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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역사로서의 5·18] 유언비어와 무장폭동
‘유언비어와 무장폭동’
역사로서의 5·18
김대령씨, 세계기록유산 등재 분석
영화 ‘화려한 휴가’ 거짓 팔아 흥행
광주사태의 진실 재조명을 위한 ‘역사로서의 5.18’이 전4권, 1,560쪽의 방대한 실증자료로 엮어져 5월초에 발매된다. 저자는 재미 사학자인 김대령씨, 출판은 비봉출판사가 맡았다. 비봉출판 박기봉 사장은 이 책이 5.18관련 묻혀진 진실을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방대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부분을 경제풍월에 제공했다.
묻혀진 진실 재조명의 초석
저자 김대령씨는 프롤로그를 통해 대한민국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포럼 사무국장 김효선씨의 권유와 전 육사교수인 정창인 박 사(한미애국단체연합회장)의 도움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또한 거짓 선전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기록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내용을 읽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집필했다고 한다.
출판을 맡은 비봉출판 박기봉 사장은 서울상대를 나와 증권사 간부로 근무하다 출판인으로 전신하여 국익과 공익을 위한 기획서적을 다수 출판했다. 북한이 공개한 대남공작사를 엮은 ‘북의 지령 따라 움직이는 남쪽 사람들’, ‘붉은 수선화’, ‘통일교향곡’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에 내놓은 ‘역사로서 5.18’에는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5.18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 △광주 청문회에 드러난 5.18 비화, △5.18재판 법리의 모순 등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전4권 주요목차 별항).
<역사로서의 5.18 전 4권 목차>
<제1권>제1장 : 유언비어 잔치판△고의적으로 유포된 박관현 사망설 △헬기 기총사격 유언비어 △미 항공모함 시민군지원 유언비어 △차명숙과 전옥주의 화려한 유언비어 가두방송 △유언비어로 모집된 시민군
제2장 : 사전준비 폭동인가, 사후 저항운동인가△1980년 이전 무장봉기준비 △사전 무장봉기 계획입증5.18기록물 △탈북자와 윤한봉의 일치된 증언 △민중봉기선동한 5.18설명서 △왕년의 빨치산이 선포한 투쟁선언 전단 △광주사태에 대한 북한의 입장
제3장 : 날짜별 주요 5.18 사건△5월 17일 광주사태 전야 △사태의 발단 △화공에 의한 폭력시위 △차량 돌진에 의한 도시게릴라 방법 △무장시민군의 도청함락 △뜻밖의 반전 △광주 코뮌 권력을 장악한 무장봉기파△전원 자폭결의 △새벽의 마지막 전투
<제2권>제4장 : 외부에서 침투한 시민군△가짜스님 손성모 간첩과 왕년의 빨치산 스님 △김대중이 간첩 손성모 북송 △20사단 지프차 탈취시민군 △무기탈취, 무장봉기 시민군 600명 출현 △불순세력이 있었다는 낌새들 △5.18광주영웅 대남공작원 장중한 △괴한들이 탈취한 지프차들의행방 △군경과 시민군 뒤바뀐 제복 △학생 없는 학생시민군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낌새와 단서들 △북한방송 청취로 시사정보 입수한 시민군
제5장 : 시민군과 계엄군, 누가먼저 살았나
제6장 : 시위대와 시민군 사상자 발생원인△시민위에 떨어진 돌과 화염.병 △시민군간의 총격전 △시민군 운전미숙 사고 △광주교도소 습격 △시민군의 수류탄 폭발
<제3권>제7장 : 5.18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김대중과 정동년의 광주청문회 위증 △국민인식과 다른5.18재판 판결 △꼼수로 빚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법리 △내란설과 제3세력 개입설 △박현채의 민관 선동논리 △사라진 5.18 비밀문서와 보존된 기록들 △1심의 황당한 판단,2심의 황당한 법리해석
제8장 : 5.18판결과 상반된 사실들
△5.18 이전 성명서 대필한 왕년의 빨치산 △시민군이 최규하 대통령에 충성하는 세력이었나 △신현확 물러가라는 구호의 꼴불견
