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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광주에 관련하여
본 문서에서는 1980.5.17까지의 정치적 배경과 각종 소요사건에 관한 내용들은 다루지 않았다.*아래는 5.18 광주사태에 관련된 몇가지 사건을 시간 순으로 나열한 것이다. 1980년 4월 29일, 김대중이 주도하는 ‘국민연합’은 ‘민주화촉진국민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선포와 함께 불법적인 장외투쟁을 전개..1980년 5월 22일은 김대중 선생이 강제로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기 위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이 계획은 김대중 홍위병들이 극비에 추진하고 있었으며, 5월 16일 이화여대 강당에서 그 모의를 하던 홍위병들 중 몇명이 경찰에 검거되고 나서야 우리 정부는 그 사실을 알았다.(그냥 참조만 하기를. 김대중 석방 사건. 서울의 봄. 그리고 대통령 선거 및 헌법 개정을 둘러싼 극심한 정치적 갈등. 김영삼. 김대중. 김대중의 소요사태 선동등 5월 17일까지의 사건은 매우 복잡함.)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포고 제10호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겼으며 중요 대학에 계엄군이 주둔함에 따라 극심했던 학원소요는 진정되어 전국이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광주지역만큼은 격렬한 시위사태가 지속되었다. 전북 금마에 있던 7공수 2개 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 1개 대대씩 진입하여 31사단장인 전남출신 정웅 소장의 작전 지휘 하에 들어갔다. 정동년 등 5.18 고소자들은 신군부가 특별하게 광주에만 공수부대 2개 대대를 보냈다고 주장하지만 계엄포고 10호에 의해 배치된 공수부대 현황을 보면 광주에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1공수여단 소속 4개 대대는 연세대, 서강대, 홍익대에 배치했고, 5공수 소속 4개 대대는 모두 고대에 배치했고, 11공수 소속 3개 대대는 모두 동국대에 배치했고, 13공수 소속 2개 대대는 성대에, 9공수 소속 3개 대대는 서울대 중앙대 숭전대에, 7공수 4개 대대는 전남대, 조선대, 전북대, 충남대에 각 1개 대대씩 배치했다. 고대에 4개 대대, 동국대에 3개 대대, 성대에 2개 대대가 배치되었던 것에 비하면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 1개 대대씩을 배치한 것은 당시 계엄사가 광주를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나마 7공수 2개 대대는 겨우 600명 수준에 불과했다.1980년 5월 18일 오전 9시경, 7공수여단 제33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전남대 정문에 2백50여 명의 대학생이 몰려와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방 속에 숨겨온 돌을, 부동자세로 서 있는 공수대원들에 던져 7명의 공수대원들에 피를 흘리게 하는 부상을 입혔다. 공수대가 학생들을 향해 진격하자 학생들은 미리 예정한 대로 광주의 중심가 금남로와 충장로 쪽으로 도주하여 파출소를 파괴하고 불태우며 경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경찰들은 도망가기에 바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광주에서 의외의 사태가 발생하자 최규하 대통령은 매우 빠르게 움직여 이날 12시에 대국민성명을 발표했다. 나라 사정은 어려워 가는데 광주시위가 불순한 정치세력들에 의해 유발되어 점점 악화돼 가고 있으니 진정하라는 경고와 당부의 뜻을 전한 것이다. 시위가 난폭해짐에 따라 경찰로서는 도저히 폭력 시위를 당해낼 수 없게 되자, 안병화 전라남도 경찰국장은 전라남도 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출동을 요청했다. 이와 동시에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역시 분주하게 움직였다.1980년 5월 18일 오전 11시에 전남대생 1백 명 가량이 광주역에 모여 30분을 기다려도 학생회장이나 학생운동권 리더가 안 보이자 모인 이유를 몰라 모두 뿔뿔이 흩어지려 하던 찰나 누군가가 "경찰이 박관현 회장을 죽였다"고 큰 소리로 유언비어를 외치며 학생들을 선동했다. 박관현 회장은 그때 여수로 가고 있는 길이었음에도 모두 그 유언비어에 감쪽 같이 속았다.1980년 5월 18일 처음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가 등장하였을 때는 광주 경찰이 죽인 것처럼 말이 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웠고, 2007년에 제작된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민우가 진우(박관현)의 피 흘리며 축 늘어진 시신을 어깨에 둘러멘 장면의 포스터로 흥행에 성공하였으며, 거의 모든 관객이 이 거짓에 속았다.1980년 5월 18일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에게 전남대와 조선대에 주둔중인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시내로 출동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써 시위진압 임무는 오후 4시경부터 31사단장 정웅에게 넘어갔다. 공수대의 특성과 시위진압 작전에 서투른 정웅은 공수부대 2명의 대대장들에게 시위대를 쫓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모든 길목을 막고 주동자를 전원 체포하라는 무모한 명령을 내렸다. 기계와 같은 공수대원들은 하늘같은 2성 장군이 내린 명령에 따라 오후 4시경부터 4-5명 단위로 쪼개져 시내의 주요 길목을 차단했다. 대규모 시위대는 4-5명 단위로 서 있는 계엄군을 향해 돌과 화염병 등으로 공격을 했고, 수적으로 열세한 처지에서 피를 흘리게 된 계엄군 병사들은 보복 심리에서 무자비할 정도로 진압봉을 휘둘렀다.광주시내에는 첫날부터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의 씨를 말리러 왔다거나 여학생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등 기상천외한 유언비어들이 나돌았고, 이 거짓 유언비어를 듣고 흥분한 시민들은 점점 더 많이 중심가로 모여들어 시위대가 공수대원들에 매 맞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더 많은 유언비어가 확대 재생산되어 시위대의 규모를 순식간에 키웠다. 악성 유언비어는 분노와 폭력을 유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으며 광주의 첫날에 퍼진 유언비어는 아래와 같았다.{{'화려한 휴가라는 명칭 하에 데모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벌써 40명이 죽었다.''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을 이틀씩이나 굶기고 술과 환각제 등을 복용시켜 광주에 투입했다.''공수부대원이 임신한 여자의 배를 대검으로 찔렀다.''죽은 시민을 불도저로 밀면서 처리하는 과정이 TV에 나왔다.''대검으로 시민의 머리 가죽을 벗겨냈다.'}}특히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의 씨를 말리러 왔다는 종류의 유언비어는 묵은 지역감정에 불을 댕겨 광주시민들을 분노시켰다. 시위대가 갑자기 1,000여명 단위로 불어나 한일은행 및 도청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면서 자정까지 해산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 15명, 경찰관 310명이 부상을 입었고, 계엄군은 시위학생 615명을 검거했다. 진실이 위와 같은 데도 광주사태의 주모자요 영웅이라는 윤상원은 10시 30분경 불온서적을 취급하는 녹두서점 김상집씨에게 전화를 걸어 “전대 정문 앞인데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무차별살상하고 있다”며 정반대로 이야기했고, 이 거짓말은 녹두서점을 통해 전국 대학가 운동권으로 퍼져나가 그대로 대자보로 제작되어 대학가 벽보에 붙었다. 5월 19일, 윤상원이 민주투쟁회보 이름으로 뿌린 삐라는 아래와 같은 글귀로 시작 된다."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며,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 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 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의 젊은 학생들이 그렇게 소리 높여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바로 유신 잔당과 전두환 일파들입니다. 죄 없이 학생들과 시민들이 수없이 죽었으며 지금도 계속 연행당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이 있는 한 동포의 죽음은 계속될 것입니다."1980년 5월 19일 뿌려진 이 삐라의 내용은 5월 18일에 대한 내용이었을 것이며, 5월 18일의 실제 상황과 이 삐라 내용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5월 18일 공수대가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고,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른 적이 없었건만 윤상원은 첫날부터 이처럼 거짓 선동하는 삐라를 살포했던 것이다.1980년 5월 19일 광주사태가 확대일로로 치닫자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중장)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1개 공수여단의 추가 증원을 요청했다. 1980년 5월 19일 계엄사는 광주에서의 시위가 불길처럼 확산되고 시위양상이 격화일로를 치닫자 1개 공수여단을 더 증파하기로 하고, 정호용 특전사 사령관과 의논하여 최세창 장군이 이끄는 3공수여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후, 18:00시에 2군사령부에 3공수 5개 대대를 작전통제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23:08분에는 3공수여단에 광주투입 명령을 하달했다. 1980년 5월 19일 17시경, 광주시위대에 에워싸여 고립된 11공수 장갑차 뚜껑 위에 시위대가 불타는 짚단을 계속 올려놓았다. 그 열을 이기지 못한 소위가 뚜껑을 열고 나와 비조준 사격을 하였다. 불타는 장갑차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위목적에서 비조준사격을 한 것이다. 이것이 5.18광주사태 전과정을 통틀어 최초의 발포였다. -["5.18관련사건수사결과",검찰보고서,1995년 7월 18일,197-216쪽]-1980년 5월 19일 23:00시, 정웅 사단장은 기밀실에서 예비군훈련단장, 최웅 11여단장, 96연대장, 경찰국장 등과 작전회의를 했다. 익일인 5월 20일 오전에 증파되는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전남대를 기점으로 하여 전남도청의 서쪽을 담당하고, 11공수여단 3개 대대는 조선대를 기점으로 하여 전남도청의 동쪽을 담당하되 과잉진압을 자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3:40분, 2군사령관은 도시게릴라식 난동 행태에 대비하여 대대단위 기동타격대를 보유하여 과감하게 강타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충정작전지침을 하달하고 이적행위자는 단호하게 조치하고 선량한 학생과 시민은 보호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건물의 셔터를 내리게 하여 시위대가 도시게릴라식으로 건물을 이용하여 공격하지 못하게 할 것, 바둑판식으로 분할점령 할 것, 시위대 10명 이상이 모이지 못하도록 할 것, 총기 피탈자에 대해서는 엄중 처벌할 것 등의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1980년 5월 21일 무장시위대에 의한 광주교도소 무력습격이 있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 있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장갑차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시민군 사망자만도 28명에 달했다.1980년 5월 21일 폭도들은 20사단 지휘부를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무전기와 공용무기가 탑재된 위엄 있어 보이는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했고, 곧바로 일사분란하게 흩어져서 당일 12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산재한 38개 무기고를 일시에 습격했다.1980년 5월 21일 폭도들이 탈취한 무기는 카빈, M-1, 기관총 등 5,403 대, 소화기탄약 288,680발, 수류탄 270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 폭약 2,500여 상자, 뇌관 35만개, 4만여m의 도화선 등이었다. 779대의 차량이 탈취됐고, 이들 779대는 군용으로부터 탈취한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로 구성됐다. 정규군 2개 연대 규모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부근에서 발생한 총격전에서 사망한 민간인에 대한 통계는 95년 7월 18일자, 검찰의“5.18관련사건수사결과”105-106쪽에 33명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33명의 사망자 중 20명은 자상 등 다른 원인에 의해 사망했고, 13명이 총상에 의해 사망했다. 총상 13명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다.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70%가 시민군이 소유한 카빈소총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계엄군에는 카빈소총이 일체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무고한 시민을 쏘는 시민군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광주폭동 전과정을 통해 계엄군이 소지한 M-16에 의해 사망한 시민이 36명뿐이다. 이 중 12명은 신원미상자이다. (북한특수군 시체들일 가능성을 제기.) 그리고 그 36명 중 28명은 시위대가 6차례에 걸쳐 교도소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좌익수 170명을 포함해 2,700명의 수용자들을 해방시키려다 죽은 사람들이다. 날짜별 사망자 통계는 이러했다. 5월 18일에는 사망자가 없었다. 5월 19일에는 노동자 및 양화점 점원 2명이 타박상으로 사망했다. 5월 20일에는 7명, M-16 1명, 카빈 2명, 타박상 4명이다. 5월 21일에는 61명, 카빈총 16명, M-16 30명이었고 나머지 15명의 대부분은 타박상이고, 일부 기타 총상 및 자상이 있었다. 5월 22일에는 29명, 차량사 5명, 카빈 5명, M-16 16명 그리고 나머지 3명은 기타총상이다. 5월 23일에는 20명, M16 14명, 카빈 1명, 타박 2명, 기타총상 3명이다. 5월 24일에는 12명, M-16 8명, 카빈 1명, 타박1명, 자상1명, 기타총상 1명이다. 5월 25일에는 사망자가 없었고, 5월 26일에 타박상 1명이 발생했다. 마지막 날인 5월 27일에는 26명, M-16이 22명, 카빈1명, 화상1명(윤상원), 기타총상 2명이다. 카빈총 사망자를 날자 차례 별로 보면 0. 0. 2,16,5,1,1,1,0,0,1이고, M1-6 사망자를 날짜 차례별로 보면 0,0,1,30,16,14,8,0,0,22이다. 시내격전이 가장 치열했던 21일에 시민은 M-16에 의해 30명, 카빈에 의해 16명이 사망했다. 시민군 총에 시민이 맞아 사망한 것이다. 5월 21일은 양측 모두 이성을 잃고 감정이 극에 달해 있을 때이며, 군이 30명의 시민을 쏘는 동안 시민군도 16명의 시민을 쏘았다. 또한 5월 21일에는 10여정의 M-16이 이미 파탈되어 있어 M-16 사망자 모두를 군에 전가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날 시민들은 61구의 시체에 대해 분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20% 이상은 차량사고에 의한 사망한 사람과 시민군이 쏜 총에 의해 사망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전체 기간 중 차량사는 12명, 카빈사는 26명이다. 이 38명(23%)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군이 책임질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엄군이 시내를 완전히 떠나 있었던 5월 22일부터 26일 사이에 발생한 사망자 61명(37%)은 주로 시민군이 군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따라서 이 37%의 사망자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시민군이 져야 할 것이다.1985년 5월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광주사태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95-103쪽에는 사망자들에 대한 총상 분석 자료가 있다. 신원이 확인된 학생 및 민간인 사망자 152명 중 총상 사망자는 116명, 76.3%가 총상 사망자다, 총상 사망자 116명 중 36명이 M-16 총상이고, 80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이다. 즉 총상 사망자 중 69%가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인 것이다. 특히 시위대공격이 가장 치열했던 5월 21일 사망한 시민들을 보면 계엄군이 없는 곳들에서 많이 발생했다. 당시 계엄군은 도청앞과 전남대에만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이 끼어들 수 없는 급박한 전투 상황 속에서 총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신분을 확인할 수 없다. 위험한 작전지역에 나타나면 누구나 총구에 의해 오해를 받을 수 있고 피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5월 24일(토) 09:55분, 호남도로 광주인터체인지(IC) 부근에서 부대로 복귀하던 31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2/29)이 무장시위대의 사격에 응사하면서 고속도로로 진행하던 중 이를 시위대로 오인한 전교사 예하 기갑학교 병력이 오인사격을 가하여 96연대 소속 사병 3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2명과 군인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오후 효천역 부근에서는 매복하고 있던 전교사 보병학교 병력이 이동 중에 있던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하여 선두 장갑차와 후속 트럭에 90미리 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키고, 이에 63대대가 응사를 하는 과정에서 63대대 병력 9명이 사망하고 63대대장 등 군인 33명과 마을주민 3명이 총상을 입었다. 한국군이 한국군을 쏜 것이다. 이렇듯 전쟁터에 배치된 총구는 한사람 한 사람의 신분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억울하게 피해를 당했다는 말은 성립해도 계엄군이 일부러 광주시민만을 골라서 쏘았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5월 22일부터 26일에 걸쳐 시민군이 외곽으로 쫓겨난 계엄군을 일부러 쫓아가서 총으로 공격하다가 피해를 입은 이 61명에다 차량사 및 카빈사 38명을 보태면 99명(60%)이 된다. 전체 사망자의 60%에 대해서는 성격상 그 책임이 명백하게 시민군에 있어 보인다. 여기에 기타총상이 9명도 보태야 할 것이다. 기타총상이란 시민군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AR기관총, CAL50 기관총, M1소총 등 다양한 종류의 화기들이다. 계엄군에겐 오직 M-16만 있었다. 기타총상을 여기에 더 보태면 군이 책임질 수 없는 죽음이 108명(66%)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이 108명의 죽음에 대해 계엄군은 억울한 누명을 써온 것이다. 진압 직후의 계엄사 발표로는 교도소 전투에서 사망한 민간인이 28명, 부상자가 70명이라 했다. 계엄사측은 또“시내버스, 군경 차량 등을 마구 탈취한 폭도들이 시위를 선동하는 과정, 무기탈취를 위해 이동하는 과정, 그리고 음주운전 및 과속운전 등으로 인한 전복이나 충돌하는 과정에서 3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탈취한 소총, 수류탄 등 무기류 취급 미숙으로 인해 1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라남도 인들을 위해 계엄군이 지켜주던 도청 그리고 전남대로부터 살인적인 공격을 받다가 시외곽으로 철수하는 병력을 향해 총격을 가하다가 사망한 무장시위대들에 대해서도 계엄군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군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피해자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결국 모든 책임은 충돌 자체에 있는 것이다. 충돌을 일으킨 장본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본인은 누구인가? 검찰과 법원과 그리고 이른바 5.18정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장본인이 전두환과 정호용 등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반대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김대중, 복학생들, 재야세력, 유언비어를 퍼트린 세력,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광주시에서 계엄군을 잘못 지휘한 윤흥정과 정웅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편의 주장에 동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독자의 몫이다. 여기에서 숫자가 틀리고 맞는 것은 둘째 문제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계엄군과는 전혀 관계없이 발생한 피해를 전부 계엄군이 다 뒤집어 써왔다는 사실, 계엄군이 수세적 방자였고 시위대가 적극적 공자였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계엄군이 처음부터 광주시민을 싹쓸이 하려고 무자비한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매도되어 온 사실, 그리고 카빈소총 등으로 시민들을 쏘아죽인 사람들에 대한 정체에 대한 것이다. 언론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광주학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망자 수는 결코 한쪽 만에서 일방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쌍방충돌과 쌍방교전에서 발생한 것이다. 부상자 수를 비교하면 더욱 확연해 진다. 민간인 부상자 수는 377명, 군인 부상자수는 117명, 경찰 부상자수는 148명이다. 군경을 합치면 265명이다. 부상자 수의 비율은 민간 대 군경이 1.4: 1인 것이다. 쌍방이 엇비슷한 것이다. 이를 두고 군경이 일방적으로 시민을 공격하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한편 23명의 계엄군 사망자는 5월 20일에 1명, 21일에 3명, 22일에 3명, 23일에 1명, 24일에 11명, 25일에 1명, 27일에 2명, 28일에 1명이다. 21일 전사자는 3여단 16대대의 정관철 중사로 계엄군의 차량에 깔려 즉사했고, 21일 및 22일의 전사자 6명은 계엄군이 철수하는 도중 시위대의 사격을 받아 발생했고, 24일의 11명은 교도대로부터 오인사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리고 나머지 전사자는 광주시 재탈환작전에서 발생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동안 언론들로부터 나온 왜곡되고 산만한 자료들만을 가지고 5.18에 대한 지식을 나름대로 형성해 왔다.5.18을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찬탈하기 위하여 전두환이 일으키고 획책한 광주 말살 작전이라고 믿는 것은 전라도 사람들의 굳은 신앙이다.5공세력을 처벌하기 위해 작성된 검찰의 5.18 수사기록에는 신군부가 광주작전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없고, 광주작전의 지휘계선 상에 있었던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소준열 계엄분소장은 법정에 나와 광주작전에 신군부가 개입한 바 없다고 잘라서 증언했다. 5.18 반란 당시 전두환은 계엄령 하에서 수사반장 임무를 수행했던 2성장군에 불과했다. 5.18은 당시 전두환이 간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전두환과 5.18 사이는 사돈의 팔촌 사이도 아니었다. 5.18 진압은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진종채 2군사령관과 전교사 사령관으로 연결된 군 통수체계에 의해 수행됐다.----------------------------------------------------------------------------------------------------------------------------------꽤 읽어볼만한 글인거 같습니다글 마지막부분처럼 판단은 여러분들의 몫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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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5.18 이게 사실이라면 충격적이군요
출처: 전남대 5.18 연구소
물론 증언 당시 증언자가 평민당이라는 점은 감안해야합니다만, 증언 내용 자체는 사실이라면 ㄷㄷ
군수사기관 관계자
505보안부대 광주사태 처리 특명반 수사관의 증언/허창환(당시 보안사 광주지부 특명반 수사관)
505보안부대 광주사태 처리 특명반 수사관의 증언
증언자 : 허장환
생년월일 :
출생지 :
성장지 : 광주시
학력 : 대졸
당시직업 : 보안사 광주지부 수사국 수사관
현재직업 : 평민당원
채록일자 : 1988년 12월 2일
특기사항 : 이 증언은 증언자가 1988년 12월 6일 평화민주당사에서 가진 기자회견 전문임.
저는 지난 1980년 5월 18일 광주사태당시 계엄 업무를 기획조종하는 실질적인 지휘본부였던 보안사 광주지부 제505보안부대 즉 계엄사 전남합동수사단 광주사태 처리 수사국의 핵심부서인 특명반 수사관으로 재직한 바 있던 허장환입니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씨는 지난 88년 9월 4일 저를 비롯한 전두환, 최세창 등 9명을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광주지검에 제소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관계 검찰에서는 피고소인인 저에게 단 한번의 확인조차 없었습니다. 이는 보안사령부 511연구단의 압력에 의해 증거불충분이란 명목으로 동 사건을 기각 조치토록 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국민 앞에 광주사태의 실상을 공개하게 된 중요한 배경과 의미는 중학교에 다니는 저의 아들이 앞서 말씀드린 고소내용이 보도된 신문을 보고 난 후 당시 광주사태의 배경과 그 당시의 아버지의 역할, 그리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 등에 대해 물어왔습니다.
