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검색 결과(34);
-
-
-
-
[밀리터리] 북한 무기 수송기
미국의 대북 특사 보즈워스가 다녀간 직후 북한은 미사일 등을 실은 수송기를 평양 순안 비행장에서 출발을 시켰고, 이 수송기가 태국의 돈므앙 비행장에 급유차 착륙을 하였고 미국 정보부와 태국 정부가 긴밀히 협조하여 수송기의 화물을 수색 압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정사들도 구속 수감되어 12일간 조사를 받게 될 모양이다. 보즈워스 특사가 북한과의 회담 결과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라 했고, 북한이 6자 회담에 긍정적으로 반응을 했다고 전했다. 메스컴에서는 북한의 이중성에 대한 기사로 가득하다.
북한은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러한 자원을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 들인다. 이에 못지 않게 외화 소득의 꽃이라면 단연 무기 수출이다. 북한은 오랜 동안 무기를 제3세계에 판매하므로써 수많은 외화를 벌어 들여 왔다. 이번 사건도 북한의 수출 관행에 따른 행위였다고 본다. 앞으로도 이런 관행은 제제를 받을 것이며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제제는 당연한 일이다.
시기 선택을 잘못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이나 6자 회담 참가국들이 북한의 6자 회담 복귀를 기다리고 있고 이즈음 미국 보즈워스 특사가 평양을 방문하여 아주 유익한 대화를 마쳤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화에 눈이 먼 북한이라도 대량 살상 무기의 제 3세계로의 수출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세계 각 국과 유엔이 북한의 무기 수출에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외화가 급해도 돌아 갈 줄 알아야 한다. 돌아 간다는 말의 의미는 우선 북미 회담을 통해 6자 회담에 복귀하는 것이 순서이고, 그 후 미국과 6자 회담 참가국들... 그리고 유엔 제제가 해지된 그 이후에 대량 살상 무기의 수출을 제외한 건전한 국제적 경제 활동으로 인한 외화 획득에 주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북한이 6자 회담을 통해 핵을 완전히 폐기한다면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지원을 할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진정으로 북한 정부와 주민들을 위하는 일인지를 신중히 저울질 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세계의 감시망을 피해서 무기를 수출하는 일은 앞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핵을 폐기하는 것이 세계와 더불어 북한의 살 길인 것이다.
지난 13일(현지시간) 최종 목적지가 우크라이나로 보도된 바 있는 북한 무기 운송 혐의로 억류된 그루지야국적의 수송기의 최종목적지가 파키스탄과 중동의 테러조직일 수 있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14일 태국 현지 언론에 따르면 북한산 무기 중 일부는 스리랑카와 중동에 갈 목적이었다는 승무원들의 진술이 나왔다. 이들은 북한산 무기 35톤을 운송하다 적발된 혐의로 태국 정부에 의해 억류돼 승무원 5명 등은 추가조사를 위해 구금명령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그러나 조종사가 태국 정부 당국에 스리랑카를 향하고 있었다고 말하고,우크라이나가 최종 목적지라고 밝히는 등 진술이 엇갈리고 있어,정확한 최종 목적지를 확인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한편,억류된 그루지야국적의 수송기에는 이른바 '공중조기경보기 킬러'(AWACS killer)로 불리는 미사일이 실려 있을 수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NYT는 14일 인터넷판에서 태국 언론들이 보도한 수송기의 화물칸 사진을 살펴본 미국의 무기 전문가 말을 인용, 'K-100'이라고 쓰인 상자들에 대해 추측하기로 이 무기는 미국, 이스라엘 등이 운용하는 공중조기경보기(AWACS) 타격용 미사일인 K-100 미사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미국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NYT와 인터뷰에서 태국이 압류한 북한산 무기의 목적지를 이란일 것으로 본다며, 이렇게 이란이 북한으로부터 사들인 무기가 나중에 하마스나 헤즈볼라로 흘러들어 가는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북한이 무기를 수출할 때 자주 이용했던 선박이 아닌 수송기를 이용한 점에 대해서도 미국의 추격설 등 북한 선박에 대한 국제적 감시가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백악관의 한 관계자는 이번 태국 정부의 북한 무기 압류 조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874호를 오바마 행정부가 강력하고도 공격적으로 이행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고 NYT는 전했다.한편,원유 시추 장비가 실린 것으로 알고 있었고 불법 화물 적재 사실은 몰랐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승무원들에 대해서는 12일 동안의 구금 조치가 취해졌다.이들 승무원들은 4명은 카자흐스탄 출신이고 1명은 벨로루시 출신으로 불법 무기 소지 등의 혐의로 태국 경찰에 의해 13일 구금됐다.
