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으로 갈거라서 비행기 표가 빨리 매진된단 말이야. 그래서 x월 x일을 기준으로 내가 일정을 좀 짜봤는데 어쩌고저
쩌고~~~~~~(뭐라고 왱알왱알 지껄였지만 결국 적당히 놀고 오겠다는 말이였었던 듯)~~~ 블라블라 부랄부랄~~
~~~ 이렇게 해서 1달 코스로 움직이면 생각보다 저렴하게 갔다올 수 있다구!"
프레젠테이션이 싫어서 직장도 때려치운 주제에 말은 아주 국회의원 대변인 급이다. 그 재주를 회사에서나 좀 쓰지…
뭐 어쨌든… 그러시겠죠. 저렴한 미국행 천만원 코스면 아~주 부담없게 갔다올 가격이죠.
와이프 씀씀이로 본다면 비행기 값, 숙박비만 빼더라도 생활비로 하루 최소 몇십은 써제낄 텐데
돈이 썩어 넘치지 않는 이상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렇겐 못보내지…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이미 마음은 미국으로 떠난 와이프의 씀씀이는 한국과 특별히 다르지 않으리라.
"생활비는 어쩌려고? 미국 물가가 한국 물가랑 같다고 생각하는건 설마 아니지? 숙박비도 세나 데리고 자려면 좋은데서
자야되니까 비용이 장난 아닐텐데, 쌈짓돈이라도 모아놨어?"
“내가 그런걸 모을 정도로 생활비가 남아도는줄 알아? 당연히 한푼도 없지!”
저축 안한다는 말을 저렇게 당당히도 내뱉을 수 있다니… 저정도 뻔뻔함이면 어딜 가서도 굶어죽지는 않겠지. 결국 나보고
전액 부담하라는 소리인데, 장기라도 떼서 팔지 않는 이상 돈 나올 구멍이 없기에 와이프도 단념할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우리 신혼여행 이후로 세나때문에 어디 여행이라도 제대로 가본적 있기나 해? 우리도 좀 숨 돌리면서 살아야지!”
우리? 우리라는 말의 어감이 이상하다… 나는 어차피 가지도 못하는데 왜 우리라니????
작년 12월에 갔었던 속초 여행, 1월에 부산 갔던 호캉스, 2월에 갔던 3박 4일 다낭은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였나?
와이프가 정의한 여행의 개념은 신혼여행처럼 1주일 이상, 외국으로 가는 것만 포함되나보다. 참 기적의 개념이다.
"그래… 다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갈 수 있을정도로 우리 형편이 넉넉하지가 않은 거 알잖아? 숙박비 포함해서 이것저것
하면 적어도 비행기값 이상은 들텐데, 지금 그런 돈이 어디 있니…"
"내년에 나올 당신 퇴직금 미리 땡겨쓰면 안돼? 어차피 그 돈 나오면 그걸로 우리 셋이서 프랑스 올림픽 보러 가려했잖아
그거 미리 쓴다고 생각하면 안될까?"
여자를 패는것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꽉 쥐어진 내 주먹은 신념을 깰 정도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분명히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가능하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그래도 이정도로 현실에 대한 자각없이 헛소리만 늘어놓는 와이프를 보자 분노보다는 서글픔이 몰려왔다.
과연 나는 이 여자를 믿고 살아도 되는걸까… 애 둘 키우는것보다 더 힘든 미래를 생각하니 소주 대짝은 마신것처럼
속이 쓰려왔다.
내 표정이 더러워진 것을 확인한 와이프는 그제서야 내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란 걸 눈치챈 듯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며
내 손을 잡았다
"사실은 이번에 형부가 이번에 미국출장 가면서 언니랑 같이 가거든~ 호텔 스윗룸 2개 1달 동안 빌려서 사용한다길래
언니가 세나 데리고 같이 가자고 해서 바로 간다고 했지~~~. 생활비도 언니랑 반반씩 부담하기로 했고, 숙박비는
안드니까 크게 부담도 없어 ㅎㅎㅎㅎㅎㅎㅎ 어때 나 잘했지?"