저는 상명하복만이 요구되었던 당시 저의 입장과 정의를 알려고 하는 아들의 아버지로서 평소 자식에게만은 역사적으로 죄인이 되지 않는 길을 택하려는 양면된 입장으로 그 동안 고뇌와 번민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광주민중항쟁 당시 숨져간 수많은 민주열사들의 영혼 앞에 조금이라도 사죄하고 더욱이 어린 아들의 세대에서 다시 민족의 죄인이라는 오명을 남기지 않는 길은 오직 정권 찬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친위대원이었던 저 같은 사람이 모든 진실을 국민 앞에 공개하는 길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증언에 앞서 저는 먼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목숨보다 소중한 민주주의를 쟁취키 위해 산화한 수많은 민주시민들과 의미 없이 숨져간 공수대원들의 영령 앞에 조용히 옷깃을 여미고 그들의 명복을 빌고 그분들의 유가족과 아직도 병상에서 신음하는 부상자 그리고 505보안부대에서 저를 비롯한 수사관들로부터 잔혹한 고문수사를 받은 모든 분들에게 엎드려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편의상 사태발발 전, 사태발발 후, 그리고 평정 후 수사과정과 결론, 참고사항 순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사태발발 전 사항으로 광주사태가 외부세력 즉 김대중씨가 조종하여 발생하였는가? 아니면 보안사령부가 김대중씨를 광주사태 배후 조종세력으로 조작하여 광주사태를 사전 기획하고 이를 구체화시켜 실행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가) 1980. 5. 17 국방부 기밀실에서 확대계엄을 위한 전군주요지휘관 회의가 열리기 하루 전인 80. 5. 16 보안사?부 대공처장 이학봉 대령에 의해 긴급소집된 전국 보안부대 수사과장회의에 참석하고 귀광한 광주 505보안부대 대공과장 서의남 중령은 80. 5. 17. 17:00 경 광주 보안부대 1층 대공과장실에서 저를 비롯한 수사관 8명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사령부 지침을 하달한 바 있습니다.
1. 이번 확대계엄은 광주에 한한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전제와 함께 1980년 5월 17일 0시를 기해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에 확대계엄을 실시한다.
2. 확대계엄을 실시하는 목적은 용공분자인 김대중이 자신이 대통령이 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였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함을 깨닫고 변칙수단을 강구하여 민중폭동으로 혁명을 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3. 더욱이 문제 학생들로 구성된 전국학생연맹 대학생들이 이화여대에 모여 22일을 기해 전국에 4.19와 같은 데모를 일으키기로 토의한 바 있다. 여기에 전남대학생들도 참석했으며, 이들이 광주에 내려와 김대중의 지령대로 광주를 기점으로 폭동을 일으키려하고 있다는 정보를 사령부에서 입수했다.
4. 김대중이는 이들에게 벌써 폭동에 필요한 자금도 주었다고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의남 중령은 사령부에서 가지고 온 예비검속자 명단을 보이면서 김대중 자택 방문자 기록 및 출입자의 사진도 입수하였다고 말하면서 검거 대상자 전원을 계엄확대를 알리는 새벽 방송이 나가기 전까지 전원 체포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나) 서의남 중령은 사령부 지침을 하달하고 나서 목포지역에 장기간 근무하여 김대중씨의 인적사항을 잘 알고 있는 저에게 목포, 여수, 순천 등 분견대에 지시하여 추종인물을 일망타진토록 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당시 목포분견대에서는 박대통령 집권시부터 동향을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서의남 중령은 재야인사 및 학생 등 김대중 추종세력은 이번 기회에 씨를 말려야 한다고 말하며 505사병만으로는 부족하니까 경찰도 동원하여야 한다고 하여 전남도경을 비롯한 광주 및 서광주 경찰서 등에서 기히 합수단에 파견 근무하던 인원의 각 10명씩 30여명의 경찰수사요원을 당일 밤 지원 받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21:00 경 서의남 중령은 검거자 명단을 수사관에게 할당하는 자리에서 제가 "그럼 김대중이도 오늘밤 체포되겠군요."라고 말하자 서의남 중령은 "사령부에서 지금 이 시간쯤에 아마 검거했을거야." 라고 대답하였는 바 서의남 중령의 무심코 뱉은 이 말이 후일 광주사태가 사전 조작이라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발언이었음을 당시 제 자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비 검속에 앞서 저는 서의남 중령으로부터 전남대와 조선대에 지금 이 시간에 주둔하고 있을 공수부대에 가서 공수부대를 담당하는 보안부대원을 찾아 명령보고계통을 505로 하도록 지시한 후 대학 내 도서관 등에 있는 학생들을 공수부대와 협조, 체포하고 이들 중에 예비검속 대상자를 색출토록 하라는 지시를 받고 22:00 경 조선대에 임해 본즉 공수부대원들이 이동을 마치고 일부는 야영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일부는 대학 내를 수색하고 있었습니다.
다) 다음은 사태 발발 후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확대계엄이 일어난 1980. 5. 18. 오후에 보안사령부 대공과장 홍성윤 중령이 자신들이 구성하고 실행했던 광주사태의 진행과정을 확인키 위해 사태 감독관이란 직책으로 내려와 5월 28일 저녁에 상경한 바 있으며 광주사태 투입 병력의 최고 지휘관인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사태 진행과정에서 서울과 광주를 수시로 왕래하면서 505부안부대장 및 최세창, 신우식, 최웅 준장 등 예하 부대장과 빈번히 접촉하며 작전상황을 수시로 보고받고 지시한 적이 있던 중 5월 21일 서울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직접 광주 K-57 비행장에 도착 상무대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에서 사태 진행과정에 대한 브리핑을 받은 후 헬기로 광주일원을 살펴보고 상경한 후 전교사 기밀실에서 제505보안부대장 이재우 대령, CAC사령관 윤흥정 중장, 공수특전사령관 정호용 소장, 11공수여단장 최웅 준장, 7공수여단장 신우식 준장,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소장, 전교사 참모장 장사복 준장 등 계엄관계관회의가 개최되었는바 이 회의 석상에서 특전 사령관 정호용 소장을 비롯한 예하 3개 공수 여단장들이 한결같이 무기 사용여부로 회의를 질질 끌 것이 아니라 군이 자구책으로 자위력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라는 회의 결정이 있고 그후 저는 이러한 회의 결정을 505보안부대에서 사령부에 보고하는 T.T전문에서 자위력 구사 결정 사전 조치 발포, 계엄군 시 외곽 철수 등으로 된 내용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수사회의 과정에서 상기 505대공과장 서의남 중령은 "오늘 사령관님께서 부대에 들르지는 않았지만 광주를 다녀가셨고 전교사 회의 결과 역시 자위력 구사를 최종 결정했으니 폭도들에게 곧 사살명령이 내릴 것이다. 지금부터는 외근 근무를 하는 수사관들은 사복 근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폭도로 오인 받을 수가 있다." "특히 허 수사관은 특수임무 수행상 시내에 자주 출입하므로 주의하도록 하시요."라고 하여 그때 저는 "아! 이것이 정식 발포 명령이구나." 그리고 "정말 역사적 순간이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4·19의거 당시 발포문제로 시비가 있었던 점을 회상하고 "만일 최인규와 같은 꼴이 되는 것은 아니겠죠?" 라고 하자 서의남 중령은 "그때와는 사태가 다르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사령관님이 책임진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있고 나서 형식상 지휘계통인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자위력을 위한 자구책이 하달되었으며 이날 밤 계엄군이 퇴각을 시작하며 전면적인 발포가 있었습니다.
5월 22일 17:00 경 서의남 중령은 계엄군이 철수된 광주시내 시민군 동태를 탐지하기 위해 저를 비롯한 수사관 4명을 침투 그들의 배치사항, 병력, 소지화기, 특히 중화기 소지 여부 등을 확인 보고토록 한 바 있습니다.
그후 5월 23일 10:00경에는 저를 비롯한 수사관 6명이 헬기를 타고 광주교도소에 공수되어 게엄군이 철수작전시 체포한 시민군 및 교도소 습격 폭도 명목으로 체포 수용중인 178명에 대한 분류심사 작업을 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연고지인 담양, 순천 방면으로 가려던 광주에서 취학하고 있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당시 제 직권으로 중학생 1명을 현지 석방조치 한 바도 있습니다.
라) 5월 27일 평정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7일 평정 기습작전을 앞두고 CAC공병대 폭약전문처리 군속이 전남도경 지하실에 은밀히 침투, 폭약 뇌관 완전 제거 보고가 있고 나자 26일 저녁 9시 K-57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에게 저를 비롯한 평소 도청내부 구조를 잘 아는 정보과 도청담당요원들로부터 내부 구조 시설에 관한 브리핑이 있었고 익일 04:00 평정작전에 돌입되었습니다.
저는 06:00 경에 도청에 들어가 현지 수습처리 부대로 투입된 20사단 병력 담당 보안 부대원과 협조하여 일제 외부인 출입을 통제시키고(특히 국내외 기자 등에) 폭도들이 기록하였을지도 모를 모든 문서서류 일체를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고 도청에 임하여, 상기 임무를 수행한 바 있습니다.
마) 광주사태 처리 수사국 편성
사태 평정 후인 80. 5. 27. 광주 외곽을 계엄군으로 신속히 차단하고 수사관 1명씩을 배치 사태 가담자를 색출토록 하는 반면(이때 홍남순 변호사 일가족이 송정리 검문소에서 505보안부대 이종남 수사관에게 체포) 사태 처리를 위한 수사국이 긴급 편성되었는 바 편성요원들은 보안사, 안기부, 검찰, 범죄수사대 등에서 차출된 80여명의 수사요원들이 80. 5. 27. 헬기로 505보안부대에 투입되었는 바.
1. 수사국 구성요원의 주요 편성 직제를 보면 초대 수사국장이 보안사 기획처장 최예섭 준장, 부국장에 현 보안사 참모장 최경조 소장(당시 대령) - (최예섭에 이어 수사국장이 됨), 부국장에 505보안부대 대공과장 서의남 중령, 광주지검 공안검사 김기준 외 1명 등이 주축이 되고
2. 3개과 1개 반으로 편성 - 1과. 재야 담당 팀장 전남도경 파견요원 (경정)
2과. 학생 〃 〃 안기부 파견 요원 (부이사관)
3과. 폭도 〃 〃 보안사 〃 〃 (조모소령)
그외 특명반이 있었습니다.
3. 이들은 처음 재야 수괴를 정할 때 남동성당 김성용 신부로 했다가 김신부가 미검상태였으므로 홍남순 변호사로 교체했으며, 최고 수괴를 김대중씨로 한 후
재야수괴 - 홍남순
학생수괴 - 전남대 (정동년)
폭도수괴 - 김종배
극렬가담 불량배 - 박남선, 윤석루
등으로 수사체계도를 작성하고 체포된 사람들을 이 체계도에 무조건 적당히 끼워 맞추었습니다. 이러한 수사과정에서 김대중씨와 범죄사실을 연계시키기 위해 피의자들에게 무수한 고문이 자행되는 조작수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예로 1) 5. 29. 정동년이 숙박하였다고 주장하는 아리바이를 없애기 위해 완도읍 모 여인숙의 숙박부를 찢어버리고 변조한 외, 2) 홍남순씨를 고문과 설득 회유로 송치하였다가 홍변호사가 검찰에서 진술을 번복하자 도저히 공소유지가 어려워 기소할 수 없다라는 군 검찰관의 요구가 있자 재차 신병을 보안부대에 인수 잔혹하게 고문하여 수사관이 진술서를 쓰고 피의자격인 홍남순씨가 이를 정서하여 기소한 사실, 3) 22일 오후 4:30 경 광주 통합병원 근처에서 시민군이 잡아 계엄군에 인계된 간첩 용의자 전옥주를 서의남 중령이 저에게 "최대한 김대중이와 연계시키라."고 하였으며, 4) 전남 도청에서 사태 진행과정 중 발생된 독침사건의 주범 장계범이를 사태 평정 후 보안부대에서 보호하였으며 장계범이 분명히 사태 가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형사처벌되지 않았으며 더욱이 서의남 중령은 당시 이들을 저에게 잘 보호하도록 지시까지 한 바 있습니다. 5) 송치된 인원들에 대한 군 재판부의 공판이 진행되기도 전에 송치된 자의 형량을 505보안부대와 CAC 군 검찰 및 재판부가 사전에 형량확정을 했으며, 그리고 공판일에는 피고인이 범죄사실을 인정하도록 수사관 전원이 법정주변에서 대기하며 공소유지에 필요한 조치를 한 바 있습니다. 6) 그외 특명반에서는 전남대 교수를 골라내어 이들을 김대중 내란 음모 간접 가담자로 규정 민준식 총장 및 김동원 교수, 이방기 교수, 명노근 교수 등 수 십 명을 사표를 강요 사직토록한 이 권력형 부조리 수사를 하는 등 국보위 및 청와대 지시사항을 수행한 바 있습니다.
= 결론 =
5·18 광주만행은 5·16보안사 대공과장 회의에서 이미 그 사전 전모가 대공처장 이학봉 대령에 의해 지시되었고 상기 지시를 받은 505보안부대 서의남 중령은 이를 구체화시키고 실현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계획 하에 계엄확대 방송과 함께 도시외곽을 차단하고 시외전화 등 통신을 두절시켜 광주시민을 고립시킨 후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살육진압작전이 시작되었으며 이에 병행하여 80. 5. 18부터 보안사 대공과장 홍성율이 보안사령부가 구상하고 실행했던 광주사태의 진행과정을 독려하는 감독관으로 내광하여 사태를 전두환 사령관에게 보고하였고, 5. 19부터 공수특전사령관 정호용 소장이 수시로 서울 광주를 내왕하며 작전상황을 지휘 및 보고하였으며 또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직접 광주를 다녀가는 등 일련의 과정을 감안컨대, 광주사태 사전조작 및 발포 책임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음이 명백한 사실인 것입니다.
이들은 5·18진행과정에서도 장계범 독침사건을 조작하는 등 흥분된 군중심리를 더욱 극대화시키려는 조작을 하였고 수사과정에서도 김대중 - 홍남순 등 사전에 조작된 틀에 맞도록 모든 사람을 가혹한 고문으로 수사하여 이 틀에 끼워 맞추었으며 체포된 자의 형량도 재판이 있기 전에 미리 505보안부대가 예상 확정 조정하는 등 실로 경악할 일이 자행된 바 있습니다. 이들은 5. 28 이후에도 특명반으로 하여금 교수 등 민주인사를 김대중씨 추종세력으로 조작하여 그들을 자격정지케 하여 수많은 가정을 경제적으로 파탄케 한 바 있습니다. 5·18 광주시민 학살은 이처럼 소수 정치 군인들이 사전에 조작한 계획에 따라 진행된 민족의 비극사임을 만천하에 밝혀 드리는 바입니다.
= 참고사항 =
특명반에서는 권력형 부조리 척결이라는 미명하에 국보위 지시로 삼청교육 및 공무원 숙청 작업과 병행하여 전남일보 사장 김종태 및 조선대 총장 박철웅 일가족을 잡아들여 이들을 위협 고문하고 재산 일부를 몰수하였으며, 불교정화란 명목하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사찰 수색 및 승려 체포 등 종교 탄압을 하였고 특히 국보위에서는 전남도에 전 모 대령을 파견하여 행정전반을 지휘 감독케 한 바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505보안부대는 광주사태를 최종 마무리하면서 민주화 항쟁가담자 전원을 내란 가담 국 사범으로 치안본부 컴퓨터에 입력시켜 이들을 영원히 범죄인으로 낙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81년 11대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바 있던 현 평민당 국회의원인 전 31사단장 정웅 장군을 청와대 지시에 의해 납치, 강제로 입후보 사퇴케 한 장본인이 본인임을 이 자리에서 밝힙니다.
이상 광주사태 전모를 말씀드렸습니다.
끝으로 당시의 광주시는 도시전체가 2차 대전 당시 악명 높았던 아우슈비츠 유태인 도살장을 능가하는 잔혹한 참상이었음을 여러분에게 폭로합니다.
오랜시간 감사합니다.