자료제공 : 언합뉴스
-
-
[정치·경제·사회] 세계 보도 사진 **1955 ~ 2006**잠시 생각의 시간을~~~
세계 보도 사진 / 1955 - 2006
세계보도사진전은 네덜란드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보도사진재단 (World Press Photo Foundation)이 주관한다. 보도사진은 사진기자의 순간의 선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동감과 현실감각을 깨우쳐 주는 대단한 동기부여라 생각한다. 보도사진을 사건에 대한 소식으로 단순히 받아들이기 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느끼고 지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노력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Mogens von Haven, Danemark, 1955 "나 찾아 봐라!"덴마크의 모터사이클 경기중 한 선수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
Helmuth Pirath, Deutschland 1956, Keystone Press
" 어느 귀향 " 1956년 소련에 전쟁 포로로 있다가 풀려난 독일 병사가 딸과 재회하고 있다
Douglas Martin, USA 1957 The Associated Press
" 그녀의 꿈 " 1957년 미국 노스캐럴라이너의 샬로테 도로시 카운츠는 하딩 고등학교의 첫 흑인 입학생
가운데 한명이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인종 차별 철폐 정책으로 입학이 가능했지만
돌팔매를 맞는 등 온갖 모욕에 시달리다 나흘 만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
Stanislav Tereba, Tschechoslowkai 1958, Vecernik Praha
" 눈속에 비 "
Yasushi Nagao, Japan 1960, Mainichi Shimbun 1960년 10월 12일
토쿄의 히비히 홀 연설하고 있는 일본 사회당 당수 이네지로 아사누마를 한극우파
대학생이 단상으로 올라와 칼로 찌르고 있다
Hector Rondon Lovera, Venezuela 1962, Diario La Republica
" 왜? " 1962년 6월 4일 베네주엘라의 어느 해군기지 총에 맞은 한 병사가 군목의 품에 안겨 죽어가고 있다
신부가 저격자를 향하여 무엇인가 를 말하려는 듯하다 이 사진을 찍은 로베라는 저격수의 총알 세례를
피하기 위해 기어 다녀야만 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사진이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후일담을 밝혔다
Malcolm W. Browne, USA 1963, The Associated Press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1963년 6월 11일 베트남의 사이공에서 한 승려가 정부의 종교 탄압에 항의하여
분신을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종교 탄압이 심했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Don McCullin, UK 1964, fur "The Observer/Quick"Life"
"사이프러스의 죽음" 1964년 4월, 그리스-터키 내전으로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이 통곡하고 있다
Kyoichi Sawada, Japan 1965, United Press International "
깊은 강물 " 1965년 베트남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자 아이들을 데리고 물을 건너는 어느 모정
Kyoichi Sawada, Japan 1966,
United Press International " 미군과 탱크 "
1966년 2월 24일 베트남 베트남에서 미군들이 베트콩의 시체를
이렇게 묘지로 운반하고 있다
South Vletnam, 1967 Co Rentmeester / Life
Eddie Adams, USA 1968, The Associated Press
" 잔인한 날 " 1968년 2월 1일 베트남 사이공에서 병사들이 베트콩으로 짐작되는 한 사나이를 거리 모퉁이로 끌고가