칭찬받기를 바라는 댕멍이처럼 와이프는 내 눈을 바라보면서 허락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1000만원 들거 500만원 드니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건가…
언젠가 모 사이트에서 보았던 멘트가 생각났다. 남자는 필요한 100달러짜리 물건을 120달러에 사오고
여자는 필요하지도 않는 100달러짜리 물건을 50달러에 사온다고…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미국가는 일이
가성비가 맞을거라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래 뭐 좋게 생각하자… 생각보다 개념은 없지는 않구나… 마음을 비우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래도 미국 1달 생활비가 그렇게 만만치는 않을텐데 그건 어떻게 마련해야 할 지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음달 월급 일정에 맞춰갈 테니까 다음 생활비랑 비행기값만 주면 돼! 어차피 세나 보육비랑 식비 등등 줘야하는거
그냥 여행 경비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응 오빠~ 그렇게 할거지?"
동갑에다 개월수도 나보다 빠르면서 이런때만 오빠다.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 넘어갈 내가 아니지만 리액션이 안좋으면
뒷감당이 안되므로 기분좋은 표정을 억지로라도 쥐어짜야 한다.
“그래 우리 예쁜이 작은 머리통이 장식으로만 달고다녔던건 아니구나 ㅎㅎㅎ 알겠어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
내 입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은 결국 승낙의 뜻과도 같았기에 와이프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 다음달 생활비 다 갖다바치면 나는 집에 오면 손가락만 빨면서 지내겠지… 그래도 요리하나는 끝내주게 잘하고 좋아하는
와이프가 1달치 음식을 미리 해놓고 갈테니 굶을 걱정은 없을 것 같다. 걸리면 뒤질때까지 쳐맞겠지만
한 달동안 버틸 비자금도 챙겨놨으니 일단 금전적으로도 안심이다. 그렇다면 다음달부터 나는 혼자인건가? 정말로?
내생에 다시오지 못할 절호의 기회인건가… 갑자기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쩍슬쩍 각기춤을 춘다.
허벅지를 꼬집으며 앞을 바라보니 와이프의 표정의 밝지만은 않다. 더럽게도 빠른 눈치 하나만으로 30년을 살아온 와이프이기에
절대 지금의 내 감정을 들켜서는 안된다.
0.1초도 안되는 시간동안 알고리즘을 굴린 나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와이프에게 물었다.
"그래도 내가 세나랑 당신 1달동안 못보는데, 내 감정도 생각해줘야 되는거 아니야? 하루이틀 정도야 상관없겠지만
한달씩이나 어떻게 따로 떨어져 지내냐? 기러기 부부도 아니고…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흥, 나랑 세나 없으면 혼자서 친구들 만나고 술먹고 아주 신나게 놀거면서… 내가 모를줄 알아?”
이년이… 니가 먼저 가겠다면서 또 내가 노는건 못봐주겠다는 놀부심보냐?
잠시 흥분했던 주먹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불쌍한 눈초리로 눈치게임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하루이틀은 괜찮을지 몰라도, 세나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도 내 눈에 담아야 되고,
세나 밥 먹이는것도, 씻기고 이빨 닦이는것도 다 내가 했는데 내가 못해주면 세나가 타지에서 얼마나 낮설어하겠어
그리고 나도 그래… 내가 너 없으면 밥을 잘 챙겨먹을 것 같아?
나는 옷도 제대로 다릴줄 모르고 빨래도 못하고 양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니가 안챙겨주면
내가 어떻게 혼자 다 하겠어… 다시 한번만 생각해봐. 정말 가고싶어?"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멘트 한번 치고, 와이프의 감성을 자극하되, 그래도 어쩔수 없이 보내준다는 느낌으로
와이프를 살살 구슬렸다. 젊었을 때야 이런 개수작은 금방 들통이 났겠지만 나이먹은 노계가 된 와이프님은
감성어린 수작질에 감동한 것인지 살짝 눈물을 글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