질문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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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5.18 희생자들...(잔인한 사진이 많음)
5.18희생자 사진★많이 잔인하니,심 약하신 분들은 피해주세요.▲ 허화평 전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15일 "(80년 광주의) 계엄군은 착검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복 진 <전남일보> 사진부 기자가 80년 5월 19일 촬영한 사진 에는 M16 자동소총에 대검을 꽂은 채 시민들을 쫓고 있는 공수부대원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붉은 색 원) 5.18 기념재단이 펴낸 <오월, 우리는 보았다 - 계속되는 오일팔 (1979.2.25-2004.5.18)>에서 발췌. ⓒ2005 신복진 ▲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계엄군이 착검하지 않았다 는 허화평씨 주장과 달리 신복진 <전남일보> 사진부 기자 가 80년 5월 19일 당시 촬영한 사진에는 M16 자동소총에 대검을 꽂은 채 시민들을 구타하는 공수부대원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5.18기념재단이 펴낸 <오월, 우리는 보 았다-계속되는 5.18>에서 발췌. ⓒ2005 신복진 좌측 머리부분이 함몰된 광주항쟁 사망자5월 18일오전 10시, 휴교령이 내린 상태에서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든 학생 100여명과 무장 공수대원이 대치하였다. 200-300명 정도로 수가 불어나자 학생들은 "계엄해제" "계엄군 물러가라" "휴교령 철회하라" 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곧 대치 중이던 공수부대 책임자가 "돌격 앞으로" 라는 명령을 내렸고, 공수대원들은 학생들에게 파고들면서 곤봉을 휘둘렀다. 곤봉은 쇠심이 박힌 살상용 곤봉으로, 이를 맞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좌측 가슴에 총상과 자상이 난 채 사망한 광주항쟁 사망자"공수부대 병사들은 마음껏 모든 가능한 폭력을 행사하였다. 첫날부터 대검을 사용하였고, 지나친 폭력에 항의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며 무지막지하게 구타하고,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젖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하였다." -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풀빛, 1999)뒤쪽에서 본 위 사진 사망자의 총상 자국"공수 놈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60살이 넘어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ㄱㄱㅣ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놈들은 "이 씨8 년은 뭐냐,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화발로 할머니의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화발로 뭉게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버렸다.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박남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샘물, 1988)아...하늘이여...."어느 할아버지는 "저럴 수가 있느냐, 나는 일제 때에도 무서운 순사들도 많이 보고, 6.25 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저러는가. 죄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는 없다. 저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 하면서 통곡했다. 어느 중년의 사내는 "나는 월남전에는 참전해서 베트콩도 죽여봤지만 저렇게 잔인하지는 않았다. 저런 식으로 죽일바엔 그냥 총으로 쏴 죽이지. 저 놈들은 죽여버려야 해" 하면서 오열을 터뜨렸다. 온 거리는 피의 강,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무참하게 구타당한 채 사망당한 광주 영령5월 19일"5월 19일에 저질러진 공수부대의 만행은 어찌나 잔인했던지 진압하러 나온 경찰조차 시민들에게 울먹이면서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고 애원할 정도였다."사살되거나 타살후 리어카에 실려 어디론가 이동을 기다리는 시신"주위의 노인들이 공수대원의 폭력을 만류하자 그들은 노인들의 머리를 곤봉으로 후려쳤다. 노인들도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이런 모습을 도망치며 바라본 시위 군중들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일시에 돌아섰다. 그리고는 "좋다, 다 죽여라!" 하면서 공수부대에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로타리 부근 전투에서 머리가 으깨지고 팔이 부러져 온통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중이던 택시기사에게 공수대원이 부상자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기사는 안타깝게 "당신이 보다시피 지금 곧 죽어가는 사람을 병원으로 운반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호소하자 그 공수대원은 차의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기사를 끌어내려 대검으로 무참하게 배를 찔러 살해했다. 이런 식으로 최소한 3명의 운전기사가 살해당했는데, 이는 다음날인 20일, 또 하나의 기폭제였던 차량시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어떻게 눈을 감았을꼬..5월 20일대검만으로는 모자랐던 걸까. 20일 오후부터는 심지어 화염방사기까지 사용하였다. 2시 30분경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를 쏘아 여러 명의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타 죽었다.-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풀빛, 1999),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택> (인물과 사상, 2003)"시민들은 혹시나 자신들의 운명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TV를 통해 방영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모두 열심히 시청하였지만 TV에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연속극이나 오락프로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들은 텔레비젼을 보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한 쪽에서는 죄 없이 같은 동포가 절규하며 죽어가고 있는데, 저 텔레비젼의 다리를 흔들어 대는 춤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배신감이었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아.....아.....그저 눈물만....MBC 이외에도 KBS와 세무서도 불에 탔다. 신군부는 이 방화들을 '폭도론'의 증거로 TV 등을 통해 계속 보여주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얼마나 얼마나...."전남대에서 신역까지 도보로 이동하면서 아스팔트와 건물을 향해 사격을 실시한다. 트럭 위에서는 M60이 엄호사격을 하면서 한 발 한 발 신역을 향해 다가간다. 사병들을 향해 고함치기 시작했다. 후퇴는 없다. 후퇴하면 모두 쏴죽인다."- 광주매일 정사 5.18 특별 취재반 <10일간의 항쟁> (사회평론, 1995)피멍이 들어 사망한 광주영령을 방치한 공수부대5월 21일오전 10시경 금남로에는 10만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시민들은 일단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시외곽으로 철수시키겠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약속한 정오가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후 1시 정각, 건물 외부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건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를 알리는 신호였다. 광주시민들을 몰살시키려는 것이었을까.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를 정면으로 맞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광주매일 정사 5.18 특별 취재반 <10일간의 항쟁> (사회평론, 1995)거의 미이라가 된 상태로 방치된 시신"공수놈들은 같은 동족을 살상하고도 쓰러진 사람들을 옮기지 못하도록 연발로 위협사격을 해대었다. 아직도 공수부대놈들의 사격선 부근에서 부상한 채로 살려달라고 외치는 시민들의 애원소리는 처절했고, 이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피를 끓게했다. 공수놈들은 아직 죽지 않고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시민들을 구하려고 뛰어나가는 시민들에게조차 사격을 가해 사살해버렸다. 부근 건물의 벽에 바짝 붙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시민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박남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샘물, 1988)얼마나 아팠을까 아"순식간에 금남로는 피와 통곡의 바다가 되었다. 공수부대는 도청과 주변의 건물에 숨어 보이는 사람들마다 져격하였다. 1시 30분경에는 한 청년이 장갑차 위에서 윗통을 벗고 태극기를 높이 휘날리며 도청을 향해 '광주만세!' 를 외치며 달려들었다. 모든 시민들이 긴장되어 그를 응시하는 가운데 한 발의 총소리와 함께 피가 튀며 청년의 목이 꺽어졌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시민들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에 온몸을 떨었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전쟁' 이었다. 시민들은 곧 총을 얻기 위해 시내, 외의 무기고로 향했다."-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풀빛, 1999)사살되거나 타살되거나 대검에 찔려 방치된 시신들21일 저녁, 드디어 시민군은 계엄군을 도청에서 몰아내고 점거하는데 성공한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택> (인물과 사상, 2003)5월 22일22일 비공식적인 정전이 성사되고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한 시민 수습위원회와 신군부 사이에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날 계엄당국은 김대중을 광주폭동의 배후라고 발표했으며, 일부 특전사 지휘관들은 무력을 동원해 광주 '폭도들'을 '소탕'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황정일 역. <알려지지 않은 역사> (중앙 M&B, 1999),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아..........전두환은 정석환에게 "최장군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을 터이니 용기를 잃지말고 분발하라고 전해달라"며 전두환 자신의 명의로 금일봉 1백만원을 최웅에게 전해달라고 지시했다.- 정석환, <비화/ 5.18당시 정보부 전남지부장 정석환 비망록> (신동아, 1996 1월)5월 24일공수부대는 지원동 주남마을을 출발하여 학동과 진월동을 거쳐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는 야산으로 철수하던 중 진월동에 이르러 인근지역에 장난삼아 총질을 가했다. 저수지에서 멱을 감고 있던 아이들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자 아이들은 둑 너머로 피신했지만, 전남중학교 1학년이었던 박광범이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또한 진월동 동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도 무차별 집중사격을 가했다. 모두 피신했지만 신발이 벗겨져 뒤돌아섰던 효덕국민학교 4학년 전재수는 총에 맞고 즉사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님이여...전남대학교 교수들은 <대한민국 모든 지성인들에게 고함>을 발표했다. "모든 사람들은 6.25때에도 이런 참혹한 살육전은 없었다고 울부짖으며 '모두 죽자' '죽여달라' 를 외치며 짐승 같은 계엄군과 맨몸으로 싸웠습니다..... (중략) 고립된 우리 광주 시민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한시가 절박합니다. 민주시민이여! 민주화를 위해, 우리의 삶을 위해 일어섭시다."- 김정남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활성서, 2002년 12월)조국은 그대들에게 총칼로 잔학했는데..그래도 태극기를 덮고...5월 25일아침 8시, 황금동 부근에서 술집을 경영하는 21세의 장계범이라는 사람이 도청 농림국장실에 쓰러지듯이 허겁지겁 들어닥치면서 어깨를 움켜쥐고는 "독침을 맞았다!"고 소리쳤다.... (중략) 독침 사건이 발생하자 도청 안의 분위기가 갑작스레 살벌해졌다. 여기저기서 간첩이 침투했다는 소문이 돌고 모두들 수군거리며 도청 안에는 불안해서 못 있겠다며 상당수가 빠져나갔다...(중략) 이 사건은 사전에 계획된 것으로서 침투정보요원들의 도청지도부 교란작전이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길거리에 방치된 광주의 영령들5월 26일전남 도청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내외신 기자회견이 열렸다. 미국의 일간지 <볼티모어 선>지의 기자 블레들리 마틴은 이 기자회견에서 만난 광주항쟁 지도부의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임창용 <'폭동'아닌 '민주항쟁' 자리매김 큰 몫 윤상원 5.18 시민군 대변인> (서울신문 1998 9월 10일)다 피지도 못하고...여인이여...5월 27일 0시를 기점으로 광주의 시외 통화가 끊기자 도청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계엄군이 진입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우리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산 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하여,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자,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라." -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절통하고 절통해서 어찌 눈을 감겠소...5월 27일새벽 4시쯤 도청 앞은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으며, 금남로를 중심으로 시가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장갑자 위에 장착된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비추는 가운데 계엄군은 항복을 권유하는 최후 통첩을 방송했다. 그러나 도청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곧 총성이 울림과 함께 계엄군의 서치라이트가 박살났다. 다시 캄캄한 어둠이 내리깔렸고 계엄군의 일제사격이 개시되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달아나던 시민군을 살해했던 계엄군은 8명의 투항자들을 전부 사살하였다. 한 계엄군 병사는 한쪽 발을 시민군 포로의 등에 올려놓고 사격하면서 "어때, 영화구경하는 것 같지?"라는 농담까지 던졌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아.......그저........"시민군들이 모두 정면으로 응사하는 동안 뒷담을 넘어 들어온 3공수 특공대는 도청 건물로 잠입하여 보이는 대로 총을 난사하고 여기저기 수류탄을 까넣었다. 그리고는 확인사살까지 했다. 많은 시민군들은 특공대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지만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풀빛, 1999)그 날 이후광주학살의 참상을 목격한 후 서울로 올라왔던 서강대생 김의기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5월 30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글을 뿌리면서 투신 자살했다.후일,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어 신고가 접수되지 않은 사망자 수까지 합하면 전체 사망자 수는 2천명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처음부터 사상자수를 은폐하기 위해 사상자가 발생하는대로 트럭에 싣고 아무도 모를 곳에 파묻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조선일보>는 5월 25일자 사설에서 항쟁세력들을 '분별력을 상실한 군중'으로 몰아붙이고는, "......57년 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역사가 반교사적으로 우리에게 쓰라린 교훈을 주고 있다..." 며 마치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한 일본인 폭도들에 비유하기도 했다.- 정운현 <'광주의 굴레' 못 벗은 한국언론> (대한매일 2001년 5월 19일) 죄없는 국민에게 총,칼도 모자라 화염방사기를 쓴 정부죠.전두환이 쪼개며 티비에 나올 때마다 정말이지..살의를 느낍니다.
피빛망투작성일 2012-12-27추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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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다] 극우세력의 5.18 왜곡에 대한 반박
극우 세력의 왜곡과 그에 대한 반박을 담았습니다.관심있는 분은 읽어보십시오.
1. 5.18은 김대중 정권때부터 민주화운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5.18은 88년에 가동된「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거치면서 노태우 정부 때 처음「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공식 인정 받았다.◆ 이후 1993년 5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5.13 담화, 1995년 12월 5.18 특별법 제정, 1997년 4월 12.12 5.18 사건 신군부 유죄판결 확정, 1997년 5월 정부의 5·18민주화운동기념일 제정을 통해 민주화운동이란 평가가 확고해졌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438896
2. 5.18 최초 사망자는 20일 저녁 사망한 경찰이다.
◆ 5.18 최초 사망자는 19일 새벽 사망한 청각장애인 김경철이다.
◆ 5월 18일 희생된 김경철씨는 공수부대에 의한 대표적인 과격진압 사례였다. 청각장애로 인해 말까지 할 수 없었던 김씨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05981
◆김경철씨 사망자 조서 http://i45.tinypic.com/w2bl95.jpg
◆20일 김경철 이외에도 김안부(19일 밤), 김기현(21일 오전) 등의 희생자가 발생.
3. 광주시민이 계엄군에 먼저 발포했다.
◆1995년 검찰, 2007년 국방부 조사결과에 따르면 계엄군이 먼저 여러 차례 발포했다.
◆(1995년 7월 검찰발표)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는 5월 19일 오후 5시께 광주고 부근에서 있었던 바 (중략) 20일 밤11시께 3공수여단이 광주역 일대에서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으며 (중략) 21일 다시 전남대 앞에서 장갑차, 경찰가스차 등 시위대의 차량돌진 공격에 대응해 발포한 것으로 (중략) 시위대가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위) 최세창 제3공수여단장은 각 대대에 M16소총 실탄을 배부해 장착토록 지시했다. 당시 광주역에 투입됐던 이모 하사는 과거사위와의 면담에서 "지원 병력을 막아선 시위대를 향해 발포가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오후 1시경 비극의 전남도청 앞 발포가 자행됐다. 계엄군이 시위대에 밀리자 공수부대 중대장 이상 및 일부 하사관들에게 실탄이 분배됐고, 시위대가 밀고 들어는 장갑차에 11공수여단 무전병이 사망하자 집중 사격이 시작됐다. 당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계엄군 중 일부는 위협사격을 가했지만 일부는 조준사격을 했고, 특히 인근 광주관광호텔 옥상 등 주변 건물에 저격병이 배치돼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이에 대해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기 전에 시민들 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고 진술했으나, 과거사위는 "계엄군 사상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총상에 의한 부상자나 사망자는 없었다"고 밝혔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0034698
4. 5.18 당시 시위대원이 장갑차를 조종했는데, 일반인이 어떻게 장갑차 조종을 할 수 있나?
◆광주 시민이 조종했던 장갑차는 KM900(CM6614)이다. KM900은 궤도장갑차가 아니라 차륜식장갑차이며, 핸들이 달려있어 조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또한 당시 버스기사, 트럭기사도 시위에 많이 참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광주 시민의 KM900 장갑차 운전이 불가능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5. 5.18 당시 광주교도소가 습격당했는데?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있으며, 도로 옆에 바로 붙어있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광주에 배치된 계엄군에 광주 외곽을 봉쇄하여 폭도의 외곽진출을 절대로 허용하지 말라는 2군사령부 지침이 내려왔다. 제3공수여단은 광주교도소를 주둔지로 삼아, 광주-담양 국도와 호남고속도로의 통행을 봉쇄했다. 제3공수여단은 교도소에서 500m~1km 떨어진 도로에 바리케이드 설치하고, 광주 외각으로 나가려는 차량에 발포했다. http://i50.tinypic.com/2ms2h3d.jpg (가운데 운동장이 보이는 건물이 광주교도소)
◆(광주교도소장 한도희) 시민군이 80년 당시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면 교도소 주변에 시체가 있어야지 어떻게 도로에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시 교도소에는 3공수여단 병력이 중무장하고 있어서 교도소 습격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엄군이 시 인근 지역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무차별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64241
◆(1995년 12월 검찰 현장조사 결과)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간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위치, 시외곽으로 빠져나가려던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다수의 교전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와 무관한 시민들이 도로를 지나다 매복병사들로부터 사격을 받았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22900329101009&ed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5-12-29&officeId=00032&pageNo=1&printNo=15638&publishType=00010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위) 외곽도로 봉쇄작전 중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12.12 5.17 5.18 보고서 100쪽>
6. 꼭꼭 숨겨져 있던 38개 무기고에서 어떻게 무기를 탈취할 수 있었나?
◆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 파출서에서,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 무기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남 지역 예비군 무기고가 200여개 넘게 있었다.
7.시위대가 쓰던 카빈에 맞은 사망자가 계엄군이 쓰던 M16에 맞은 사망자보다 많다?
◆제5공화국의 국방부는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88명이 폭도 자신들의 난동으로 죽었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제5공화국 국방부는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현존하는 5.18 사망자에 대한 검시자료는 보안사가 작성한 '광주사태 검시참여보고', 광주지검이 작성한 '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 , 광주시청에서 작성한 '광주소요사태 사망자 조서'로 3가지가 있다. 카빈 사망자만을 따져보자면, 보안사 검시 자료는 카빈 사망자 21명, 광주지검의 검시 자료는 26명, 광주시청 검시 자료는 12명이다. 세 자료에서 모두 카빈에 의한 총상으로 인정 된 사람은 8명이다.
1.보안사 검시자료 -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중 참고자료 부분 2. 광주시청 검시자료 - 국가기록원 3. 광주지검 검시자료 - 광주광역시 5.18 민주화운동자료총서 20권
8.1991년 윤기권의 월북은 북한이 배후조종했다는 근거다. (화려한 휴가의 주인공이 월북했다고 왜곡하기도 함)
◆윤기권은 1962년 전북 정읍 출신으로, 1980년 광주 대동고등학교 학생이었다. 5.18의 충격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1991년 3월 월북했다.◆윤기권은 5.18 당시 신원이 확실한 고등학생이었으므로 북한이 파견한 간첩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대단한 역할을 맡은 것도 아니다. 5.18 주역들의 대량 월북도 아니고, 단 한명이 월북했다고 5.18 전체를 매도할 수도 없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5&no=290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5&no=289
9. 북한이 5.18을 광주인민봉기라고 부르고, 매년 5.18 기념식을 여는게 의심스럽다.
◆북한은 5.18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남조선인민봉기), 6.3항쟁(남조선청년학생봉기), 6월항쟁(6월 인민항쟁), 부마항쟁(10월 민주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운동을 모두 기념한다.(괄호 안은 북한에서 부르는 명칭)◆북한은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이라고 왜곡하여 북한 주민에 대한 선전수단으로 삼을 뿐이다. 북한에 있을 때 5.18 민주화운동 등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http://www.rfa.org/korean/in_focus/nk_518-05182009134816.html
10. 5.18 북한군 특부수대 개입설을 주장했던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의 증언 신빙성이 있는가?
◆5.18 당시 광주에 침투했다는 북한군의 숫자, 침투경로, 퇴각경로, 귀환인원이 매번 달라지고 일관성이 없다.
◆임천용은 2006년 8월 한국논단과 인터뷰에서 서해안 쪽으로 450명이 침투하고, 3분의 1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특히 한 무리는 군복을 입고 계엄군 쪽에 침투하고, 절반쯤은 시민군 쪽에서 활동했다고 말했다. ◆2006년 12월 기자회견에서는 1개 대대가 침투해서, 3분의 2가 귀환했다는 증언이 나왔다.◆2008년 임천용은 뉴스한국과 인터뷰에서 서해안과 동해한으로 각각 1개 대대씩 침투해서 절반이 귀환했다고 말했다.(참고: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는 300명으로 구성됨)
1. 한국논단 인터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83002. 2006년 기자회견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19&aid=0000017557
3. 뉴스한국 인터뷰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k2007021120301185542
11. 탈북자 단체의 5.18 증언집 '5.18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는 신빙성이 있나?◆북한에 있을 때 5.18 상황을 생중계로 지켜봤다는 증언이 이 책의 포인트.◆북한에서 5.18 당시 광주 상황을 TV를 통해 생중계로 봤다는 주장./1980년 당시 기술로 송신소, 중계소 하나없이 광주에서 수 백km 떨어진 평양에 생중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여자만 골라 도끼, 칼로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는 주장./5.18 민주화운동 당시 사망한 여자는 11명에 불과하며, 모두 M16 총에 맞아 사망했다. ◆전기톱으로 머리를 갈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는 주장./머리가 전기톱에 갈려 죽은 사람에 대한 검시기록은 없다. 머리에 총상을 입어 사망한 시신 사진을 왜곡한 것이다.
12.5.18 당시 북한군이 활동했다는 것은 북한 사람, 탈북자 사이에서 상식이다?
◆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인 탈북군인협회 회장은 5.18 북한군 침투설을 주장하는 자유북한군인연합에 대해 "탈북군인협회와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일하는 방법이 달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 특히 보여주기 사업, 이벤트성 사업 등은 지양해야 한다. ‘북한 보급창고 등을 까고 나오자’ 식의 선동적이고 과격한 활동이나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 등도 현실과 맞지 않다."고 비판한 바 있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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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각 대학별 슬로건
서울대 :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 Veritas lux mea(라틴어 "진리는 나의 빛") 연세대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YONSEI Standing Proud(세계 속에 자랑스러운 연세) 고려대 : 민족의 고대에서, 세계의 고대로 / 자유, 정의, 진리 서강대 : Be as proud of Sogang, As Sogang is proud of you(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한양대 : 세계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 사랑의 실천 성균관대 : 한국지성 600년, 미래인재의 산실 / 仁義禮智(인의예지) / Over the sky to the world best 이화여대 : 이화! 즐겁게 세상을 흔들어라 중앙대 : 의에 죽고 참에 살자 / 한국의 중앙에서, 세계의 중앙으로 한국외대 : 진리, 평화, 창조 / 내 꿈에, 세계를 플러스 경희대 : 뉴밀레니엄, 평화와 공존의 대학 / 그대 살아 숨쉬는 한 경희의 이름으로 전진하라 홍익대 : 예술과 학문의 만남 동국대 : 동국사랑 아름답게 동국미래 희망차게 건국대 : 시대를 앞선 지성, 세계를 향한 도전 숙명여대 :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 인하대 : 인하에서 배우고 세계에서 펼치자 국민대 : 21세기 글로벌 시티즌을 양성하는 국민대학교 숭실대 : 진리와 봉사를 세계로 단국대 : 민족애를 바탕으로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전문인 양성 가톨릭대 : Three distinct campuses, One great University(각기 다른 세 캠퍼스, 하나의 큰 대학) / A Step Forward(한걸음 더)
성신여대 : 성신의 네가지 약속! 변화, 성장, 이상, 완성 / Bright Sungshin(빛나는 성신) 명지대 : 명지대학교는 나무처럼 늘 푸른 마음으로 사람을 키웁니다 덕성여대 : 나의 브랜드 발전소 / 나의 브랜드 파트너, 덕성여자대학교 동덕여대 : 변화를 꿈꾼다면, 변화의 시작은 동덕과 함께 - 세상 앞에 한 발짝 더 / 그녀가 가는 곳이 길이 됩니다 서울여대 : 나를 깨우고, 사회를 깨우고, 미래를 깨우는 대학 한성대 : 다르다 그래서 멋지다 삼육대 :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육,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학 서경대 : 북경엔 북경대, 동경엔 동경대, 서울엔 서경대 오산대 : 서울에서 가깝다고 걸어오지 마세요 / 우리곁에 항상 가까운 대학! 오산대학 포항공대 : 100%를 위한 1%, 포항공대와 함께 한국 과학의 미래를
존나멋지다..근데..
너희 광운대꺼 알아? "꿇어라 광운이다"
★★★★★★★
1. 서울대: 명실공히 대한민국 본좌. 그동안 理科에서는 카포대, 文科에서는 연고대의 도전을 받으면서도 절대 권력을 유지한 지존. 이제 국내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고, 단지 외국대학들과 최후의 결전만을 앞두고 있다. 서울대 출신 議員과 長官의 숫자가 과반수를 넘고 있는 상황에서, 그 기득권 포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듯. 최고에 걸맞지 않은 낡고 무미건조한 캠퍼스는 옥의티로 지적된다.
2. 연세대: 90년대 중반만 해도 國立大 본좌는 서울대, 私立大 본좌는 연세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세가 드높았지만, 현재는 理科는 카포대에 밀린지 오래고 文科에서도 고려대의 거센 도전에 밀리는 모습이다. 고려대의 LG-POSCO 경영관에 자극받은 연세대는, 세계적 건축 거장 '알바로 시자'를 영입하여 최신식 경영관을 신축 중이다. 이웃인 서강대, 이대와 함께 트라이앵글을 형성, 신촌 大學文化를 주도하고 있으며, 2005년 5월 신축한 매머드급 세브란스 병원은 연세대의 간지를 더해주고 있다.
3. 고려대: 해병대, 호남 향우회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강의 인맥으로 평가 받음. 그동안 연세대에 밀리며 만년 私學 2等의 이미지를 풍겼으나, 고대=法大, 연대=經營 이미지를 깨고야 말겠다는 무서운 집념으로 몇 년 전부터 엄청나게 經營大를 띄웠으며, 거의 학교를 갈아 엎는 듯한 엄청난 투자로 국내 최고의 간지 캠퍼스를 만들며 대망의 세계 대학 200위권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인문계에서만 연세대를 따라잡았을 뿐, 아직 이공계와 의약학 계열은 연세대에 비해 더 분발이 필요하다.
4. 서강대: 서울대의 '鶴峴學派'와 쌍벽을 이루는 서강대의 '西江學派'는 선성장 후분배 정책을 주도하며, 1960-80년대 한국 經濟의 고도 성장을 이끌었다. 한 때 經營과 經濟, 新聞放送을 중심으로 이웃 대학인 연세대를 위협할 정도로 막강 위력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협소한 캠퍼스와 짧은 역사, 의대 및 예체능 계열의 부재로 끝내 본좌급 名門大 진입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최근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로스쿨 및 연구중심 대학으로의 전환 움직임은 서강대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5. 성균관대: 한 때 모재단의 부도로 정부의 국제대학원 선정에도 떨어지는 등 비참한 처지였지만 삼성의 인수로 부활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一等主義를 강조하는 삼성에 별다른 성과를 보여주지 못해 늘 戰戰兢兢 중이며, 최근 반도체학과 학생 모집의 대실패와 삼성의 친아들인 ICU의 등장에 크게 긴장하는 모습. 전통의 강호 성대法大 출신의 막강한 법조계 인맥이 강세이고, 성대醫大는 서울醫大와 맞먹는 극강 인풋을 자랑하나, 서울醫大와 연세醫大에 비해 전통과 인맥에서 아직은 열세이다.
6. 한양대: 한 때 이공계 파워를 바탕으로 三大私學을 외치며 호기를 부리던 때도 있었지만, 20세기 산업화 시대에서 21세기 정보화 시대로 진입하면서 자연스럽게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최근에는 카이스트와 포항공대, ICU 등 초일류 工科大學들의 부상으로 이공계 名門大가 되겠다는 포지셔닝에도 실패한 듯 보인다. 하지만 한양工大 출신들의 인맥과 맨 파워는 서울대 다음갈 정도로 막강하며, 그동안 착실히 쌓아온 설고연 다음가는 한양法大의 성과는 한양대의 로스쿨 유치에 밝은 희망을 주고 있다.