제9장 : 5.18 국민결집 판결과 상반된 사실들△약탈과 도덕성 결여 △무장봉기파와 수습위의 다툼 △무장시민군을 무서워했던 시민들 △코뮌주의자들과 수습위간 다툼 △북한지령문처럼 보이는 5.18 성명서 △차량 약탈한 헌법기관? △경상도 차량 불 지르는 헌법기관? △지역감정 자극 유언비어
제10장 : 중학생 시민군이 헌법기관?△중고생 봉기위원회 △중고생 청소년시민군 △송정리서죽은 영암 고등학생 △윤기권의 월북 △고등학생 시민군 △김효석의 무응답
제11장 : 광주 해방구에 대한 법리해석 문제△광주해방구 주역 코뮌주의 혁명가들 △코뮌주의자들에대한 서로 다른 법리잣대 △코뮌주의자들의 민족민주혁명론
<제 4권>
제 12장 : 5.18 민족민주에 대한 법리해석 문제△자유민주 대항마 민족민주 △남조선 민족해방 전선과 광주운동권 △남조선 민족해방 전선과 북한관계 △5.18의 반미이념 △북한이 주도하는 통일운동 △왕년의 빨치산 전용어 △대남공작용어 혁명역량 △북한 공작금 수령한 민족민주 진영인사들 △김대중 후원자 김일성 △김일성이 문익환에게 보낸 밀사 △가톨릭 농민회 서경원 간첩사건 △광주사태 배후 장기표의 여간첩단사건 △김낙중 간첩사건
제13장 : 광주운동권사에 비춰본 5.18△박현채가 원격조정한 민청학련사건 △인민혁명당과 광주운동권 △광주일고 동문들의 박정희 암살음모 △황석영의 북한 5.18영화 ‘ 님을 위한 교향시’ △황석영의 밀입국 배경 △빨치산과 선후배관계 광주운동권 △에필로그, 부록1~5, 참고문헌 등
‘화려한 휴가’ 유언비어 팔아 흥행
저자는 영화 ‘화려한 휴가’는 실화가 아닌 거짓 선전 유언비어들을 팔아 흥행에 성공했지만 만약 관객들이 이를 사실로 받아드린다면 대한민국 국군은 ‘시민학살 기계’로 낙인 찍혀 완전히 명예가 훼손된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5.18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60만쪽에 들어있는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녹취록을 분석하면 5.18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과도정부와 김대중씨의 ‘거리정치’와의 충돌이며 5.18재판은 시민군의 무장봉기를 정당화시켜 준 판결로서 “거짓이 진실을 지배했다”고 풀이했다. 저자는 지난 “30년 이상 5.18담론들은 실상 보다 허상이 많았기에 역사로서 재조명돼야 한다”고 믿기에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전옥주의 화려한 거짓 가두방송
5.18의 발단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여수 돌산으로 가고 있을 때 누군가 “박관현이 죽었다”고 외친 거짓선전으로부터 시작됐다.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선동한 말이 광주시내로 퍼지자 사실 확인도 없이 군중들이 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지고 경찰을 납치했지만 5.18재판은 그들을 ‘헌정질서 수호행위’로 판단했다.
유언비어의 위력을 확인한 선전조는 5월 19일 전옥주를 데려다가 ‘죽은 학생이 내 동생’이라는 거짓 가두방송을 시켰다. 그녀는 남동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옥주와 박관현은 성씨도 달랐다. 그런데도 전옥주의 거짓 가두방송이 광주사태의 쓰나미를 불러왔다. 영화 ‘화려한 휴가’ 속에 전옥주는 정의로운 간호사로 나오지만 말짱 허상이다.
다음날에는 “전남대 총장이 박관현 사망 충격으로 할복자살 했다”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나오고 ‘전두환 광주 살육작전’,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려 왔다’, ‘최규하 대통령이 사살되었다’는 유언비어로 발전했다.
저자는 이 같은 사실을 들어 유네스코에 등재된 5.18 기록물이 거짓말을 시위 선동도구로 이용한 문화유산이냐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전후배경
저자는 5.18재판이 허상을 숨기기 위해 5.18의 전후관계를 짚어 보지 않고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만을 따져 물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DJ세력과 범 운동권은 5월 20일 총궐기로 최규하 정부를 전복시킬 목적으로 신현확 총리에게 19일까지 총사퇴 최후통첩을 보냈다. 최 대통령의 중동순방을 계기로 시위대가 청와대로 진격하려 했지만 경찰은 무방비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괴한이 버스를 탈취하여 경찰관을 압살, 부상시키자 경찰관들은 혼비백산 했었다.