심문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권총을 꺼내어 사나이를 겨누더니 즉시 방아쇠를 당겨 버렸다
Londonderry Northern lreland, 1969
"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 1969년, 북아일랜드 런던데리에서 영국군과 대치 중인 젊은 가톨릭 신도
Hanns-Jorg Anders / Stern
Wolfgang Peter Geller 1971, Deutschland
" 한낮의 .." 1971년 12월 29일 독일 자아르브뤼켄 경찰과 은행 강도 사이의 총격전
Unbekannt 1973, The New York Times
" 구테타 " 1973년 9월 11일 칠레의 산티아고 살바도르 알렌데 대통령은 민주적인 투표에 의해 당선되었으나
그를 실각시키려고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대통령이 관저에서 철모를 쓰고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있다
대통령은 이 사진을 찍은 뒤 곧 저격 당했다고 한다
Ovie Carter, USA 1974, Chicago Tribune
" 가뭄 " 1974년 7월 나이지리아의 카오 여기에 한 가뭄속에 어린아이가 있다 아프리카 대기근의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1만6000km를 헤맨 끝에 기아의 가장 큰 희생자인 어린이의 표정을 잡는다
Stanley Forman, USA 1975, The Boston Herald
" 아파트에 불이 났다 " 1975년 7월 22일 미국 보스턴 모녀가 소방 사다리를 타고 피신하려고 했으나
그만 사다리가 부실하여 무너져 버렸다 떨어져 내린 것은 소방 사다리와 화분만이 아니었다
Beirut, Lebanon, 1976 1976년 레바논 베이루트
Leslie Hammond, Sud-Afrika 1977, The Argus
"혼란 했던 날 " 1977년 8월 남아프리카 서부 모데르담 집을 잃은 철거민들이 항의 데모를 하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쫓기고 있다
Tokyo, Japan, 1978 1978년 일본 도쿄
David Burnett, USA 1979, Contact Press Images " 아픔의 존재 "
1979년 11월 타일란드의 타 카오' 에 있는 피난민 수용소
한 캄보디아 여인이 식량 배급을 기다리면서 아기를 재우고 있다
Michael Wells, UK, 1980 " 굶주린 소년과 선교사
" 1980년 4월 우간다의 카라모자 사진기자 마이크 웰스' 는 굶어 죽는 사람 모습을 찍어 사진전에 참가하고 상금을 타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어찌되었는지 그의 사진이 뽑히고 상금을 받게 되자 그는 당황했다고 한다
Manuel Perez Barriopedro, Madrid, Spain, 1981 1981년
스페인 마드리드 쿠데타를 일으킨 스페인 경찰과 헌병이 마드리드의 의사당을 장악했다
Manuel Perez Barriopedro / EFE
Robin Moyer, Beirut, Lebanon, 1982 1982년 레바논 베이루트
Mustafa Bozdemir, Turkei 1983, Hurriyet Gazetesi " 어머니의 통곡 " 1983년 10월 30일
터키 동부의 Koyunoren. 큰 지진이 일어나 다섯 명의 아이들을 한꺼번에 땅에 묻게 된 여인의 통곡
Pablo Bartholomew Indien, Gamma, 1984, Gamma " 아이의 죽음 " 1984년 12월
인도 보팔시 보팔 화학 단지에 가스 누출 사고 있었다 사고로 독가스에 죽은 시체들이 트럭에 실려 나왔는데
그 중엔 어린 아이도 있었다 숨진 아이의 눈이 산업화로 인한 대재앙을 고발하고 있다
" 슬픈 눈망울 " 1985년 11월 16일 콜럼비아의 아르메로. 소녀의 이름은 오마이라 산체츠이고
나이는 12살이다 화산이 폭발하고 건물이 무너지자 갇히게 되었는데 사진 작가는 소녀가 의식을 잃지 않도록 계속
그녀에게 말을 붙히며 노력했지만 구조되지 못한 채 60시간이 되었을 때 의식을 잃고 죽어갔다
Alon Reininger, San Francisco, USA 1986, Contact Press Images " 에이즈 " 1986년 미국 샌프란 시스코
카포시육종이라는 에이즈 증상을 앓는 한 미국인 환자 그는 무엇을 희망하며 살았을까?