7. 중앙대: 演劇, 映畵, 放送 등의 예술 관련 분야로 일가를 세우며 발전했지만, 근래 실용학풍이 대세를 이루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도 최근 국악대학 육성에 의지를 보이며 예술 중심 대학을 선언한 국악인 출신 총장은 중대에 큰 부담이 되고 있으며, 가뜩이나 많은 중앙대의 민속학-아동복지-사회복지-문헌정보 등 비인기학과의 과잉 문제와 맞물려 몰락을 부채질 하고 있다. 간판인 신방과는 국내 최다 언론사 간부 배출의 자랑하며, 송도에 대규모 國際文化藝術 허브 조성 계획을 갖고 이다.
8. 경희대: 중앙대와 함께 인서울 中上位圈의 마지노선 대학이다. 공원과 같이 꾸며진 아름다운 하두리 캠퍼스와 韓醫-齒醫-醫學-藥學-韓藥-韓方으로 이어지는 보기 드문 의약학 라인은 경희대를 떠받치는 두 기둥이나, 이것만으로 名門大가 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매년 8-9위권의 司試合格率과 행정학과 기준 역대 4위의 行試合格者 배출을 자랑하는 行政名門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법조계와 정관계 인맥이 두텁기로 유명하며, 곧 있을 로스쿨 선정 여부가 경희대에게는 최후의 심판이 될 가능성이 크다.
9. 이화여대: 과거 연고대 다음가는 名門大로 불리우며 女子大學의 본좌임을 자처했던 이화여대는 이제는 단국대, 아주대, 외국어대와 함께 최근 십 년간 가장 쇠퇴한 대학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큰 쇠락을 겪었다. 그것은 여대로서의 한계성 때문으로, 여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자체가 이화여대에게 큰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司試, 行試, CPA 등등의 각종 國家考試에서 지금도 매년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으며, 현 國務總理를 비롯, 곳곳에 포진한 이대 동문파워의 위력은 가히 名不虛傳이라 할 만 하다.
10. 서울시립대: 과거 농업대학이 전신으로 1987년까지도 서울산업대로 불리우다, 綜合大學으로 승격이 되며 이름을 서울시립대로 바꾼 비교적 젊은 후발 주자다. 시립대의 간판인 稅務학과, 都市行政학과의 경우 상위 2% 이내의 막강한 인풋을 자랑하며, 이들 학과를 중심으로 매년 行試, CPA, 稅務士, 鑑評 등에서 우수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과거 변변치 못했던 수준 때문에 다소 부실한 사회적 인맥이 단점이며, 근래 쟁쟁한 사립대학들의 치열한 경쟁 속에 공립대학으로서의 성장의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11. 한국외국어대: 과거 外交官 士官學校라 불리우던 외대는 졸업생들이 서울대, 연고대 인맥에 밀려 아프리카와 중동, 남미를 떠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많았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연고대 떨어지고 외대가는 학생이 많았을 정도로 강세였으나, 해외여행이 자율화되고 어학연수가 보편화 되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어, 지금은 건동국단과 함께 五國大로 불리고 있는 실정이다. 간판인 英語학부는 지금도 상위 2.5-3%의 꾸준한 선방을 유지하고 있으며, 과거 극강 인풋의 英語학과 출신 동문파워는 위력적이다.
12. 부산대: 부산의 서울대로, 수도권을 제외한 地方의 綜合大學 중에서 최고의 본좌 학교이다. 이 때문에 로스쿨 및 연구중심대학 선정 등에서는 언제나 연고대와 함께 큰 수혜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극심한 인서울 선호현상으로 과거에 비해 점수가 많이 낮아지긴 하였으나, 아직도 司法試驗, CPA 등에서 꾸준히 10위 안에 랭크되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工大 출신 대기업 CEO 배출 전국 5위 안에 들 정도로 이공계도 강세이다.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의 성장과 함께 앞으로 지속적인 발전이 예상된다.
13. 인하대: 인하대는 인천-하와이 대학의 줄임말로, 하와이 출신이었던 이승만 大統領과 하와이 교포들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대한항공을 보유한 한진그룹이 재단으로 들어온 후 큰 발전을 이루었으며, 같은 한진 재단 하에 있는 항공대와 인하공전과는 兄弟 關係를 맺고 있다. 工大인맥의 경우 한양工大 다음갈 정도로 막강하며, 카포대 포함 전국 공대랭킹 10위 안에 드는 名門工大이다. 아태물류, 국제통상을 중심으로 文科도 뜨는 중이며, 탄탄한 한진그룹의 재원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발전이 예상된다.
14. 건국대: 건국햄과 건국우유, 동물병원의 튼튼한 자원을 바탕으로 축산학에서 동물학, 수의학으로 이어지는 국내 최고의 축산-수의 계열을 보유. 역대 政治人 배출 4위, 행정학과 기준 行政考試 7위, 4급 이상 公務員 출신학교 6위를 랭크하고 있는 막강한 法-政-行 라인업은 축산, 수의와 함께 건대의 자랑이다. 부동산학의 명문답게 최근에 학교 앞 야구장 부지를 거액에 매각하여, 그 자금을 학교발전에 투자하는 수완을 발휘. 지속적인 건국대의 허벌난 투자는 장래 五國大의 수장 자리를 예고하는 듯 하다.
15. 경북대: 부산대와 쌍벽을 이루는 지방 종합대학교의 본좌급 학교. 과거 부산대와 함께 서울 중상위권 대학들과 경쟁하며 盛世를 누렸으나, 수험생들의 극심한 인서울 선호현상으로 하락의 길을 걷고 있다. 매년 서울의 중앙대, 경희대와 司法試驗 합격을 다툴 정도로 法大가 유명하며, 아직도 대기업 등에서의 경북대 출신에 대한 선호도는 상당하다. 법조계와 정관계, 재계 등의 경북대 인맥은 훌륭하며, 앞으로 정부의 地方國立大 육성정책과 맞물려 다시 한번 재도약할 잠재력과 가능성이 충분한 학교이다.
16. 동국대: 최근 창학 100주년을 맞이했으나 사회의 지속적인 무관심으로 무언가 새로운 전기가 필요할 듯한 佛敎 大學. 우리나라 불교계를 이끌어 가는 대학으로 또 다른 불교대학인 중앙승가대와는 라이벌 관계지만, 동국대 불교철학과 도쿄대 인도철학은 우리나라 불교계 최고의 엘리트 코스로 평가 받는다. 警察行政學科와 演劇映畵科가 간판이나 특별한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최근 신축한 일산 불교병원도 건대병원에 비해 잘못된 입지 선정으로 큰 스포트라이트를 못 받고 있는 실정이다.
17. 아주대: 아주대는 프랑스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한불기술대학이 모체로, 연세대 출신 김우중의 대우그룹이 아주대를 인수한 후 연세대와 함께 큰 성장을 이루었던 대표적인 대학. 그러나 대우그룹의 갑작스러운 부도와 해체 후 연세대와는 달리 大學評價에서도 대폭락을 하는 나락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한양工大와 더불어 그동안 쌓아놓은 아주工大의 브랜드 덕분에 최악의 사태는 모면하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이공계의 쇠퇴로 앞으로의 뚜렷한 비젼은 발견못하고 있다.
18. 홍익대: 홍익대는 과거 서울대 美術界와 대립하며 서울대에 버금가는 美術大學으로 유명했으나, 최근에는 실용 디자인 분야에서의 라이벌 대학인 국민대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建築 등 미술 연계 전공이 발전했고 신촌에 입지한 것이 가장 큰 장점으로, 개방적이고 잘 노는 이미지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학교 이미지에 비해 낙후되고 협소한 캠퍼스가 큰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홍대 정문인 멀티미디어관이 완성되면 외관은 좀 나아지겠지만 기타 건물이 너무 떨어지는게 현실.
19. 국민대: 과거 쌍용그룹 재단의 후원을 받으며 크게 성장하였다. 쌍용그룹의 몰락 후 아주대처럼 몰락을 예상했으나 그동안 쌓아놓은 디자인 및 藝術系列을 바탕으로 서울대, 홍익대와 함께 美術界 빅3을 형성하고 오히려 다른 학교보다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캠퍼스 면에서도 큰 변혁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다른 五國大 그룹과 비교해서 지방 캠퍼스가 없고, 건국獸醫, 동국韓醫, 단국齒醫처럼 의약학 계열이 없는 것이 성장의 한계로 보인다. 장래 국민대에 경전철이 뚫린다면 새로운 발전의 전기가 될 수도.
20. 숙명여대: 과거 梨花女大와 함께 영부인 배출 순위에서도 경쟁 관계를 이루며 크게 발전했지만 최근 전반적인 여대의 하락으로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투자로 말미암아 장래 이화여대와 함께 여대 부문에서는 부동의 라이벌 관계로 굳어져, 이변이 없는 한 갑작스러운 몰락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梨花女大가 의외로 안티 세력이 많은 반면에 淑明女大는 참하고 조신한 이미지로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창학 100년을 맞으며 名門女大의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
21. 숭실대: 189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W.M.Baird) 박사에 의해 설립된 崇實學堂이 기원으로 우리민족 最初의 大學이다. 내실있는 학문을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문과에서는 경영과 사회복지가 강세이다. 특히 숭실대 社會福祉학과는 교수 및 평판도 부문에서 서울대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유명하다. 숭실대의 간판은 컴퓨터공학 분야로 1995년 대한민국 최초로 컴퓨터학부를 창설하였으며, 이듬해 국내 최초로 IT대학을 설립하였다. 어딜 가든지 숭실대컴공 하면 알아줄 정도로 인지도가 있다.
22. 전남대: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동에 위치한 전남대학교는 광주-전라 지역에서 부동의 본좌급 국립대이며 부산대, 경북대와 함께 지방 종합대 빅3으로 불리우는 地方名門大이다. 매년 10위권의 司試合格者를 배출하는 法大가 강세이며, 서울의 서강대, 건국대, 시립대 등과 司試合格 순위를 다투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높은 司試合格率을 바탕으로 법조계와 정계에 많은 동문들이 진출해 있으며, 지역 안배를 고려한 로스쿨 선정시 광주-전라를 대표하는 전남대의 로스쿨 유치 가능성은 밝다고 볼 수 있다.
23. 단국대: 한 때는 동국, 건국과 함께 三國大를 형성하며 치의예 및 특수교육, 연극영화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나 김영삼 정부 때 미운털이 박혀 부도의 위기를 맞아, 지금은 外國語大, 建國大, 東國大, 國民大 등과 五國大를 형성하며 겨우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역대 長, 次官 배출순위가 9위에 이르고, 과거 잘나가던 시절의 인맥들이 사회곳곳에 포진해있어 갑작스럽게 몰락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2007년에 용인 죽전으로 캠퍼스가 이전할 계획이나, 이전한다 해도 큰 변화는 없을 듯 하다.
24. 세종대: 1940년 서울여자학원의 전신인 경성인문학원을 모태로 설립되었으며, 1979년 男女共學체제로 전환하면서 현재의 世宗大學校로 교명이 개편되었다. 경희대와 쌍벽을 이루는 호텔경영으로 유명하며, 호텔경영-관광경영-외식경영의 세종대 호경라인은 리츠칼튼 CEO, 바비엥 레지던스 사장 등 이 분야 굵직한 著名 人士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호경과 함께 체육-무용-음악-영화예술-만화애니매이션-회화-패션디자인-산업디자인 등으로 이어지는 막강한 예체능 라인은 세종대의 얼굴이자 상징이다.
여러분이 목표하시는 대학이 여기 있나요? 그렇다면 모두들 화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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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5.18에 사전적의미~
5월달이 지났는데 짱공유 "정경사"에서 5.18 관련 글이 올라와서 살짝 정리해봅니다~
사전적의미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내용을 꼭 필독 하시길~
사전적의미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혹은 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돼,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1] 당시 광주 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 파괴∙민주화 역행 조치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진압 훈련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과격진압했다. 2011년 5월에는 5·18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ac)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었다.
개요
1979년 10.26 사태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 같은 해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1980년 초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k-공작 계획을 실행하며 언론을 조종·통제했다. 같은 해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돼 국내의 정보 기관을 모두 장악하며 집권을 준비했다. 1980년 5월부터 정치 참여 의도를 드러내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전두환, 신현확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같은 달 국회에서는 계엄 해제 논의, 개헌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정국 운영에 방해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계엄 포고령 10호를 선포해 정치활동 금지령∙휴교령∙언론 보도검열 강화 등의 조치를 내렸다.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의 재야, 야당 인사를 감금하고 군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다. 5월 18일 아침부터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김대중∙김영삼 석방과 신현확∙전두환 퇴진을 외치면서 시위를 했다. 전두환∙노태우 등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는 부마항쟁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 공수부대 등의 계엄군을 동원해 진압했다. 신군부는 1980년 초부터 전 군에 충정훈련을 실시했고, 5월 초부터 군을 사전 이동 배치하고 군대를 투입해 신군부에 반발하는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마쳤다.
5월 18일 16시 이후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운동권과 무관한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은 5월 21일 13시경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후 철수했다. 이 날 저녁 광주광역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자나 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발생했다. 5월 27일 0시를 기해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했으며, 무력으로 도청을 점령했다.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호남 전역에서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그 결과 전두환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은 물론이고, 민주정의당과 연관성이 있는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도 여전히 높다. 당시 신군부는 언론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관제보도를 의무화하도록 해 언론을 장악하고 조종했는데, 미국대사과 주한미군 사령관 등의 관련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 언론이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승인했다는 왜곡 보도를 쏟아내자 학생운동권 내 미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이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비롯,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발생한 각종 민주화 혹은 반미 집회와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신군부 인사를 주축으로 한 제5공화국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 또는 김대중의 사주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왜곡했다. 1988년 제5공화국 비리 청산 분위기와 맞물려 열린 국회 광주진상특위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면서 재평가가 가시화됐으며,[3][4] 1996년 검찰의 수사에 의해 신군부 인사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 의도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책임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1997년 대법원이 5·18, 12·12 진압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됐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피고인(전두환 등)의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대법원은 전두환·정호용·이희성·황영시·주영복 등을 5.18 민주화운동 진압 책임자로 판시했다.[5]
대한민국의 신군부 및 일부 반공주의 우익 세력 등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혹은 김대중의 사주로 일어난 폭동 내지는 소요사태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6], 일부 조선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발생한 대부분의 유혈사태가 단순한 계엄군-시민간의 충돌이 아니라 북조선의 조선인민군 특수부대의 공작으로 발생한 계획적인 테러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설득력이 매우 낮다. 5·18, 광주항쟁(光州抗爭), 광주학살(光州虐殺), 광주사태(光州事態), 광주민중봉기(光州民衆蜂起), 광주시민항쟁(光州市民抗爭), 광주인민봉기(光州人民蜂起) 등의 다른 칭호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편집] 명칭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또는 ‘폭동’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됐다.[7][8] 이는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신군부의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됐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 인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8년 제6공화국이 등장하면서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그렇게 불러 처음 나왔고,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화 됐다. 한편, 신군부의 군사독재와 폭력에 맞선 민중항쟁을 광주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 항쟁’이란 명칭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을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사용됐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다. 기타 중립적인 ‘광주 항쟁’, ‘광주 민중 항쟁’,‘광주 의거’, ’광주 자유 민주 의거’, ’광주 민주 의거’, ’광주 자유 의거’,‘광주 인민 항쟁’ ,‘‘광주 학살’, ‘광주 학살사건’,‘5월 항쟁’,‘5·18 민중항쟁’,‘광주 시민 항쟁',‘광주 민중 항쟁’ ,‘광주 민중 봉기’ ’광주 양민 학살사건’,‘5월 민중 항쟁’,‘5.18 민중 항쟁’ 등의 다른 명칭도 존재한다. 한편 일부 반공주의 보수 세력은 광주민주화운동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광주사태’, ‘광주사건’, ‘광주반란’, ‘광주소요사태’, ‘광주무장폭동’,‘광주폭동’ 등으로도 부른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광주봉기’, ‘광주인민봉기’, '영웅적 광주인민봉기', '광주폭동' 등으로 평가한다.[9][10][11][12]
[편집] 발생 배경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이후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민주적인 헌법으로 되돌아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고, 11월 7일 최규하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해제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됐던 개헌 논의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육군 참모총장)를 체포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0년 2월 신군부 세력은 k-공작계획을 실행해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가고 있었다.
1980년 5월 초순경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13]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해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저항를 탄압하면서 신군부가 정국을 주도하고, 국회 폐쇄와 정치인 체포로 신군부의 안정적인 정국 장악을 담보한다는 것이 시국수습방안 기획 의도였다.
중앙정보부는 일본 내각조사실의 첩보를 토대로 5월 10일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5월 11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북괴남침설’과 같은 첩보는 가치가 없다고 결론내린 상황이였다. 5월 13일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과 미국 국무부의 한 대변인는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해 흘린 정보라고 평가했다.[14]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고 밝혀 신군부가 집권을 정당화 하기 위해 악용했던 ‘북괴남침설’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15]
한편 같은해 5월 중순부터 정부와 국회에서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5월 12일 신민당과 공화당 양당 총무들은 개헌안 접수하고, 비상계엄 해제 등의 정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5월 20일 10시 임시국회의 소집을 공고했다.[16] 같은날 신현확 총리는 국회와 협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개헌 일정을 앞당긴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17]
1980년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의 정치 참여를 반대하기 위해, 지상 서울역 주변에서 학생들의 자발적인 집회가 있었으나 5월 15일 경찰의 진압 소식이 전달되면서 스스로 해산했다. 5월 17일 24시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려 18일 1시 부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같은 날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해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됐고, 6백여 명의 학생·교수·재야인사 등이 체포됐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무장헌병들에 의해 가택 연금됐다. 신군부가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내린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정치 활동 금지·휴교령 등의 민주주의 역행 조치에 항의해, 5월 18일 오전 전남대 학생들은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했고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폭행으로 진압했다. 과격한 부대인 공수부대의 투입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정동의 모략’이란 소주제에서 이미 1980년 1월초 서울 정동 미대사관에서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과 미8군사령관 등이 모여 5·18을 ‘난동’과 ‘소요’로 유발시키려는 음모를 꾸민 뒤 지도인물로 김대중(金大中)씨를 내정했다고 음모 의혹을 제기했다.[18]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과 군부독재자들의 책동에 격분해 들고일어났다.[19] 하지만 1996년 있었던 검찰 수사에 의해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와 시위 진압 계획이 밝혀진 것과 달리[13], 김대중과 미국이 학살의 배후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에 실질적인 증거는 없다.
[편집] 과격진압의 배경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이루어질 조치에 대한 반대 집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전두환(보안사령관)·황영시(육군참모차장)·정호용(특전사령관) 등 신군부 핵심세력은 진압병력 투입 및 강경진압 방침을 결정했다. 시국수습방안은 계엄 확대와 동시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과감한 방법의 타격으로 시위대를 진압한다는 지침이 즉각 실행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20]
1980년 3월 4일 ~ 3월 6일 수경사에서는 '제1차 충정회의'에서 군의 투입을 요하는 사태 발생시 강경한 응징조치가 필요하다고 내려졌으며, 이미 80년 초에 학생 시위가 가열될 것을 대비해 전국 군 부대에 충정훈련이 강도높게 실시됐다. 5월 10일부터 2군사령부에서는 광주·대전 등에 제7공수여단을 배치하는 방안을 의논했다. 5월 14일부터 제31사단은 광주 지역의 주요 보안 목표를 점거했기 시작했으며, 5월 15일 제7공수여단은 광주·대전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광주 시내에서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등 체포 위주로 진압하라는 상부의 지시는 공수부대원들의 과격진압을 부채질했다. 광주에서 시위가 계속되자 계엄부사령관인 육군 참모차장 황영시는 강력하게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5월 18시 23:00부로 2군사령관의 강조사항이 각 공수부대에 지시됐다. 이 지시는 “공수부대 시내 출동, 융통성 있게 운영”하며, “전 가용 작전부대 투입”하여 “주모자 체포”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같은 날 내려진 지시는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하며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토록 지시했다. 이같은 지침은 현장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에게 더욱 더 과격한 진압에 나서게 했다.
계엄사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김대중 연행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불순분자’나 ‘고첩’들의 책동으로 몰아갔다. 5. 21.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에서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다”고 규정했다. 이렇듯 사실을 왜곡한 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시위를 규정하는 상층부의 인식과 지침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요인들 때문에 현장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 또는 시위대를 ‘적’으로 규정했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결과적으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과격진압을 하는 배경이 됐다. [21]
[편집] 전개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던 전남도청 별관
[편집] 전체 개요
[편집] 사건 초기
[편집] 5.17 조치 이전 계엄반대시위
1980년 5월 15일에는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했다.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은 집권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반대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다. 이에 따라 5월 17일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다. 새벽 0시경 보안사령부는 야당 인사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체포해 감금했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국회를 점령해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자정 이후 전국으로 비상계엄령이 확대됐고 광주에 제7공수부대 33대대, 35대대 병력이 도착했다. 제7공수부대는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을 점령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각기 조를 편성해 광주 시내 각 학교의 입구를 지키고 검문검속했다.[22] 계엄포고령 제10호가 선포돼 대학휴교령∙보도검열강화∙정치활동금지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13]
[편집] 대학생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8일 당일 아침 9시 이후, 텔레비젼 방송과 라디오, 신문을 통해 비상계엄 전국확대 소식을 보도했다. 18일 오전전남대학교 학생 100여 명은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원에 항의했다. 이로 인해 대학생과 공수부대원 간 충돌 발생했다. 학생들은 구타당했고 공수부대의 구타에 자극받은 전남대학생 300여명은 교문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투석했고, 일부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했다. 전남대학생 300여명은 가톨릭 회관 집결해 시위했고, 이에 경찰은 최루탄 발사하며 해산했다.
