 쇼킹이였다.
사람들이 간신히 떼어낸 그 둘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항상 단정하고 예쁘장하던 학습 위원장의 얼굴은 볼터치를 좀 과하게 찍었는지 양 볼따구가 시집가는 새색시처럼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고 살짝 웨이브졌던 단정한 머릿결 역시 땅바닥에 나뒹굴면서 자다 일어난 사자 갈기처럼
사방 천지로 뻗어있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세련되게 입었던 옷들도 땅바닥에서 몇 바퀴를 구르고 나니
반 걸레짝이 되어버렸고, 이미 소리를 지를 대로 지른 상태라 쌍욕을 내뱉어도 목소리가 갈라져서 단순히
야생 멧돼지의 절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었던 것 같다.
학생회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초반 기습을 성공적으로 거두었으나 마지막에 머리끄덩이를 잡힐 줄 생각 못했는지
항상 칼각 잡혀있던 머리채가 산발이 되었으며 땅바닥에는 뽑힌 머리털들이, 장모종 개털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깔끔하게 잠겨있던 여성용 셔츠도 립밤 흔적과 파운데이션 가루가 덕지덕지 묻혀져 있고 중간 단추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건지, 마지막에 기습을 당한게 억울한 건지 눈동자는 피구왕 통키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콧구멍은 미친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묵혀놓았던 스트레스 때문이였을까, 단시 학업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이였을까… 아니면 그냥 학습위원장이 싫었던 걸까…
그건 알 수 없었지만 정말로 분한듯 씩씩거리는 학생회장의 표정을 다시 생각해보니
웃기고 재미있다는 생각보다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일단 그렇게 주위 사람들의 노력으로 두 사람을 떼어놓긴 했으나 고등학교 처럼 선생님 오시기 전까지 분위기가
전환되지는 않았고, 그 두사람은 바로 조퇴를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행히 워낙 큰 싸움이였지만 행정실이나 교육실에까지 알려지지는 않았고, 그날 당장에 경찰이 출두할 정도로
어수선하지는 않았다는게 그나마 다행이였다.
그러나 그 순간만 조용히 넘어갔다 뿐이지 그들의 치킨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