Anthony Suau, USA 1987, Black Star. " 어머니의 절규 " 1987년 12월 18일
한국 구로동 한 어머니가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한 아들이 체포된 후 시위진압 경찰에게 애원하고 있다
당시 한국의 아픔이 세계인의 눈과 같이 나눈 한장의 사진이 아닐까 ..?
David Turnley,Black Star 1988, Detroit Free Press
1988년 러시아 레니나칸
Charlie Cole 1989, Newsweek " 단신으로 탱크 막아선 청년 " 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인민해방군 탱크부대 앞을 단신으로 가로막았던
사진 속 청년은 1만여 명의 시민이 죽거나 다쳤던 이날 이후 종적을 감추었다
Georges Merillon, 1990, Gamma 1990년 유고슬라비아 코소보
David Turnley, USA Black Star/Detroit Free Press " 마지막 날 " 1991년 2월 이라크 미군 하사관
켄 코자키에위츠가걸프전 전투 마지막 날 오발사로고 사망한 동료 병사 앤디 앨러니즈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다
James Nachtwey 1992, Bardera, Somali
소말리아의 한 어머니가 기근으로 죽은 아이를 묘소로 옮기고 있다
Larry Towell 1993, Palestine Territories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한 소년이 장난감 권총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James Nachtwey 1994, Rwanda " 고통 " 1994년 6월 르완다 투트시족 반란군에게 의심을 받아
후투족 극우민병대에게 잔혹하게 당한 남자 고통 그 이상의 모습이 눈가로 였보인다
Lucian Perkins 1995, Chechnya
체첸전 피난민을 태운 버스에서 한 소년이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Francesco Zizola 1996, Kuito, Angola " 지뢰속 아이들 " 1996년 앙골라 퀴토 앙골라 내전의 지뢰 피해
어린이들 어린이들 모두 말이 없고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더럽고 추레한 모습이다
7만 명의 앙골라인 또는 150명당 1명꼴로 대인 지뢰로 다리를 잃었으며 이 수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치이며 세계 어느 인구 중 가장 높은 인구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Hocine 1997, Algiers, Algeria " 오열 " 1997년 9월 23일 알제리 벤탈라 학살 사건 이후
사상자들이 안치된 병원에서 비통해 하며 울고 있는 여성
Dayna Smith 1998, The Washington Post 1998년 유고슬라비아 코소보
남편을 잃은 코소보 해방군의 아내를 위로하는 친지들
Claus Bjorn Larsen 1999, Albania 1999년 코소보 코소보 내전의
인종청소를 피해 도망쳐온 알바니아인 부상자
Lara Jo Regan 2000, Texas, USA
Erik Refner 2001, Jalozai refugee camp. 2001년 아프가니스탄.
난민 캠프에서 탈수증으로 숨진 한 살짜리 아이의 잠자는 듯한 얼굴 표정이다
Eric Grigorian 2002, Qazvin Proince, Polaris Images " 아버지의 바지 " 2002년 이란 서북부 지방을
강타한 지진 지진으로 아버지를 잃은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가 묻힐 구덩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가 남긴 바지를 끌어안고 우는 것뿐 그리고리언 씨는 만사를 체념한 듯한 이 소년의
모습을 포함해 5장의 사진을 찍은 후 더는 셔터를 누를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란에서는
1991년 이후 1000여 차례의 지진으로 1만7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Jean- Marc Bouju, France The Associated Press 2003. 2003년 3월 남부 이라크 나자프 시에
있는 미 101 공수사단 3여단 내의 포로수용소 겁에 질린 4살난 자신의 아들을 안고서 달래주고 있다 사진을 찍은
부지 기자는 전쟁의 참혹함을 전달하기보다 전쟁속에서 피어난 부자간의 애뜻함과 그를 지켜보던 병사의
동정심 등을 한컷에 담았다 사진 찍힌 이후 이 두 부자의 거취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Arko Datta 2004, lndia, Tamil Nadu " 지진 " 2004년12월 26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해안에서 발생한
강력한 지진으로 인도, 타밀나두주 쿠달로드에서 쓰나미에 희생된 친지를 보며 한 여인이 오열하고 있다
어촌으로 구성된 인도 타밀나두주는 최악의 피해를 입은 곳 중의 한 곳이며 집과 인명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한순간에 쓸려 갔다
Finbarr O'Reilly 2005, Tahoua, Niger, 1 August " 아기의 손 " 니제르 타우아의 비상급식소의 어머니와
아이 2005년월1일, 니제르 서북부 타우아 지방의 한 마을에서 영양실조에 걸린 한 살짜리 아기 알아싸
갈리소우가 앙상한 손가락으로 엄마 파토우 오우세이니의 입술을 누르고 있다
Spencer Platt 2006, Spencer Platt, USA, Getty Images 2006년 8월 15일 이스라엘 과 레바논 헤즈볼라.