5월 18일 오후 4시 제7공수여단이 시내에 투입됐다.[23] 제7공수여단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검문검색과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24]
이날 희생된 청각장애인 김경철씨는 공수부대에 의한 대표적인 과격진압 사례였다. 그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25]
[편집] 전개 과정
[편집] 광주 시민의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과 고등학생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학생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폭증했고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했다.[25] 일부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 직접 항의를 가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20일 24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22]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다.[26]
[편집] 계엄군의 발포 및 광주 시민 학살
5월 21일 오전 전남도청과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21일 오전 시민 대표는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됐다. 전남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확*로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 철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1일 정오 12시경 전남대 앞·21일 오후 1시경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도청 집단 발포 이후,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수협·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가했고 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25] 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정부는 광주 지역의 시위를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자유 민주화 시위대는 광주mbc 방송국를 방화했다.
[편집] 광주 시민의 항쟁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이 결성됐다. 시민들은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세아자동차에서 차량을 탈취했다. 일부 시민군은 26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됐다.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다. 21일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21일 저녁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전달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오후 7시 보안사에서 전달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이 발표했다.
[편집] 광주외곽봉쇄작전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5월 21일 21시 30분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을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27]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송암동 학살을 비롯한 시민 살상 행위가 광주 외곽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편집] 광주 시민의 자치
22일 이후 광주는 군인들에 의해 완전 포위·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됐고 전국 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외신기자들에 의하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치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시민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준다. 다함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광주의 상점가, 금융기관, 백화점에서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었다.[28]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던 이 기간에 광주 시민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켜나갔으며 대치 상태는 26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시민 자치 기간에도 광주 시민의 협력으로 행정기관의 역할이 상당부분 유지됐다. 당시 전라남도부지사 정시채를 비롯한 공무원도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했다. 공직자들은 5.18 당시 양곡 방출이나 부상자 처리 등의 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29][30] 이 기간은 ‘광주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부 지식인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프랑스 시민들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편집] 평화집회
해방광주로 불리는 동안 일부 시민들은 스스로 계엄사에 무기 자진반납을 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하며 계속 무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수차례에 걸친 내부 대책회의와 협상 끝에 계속 무장을 해야 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평화적 시위는 계속됐고 〈애국가〉와 〈울밑에선 봉선화〉 등을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광주 시민은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이 구호는 광주 시민들에 의해 많이 불렀고,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31]
[편집] 광주 재진입 작전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시작됐다. 5월 27일 새벽 2시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발을 사격해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다. 도청 내 일부 시민군은 자진 투항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쟁 의견으로 나뉘어졌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채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시민군 생존자를 체포·연행했고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편집] 미국 측의 반응
대한민국 측은 5월 18일 0시에 시작된 비상계엄 확대 선포 2시간 전에 갑작스럽게 이를 미국에 통보했다. 미국은 한국군 당국이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대학과 국회를 폐쇄하려는 의도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 5월 18일 오전 미국은 서울과 워싱턴에서 계엄령 실시에 대하여 강력하고 맹렬하게 항의했다.[32]
계엄사령부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동원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광주에 투입될 당시나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광주에 투입되었던 한국군의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었던 적이 없다. 20사단의 경우, 10·26 사건에 뒤따를 혼란을 대비한다는 대한민국 측 요청에 따라, 10월 27일 20사단 포병대와 예하 3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 넘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특전사 부대가 광주에 배치된 것을 사전에 몰랐으며, 작전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32]
미국 측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초기에 방관적이었다. 5월 18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주미 대사관으로 부터 미국 국무부로 타전된 전문에서는 광주에 대한 언급이 없다. 5월 20일까지만 해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미국 측의 인식은 막연한 소문에 불과했고, 공수부대의 광주 과잉진압 문제는 서울에서 일어났던 신군부에 의한 정치탄압 사건에 비해 우선 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미국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건 5월 21일 부터 였다. 이 때는 이미 5.18 민주화운동의 비극의 씨앗이 된, 시위 군중에 대한 강압적인 진압이 이뤄진 후 특전사 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시점이었다. 미국은 이후 광주사태에 대한 평가에서 첫 무력 진압이 이루어진 18일이나 27일의 전면 재진압보다는 5월 21일을 사태의 정점으로 파악하고 있다.[33]
5월 21일 이후 미국은 신군부와 신군부에 반대하는 대한민국 국민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입장 표명의 압력을 받았는데,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에 성명서에 포함시킬 항목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우리는 광주에서의 시민 분쟁(civil strife)에 경악하고 있음(alarmed)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극도의 자제심을 발휘,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를 추진할 것을 촉구함
글라이스틴의 제안대로 이튿날인 5월 22일 오전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글라이스틴의 문안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성명을 발표했으나 언론을 통제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신군부는 미국의 이런 입장이 일반에게 전달되는 길을 봉쇄해 버렸다. 글라이스틴과 위컴의 오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군부 측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위컴은 이 일을 두고두고 비난하게 된다.[34]
5월 22일 오후 미국에서 열린 정책 검토 위원회(policy review committee)는 “지금까지 우리가 취해온 행동 이상의 일은 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동의. 우리는 온건한 방법을 선택할 것을 조언했으나, 대한민국 국민이 질서 회복의 필요를 느낄 경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았음”이라는 광주 상황에 대한 방침을 정했다.[35]
5월 23일 글라이스틴과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와 첫 회동을 가졌다. 글라이스틴은 대한민국 측에 5월 17일 계엄령 확대 정책이 미국에 충격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 시위를 확고하게 진압하는 것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정치 탄압을 수반한 것은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결국 광주에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는 데 일조한 것이 틀림없다는 견해를 보였다.[36]
[편집] 날짜별 상세 일지
5월 16일 금요일 이전
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전국 대학생 10~20만 명이 모여 지상 서울역 광장 주변에서 집회.
5월 15일 대학생단체 간부들에 의해 대한민국 경찰의 출동 소식을 사전에 접하고 서서히 해산.
5월 17일 토요일
21시 40분: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23시 00분: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 검속 실시
24시 00분: 5월 17일 0시부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신군부 계엄포고 제10호를 통해 정치활동 금지, 언론검열 강화, 대학교 휴교령 선포. 광주 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7 공수여단 33대대, 35대대 등). 전주 전북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도 잡아들여 폭행. 이 과정에서 대학생 사망자가 1명 발생했다.
전북대 농학과 2년인 이세종(당시 21세)은 5월 17일 12시께 계엄군에 쫓기다 전북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추락사).[37]
새벽 1~2시 경: 보안사령부(사령관 전두환)가 김대중 등 신민당 지도자와 김종필 등 공화당 지도자를 체포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점령. 국회 기능 마비.
5월 18일 일요일
새벽: 계엄군의 무차별 구타와 학살을 일부 시민들이 자진해서 방송으로 알림.
새벽6~8시 경: 계엄군의 구타와 학살에 대항해 학생들이 궐기
오전 08시: 신군부 등이 비상국무회의와 국보위 회의를 개최, 학생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계엄군 투입을 결정
오전 09시: 광주시내에 계엄군 투입 그러나 지연도착
09시 00분~30분: 계엄군의 지연 도착으로 3,7,11공수여단 병력 투입, 전남대학교 교문에 배치
09시 40분: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당함.
10시 00분: 전남대학교 주둔 계엄군을 상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임
10시 15분: 계엄군(공수부대원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항의 시위 진압.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첫 번째 부상자 발생)
10시 20분: 전남대학교 교문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원과 외부에서 학교로 출입하던 대학생 간 충돌 발생. 공수부대의 대학생 구타에 자극받은 대학생들 800여 명이 교문에 배치된 7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돌을 투석, 일부 학생들이 교문을 벗어나 광주 금남로로 이동.
오전 11시 00분: 전남대 300여 명 가톨릭 회관 집결,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 시킴
정오 12시 :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옴.
12시 : 광주 시내에 계엄군 도착. 교문 밖을 쏟아져나온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무장충돌, 지나가는 시민 중 일부를 대학생으로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잡아다 구타, 가혹행위로 확대.
오후 : 학생 구타와 시민 구타에 분노한 대학생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함. 계엄군과 공수부대는 오전에 집단 투석당한 병사들로 자극돼 흥분. 대규모 폭행, 구타, 가혹행위 발생.
15시 40분: 금남로 유동 삼거리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 진압과정에서 시위대로 추정되는 시민들을 잡아다가 구타 및 현장 체포함.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언어 장애인인 김경철 씨 계엄군에게 전신 구타당함.
19시 02분: 계엄사령부, 통행금지령 확대 국내외 방송을 통해 통금 시간을 저녁 9시로 당긴다고 발표.
20시: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무차별 구타에 불안, 흥분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학생들에게 동조.
21시: 계엄사령부 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방송과 라디오를 통해 해산 경고문 발표.
5월 19일 월요일
오전03시 00분: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김경철 씨 병원에서 사망 - 두 번째의 희생자).
09시 30분: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10시 00분: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1공수여단 위력시위 이후 착검한 상태로 진입, 대검으로 인한 자상자 발생. 11공수여단 약 천여 명이 강경 진압을 강행했고, 3~4명이 한 조가 돼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
오후: 시민군이 본진을 갖추기 시작. 쇠파이프와 각목 등으로 무장했으나 무장력이 현저히 낮았음
오후14시 40분: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돼 무리한 진압 작전 전개
15시 00분: 시내 기관장과 유지들, 회의를 하고 시위 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
16시 30분: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 광주 적십자 병원에서 5·18 최초 희생자 청각장애인 김경철 사망.
저녁 20시 00분: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수만 명이 “전두환 타도”와 “신군부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 “신현확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침.
20시: 학생들의 처참한 몰골을 동정한 시민들이 시위에 동참, 2백 대의 택시가 전남도청 앞에 결집,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 시위가 이어짐.
22시: 도청 주변을 가로막은 택시들과 3,7,11공수부대 및 계엄군이 대치, 실랑이를 벌임.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동참
5월 20일 화요일
08시 00분: 고등학생들의 참여에 자극받은 정부는 문교부를 통해 광주 시내 및 전라남도 광산군, 나주군 일대 고등학교에 휴교 조치 하달.
10시 20분: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끌려나와 마구잡이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에 공방전 계속.
18시 4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차량 경적 시위.
20시 0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 및 공수부대원의 진입을 가로막음.
20시 10분: 시위대, 도청으로 서서히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택시와 차량에 가로막힌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
20시 00분: 3공수, 11공수 여단장 실탄 분배 지시 (3공수여단장 실탄 장착 지시, 11공수의 경우 각 각 61대대,62대대가 1000여발 분배)
20시 00분: 실탄분배 과정에서 대검을 사용.
21시 00분: 택시 200여 대와 버스들은 진입로를 차단, 공수부대 및 경찰과 충돌. 일부는 우회해서 감.
21시 05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해 경찰 4명 사망
21시 50분: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mbc 방화
23시 00분: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 사망. 시민 수십 명 부상.
5월 21일 수요일 (이날부터 광주해방구, 해방광주)
00시 35분: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광주역에서 철수하던 계엄군, 대검과 곤봉 등으로 시위대 2명 살해. 계엄군 측 부상자 5명으로 보고.
02시 18분: 시외전화 두절
04시 00분: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
04시 30분: 광주kbs 건물 방화
08시 00분: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진압 명령을 받고 투입된 20사단 병력과 충돌
10시 15분: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함.
11시 10분: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
12시 10분: 전남대 진출을 시도한 시위대가 전남대 앞에 배치된 공수부대원들의 저지에 밀려 신안동 굴다리까지 1km 후퇴. 공수부대의 진압 도중 시민 4명 사망
12시 59분: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13시 00분: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됨.
13시 20분: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이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에 올라가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시작
14시 15분: 도지사, 경찰 헬기에서 시위 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
14시 35분: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 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14시 40분: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15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16시 00분: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16시 43분: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m2 중기관총 2대 설치
17시 30분: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와 광주교도소로 철수
5월 22일 목요일
광주 시내가 계엄군에 의해 고립됨
09시 00분: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10시 30분: 군용 헬기 공중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11시 25분: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12시 00분: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13시 30분: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 항의 수습안 전달
15시 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17시 18분: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 결과 보고
17시 40분: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18시 00분: 20사단이 통합병원 진입로 확보를 위해 1km 전진하며 사격, 작전 중 지역 주민 8명 사망
19시 00분: 동양방송 라디오(현 kbs 제3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기상도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중간조사 결과 뉴스를 보도했다.
21시 30분: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08시 00분: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10시 00분: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10시 15분: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해 총기 회수 작업 시작
11시 45분: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13시 00분: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15시 00분: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
19시 40분: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13시 20분: 11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4명 사망.
14시 20분: 송암동에서 11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 9명 사망 40여명 부상, 오인 총격전 직후 공수부대원이 주변 민가를 수색해 마을 청년 4명 처형.
14시 50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11시 00분: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메시지와 함께 광주민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 원 전달
15시 00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21시 10분: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 발생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 문제 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05시 20분: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08시 00분: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 감행
10시 00분: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4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15시 00분: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상황 브리핑
19시 10분: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처
24시 00분: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월 27일 화요일
02시 00분: 계엄군의 광주 진입
03시 00분: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04시 00분: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0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
05시: 시민군 생존자들 자진해서 자수. 자수 과정에서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 3명을 시민군이 자진해서 체포해 계엄군과 경찰에게 넘겼음.
05시 10분: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
06시 00분: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07시 00분: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08시 50분: 시내전화 통화 재개
[편집] 피해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29주년을 맞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38][39] 검찰은 1994년 사상자 수를 발표했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5.18의 핵심적인 진상은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경찰 및 군인 중 사망자는 경찰 4명, 군인 22명으로, 이들은 1980년 6월 21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안장됐다. (광주광역시가 발표한 통계는 유족이 보상금을 수령한 사망자 수이다. 확실하게 신원이 밝혀졌지만, 보상금을 수령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165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와 부상자회, 5.18기념재단 등 4개 단체가 공식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상이후 사망추정자는 376명 등이다.[40]
1980년대 중반에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과 무차별적인 연행으로 인해 사망자가 2천여 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5.18 종료 직후에 정부에 신고된 사망추정자, 실종추정자는 2천여 명에 달했고, 일부 학생운동권이 이를 인용한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1985년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1980년 당시 사망자 및 실종자로 신고된 인원은 2천 명이 맞다면서, 그중에는 체포 구금된 자, 사망자, 부상입원자, 피신자도 포함돼 있어, 이들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 것이라고 답했다.[41]
5.18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 연구진은 5.18 유공자 중 부상자와 구속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성폭행 피해자나 난민, 고문피해자 등 인권 유린 피해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까닭에 상당수가 ptsd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진행한 오수성 전남대 교수는 “5.18 체험자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당시 충격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재경험하면서 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중독을 함께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42] 또한 이들은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다. 2007년 8월 기준, 5.18 피해자로서 사망한 376명 가운데 39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5.18 피해자의 자살률은 10.4%로 일반인의 약 500배다.[43]
[편집] 연행자 고문 피해
한국인권의료복지센터 부설 ‘고문 정치폭력 피해자를 돕는 모임’은 1980년 5.18 당시 연행 또는 구금됐던 피해자가 1인당 평균 9.5회의 고문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중 물고문, 매달기, 구타, 비생리적 자세 강요, 강제 급식, 밥 굶기기, 의료기회 박탈 등 신체적 고문이 62%를 차지했다. 수면박탈, 복종강요, 지각박탈(암실 가두기) 등 심리적 고문은 38%를 차지했다.[44]
5.18 당시 계엄군에 의해 폭행당하고 트럭에 실려 광주교도소∙상무대에 연행된 광주 시민은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계엄군은“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날로 찍는 ‘닭발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송곳으로 맨살 후벼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고문들을 자행했다.[45]
연행자들은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이미 짜인 각본에 따라 내란음모 선동 등의 죄명으로 수사를 받았다. 특히 신군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상 연관이 없는 김대중과 관련한 내란음모 조작이라는 각본 수사가 이루어졌다. 김대중으로부터 폭동자금을 얼마 받았느냐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잔인한 고문, 구타, 심지어 같은 동료끼리 때리게 하는 비인격적 모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폭거를 자행했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석방이 된 후에도 오랜 시일동안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했다. 이들은 풀려난 후에도 엄청난 공포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46]
정동년 5.18 30주년 기념행사위원장∙고 홍남순 변호사∙고 조아라 광주 ywca 회장∙고 명노근 전남대 교수∙송기숙 전 전남대교수 등의 민주인사들은 상무대 지하 조사실에서 보안대 조사관들의 조사를 받았다. 정동년은 “보안대 조사관들이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를 하면서 무릎 사이에 곤봉을 끼우고 밟고 군홧발로 짓이기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또한 그는 “경찰이나 중앙정보부처럼 기술적인 고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보안대 조사관들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사실을 조작하기 위해 무지막지한 고문을 했다”며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말했다.[47]
[편집] 영향과 평가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정권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1987년 6월 민주항쟁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미국을 한국전쟁 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당시 운동권을 중심으로 해 재고됐다.
1980년 7월 4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다. 서울의 학생시위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조종했다는 명목으로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이는 후에 신군부가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대중 등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미국의 강력한 사면 요청에 따라 감형됐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과 폭도들의 반란으로 조작했다. 하지만 1988년 5공 청문회를 거치고 1995년 12월 21일 국회에서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해, 계엄군의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피해 배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 12. 21.)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 12. 17.)이 제정[48]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비(非)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자유 민주화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또한, 계엄군이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서훈이 취소됐으며 그 자격도 박탈됐다. 또한, 이 일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는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형과 2천억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다.[48]
광주항쟁은 이후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발생한 각종 반미시위 및 반미주의 확산에도 일부 기여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지역 대학생들에 의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약칭 부미방 사건)에도 영향을 미쳤다.[49][50]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구호 중에는 “민주주의를 원하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라는 조항이 제1항 서두에 삽입돼 있다.[49][50] 이후 미국의 광주학살 책임과 전두환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대학생 및 고등학생, 일반 시민들에 의한 반미 시위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지속됐다. 강원대생 성조기 공개 소각사건(1982년 4월), 광주미문화원 2차 방화사건(1982년 11월),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사건(1985년),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사건(1983년 9월), 부산 미국문화원 투석사건(1985년 4월) 등의 원인이 됐다.