그날 저녁 시위대 본부차량이 서울역에 도착하자 ‘민청협’의 사주를 받던 유시민은 청와대로 밀고 들어가자고 했고 심재철은 시위대의 해산을 주장했다.
1974년 국가전복을 음모했던 민청학련은 빨치산 출신 박현채가 원격조정 했으며 이 사건 관련자들이 ‘민청협’으로 다시 모여 이날 시위대를 원격 조정했던 것이다. DJ는 1980년 4월 이 민청협을 끌어안아 간부들에게 유급 홍위병 역할을 맡겨 가두시위를 주도케 했으며 이 무렵 차기집권용 예비내각까지 구성했었다.
이 같은 배경 속에 5월 20일 총궐기를 계획하고 있을 때 5월 15일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버스를 탈취하여 남대문경찰서 저지선을 돌파하여 시위대가 서울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 버스 탈취 폭도가 탈북자들의 증언과 체포간첩들의 심문결과 북한군 특수부대원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사건을 운동권 용어로는 국가전복의 기회를 놓친 회군이라는 뜻으로 ‘서울역 회군’이라고 표현한다.
내무부장관, ‘군 개입 불가피’ 보고
이를 계기로 내무부가 치안유지에 한계를 느껴 심재철에게 전화로 시위대의 해산을 호소했고 김종환 내무부장관이 신현확 총리를 찾아가 “경찰로서는 더 이상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니 군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요청했다. 이어 신 총리가 중동에서 귀국한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5월 17일 심야에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되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선포했다는 요지가 ‘5.18의 전후관계’라는 말이다.
저자는 이 같은 사태발전에 따른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쿠데타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5.18 재판이 시민군의 무장봉기를 정당화시켜 주기위해 계엄확대를 쿠데타로 해석할 수밖에 없어 ‘최규하 물러가라’고 외친 시민군을 마치 ‘최규하 수호세력’이라고 억지 판단한 꼴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되면 5.18 시민군이 오히려 유신헌법 수호세력이 아니냐는 말이다.
당시 DJ 지지세력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는 유신헌법에 따라 선출된 ‘유신잔당’으로 개헌을 주도할 자격이 없고 타도의 대상이라고 보고 민중봉기를 통한 정권교체를 목표했다. 1979년 이슬람 과격파가 이란의 팔래비 왕정을 전복시킨 호메이니의 혁명을 염두에 두었는지 모른다.
저자는 결과적으로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법적 근거가 전무하다고 해석한다. 5.18 재단 설립자인 윤한봉은 자신이 무장봉기를 총지휘했다고 주장하지만 행동대장일 뿐 배후세력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고 본다. 배후에는 왕년의 빨치산 세력이 따로 있었다고 보기에 5.18 주동자들의 이념운동도 시민군 전체의 이념이 아니었다. 무장 시민군의 다수는 외지인들이었다.
광주시민도 모르는 외지인 5~600명
저자는 5.18 기록물 자체가 시민군 주동자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사상이나 이념이 없었음을 입증한 기록이라고 해석한다. 일부 불순세력 외의 시민군들은 이념집단이 아니었으며 배후세력에 원격조정 됐다고 본 것이다. 이념집단이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 ‘민족민주’, ‘인민민주’ 사상을 말한다.
왕년의 빨치산 박현채가 주창한 사회민주주의를 ‘민족민주’라고 불렀다. 1980년 5월 8일,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민족민주화’ 대성회를 선포할 때의 ‘민족민주화’가 바로 사회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를 뜻한다.
5월 21일, 전남도청 광장에 모인 인산인해는 광주시민이 아닌 탈취한 차량으로 광주 외곽에서 실어온 사람들이다. 도청 주변 시민들은 피난을 가거나 대문을 닫고 숨어 있었다.
이날 오전 8시 낫으로 무장한 세력이 20사단 지프 14대를 탈취하고 9시에는 아세아자동차에서 수백 대의 차량을 탈취했다. 그들의 일부는 38개 무기고를 털고 나머지 일부는 광주 외곽주민들을 실어 날랐다. 그들의 행동은 일사불란했고 전광석화 식이었다.