이스라엘 폭격에 의해 파괴된 베이루트 남쪽 인근을 레바논의 부유층 자제들이 지나가는 모습 자신의
조국에 펼쳐진 현실감각을 잃은 듯한 철딱서니 없는 젊은이의 얼굴에 레바논의 미래가 엿보인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꾸거나 속이지 않고, 오류나 혼동 없이
응시하는 것은, 모든 창작물들보다도 그 자체로 더 고귀하다.
The contemplation of things as they are, without substitution or imposture,
without error and confusion, is in itself a nobler than a whole harvest of invention.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
[밀리터리] 레바논 내전
레바논은 1943년 11월 독립한 이래, 줄곧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세력과 이슬람교 세력 사이에 정권 쟁탈을 위한 갈등과 대립이 계속되었다. 즉 친서구적이고 보수적인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원리주의 색채가 짙은 급진적 이슬람교도 사이의 불균형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그러다 1958년 5월 그리스도교도인 대통령 샤문이 친서방정책을 표방하고, 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재선을 꾀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슬람 세력이 국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부터 레바논은 내전에 돌입하였고, 이 내란을 막기 위해 미군 1만 5000명이 수도 베이루트에 상륙해 내전은 끝나고, 정국도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그 뒤 1970년 9월 요르단에서 추방당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레바논 남부 지역에 난민촌을 건설하고, 이스라엘과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이어 1972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베이루트에 본부를 설치하면서 다시 내전에 돌입하였다. 1975년에는 이슬람 게릴라들이 레바논 정부와 그리스도교 세력을 상대로 국지전을 전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시리아가 사태 수습을 핑계로 정규군을 투입하기도 하였다.이 때부터 1976년 10월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레바논 전역이 내전에 휩싸여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이스라엘도 1978년부터 수차에 걸쳐 레바논을 침공해 이후 레바논내전은 이슬람 게릴라 단체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1982년 8월 이스라엘과 레바논 사이에 휴전이 성립되고, 1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축출되었다.1990년 헌법 개정을 통해 정국이 다소 안정된 뒤에도, 이슬람 무장단체인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사이의 무장투쟁은 2000년 5월 이스라엘이 남부 레바논에서 철수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2005년 현재까지도 소규모 국지전의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1975년부터 1990년까지만 내전으로 인해 15만 명이 죽었고, 1978년부터 1999년까지 남부 레바논 지역에서만 227명의 국제연합군이 사망하였다.
-
-
-
[밀리터리] US SOCOM 에 대하여...
USSOCOM ( United States Special Operations Command )
1. 창설배경
①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1979년 이란은 팔레비 국왕의 독재에 저항하던 호메이니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미국과 극히 사이가 안좋았던 호메이니였지만 정권 장악후 이란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미국과 화해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격분한 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에 난입하여, 직원과 미국민을 인질로 삼은 사건이다. 사건 발생 1979년 11월 4일부터 1981년 1월 20일까지 무려 444일을 억류하고 있었다. 이 기간 중 미국은 인질 구출을 위해 특공대 투입을 결정하고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작전 지휘관은 델타의 창시자인 찰스 베크위스 대령이었다. 하지만 작전은 처음부터 삐그덕거렸다. 해군, 해병, 공군, 육군 모두 이 작전에 참가해서 한 건 올리기를 원한 나머지 간결해야할 작전이 상당히 복잡하게 전개됨으로 인해, 구출을 위해 파견된 항공기끼리 이란 사막에서 충돌... 작전은 대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 때문에 베크위스 대령은 옷을 벗어야만 했다.