2000년 5월 15일에는 미국의 광주학살 을 규탄하는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 등 서울의 여러 대학교 학생 100여 명이 오전 11시경부터 서울 미국 대사관 앞으로 몰려가 항의 집회를 벌렸다.[51] 그들은 미국이 2000년 6월에 열리는 남북최고위급회담에 간섭하고 있으며, 한국전쟁과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때 주민들을 학살했다고 비난하는 프랑카드를 흔들면서 미국 대사관에 기습을 시도, 반미구호를 외쳤다.[51]
[편집] 의의 및 교훈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과 민중의 의지를 대내외에 드러내었고 반민주, 군사독재의 야만성을 세계에 폭로함으로써 군사독재체제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으며,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항쟁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으므로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가열찬 투쟁이 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 저항과 연대로 이어질 때 비로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를 알게 해 주어 통일운동의 계기가 됐다. 미국은 해방 후 줄곧 사실상의 군사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여실히 입증됨으로써, 미국이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팽배해지면서 처음으로 반미 운동이 싹트게 됐고, 자주·통일운동이라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지평이 활짝 열리게 되고, 이후 대한민국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성을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52]
광주 민주화 운동은 다른 국가의 민주화운동에도 영향을 끼쳣다. 일본의 마쓰나가 세이타로 요미우리신문 홍콩 특파원은 중국의 천안문 민주화 운동과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퇴진의 배경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다고 평가하였다.[53]
[편집] 사건 당시 언론에 의한 왜곡
신군부는 보안사를 중심으로 ‘언론반’을 구성해 계엄사령부 보도처의 신문·방송·라디오·잡지 등 모든 매체에 대한 보도검열해 100만 건 이상을 조종 감독했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으로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언론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와 함께 보안사에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표하면서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조치를 내렸고 기자협회 간부 연행 했다. 또한 관제 보도를 의무화하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동아일보, 동아방송, 중앙일보 등은 5월 20일에 경향신문, 문화방송, 합동통신 등의 양심적 언론인들은 사실 보도를 요청했다. 5월 21일에 조선일보는 5월 22일에 5.18 사실 보도, 보도 검열 전면 철폐를 요구하면서 제작 거부를 시작했다.[54] 하지만 신군부는 철저하게 무시했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에 따라 ‘광주소요사태의 조속한 진정과 질서회복 유지를 위해 중진언론인을 초청, 현지실태를 취재토록 유도하고 국민계도를 촉구토록 유도’한다는 명분과 목적 아래,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회부 기자 32명, 국방부 출입기자 17명 등 합계 49명을 2처 2과장 중령 이용린이 인솔해 1980년 5월 24일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6시 40분까지 광주 일원 소요 현장을 취재하도록 했고,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장, 편집국장, 정치부장, 사회부장 각 16명 합계 64명을 4일에 걸쳐 호텔에 초청해 간담회를 가졌다.[54]
5.18 당시 미국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지지했으나,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을 견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미국이 5.18 당시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의 전모를 파악했을 때 글라이스틴 대사는 특전사의 지나친 반응이 비극의 직접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미국 관리들은 그와는 반대로 정부의 통제를 받는 광주의 라디오 방송이 미국 측이 특전사의 광주 파견을 승인했다고 보도하고 있음을 알았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역정보 행위를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하고, 이를 정식으로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를 취소하지 않았다. 또한 보안사의 조종을 받는 대한민국 언론은 미국 관리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전두환을 승인했다”라는 보도를 쏟아내었다. 이러한 신군부에 의한 왜곡 보도는 반미 감정이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55]
[편집] 5·18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은 2011년 5월 25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심의를 통과함에 따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됐다. 5·18 기록물은 9개 주제로 ▲국가기관이 생산한 5·18민주화운동 자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료, 군사법기관 재판자료 ▲시민들이 생산한 성명서, 선언문, 취재수첩, 시민들의 5월일기 ▲사진(흑백필름)자료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 ▲피해자들의 병원치료기록 ▲국회의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회의록(청문회기록) ▲국가의 피해자 보상자료 ▲미국의 5·18 관련 비밀해제 문서 등으로 총 분량은 편철 4271권 85만8904페이지, 흑백필름과 사진 2017컷이다.[56]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가 최종 심사 결과만을 남겨 두고 서석구, 지만원 등 극우 인사는 5·18이 북한군의 학살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네스코 본부에 반대 청원서를 제출했다.[57] 하지만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이들 극우 인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만장일치로 5·18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했다.[58]
유네스코는 5.18 민주화운동이 대한민국 민주화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동아시아 국가들의 냉전 체제를 해체하고 민주화를 이루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59]
[편집] 정치인들의 평가
김대중은 5.18 민주화 운동의 교훈을 “인권침해에 저항한 인권정신, 맨손으로 잔혹한 총칼에 맞섰던 비폭력 정신, 공권력의 공백속에서도 질서의식을 가지고 치안을 지켰던 시민정신, 항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평화정신”이라고 규정하고 “광주의 위대한 정신은 우리만의 자랑이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믿고 숭상하는 전 세계인의 자랑이며 인간승리의 대서사시”라고 평가했다.[60][61]
노무현은 5.18 민주화운동 27주년 기념사에서 “5.18은 역사에 많은 의미를 남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군부와 언론에 의해 폭도로 매도돼 무참히 짓밟혔던 그날의 광주는 목숨이 오가는 극한상황에서도 놀라운 용기와 절제력으로 민주주의 시민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너와 내가 따로 없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주먹밥을 나누었습니다. 시민들의 자치로 완벽한 민주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대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세계 시민항쟁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민주시민의 모범을 남겼습니다.”라고 연설하며 광주를 민주주의의 성지라고 높이 평가했다.[62]
김영삼은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라고 하며,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나. 우리 역사에 길이길이 크게 기록돼야 한다.”며 강도높게 비판하기도 했다.[63]
2007년 8월 박근혜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했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했다.[64]
2008년 5월 18일 이명박 대통령은 제28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참가해 기념사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8년 전 오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숨져간 민주 영령들 앞에 온 국민과 함께 고개 숙여 명복을 빕니다. 그 날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시는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들께도 충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역사의 고비마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 앞장서 온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을 저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크나큰 아픔으로 남았지만, 우리가 지금과 같은 민주화사회를 이루는 데 큰 초석이 됐습니다.”라고 평가했다.[65]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는 “5.18의 민주화 정신은 많은 국가들에게 표본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하며[66] 광주에 대한 애착이 많다고 밝혔다.[67]
레이건 정권 당시 리처드 앨런 미 전 안보보좌관은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대한민국에서 이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사실과 전두환 신군부의 역사 왜곡은 놀라울 정도라고 밝혔다.[68]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이정희는 “독재와 불의에 맞서 자신을 희생하고 공동체를 지킨 고귀한 광주정신은 진보의 원천이자 민주노동당의 뿌리”[69]라며 “과감한 변화로 수권정당, 대안정당으로 발돋움해 진보정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했고[69], “광주의 정치혁명을 전국에서 주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69]
[편집] 일부 극우단체의 주장
1990년대 후반부터 일부 극우단체가 북한의 인민군의 침투 의혹을 제기했다. 지만원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폭동”으로 부르는 한편, 조선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했다.[70] 조선인민군 특수부대 출신자 출신인 자유북한군인연합도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2006년 12월 20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5·18 광주사태는 (북한의)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백색테러이자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을 증명시켜 주는 현장”이라고 주장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광주사태의 발단과 *점은 민주화 봉기였다고 인정하지만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살상되고 끔찍하게 도륙당한 유혈적인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테러행위”라고 주장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들의 주장은 올인코리아, 코나스넷 등의 우파단체들을 통해 선전됐다.[71][72][73] 이날 기자회견에는 지만원, 서정갑 등 올드라이트 인사가 대거 참석했으며, 기자회견 내용을 계기로 '전두환 군부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는 주장도 기자회견의 정치적 배경을 의심케 한다는 주장도 있다.[73]
2008년 6월에는 뉴라이트 연합의 서양사 전공자인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로 부르며, 북한군 개입설을 언급했다.[74] 2008년 10월 서울교회 이종윤 담임목사는‘양심에 꺼리낌없이 힘쓰라’는 주제로 설교 중 4·3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폭력성과 북한 개입설을 설명하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75][76] 이에 대해 기독교계 커뮤니티인 대구성서아카데미에서는 광주 민주항쟁을 직접 겪은 광주시민이 광주민중항쟁은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 시민군이 벌인 항쟁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을 논거로 해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이종윤 목사의 주장을 반박했다.[77][78][79] 광주의 5.18단체들이 10일 성명서를 내고 “주일예배설교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당사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서울교회 이종윤 담임목사는 공식 사과하라”며 항의했다.[75] 이러한 주장 자체가 상식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주장이라는 반박도 대두했다.[80]
일부 보수단체들이 광주민주화운동 시민들에 대해 북한 개입설을 주장해왔던 것과 반대로, 학살을 자행했던 자들이 북한 특수부대라는 보수 단체들의 주장도 있다. 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 한·미우호증진협의회는 "(5·18 당시) 살인자들은 한국군이 아니라 북한이 파견한 600명의 특수부대 군인이었다"라고 주장한다.[81] 그러나 후에 이루어진 취재에 의하면 북한 특수부대 진압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당시 광주에 있었던 사람이 없고, "평양에서 좌천된 당 간부의 얘기를 들었다"는 등의 말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600명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도 이들은 "12.12 5.18 수사기록에 공수부대가 기밀유지하면서 작전을 하는데 정체불명의 300여명 되는 부대가 나타나 군장비와 무기를 빼앗았다. 그리고 비슷한 시점에 300여명이 아시아자동차에서 트럭을 탈취해 무기고를 습격한 사람이 300여명이다. 두 사건을 합하면 600명이라고 추정을 했다."라는 근거를 제시했다. 이들이 북한 특수부대의 진압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들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북한 특수부대 개입설에 대해 김황식 국무총리는 국회 질답에서 "5.18 민주화운동은 역사적으로 심판이 내려졌고 또 우리 국민들도 대다수가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렇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82]
[편집] 극우단체 주장에 대한 비판 및 반론
일부 극우단체 일각에서는 시민군이 광주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하는 계엄군의 학살과 폭력에 맞서 무장했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5·18 민주화 운동을 북한 인민군의 개입에 따른 폭동사태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인민군이 개입했음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실질적인 증거가 전혀 없어서 신빙성은 지극히 낮다.
일부 극우단체는 계엄사 및 제5공화국 정부의 발표를 인용해, 5.18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광주 시민 중에 계엄군이 주로 사용하던 총기인 m16보다 시민군이 주로 사용하던 총기인 카빈에 의한 희생자가 더 많이 있다고 주장한다. 5.18 민주화운동 진압 후 의사·검찰 관계자·보안사 요원이 작성한 사망자 검시 자료 원본에는 m16에 의한 사망자가 카빈에 의한 사망자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6월 중순 보안사 주재로 사체 검안위원회가 열려, 피해자 보상 문제가 제기되면서 공식 발표에서 카빈에 의한 사망자로 분류된 사망자의 숫자가 늘어났다. 당시 군부에서는 m16 총상 사망자는 군에 대항한 것으로 인식돼 폭도로 분류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 의사 2명과 목사는 난동자(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비폭도)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검안위원회에서 최초로 폭도로 분류된 사람은 20여 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해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로 분류됐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인해 사체 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 카빈로 분류된 사망자가 더 많아진 것으로 밝혀졌다.[83]
5·18 당시 계엄군의 작전보고·전투상보에 광주 시민을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국회 광주특위·검찰·국방부는 대한민국 계엄군 기록을 토대로 진상규명을 했다. 진상규명 결과 무차별 연행과 과잉진압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 광주역·전남대·전남도청에서의 집단 발포, 광주외곽봉쇄작전 과정에서 일어난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 통합병원 진로개척 작전, 송암동 학살 사건과 같은 무차별적 발포,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 중 무장시위대에 대한 발포 등이 밝혀졌다. 진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군인들에게 훈장이 주어졌으며 심지어 상부의 지시 없이 발포를 한 군인들까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된 이후 신군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볼 때 대한민국 계엄군에 의한 광주 시민 살해 행위는 분명히 존재했으며,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가 광주 시민들에게 계획적인 테러를 행했다는 주장에는 실질적인 증거가 있을 수 없다.[84]
일부 극우단체는 북한이 5·18을 기념한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북한은 5·18 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 혁명(남조선인민봉기), 6·3 항쟁(남조선청년학생봉기), 6월항쟁(6월 인민항쟁), 부마항쟁(10월 민주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운동 기념하고, 사건이 발발한 날을 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5·18 민주화운동 등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왜곡해서 북한 주민에게 선전한다. 북한에 있을 때 ‘5.18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85] 광주에 취재를 위해 잡입했던 조갑제는 5·18 당시 많이 불리고 큰 박수를 받았던 구호가 “김일성은 오판 말라”면서 5·18이 반공민주화운동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86]
5.18 민주유공자 유족회의 정수만 회장은 2006년 12월 21일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인터뷰에서 북한군 개입설을 반박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에서 “북한군 사망자가 민주화 투사로 둔갑된 사례가 있다.”면서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중 한 명이 북한군이라고 지목을 했는데, 정수만 회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지목된 인물은 1980년 5월 22일 광주국군통합병원 앞에서 20사단 61연대의 작전 도중 사망한 고등학생 임00라고 밝혔다. 당시 사망자 검시 기록을 보면 임00이 끝까지 군을 추격하기에 계엄군이 사살했다고 한다.[87]
5.18 당시 북한의 특이 동향은 없었다. 한미연합사령부와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의 분석에 따르면, 5월 초부터 5월 18일까지 북한의 특이 동향이 감지되지 않았다.[88] 5월 20일 한미연합사령부에서 미국에 보낸 전문을 보면, 그 시점까지 북한군의 어떤 동향도 확인되지 않았다. 5.18을 진압했던 계엄군은 부상자와 연행자 수천명에 대해 조사 과정에서 대공 판단서를 첨부했다. 여기에는 대공 용의점을 철저히 조사해서 대공 유무를 기록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이상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89]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일성이 5.18 민주화운동을 전후해 루마니아를 방문했기 때문에, 북한 당국이 5.18 발발을 사전 예측했다고 보기 어렵다.
1980년 5월 21일 날 오전 8시부로 전라남도 지역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이 됐다. 5월 23일 저녁 전 해양경찰에 해안경계태세 강화지시가 떨어졌다. 전남 일대 전 해안에는 31사단 병력의 이 부대는 대간첩 침투작전 부대 3개 연대가 경계를 했는데, 93연대가 목표지역 해안, 95연대가 고흥 여수 지역 해안, 96연대가 무안 영광 지역 해안경계를 했다. 광주에서 화순으로 빠지는 길은 공수부대 7사단과 11사단이, 나주와 목포, 영광으로 가는 길은 20사단이, 담양 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에는 3사단이 투입돼 광주 외곽을 전부 막고 있었으며 31일에는 해안까지 경계가 강화됐다. 이와 같은 철통경계 속에서 극우단체 주장대로 북한군 600명이 해안으로 침투해서 육로로 빠져나갈 상황이 아니었다.[90] [91]
자유북한군인연합은 탈북자 사이에서 5·18 북한개입설은 상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 조선로동당 비서 황장엽 등 고위급 탈북자들은 5·18 북한개입설을 언급한 적이 없다. 북한 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 탈북군인협회 심신복 회장은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자유북한군인연합의 주장은 현실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92]
1980년 당시 광주는 전라남도 산하의 일개 시로서 서울에서 남쪽으로 300km 정도 떨어진 소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그다지 큰 가치가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북한 측에서 광주에 개입한다고 해서 별다른 이익을 얻거나 대한민국 정부에 커다란 타격을 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과거에 군사분계선 인근 지역에 무장공비가 출몰했을 때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등에서 훨씬 적은 숫자의 병력도 주민신고에 의해 발각되거나 동선이 노출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해안가도 아닌 후방 내륙도시에 상당한 수의 병력을 별 노출없이 침투시켰다는 사실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탈북자 단체의 주장대로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 개입해 시민군과 계엄군 모두에게 피해를 입히는 공작을 자행했다면, 이는 중대한 사안으로서, 당시 신군부가 시민군이 아닌 북한군을 주적으로 삼았어야 한다. 그렇지만 신군부는 시민군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허위 선전을 계속했다는 점에서 탈북자 단체의 주장 역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당시 계엄군이 무고한 시민들까지 닥치는 대로 사살하는 국가폭력을 똑똑히 목격하고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경찰서 등의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저항한 일은 굳이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고도 상식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보수단체의 주장에는 논리적인 허점이 있다는 반론도 있다.
무엇보다도 광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북 군산에 주한 미군 공군 베이스캠프가 있는데다, 시내에서 20~30마일 거리에 위치한 광주광역시 송정동에도 주한 미군이 주둔한 상황에서. 북한군이 정말 개입했다면. 주한 미군 사령부나 미국 정부가 이를 수수방관했을 리가 없었다는 점에서 북한군 개입설은 더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조차도 모르게 북한군이 개입했다면, 오히려 대한민국이 전복될 뻔한 위기를 신군부가 자초했다는 얘기가 되고, 결과적으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우익 단체가 스스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무능과 직무유기를 증명하는 결함이 된다.
11공수여단에서 복무하던 이경남은 “5월 18일, 5월 19일 양일간에 걸친 7공수, 11공수 부대원들의 진압 작전은 오히려 극중(영화 화려한 휴가) 장면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픽션은 아무리 잘 꾸며놓아도 논픽션만 못하다.”라고 말하며 한 중사가 시민군에게 포위되자 옷을 벗어 학생들에게 총을 쏘라고 하자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을 향해 m16 소총으로 사격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시민군은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 광주 민주화 운동은 학살이라고 말했다. 또한, 군부대에서 “좌경용공 빨갱이 새끼들이 공부하기 싫어서 복학생들이 시험 기피하고 그러기 위해서 데모 선동” 등 교육 시켰다고 한다.[93]
[편집] 다른 우파의 주장
2002년 2월 사건의 관련자이기도 한 전두환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라고 규정했다. 전두환은 ‘광주는 어 그것은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라고 규정했으며,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며 반문했다.
2007년 3월 우파 언론인이며 조선일보 원로 기자인 조갑제는 5.18 당시 현장을 취재했었다. 조갑제는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 민주화 운동’이라 평가했고[94],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조선 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들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95] 이에 대해 북한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한 탈북자 단체 및 이에 동조하는 우파 세력이 조갑제를 비난하는 등의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조갑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애국단체들이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96]●광주시민 수십 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기자 수백명들이 취재한 목격자가 많은 사건이다. 5·18을 취재했던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계엄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다.●전국 비상계엄령으로 해안과 항만이 철저히 봉쇄됐다.●전두환 정권 하에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단서가 나오면 확인했을 것이다.●대대 규모 북한군이 개입다면 무장시민에 의한 국군 사망자가 7명에 그칠리 없다.●탈북자 증언은 전언에 불과하며, '내가 광주에 내려왔었다'고 나서도 믿기 힘든 판에 '카더라'란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곤란하다.●김일성이 5월 18일 광주 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 투입했다고 해도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20일 이후일 것이며, 5월 20일부터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됐다.
한편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2004~2006년에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박근혜는 2007년 8월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97]
이명박은 2008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사에서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온 국민과 함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숨져간 민주 영령들"이라고 평가했다.[98]
[편집] 언론 보도
[편집] 대한민국의 언론
조선일보 , 중앙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을 비롯한 대한민국 대부분의 언론사와 방송국은 5.18은 ‘민주화운동’과 ‘민중항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80년 당시 11공수여단 소속 병사였던 이경남 목사는 《당대비평》 1999년 겨울호에 ‘20년 만의 고백-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란 제목의 수기를 통해 “80년 5월21일 도청앞 집단발포는 법원의 최종기록과는 달리 시위대가 아닌 진압군 장갑차가 급히 퇴각하면서 넘어진 군인을 덮쳐 죽게 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99] 또한 진압 당시 죽은 군인들에 대해 “대부분이 동료들의 오인사격에 의해서 죽은 거예요. 두 번에 걸쳐서 오인사격이 있었는데, 광주보병학교와 11공수여단 사이에 5월 24일에 교전이 있었고, 또 한 번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31사단과 교전이 있어서 오인사격으로 죽었지 정작 시위대와 충돌해서 죽은 군인들은 굉장히 소수였어요”라고 증언했다.[100]
지난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 진압군 부대 지휘관들은 암매장이 없었다고 진술한 것과 다르게,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에 의해 2001년 당시 공수부대원이 비무장민간인을사살, 암매장했다는 양심선언이 발표됐다.[101]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김충근 기자는“젊은 여자,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계엄군의)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부위에 집중됐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백주겁탈, 폭력만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떠올랐다.”고 회고했다.[102]
국제신문 김양우 기자는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도청진입이 끝난 직후 도청 안 마당에서 포로로 잡힌 시민군을 계엄군 병사가 때려죽이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고 쓰고 있다.[102]
심재훈 뉴욕타임스 서울 주재기자는 “광주항쟁이 없었다면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다. 광주는 세계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증언을 했다.[103]
중앙일보 광주 주재기자 장재열는 5.18 당시 작성한 수첩에서 “대검으로 찌르고... 여자에게는 속옷만 입히고 마구 때리고 폭행. 집까지 쫓아가 폭행, 도망가는 시위대에 칼 던졌다”라고 당시 상황 회고했다.
5·18 민중항쟁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를 지낸 서청원은 9박 10일간 광주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취재한 경험을 바탕으로 〈5·18 광주항쟁 특파원 리포트〉를 공동 발간했다. 그는 “5·18 민중항쟁이 정치에 입문(민한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며 “당시 신문에 5·18 기사가 나가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당시 취재기자들과 함께 책을 발간했다”고 말했다.
[편집] 외신 언론 및 외신 기자
1980년 5월 25일 afp 통신은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라고 전세계에 타전했다.[104]
프랑스의 언론사 르 몽드 지의 기자 필립 퐁스는 1980년 5월 27일의 아침의 광주는 죽음의 도시와 같았으며 그 때 당시 상황을 학살이라고 증언했다.[105]
일본의 마쓰나가 세이타로 요미우리 신문 홍콩 특파원은 “광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진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80년대 후반 민주화가 이뤄진 것은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지도자들 마음속에 광주항쟁 정신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은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의 붕괴와 중국 천안문 사건에도 영향을 주었다.”라고 평가했다.[106][107]
샘 제임슨 미국 ap통신 기자는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1980년 광주의 3일간 군대 만행으로 빚은 희생보다 더 큰 것은 없었다. 군대의 만행은 이내 7일 간의 광주 사태로 치달았다.”라고 보도하면서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들은 광주 소재 (주)한국화약 창고의 다이너마이트 탈취 같은 시위자들의 과격한 행동을 강조했고, 군대의 잔인한 행동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수년 동안 많은 남한인과 몇 명의 미국인은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들춰냈다. 미국은 사실상 비난 또는 적어도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라고 5.18을 왜곡한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을 비판했다.[108]
블레들리 마틴 미국 볼티모어 선 서울 특파원은 “나는 지난 25년 동안의 기자생활 중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국의 강청 등 4인방 재판, 그리고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 암살 이후 폭동과 살인사건 등을 취재해 왔다. 그러나 나는 ‘광주’의 참상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건이 나의 기억 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한 마디로 나는 ‘광주’라고 대답한다.”라고 증언한다 또 “광주항쟁 기간 동안 단 하루밖에 광주에 머물지 않았지만, 1980년 5월 26일 그날 하루만으로도 바로 죽음을 걸고 폭압에 맞서 투쟁했던 용감한 광주시민들의 모습이 나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광주야말로 나의 기자로서의 경력 중 가장 감동적인 경험을 제공해준 곳이었다.”라고 5.18을 높이 평가했다.[109][108]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한 의료관련 연구개발회사 이사인 데이비드 돌린거는 5.18 광주항쟁 당시 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며 “사후 유골이라도 광주에 묻고 싶다”고 밝혔다.[110]
미국의 프리랜서 기자 도널드 커크는 “광주 민주화 항쟁은 대한민국 사회가 겪었던 정치적인 사건의 전환점이기도 하다”고 말한 뒤 “이 사건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높이 평가했다.[111]
독일인 프리랜서 사진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마티아스 라이는 “나는 외국인지만 역사의 한복판에서 고통받았던 광주 시민을 만났을 때 뜨거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며 “세계인들도 나처럼 5.18 역사를 배운다면 뜨거운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12]
한국전쟁 이후 서울 상주특파원으로 일한 최초의 서양 기자인 노먼 소프는 “광주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길고 긴 투쟁의 일부분이다. 앞세대가 자유선거를 확립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우려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지금 젊은 세대가 배우고 진심으로 감사하길 바란다”며 “지금은 언론계에서 은퇴했지만 민주화운동 때 대한민국 정부의 많은 압력에도 저를 비롯한 많은 헌신적인 기자들이 외국 독자들에게 대한민국 상황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시민을 진압하던 군인들의 잔혹함이 시위를 촉발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외국 잡지나 신문을 대한민국에 들여오는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이 배포 전 모든 자료를 검열했다. 광주에 대한 기사나 전두환을 비판하는 기사 등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을 때는 배포 전 지면에서 빠졌다. 외신 기자들이 쓰는 기사도 감시의 대상이었다. 주거비자가 나오는 것도 몇 달씩 걸려 30일마다 출입국을 반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113]
독일 제1공영방송 ard-ndr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그 참상을 서방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또 그 해 9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판결을 받자 항의표시로 “기로에 선 대한민국”이란 제목의 4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필름에 담았다. “내 생애에서 한번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도 이렇듯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114]
테리 앤더슨 ap 통신 기자 (당시 la타임스 일본총국장)은 5.18에 대해 “5·18은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었다.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찬 시민들 앞에서 시위대를 추격하며 곤봉으로 때리고, 최루탄은 물론 총까지 쏘았다. 공수부대원들은 상점과 시내버스 안까지 쫓아가서 젊은이들을 잡아 끌어냈다. 광주는 분노로 일어섰다.”라고 진술했다.[115][116]
미국 볼티모어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1994년 월간 ‘샘이 깊은 물’에 기고한 글에서 윤상원의 외신 기자회견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독일 남부독일신문 기자인 히일셔는 “5.18 당시 부상자들이 너무 많아 부상자들을 수용할 병실이 부족했다”고 회고했다. 전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노먼 누트 타프 역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절박해 보였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117]
뉴욕타임스의 서울 특파원 헨리 스코트 스톡스는 “1415년 아쟁쿠르에서 있었던 육박전을 연상하게 한다”면서 “육군 병사들이 착검된 총을 가지고 인간을 도륙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500년을 더듬을 수 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118]
[편집] 학계의 평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인류 역사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지. 무기가 수천 정이 풀렸는데 강도 사건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물자가 부족했지만 아무도 매점매석한 사람이 없었고. 그게 바로 대동세상이죠. 그때를 생각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어요.”라고 강연했다.[119]
조지 카치아피카스 미국 웬트워스공대 교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미래 사회에 자유라는 빛을 던져준 사건’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은 독재정권에서 민주화로 가는 역사의 지렛대였으며, 그 에너지는 전 세계에 강하게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120]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2005년 영국 bbc방송 인터넷판에 보도된 논평에서 “광주에서의 경험으로 한국인들은 독재로부터 탈출과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을 연관짓게 됐다”는 견해를 밝혔다.[120]
에드워드 베이커 전 미국 하버드대 엔칭 연구소 부소장도 2005년 12월 김대중 도서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독재와 미국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를 바꾸는 대한민국 근대사의 전환점'으로 5.18을 기술하기도 했다.[120]
[편집] 인권, 시민운동가들의 평가
광주인권상 수상자인 태국의 시민운동가 겸 인권운동가 앙카나 닐라파이지트씨는 “힘 없는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이 주는 감동은 믿기지 않을 만큼이었다”며 “5.18과 이후 광주의 인권운동은 세계적으로 본받을 만한 사례”라고 밝혔다.[120]
2005년 수상자인 와르다 하피즈 인도네시아 도시빈민협의회 사무총장은 “5.18 이후 대한민국의 인권발전은 아시아 인권활동가의 표본이자 목표”라고 높이 평가했다.[120] 2003년 수상자인 단데니야 g. 자얀티 스리랑카 실종자기념회 대표는 “나에게 5.18은 인권투쟁을 위한 훌륭한 영감의 원천”이라고 치켜 세웠다.[120]
5.18기념재단에서 국제인턴으로 활동하고 있는 필리핀 인권운동가 페드로 라혼은 “5.18의 역사는 결코 잊혀지지 않고 많은 나라에 전파돼야 한다”며 “광주시민들은 자유를 쟁취한 정신을 마음 깊이 지키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자극할 수 있도록 새로운 도전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120]
바울 슈나이스 목사는 "광주는 깨어 있는 양심과 열린 눈으로 불의와 폭력에 저항하라는 경고인 동시에 격려이며, 폭력, 전쟁,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함께 뭉쳤던 새 역사의 출발점이었다"며 "이런 광주에 대한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21]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서 5.18의 정신과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122]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에도 김 추기경은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가슴아팠던 일은 광주의 5월”이라고 말하며 고통스러운 심경을 밝혀왔다. 그는 언젠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을 때가 그때였다. 사태가 그대로 알려지지도 않고…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지만 먹혀들어가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은 것 같으니까…”라고 안타까웠던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123]
1984년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방문지는 광주였다. 교황은 경호를 맡은 청와대 경호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5.18의 상징 장소인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을 돌아 미사장소였던 광주 무등경기장으로 이동했다. 교황은 ‘용서’라는 주제의 미사를 통해 “광주시민과 같은 특별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은 용서가 어려울 수도 있다”며 광주시민들을 보듬었다.[124]
[편집] 관련 판결
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사회 각계 각층에서 불법적으로 집권한 신군부 인사를 고소·고발을 했다. 1995년 7월 검찰은 5.18 사건에 대해 전두환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국을 장악할 의도가 있었고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 것이 확인됐지만,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내란죄·반란죄 여부를 따지지 않고 불기소 처분했다. 1995년 12월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인용결정을 내렸다. 같은 달 검찰에 특별수사부가 설치돼 12.21 사건과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고, 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해 12.12 사건, 5.18 사건 공소시효 정지 규정을 두었다. 5.18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 23일, 검찰은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전격적으로 기소했다.
1997년 대법원은 두 전 대통령 및 다른 피의자들이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했다. 이에 따라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는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대중 정권에 의해 징역형은 사면됐으나, 추징금은 현재까지 내고 있다.[125]
또한, 광주 민주화 운동의 관련자를 숨겨 준 천주교 신부에 대해 정당행위를 부정, 범인은닉죄로 처벌한 판례(1983년)가 있다. 이회창 대법관이 참여한 재판이며, 황인철 변호사 등이 변호한 사건이 있다.[126][127]
[편집] 5.18 사건 대법원 판결
1997년 대법원은 성공한 쿠데타의 가벌성에 대해 “피고인들의 정권장악을 통해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헌법질서하에서는 헌법에 의한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한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라고 분명하게 적시했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관계를 다음과 같이 확정지었다.[128]
피고인들이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시국수습 방안의 실행을 모의하고,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한 후,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이나 총개머리판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는 등으로 시위자에게 부상을 입히고 도망하는 시위자를 점포나 건물 안까지 추격해 대량으로 연행하는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였으며, 이와같은 난폭한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함으로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후 일부 시민의 무장저항이 일어났으며, 나아가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귀중한 국민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시급하게 재진입작전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안될 상황이나 또는 광주시민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고도 볼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위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계엄군에게 광주재진입작전을 강행하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시민을 사망하게 하였다.[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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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만 해도 어마어마한 정보군요~~~
5.18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하는 분들 적어도 사전적 의미는 읽고 말씀들을 하시는건지.....
그냥 보수 언론이나 카더라~~통신만 읽고 말씀 하시는 건지....
문명이 아니라면 사전검색만 해보세요~~
어설픈 지식으로 폭동으로 몰아세우시지 마시고~~
그거 아시죠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기 전에 전국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는거~~
에휴 ~~~~이른바 보수를 지향하시는분들 해도해도 너무하시는거 아니신가?
이제는 사전적 의미도 바꿔버리실려고 그러시나??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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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펌]1950~ 대학별 아웃풋
다음 메인에 있던건데 펌자료 임
http://cafe974.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Jd6&fldid=Qt7&datanum=898632&t__nil_livestory=latest&nil_id=12&nil_no=18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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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대학의 분야별 아웃풋을 정리해 봤다. 소스는 조선일보 인물 DB다. 거기 DB 프로그램 돌려서 분류했음 ㅇㅇ(조선일보 인물 DB 출처 : http://image.chosun.com/sv/people/200710/people_db_main.html ) 아래 정리한것처럼 50년대 학번 이런식으로 조선일보 인물 DB에서는 분류되어있지는 않고, 생년으로 구분되어있다. 그래서 간단히 20년씩 빼서 1930년대 생은 50년대 학번으로 1940년대생은 60년대 학번으로 ... 이런식으로 구분 했다. 물론, 이런식으로 구분하면 오차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략적인 그림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생년기준이 아닌 학번 기준으로 표기한 이유는 좀 더 연배 추측과 그들의 주역 시기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조선일보 DB에서 나누어 놓은 분야는 정치인, 공무원, 법조인, 언론인, 기업인, 금융인, 교육인, 의료인, 전문직이다. 여기서 교육인은 교수이고, 전문직은 공사나 회계법인, 변리사 등 기타 아웃풋들이 있더라.즉, 정계(정치인), 행정계(공무원), 법조계(법조인), 언론계(언론인), 재계(기업인), 금융계(금융인), 학계(교육인), 의약계(의료인), 기타(전문직)의 분야의 아웃풋으로 생각했다.(조선일보 DB상에서는 군인/문화예술인/연예인/스포츠인/종교인/사회기관단체인의 분야도 조선일보 DB에서는 제공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까페 대다수가 관심있는 아웃풋 분야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제외 한다.) 1950년대 학번이다. 이때 시기의 대학생은 전후세대로서 아주 혹독한 환경에서 대학 다니신 분들이다. 아웃풋을 보면 서울대는 언터쳐블이다. 전 분야에 걸쳐 차이를 내고 있다. 고려대와 연세대는 순위 구분은 무의미하고 똑같았다고 보면 된다. TK지역의 간판 경북대가 4위를 차지하였다.(교수쪽의 아웃풋이 상당하므로 TK지역이라고 이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중앙대가 5위를 차지 하였고, 정치쪽과 언론쪽이 눈에 뛴다. 경희대와 성균관대가 뒤를 이었고, 경희대는 고르게 아웃풋을 나타내었고, 성균관대는 공무원쪽이 강했음을 알수 있다. 다음은 한양대이고 기업인이 눈에 뛴다. 9위에는 건국대다. 10위는 부산대다. 거의 비슷한 차이로 11위에 전남대가 있다.60년대 학번이다. 서울대는 전 분야가 고른 아웃풋을 나타내었지만, 정계쪽에서는 고려대보다 약간 뒤쳐짐. 고려대는 이 때부터 법대의 강세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금융쪽도 좋은 아웃풋 나옴. 연세대는 역시 의료쪽이 강하다. 4위는 1959년 종합대로 승격한 한양대로 이 때부터 쭉 4위의 위치를 유지한다. 공대가 강해 재계쪽이 아웃풋이 강하다. 5위는 성균관대 역시 행정계쪽이 강하고, 법조계도 강하다. 바로 뒤 이어서 성균관대와 별로 차이 나지 않게 경희대와 중앙대가 뒤따라 있다. 경희대는 의로계가 눈에 띄고, 중앙대는 정치계와 언론계가 눈에 뛴다. 지거국의 선두주자 경북대는 8위, 부산대는 9위다. 10위는 동국대가 차지하였다.11위는 영남대, 12위는 전남대가 10위랑 비슷하게 차지.70년대 학번. 여전히 서울대는 전분야 차이 벌린다. 특히 법조계는 여타 대학 개관광시키는듯. 학계, 행정계 쪽도 만만치 않다. 다만, 정치계쪽이 고려대에 뒤진다. 연세대가 행정계나 학계, 의료계에서 고려대에 앞서고, 고려대는 정계와 법조계에서 연세대보다 앞선다. 4위는 한양대 역시 기업쪽이 강하다. 5위 성균관대는 꾸준히 행정계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법조계에서도 연세대를 제치고 3위에 마크. 6위에서 8위까지는 거의 비슷하다. 6위는 지거국 경북대가 다시 올라왔다. 학계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줌. 바로 뒤이어 7, 8위는 중앙대와 부산대, 중앙대는 언론계에서 3위를 마크하여 계속 언론쪽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줌. 9위와 10위는 경희대와 영남대가 차지 격동의 386세대. 현재의 주역세대이다. 아직 70년대에 비하면 아웃풋 숫자가 반정도 덜차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의 아웃풋 시기가 정해지는 법조인 제외). 즉, 이쪽 세대부터 아웃풋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도 현재까지의 아웃풋을 보면 서울대 거의 전분야에 걸쳐 강하다. 다만, 또다시 고려대에 정치인에 밀리고, 금융쪽은 연세대와 거의 비슷. 2, 3위는 연세대와 고려대인데, 순위의 비중은 없고, 똑같다고 보면 될것 같다. 학교 특성대로 법조계쪽은 고려대가 압도적으로 강하고, 의료계쪽은 연세대가 강하다.4위는 한양대 전통대로 기업인 분야에서 괜찮은 아웃풋을 나타내고, 학교에서 밀어준 법조계 아웃풋이 수직상승한 시절이다. 다른 분야도 고루 좋은 아웃풋을 보인다. 5위, 6위는 경북대와 성균관대 거의 차이가 없다. 7위, 8위는 부산대와 중앙대가 비슷하다. 3위권을 유지하던 중앙대 언론계 아웃풋이 줄어든게 눈에 뛴다. 9위는 경희대고 고르게 좋은 아웃풋이 있다. 10위에는 늦게 시작한 서강대가 드디어 10위권에 보인다. 특징대로 기업과 금융쪽에 강하다.90년대는 사실상 거의 의미가 없다. 아무래도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나이에 입신양명할 수 있는 법조쪽 아웃풋을 제외하고는 다른 분야에서는 거의 아웃풋이 나오기 힘들다. 특히 90년대 학번으로서 교수들 ㅎㄷㄷ지금현재부터 이끌어갈 아웃풋이다. 80년대, 90년대, 00년대 아웃풋까지 망라함. 어떻게 보면 지금 입장에서는 밑에 있는 전체 시대 아웃풋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 아웃풋이다.80년대~현재 아웃풋 정리정치계 : 고>설=연>한=성>경>중행정계 : 설>연=고>한=성법조계 : 설>고>연>한>성>이=부언론계 : 설>고=연>외=서강=성=한재계(기업) : 설>연>고>한>성=중금융계 : 설>연>고>성=서강학계 : 설>연>고>한>경북>부마지막으로 전체 통계이다.몇줄 요약서울대 : 언터쳐블. 특히 법조계와 학계에서는 ㅎㄷㄷ 뭐.. 모든 분야가 먼치킨 급이다.연세대-고려대 : 두 대학이 라이벌이라는 것은 아웃풋에서도 나타난다. 두 대학의 간판 연의, 고법이 상대 대학을 2배씩 관광시킨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하다. 정치쪽에서 고려대가 눈에 뛰고, 학계쪽에서는 연세대가 눈에 뛴다.한양대 : 학교의 실용학풍때문에 공대, 법대 같은 응용 학문 중심 아웃풋을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왔지만, 교수 수에서 볼수 있듯이 실제로는 학계에도 많은 아웃풋을 만들고 있다.성균관대 : 굴곡 없는 좋은 아웃풋. 특히 금융쪽과 행정, 법조계쪽이 좋은 아웃풋을 가지고 있다.지거국3 : 지거국 3학교는 지방의 인식이 예전에 비해 안좋았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고시에서 괜찮은 아웃풋을 보여줘왔다. 학계에서도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만큼 앞으로가 주목됨.중앙대 : 중앙대 간판이라는 언론계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분야에서도 굴곡없는 좋은 아웃풋을 보여주고 있는만큼 앞으로 기대됨.경희대 : 역시 의약관련 많은 과를 보유해서 의료쪽 아웃풋이 강함. 마찬 가지로 큰 굴곡 없는 각 분야에서 좋은 아웃풋을 보여주고 있음.건국-동국 : 역대로 봐도 꾸준히 라이벌 관계임. 아웃풋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수가 나옴.서강대 : 늦게 생겼고, 소수라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경쪽이 강한만큼 금융쪽에서 강한 모습 보여준다.이대 : 예전에는 인풋이 좋았다고 하지만, 여성의 사회진출에 한계가 있었던 만큼 학계를 제외하고는 좋은 아웃풋을 보여주지 못한다. 최근 들어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고시에서도 좋은 성과가 있는만큼 계속 상승할 것으로 보여짐.외대 : 언론계가 의외로 강하고, 정치쪽이 쫌 약해 보임. 나머지는 큰 차이 없고 금용쪽도 아웃풋 괜찮다.인하대 : 뽑는 인원은 많은데 각 분야에서 그 만큼 못따라와주고 있는게 흠.지방대 빅3 : 영남-동아-조선대는 뭐...노코멘트. 아무튼 예전엔 인서울에 꿀릴것 없는 학교였음.법조계(법대), 정계(문과), 기업(공대+상경), 금융(상경), 행정계(사회대 비롯한 문과), 의료계(의약계열), 학계(문과+이과) 기타(문과+이과)일반적으로 이렇게 강한 학교들이 유리할꺼야 ㅇㅇ아참. 정계, 행정계, 재계, 금융계, 학계, 의료계, 법조계, 기타 8개 분야 아웃풋에 총 214,030명이 있더라. 이는 대한민국의 약 0.5%에 속하는 아웃풋이다.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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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아웃풋 분야를 봤을때.. 상경+ 인문계열 비중이 큰데 반해서 이공계 비율이 너무 작은듯 하네요. 실제로 대학의 졸업
인원을 보면 이공계열의 비율이 상당할텐데 말이죠....카이스트랑 포항공대가 전혀 안들어 있으니 말다한거죠 뭐
공대 대학원생의 입장에서 봤을때 인하대 같은 경우도 공과계열에서는 중앙대, 경희대 등등 고만고만한 인서울 대학보다 훨씬
임팩트가 있거든요. 참고로 저는 위에 나와있는 지잡대중 한곳에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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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전상비애:김상진 투수를 기억하십니까?
1.대학도 사치였던 고교 유망주
서림초교를 졸업한 김상진은 1989년 광주 진흥중학교로 진학했다. 강의원 진흥중 감독이 스카우트했다. 강 감독이 진흥고 감독으로 부임하며 김상진도 자연스럽게 진흥고 유니폼을 입었다. 강 감독은 이후 진흥고 감독을 맡으며 김상진과 6년간 사제지간으로 지냈다.“그즈음 있는 집 아이들은 대개 광주 충장중이나 무등중으로 진학했다. 진흥중 야구부는 반대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많았다. 상진이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어찌나 가난한지 회비를 거르게 일쑤였다. 용돈도 없어서 감독인 내가 손에 쥐여줄 정도였다.”
2.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에 빛나는 아기 호랑이
1995년 11월 김상진은 해태와 계약금 1억 원, 연봉 2천만 원에 입단계약을 맺었다. 당시 해태에 ‘1억 원’은 2, 3억 원 가치의 거액이었다. 하지만, 이해 해태는 휘문고 포수 황*와 충암고 내야수 장성호에게도 1억 원씩 안기는 모험을 감행했다. 결과적으로 황*를 제외하고 김상진과 장성호는 머지않아 해태의 주력선수가 됐다.고졸 신인 김상진은 팀에서 ‘리틀 이대진’으로 불렸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대진의 진흥고 3년 후배인데다 성격까지 비슷했기 때문이다.
3.삶의 마운드에 찾아온 강력한 타자, 암
김준재 kia 트레이너는 1998년 10월 9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해태 트레이너였던 그는 다음날 예정된 김상진의 mri 촬영을 준비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그해 상진이가 6승 11패 평균자책 3.87로 다소 부진했다. 2년 연속 9승을 따내던 친구라 10승이 기대됐지만, 오히려 성적이 떨어졌다. 목 통증으로 투구균형을 무너진 탓이 컸다. 시즌 중 수차례 목 통증을 호소했기 때문에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 정규시즌을 끝내고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에 10월 9일 mri 촬영을 예약했는데, 그날 저녁 한 통의 전화가 왔다.”김 트레이너에게 전화를 건 이는 김상진의 친구였다. “안녕하세요”란 안부인사도 없이 김상진의 친구는 다급한 목소리로 “상진이가 밥을 먹다가 피를 토했다”며 “지금 전남대 병원 응급실로 갔다”고 안절부절못했다.“감이 이상했다. 그래 전남대 병원으로 바로 쫓아갔다.” 김 트레이너가 도착했을 때 김상진은 두통을 호소할 뿐 별다른 특이사항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감이 맞았다.정밀검사 결과 3번 목뼈 척추에 종양이 발견됐다. 김상진은 일주일 뒤 3번 목뼈 주위에 있는 종양을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병원측은 약물치료와 휴식을 통해 빠른 회복이 가능하다며 김상진을 안심시켰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목뼈 척추에 난 종양의 발원지가 위임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위암이 척추까지 전이된 셈이었다. 병원에서 가족들에게 통보한 병명은 말기 위암이었다.”