② 레바논 폭탄 테러 사건
1983년에 레바논 미해병대 사령부에 차량폭탄테러가 발생 미해병대원 241명이 사망했다. 이는 신흥 조직인 헤브볼라가 자행한 것으로 헤즈볼라의 창설해에 일으킨 사건이기도 하다. 헤즈볼라는 호메이니의 무슬림 군국주의에 심취한 조직으로 시아파 무슬림 조직이다.
2. 창설
위 창설배경으로 인해 미국은 특수전에 관해 통합적이고, 일원화된 지휘체계를 구성할 필요성을 느끼고 미국 상원의 심도 있는 논의 끝에 윌리엄 코헨, 샘 넌 두 상원의원의 주도로 코헨-넌 법안을 통과시켜 1987년 SOCOM이 탄생하게 된다.
3. SOCOM 의 구성
소콤은 아래의 총 5개 사령부 ( 일부에서는 JSOC를 제외한 4개 사령부로 보기도 하지만 브랜치로서의 역할로 보기엔 현재 너무 중요시되고 있어 5개 사령부로 본인은 생각한다 ) 로 구성된다. 각 사령부 예하에는 웬만한 사람들은 알만한 특수부대들이 배속되어 있다. 초기에는 해병대가 포함되지 않았으나, 이후 대테러 전쟁이 가속화되면서 포함되게 된다. 특히 JSOC 는 미국 내의 테러에 대하여 미군을 투입할 수 있는 부대를 예하대(Delta, Devgru 등)로 두고 있다. 미국은 헌법에 따라 국내 테러에 대해 미군을 투입할 수 없으나 여기에 포함된 팀은 민병대소집법에 의거 일시적으로 투입이 가능하다. 원래 이란 대사관 인질 구출 작전, LA 올림픽 테러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사령부로 SOCOM 보다 먼저 창설되었다. 각 사령부 예하대를 일일이 열거하기는 곤란하므로 대표적 부대만 써놓겠다.
① USASOC ( U.S Army Special Operations Command ) - SFG, Delta, Ranger, 160th SOAR 등
② AFSOC ( Air Force Special Operations Command ) -720th STG ( Pararescue ) 등
③ NSWC ( U.S Naval Special Warfare Command ) - SEAL, DEVGRU 등
④ MARSOC (Marine Forces Special Operations Command ) - Force Recon, Scout Sniper 등
⑤ JSOC (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 ) - Delta, DEVGRU, 160th SOAR 등
아래는 차례대로 각 사령부의 엠블럼이다.
부대 구성의 예로 USASOC 의 SFOD-A, B, C, D 가 있는데, 이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육군의 USASOC 소속 SFG (Special Force Group) 는 SFOD ( Special Forces Operational Detachment ) A ( alpha ), B ( beta ), C ( charlie ) 가 있다. SFOD-A ( = A Team ) 는 작전 최소단위인 12명 요원( 대위가 지휘관 )으로 구성되어 있다. SFOD-B 는 SFOD-A 6개 팀을 지휘하는 소령이 이끄는 중대급 제대, SFOD-C 는 SFOD-B 3개 팀을 지휘하는 중령이 이끄는 대대급 제대가 된다. 이들은 모두 그린베레다. 이들 중 선별된 특출난 팀이 바로 SFOD-D ( delta, 델타포스 )다. 이는 대령급 지휘관이 이끌며 연대급 수준이다. 델타는 SFG 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델타의 요원은 그린베레에서만 선발되는 것은 아니다.
p.s 잘못된 내용 있으면 댓글 바랍니다~
그런데 이미지 사이즈가 조정이 안되네요... 전에는 잘 되었던 것 같은데...
해담작성일 2007-05-23추천 6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