11월 중순 들어 상진이가 조금씩 눈치를 채는 듯싶었다. 하지만, 반신반의했던 모양이다. 막상 ‘암이다.’ 이야기하니까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어리벙벙해했다. 나중에 저도 확인했는지 자신이 말기 암이란 사실을 정확히 안 다음 날부터 갑자기 병세가 악화했다.” 김 트레이너는 며칠씩 밥을 굶는 김상진을 보며 심장이 녹는 듯했다
4.22살 청년 김상진의 슬픈 기억과 사랑
호전될 것 같던 김상진의 병세는 1999년 봄부터 급격히 악화했다. 3월 초 통원치료를 해오다가 갑자기 각혈과 하혈로 응급실로 실려와 4시간의 큰 수술을 받고 4월부터 눈에 띄게 체력이 떨어졌다. 누구보다 앞장서 김상진의 투병을 도왔던 김준재 트레이너에게 하루는 김상진이 “형님, 바람…좀…쐬고 싶어요”라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 어디 가고 싶니?” 김 트레이너가 물었다.“63…63빌딩에…가고…싶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김상진이 대답했다.김상진을 휠체어에 태우고 김 트레이너는 63빌딩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때였다. 김상진이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어딘가를 찾고 있었다. 김 트레이너가 “상진아, 어디 보고 싶은 데라도 있니?”하고 물었을 때 김상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잠실야구장”이라고 했다.김 트레이너가 잠실구장이 보이는 쪽으로 휠체어를 놓자 김상진은 한동안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침 갓 뽑아낸 밀크커피처럼 따뜻한 봄볕이 김상진의 이마를 내리쬐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김상진이 항균용 마스크를 입에서 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김상진의 외출은 한 번 더 있었다. 장소는 고향 광주. 그러나 야구장은 아니었다. 김상진이 찾아간 곳은 광주구장 옆 작은 카페였다.김 트레이너는 김상진이 한창 건강할 때 “형님 500cc 맥주 한 잔만 사주세요”하고 매달린 통에 함께 술을 마신 기억이 있다. 그때 김상진은 친형 같던 김 트레이너에게 자신의 여자 친구를 소개했다. “예쁘고 참한 친구였다. 어찌나 둘이 잘 어울리던지,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이 다 환해질 정도였다.”힘들고 고달픈 투병생활 동안 김상진의 유일한 낙은 여자친구와의 휴대전화 통화와 문자메시지 교환이었다. 그러나 투병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여자친구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남자친구에 대한 변심이었을까. 아니다.“상진이가 여자 친구에게 짜증을 많이 냈다. ‘왜 찾아오느냐’고. ‘찾아와서 뭐하느냐’고.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고. 여자친구도 상진이 병세가 악화할까 봐 애써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하지만, 김상진은 여자 친구를 눈에서 보내는 대신 가슴에서 키웠다.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찾은 광주구장 옆 작은 카페가 바로 여자 친구와 자주 가던 카페였던 것이다. 카페에서 김상진은 아무 말 없이 몇 시간이고 카페 밖을 바라봤다고 한다. 간간이 여자들이 지나칠 때마다 바이올린 현처럼 가늘게 눈을 떨면서
취재를 마칠 무렵. 김상진이 마지막까지 삶의 끈을 놓지 않으며 투병생활을 했던 강남성모병원의 관계자를 만났다. 그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김상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유명 야구선수가 암 투병 중이었다. 병문안이 끊긴 밤이면 불 꺼진 병실에서 매일같이 비디오로 야구경기를 봤는데 늘 같은 경기였다. 하루는 그 경기가 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이겼던 경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죽기 전에 꼭 팀이 우승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야구를 몰라서 하는 말인데…그 팀 우승했나?” “형님. 저기가…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제가…제가 완투승을 거둔 곳이 맞지요?”김 트레이너는 휠체어에 앉아 멍하니 잠실구장을 바라보는 김상진의 뒷모습을 보며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김 트레이너와 김상진의 마지막 외출은 그렇게 노을에 물든 단풍처럼 슬프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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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로스쿨에대해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n.e.o키드님
일단 *kids 님께서 올리신 글 을 다시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1. 비용에 대한 단점2. 또다른 사교육의 시작3. 3년 기간안의 이론 실무 완비 불가4. 다양한 사회경험의 문제에 대한 기준과 근거부족
이렇게 네가지로 나눌수 있더군요
첫번째 비용에 대한 단점을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일단 비용문제는 제가 이전 글에서 언급한것과 마찬가지로
로스쿨제도에서 오는 긍정적인 측면을 굉장히 상쇄시키는 부정적인 면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로스쿨제도에서 비용문제는 어쩔수없이 따라오는 공식중 하나라고 볼수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것과 마찬가지로 현행 법과제도의 문제
즉 교수 한명당 수업듣는 학생이 적게는 50명 많게는 100여명에 이르는 현실적인 문제에서
학생들의 수업권이 침해받고 있는데 로스쿨은 법과대학과는 다르게
순수하게 법조인력을 양성하는 기관이므로 이런 수업권의 침해없이 원활한 교육을 위해
기존의 교수인력과 거기에 더불어 현장에서 근무하던(판사, 검사) 실무인력까지 교수인력으로
두다보니 수업료는 점점 올라가게 되는겁니다
현재 각 대학 로스쿨 1년 등록금 액수 입니다
로스쿨 예비인가대학 등록금
대학명
연간등록금
대학명
연간등록금
성균관대
2,000만원
서강대
1,400만원
연세대
1,950만원
중앙대
1,400만원
고려대
1,900만원
서울대
1,350만원
영남대
1,800만원
경북대
1,100만원
인하대
1,800만원
강원대
1,000만원
한양대
1,800만원
전남대
1,000만원선
경희대
1,760만원
전북대
1,000만원선
동아대
1,700만원
제주대
1,000만원선
건국대
1,600만원
충남대
1,000만원
원광대
1,600만원
충북대
1,000만원
한국외대
1,600만원
부산대
960만원
아주대
1,500만원
서울시립대
950만원
이화여대
1,500만원
사실 비용적인 문제만 보면 로스쿨 비용이 굉장히 비싸다 라고 느끼실수도 있으나
*kids 님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아직 학생이고요(군대를 늦게가서...)
제가 서울 소재권 모 대학에 다니는데 여러 친구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근데 현재 저희 학교 등록금 인문계열 같은 경우 평균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과 같은 경우는 이번에 복학 하려고 알아보니 벌써 380만원에 이르렀더군요(저는 그나마 등록휴학해서)
일년으로 치면 약 760만원 기타 잡비 포함하면 800은 그냥 넘기고 있는 판국입니다
더군다나 교재비나 교통비 등등 합치면 저같이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이미 1000만원에 이르는
등록금+생활비를 지출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참고로 이공계 같은 경우는 훨씬 더 비싼편입니다....)
그런데 이 비용이 과연 효율적으로 한 교수당 4~50명씩 수업을 듣는 로스쿨 비용에 비해서
싼거일까요?
저같은 경우 교양강좌 하나 듣고 있는데 현재 수강생이 약 180명에 이르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등록금 760만원이 굉장히 싼것일까요? 수치상으로는 싸보일지 모르죠
하지만 효율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현재 대학 등록금이 터무니 없이 비싼편입니다
대학원은 더한 실정이고요
이런 비용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저는 실무인력으로 나아갈수 있는 기반에서 공부를 하는 입장이라면
그렇게 비싼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두번째 문제는 또다른 사교육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지금 님께서 언급하신게 leet 시험을 준비하려고 다들 사교육에 매달리고 있다
이런 취지에서 말씀하신거 같은데요
이것 또한 님께서 굉장히 좁은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시는건데요
일단 리트 과목에 대해 언급해드리면
언어이해-추리논증-논술 이 세과정으로 나뉩니다
근데 이 세과목의 특성이 얼핏보면 굉장히 인문계적 소양만을 측정하는것 같지만
추리논증이라는 과목을 보면 약간의 수학적 사고도 요하는 문제도 있고 그렇습니다(수능 언어영역처럼요)
여기서 각설하고 혹시 *kjds 님 행정고시 외무고시 첫번째 시험인 psat 시험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행시 외시에서 피셋을 도입한 이유는 기존의 시험제도가 올바른 공직자를 뽑는 시험이기보다는
천편일률적인 암기위주 시험제도로 인한 여러가지 폐해를 막기위해서 도입된 시험입니다
근데 왜 리트를 준비하는 사교육은 비판받아야 하고 피셋을 준비하는 사교육은 비판의 대상에서
벗어났는지요? 오히려 저는 님께서 오직 리트만 까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여기서 일단 이야기를 중지하고 사교육에 대해 이야기 해보죠
님께서도 대학을 나오셨는지 아니면 아직 학생이신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현재 대입에서 들어가는 사교육이 가장 큰 시장을 차지하고 있죠
매년 입시다 뭐다 해서 수많은 부모님과 학생들이 오직 명문대를 가기 위해 사교육에 매달리고 있는 현실인데
지금 현재 일년에 고등학생 한명에게 들어가는 사교육 비용이 어느정도일까요?
과연 그 비용적인 측면들이 대학을 보장을 해주는것일까요?
오히려 저는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고교교육 현장과 대입제도 자체가 부정되어야 된다고 봅니다
이런 사교육이란게 우리 나라 교육현실과 국민적 인식에서 아무리 부정적으로 비춰진다고 해도
"내 자식만큼은 명문대로..." 이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절대 없어지지 않을것이라 보고요
리트를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서 독학이 아닌 사교육의 힘을 빌리는건 어쩔수 없는 현실입니다
현재 사법시험 제도 안에서도 각 법과대학 교수들의 강의를 듣고 혹은 교수저 교과서를 읽고
합격하는 사람들이 전무후무한 현실입니다
전부 신림동으로 몰려들고 있고 일부 지방학생들은 인강이나 테입으로 강의를 듣고 있는 판국이고요
공무원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흔한 토익 시험조차도 사교육 현장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데
사교육 입장에서 한 교육과정을 따지자면 모든것이 부정되어야하거나
아니면 모두 동등하게 생각해야된다는게 제 의견입니다
세번째 문제는 3년간의 교육과정에서 이론 실무 완비 불가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님께서 어디서 뭐 로스쿨까의 말을 듣고 와서 캡쳐까지 해놓으셨던데 사실 전 그걸 보고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일단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그냥 사시잉여인력일 뿐이고요
오히려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물어가는 사법시험대신 로스쿨을 생각하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사법시험을 치르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4년의 법과대학 생활+적게는 2~3년 많게는 4~5년간의
수험생활에서 쌓여진 리걸마인드 이런 소리 전부 허튼소리입니다
그럼 제가 님께 한번 여쭤 보죠
현재 연수원 39기가 내년 임용을 바라보고 있는 현실인데요
님께서는 현재 임용되어(판사든 검사든) 있는 연수원 38기 출신중에 나이가 가장 젊은 사람이 몇살인줄 아시나요?
가장 어린 사람은 84년생까지 포진해있는 마당입니다
그리고 매년 사법시험 치는 인력중에 최소연령은 약 21~23살 정도로 이루어 지고 있고요
근데 이런 사람들은 과연 법과대학 4년 졸업하고
연수원수료 하자마자 임용이 되었는데
이론 실무가 님이 말씀하신것처럼 철저하게 완비가 되어있을까요?^-^;;;
이론 실무가 완비가 되지 않아서 인정할수 없다는 말은
합격조차 못하고 있는 사법시험 노장수험생들이 그런 소릴 하는 겁니다;;
그럼 공대생 출신이면서 사법시험 붙으신 분들은 대체 어떻게 말해야되나요?
그런분들은 단지 법학학점 35학점만 이수하고 사법시험을 위해서만 공부해오셨는데
님께서 말씀하시는 어설픈 논리로 기준을 삼으면 이런분들이 더 신용할수가 없겠지요?
그럼 마지막 문제인 네번째 다양한 사회경험의 문제에 대한 기준과 근거부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전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법이라는 제도 자체가
법 그 자체로 성립된것이 아닙니다
법이라는것이 수천년간 이어져온 여러가지 도덕, 사회제도, 풍습, 사람들의 일정한 준칙을
총집합한 결과물이 바로 법입니다
제가 오늘 올린 글을 확인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자로 뜬 기사 입니다
서로 친분있는 사람끼리 술값을 마련하기 위해 짧은 시간 동안 1점당 100원짜리 고스톱을 쳤다면 '일시 오락'에 불과하기 때문에 도박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김영란 대법관)는 6일 1점당 100원짜리 고스톱을 친 혐의(도박)로 기소된 강모씨 등 2명에 대한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강씨 등의 도박행위는 일시오락의 정도에 불과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도박죄에 있어서 위법성의 한계인 '일시 오락' 여부는 도박의 시간과 장소, 도박자의 사회적 지위 및 재산정도, 재물의 근소성, 도박에 이르게 된 경위 등 모든 사정을 참조해서 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강씨 등은 지난해 9월 모 다방에서 오후 8시께부터 40분간 1점에 100원짜리 고스톱을 친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판돈은 2만2900원이었다. 이에 원심 재판부는 "서로 친분이 있는 사이로 저녁 술값을 마련하기 위해 고스톱을 친 점, 고스톱을 친 시간이 짧은 점, 내기의 규모는 1점당 100원, 판돈의 전체 규모는 2만2900원에 불과했던 점 등에 비춰 강씨 등이 고스톱을 친 것은 '일시 오락'에 불과하다"고 판시했다.
이렇게 단순취미도박조차도 철없는 검사가 상고를 해서
결국 대법원 까지 간 사건입니다.
예전에 퇴임하신 모 대법관님께서 몇몇 법과대학 순회하시면서 자신의
대법관 시절을 회고 하면서 하시던 말씀이 기억나네요
우리나라 대법관이 한해에 맡는 사건이 약 3,000건 정도되는데
너무 많은 재판을 담당하다보니 꿈에서도 내가 재판을 했는지
집사람이 걱정을 한 적이 있었다....
재판과정 하나하나 마다 막대한 국민세금이 들어가는데
다양한 사회경험을 하지 못한 검사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결국 대법원까지...얼마나 한심합니까
비단 이런 일이 이 사건에만 국한되질 않습니다
저 또한 법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 여러가지 판례를 검토해보고 교수님 그리고 같은 학생들과
토론도 해보았지만
진짜 이게 대법원까지 아니 과연 검사의 기소자체가 필요가 있었나 싶을정도로
어이없는 사건도 많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그냥 재판을 받는 당사자들이나 법원, 검찰 문제로만 국한되면
별로 말할거리도 없겠지만
이런 재판 과정에 있어서 막대한 국민세금이 투입되는것이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사회 속성상 모든게 공짜가 아닌데 그건 국가기관도 마찬가지지요
사건을 위해 투입되었을 여러 인력들이나 피고인의 변호사 선임비용 그리고 변호사들의 활동
판사 검사들의 사건 검토 이 모든것이 이런 소모적인 논쟁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근데 과연 이런 문제들이 사회경험상 받아들여지는 내용일까요?
제가 봤을땐 진짜 검사가 철이 없었거나 관행상 피고인으로 하여금 한번 혼 좀놔봐라
이런식이었겠지요
이런 어린나이 혹은 연수원 수료이후 처음부터 국가핵심권력기관에 투입된 사람들의
권위의식에 의거한 문제들은 굉장히 심각하다고 밖에 볼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재판이 하루이틀만에 끝나나요?
적게는 6~12개월
많게는 수년을 이끄는것이 재판입니다
물론 님이 말씀하신것처럼 어떤 사회적 경험이라는것에 대한 기준이 없는것이 현실입니다만
이전의 제 글을 잘 읽어보시면 저는 최소한 판검사 임용이
바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변호사로서 무료변론활동을 펼친다든지 해서 여러 사건과
여러 사회계층을 겪어보고 국가기관에 투입이 되는것이 옳고
그리고 이런과정들이 쓸데없는 권위의식도 덜 수 있는것이
아닌가 해서 말씀드린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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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지식채널e] 2-34, 2-35, 2-36
잊지 말자, 비록 아픈 역사지만, 잊지 말자.
그리고 더 이상 공권력이라는 그림자 같은 괴물이 생기지 말도록 하자.
불편한 역사를 꺼집어 내야 새 역사를 쓸 수 있다.
[ 5월 화려한 휴가의 기록 ]
80년 5월 17일, 광주 상무대 전투교육사령부에서 공수부대 천여명이 작전개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의 이름은 '화려한 휴가' 였다.
<블러디선데이>는 아일랜드의 민중 유혈사태를 다룬 영화이다. 공교롭게도,
광주가 처참하게 찢어발겨졌던 5월의 그날 역시 일요일이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졌던 피의 역사는 치밀하게 연구되고 기록되는 마당에,
이 땅에서 우리의 혈육들이 살상당했던 기억들은 조직적으로 지워지고
망각되어 버리는 실태이다. 우습고 창피하고, 무서운 일이다.
5월 17일
밤 11시 40분, 문공장관 이규현은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계엄 확대가 발표되고 두 시간이 지난 후,
전남대와 조선대 캠퍼스에 특전사가 투입되었다.
5월 18일
오전 10시, 휴교령이 내린 상태에서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든 학생 100여명과
무장 공수대원이 대치하였다. 200-300명 정도로 수가 불어나자 학생들은
"계엄해제" "계엄군 물러가라" "휴교령 철회하라" 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곧 대치 중이던 공수부대 책임자가 "돌격 앞으로" 라는 명령을 내렸고,
공수대원들은 학생들에게 파고들면서 곤봉을 휘둘렀다.
곤봉은 쇠심이 박힌 살상용 곤봉으로, 이를 맞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공수부대 병사들은 마음껏 모든 가능한 폭력을 행사하였다.
첫날부터 대검을 사용하였고, 지나친 폭력에 항의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며 무지막지하게 구타하고,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젖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하였다."
"공수 놈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60살이 넘어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놈들은 "이 * 년은 뭐냐,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화발로 할머니의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화발로 뭉게버렸다.
5월 19일
"5월 19일에 저질러진 공수부대의 만행은 어찌나 잔인했던지 진압하러 나온 경찰조차
시민들에게 울먹이면서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고 애원할 정도였다."
"주위의 노인들이 공수대원의 폭력을 만류하자 그들은 노인들의 머리를
곤봉으로 후려쳤다. 노인들도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이런 모습을 도망치며 바라본 시위 군중들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일시에 돌아섰다.
그리고는 "좋다, 다 죽여라!" 하면서 공수부대에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어느 할아버지는 "저럴 수가 있느냐, 나는 일제 때에도 무서운 순사들도 많이 보고,
6.25 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저러는가. 죄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는 없다.
저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 하면서 통곡했다.
"로타리 부근 전투에서 머리가 으깨지고 팔이 부러져 온통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중이던 택시기사에게 공수대원이 부상자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기사는 안타깝게 "당신이 보다시피 지금 곧 죽어가는 사람을 병원으로 운반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호소하자 그 공수대원은 차의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기사를 끌어내려 대검으로 무참하게 배를 찔러 살해했다.
이런 식으로 최소한 3명의 운전기사가 살해당했는데, 이는 다음날인 20일,
또 하나의 기폭제였던 차량시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5월 20일
대검만으로는 모자랐던 걸까. 20일 오후부터는 심지어 화염방사기까지 사용하였다.
2시 30분경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를 쏘아 여러 명의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타 죽었다.
"시민들은 혹시나 자신들의 운명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tv를 통해 방영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모두 열심히 시청하였지만 tv에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연속극이나
오락프로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들은 텔레비젼을 보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한 쪽에서는 죄 없이 같은 동포가 절규하며 죽어가고 있는데,
저 텔레비전의 다리를 흔들어 대는 춤은 누그를 위한 것인가 하는 배신감이었다."
mbc 이외에도 kbs와 세무서도 불에 탔다.
신군부는 이 방화들을 '폭도론'의 증거로 tv 등을 통해 계속 보여주었다.
5월 21일
오전 10시경 금남로에는 10만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시민들은 일단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시외곽으로 철수시키겠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약속한 정오가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후 1시 정각, 건물 외부에 설치된 확*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건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를 알리는 신호였다.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를 정면으로 맞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공수놈들은 같은 동족을 살상하고도 쓰러진 사람들을 옮기지 못하도록 연발로
위협사격을 해대었다. 아직도 공수부대놈들의 사격선 부근에서 부상한 채로 살려달라고
외치는 시민들의 애원소리는 처절했고, 이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피를 끓게했다.
공수놈들은 아직 죽지 않고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시민들을 구하려고 뛰어나가는 시민들에게조차 사격을 가해 사살해버렸다.
부근 건물의 벽에 바짝 붙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시민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 박남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샘물, 1988)
21일 저녁, 드디어 시민군은 계엄군을 도청에서 몰아내고 점거하는데 성공한다.
5월 22일
22일 비공식적인 정전이 성사되고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한 시민 수습위원회와
신군부 사이에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날 계엄당국은 김대중을 광주폭동의 배후라고 발표했으며,
일부 특전사 지휘관들은 무력을 동원해 광주 '폭도들'을 '소탕'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두환은 정석환에게 "최장군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을 터이니
용기를 잃지말고 분발하라고 전해달라"며 전두환 자신의 명의로 금일봉 1백만원을
최웅에게 전해달라고 지시했다.
5월 24일
공수부대는 지원동 주남마을을 출발하여 학동과 진월동을 거쳐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는
야산으로 철수하던 중 진월동에 이르러 인근지역에 장난삼아 총질을 가했다.
저수지에서 멱을 감고 있던 아이들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자 아이들은 둑 너머로 피신했지만,
전남중학교 1학년이었던 박광범이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또한 진월동 동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도 무차별 집중사격을 가했다.
모두 피신했지만 신발이 벗겨져 뒤돌아섰던 효덕국민학교 4학년 전재수는
총에 맞고 즉사했다.
5월 26일
전남 도청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내외신 기자회견이 열렸다.
미국의 일간지 <볼티모어 선>지의 기자 블레들리 마틴은 이 기자회견에서 만난
광주항쟁 지도부의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5월 27일 0시를 기점으로 광주의 시외 통화가 끊기자 도청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계엄군이 진입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우리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산 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하여,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자,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라."
5월 27일
새벽 4시쯤 도청 앞은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으며,
금남로를 중심으로 시가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장갑자 위에 장착된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비추는 가운데 계엄군은 항복을 권유하는 최후 통첩을 방송했다.
그러나 도청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곧 총성이 울림과 함께 계엄군의
서치라이트가 박살났다. 다시 캄캄한 어둠이 내리깔렸고 계엄군의 일제사격이 개시되었다.
달아나던 시민군을 살해했던 계엄군은 8명의 투항자들을 전부 사살하였다.
한 계엄군 병사는 한쪽 발을 시민군 포로의 등에 올려놓고 사격하면서
"어때, 영화구경하는 것 같지?"라는 농담까지 던졌다.
"시민군들이 모두 정면으로 응사하는 동안 뒷담을 넘어 들어온 3공수 특공대는
도청 건물로 잠입하여 보이는 대로 총을 난사하고 여기저기 수류탄을 까넣었다.
그리고는 확인사살까지 했다. 많은 시민군들은 특공대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지만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그 날 이후
광주학살의 참상을 목격한 후 서울로 올라왔던 서강대생 김의기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5월 30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글을 뿌리면서 투신 자살했다.
후일,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어 신고가 접수되지 않은 사망자 수까지 합하면
전체 사망자 수는 2천명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처음부터 사상자수를 은폐하기 위해 사상자가 발생하는대로 트럭에 싣고
아무도 모를 곳에 파묻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출처 : (이건 제가 캡처한 지식채널이 아녀요~ ^_^) 다음 - 공돌이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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