반면에 광주시민들은 무기고가 어디에 있는지 위치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외지에서 나타난 5~600명이 도청 함락을 지원한 후 5월 26일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과연 그들이 누구였을까 의문이다. 저자는 어느 누가 중학생을 시민군 특공대로 조직할 수 있었겠느냐고 물었다. 광주 학생운동권의 상징인 박현채가 바로 중학생 빨치산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름이 공개된 윤상원, 정상용 등 주동자는 코뮌주의자로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 반국가세력이라는 판결을 받았는데도 5.18 재판이 그들을 헌정질서 수호세력으로 판결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5.18 재판이 진압군은 국헌문란집단, 시민군은 헌정수호기관으로 만들어 냈다. 그렇지만 실상 진압군 가운데 한 명도 국정문관 목적이 없었고 시민군 가운데 한 명도 헌법수호 목적을 말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DJ와 빨치산 출신 박현채
저자는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1980년 봄의 가두시위와 DJ관계를 다시 한 번 소상히 설명했다.
1980년 3월 1일 시국사범들이 복적 되자 DJ는 장남 김홍일을 시켜 사조직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를 급조하여 기존 민청협, 국민연합과 함께 전위조직으로 가동했다.
당시 학생운동권은 복적생협의회 조직을 통해 총학생회를 장악했다. 복적생 장기표, 조성우, 심재권, 이현배 등이 간부직을 맡은 국민연합 사무국이 이들을 지휘했다. 사무국장 장기표가 시위계획을 DJ에게 보고하며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을 방불케 하는 홍위병 역할을 했다.
이들 복적생 중심의 DJ사조직이 비운동권 교수들의 퇴진시위를 벌이고 어용교수로 낙인찍었다. 전남대는 정동년이 퇴직교수를 결정하는 ‘교수 살생부’를 작성했다. 정동년의 전력으로 보면 박현채의 원격조정이 보인다. 1980년 봄 대학 총학생회의 성명서가 획일적인 빨치산 논조로서 박현채가 작성했다.
박현채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배후였으며 DJ는 1978년 ‘민청협’으로 개칭한 후 이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YS편에는 한 명도 가담하지 않았다. DJ가 신민당 대신에 민청협과 손잡고 ‘거리정치’에 나선 배경이었다.
DJ가 YS와 결별하고 거리정치에 나선 것은 그에게 문익환과 박현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현채는 DJ의 성명서 담당비서이자 경제스승이었다. 박의 ‘민족경제론’은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육성을 결사반대하는 논리다. 민청협의 이데올로기도 박의 이념 그대로이다. DJ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도 박이 대필했다. DJ가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와 중화학공업 건설 등 조국근대화 프로젝트를 반대한 것도 박현채의 영향이다.
‘민족경제론’은 운동권 양성 교재로서 북한식 경제체제가 박정희의 산업화 모델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이다. 정치적으로는 ‘민족민주’로서 여기에서 ‘주사파’가 나와 북의 세습체제에 충성하는 것이다.
윤한봉도 수수께끼 구술 녹취록
광주운동권의 요람이자 뿌리는 1960년대 후반 통혁당 간첩단 조직이 침투하여 장악한 써클 ‘광랑’(光郞)이다. 이를 통해 양성된 운동권이 1974년 봄 민청학련 사건을 겪은 후 10.26으로 무장봉기 적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막상 5.18이 개시되자 윤한봉도 모르는 일이 벌어졌다. 누가 누군지 모르는 시민군이 등장하자 윤은 ‘큰일났다’고 말하고 그의 여동생을 애인처럼 변장하여 도망쳤다. 그러니까 광주운동권도 모르는 무장세력을 5.18 재판이 헌법수호 세력으로 둔갑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
윤한봉은 생전 구술 녹취록에서 이처럼 수수께끼 같은 사건은 사학자들이 연구할 몫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렇지만 사망 1년전 그의 증언이 5.18 재판의 법리를 뒤집어 놨다고 저자는 비판했다.
또한 저자는 무기를 탈취한 괴한들이 광주시민이 아닌 외지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강조한다.
5월 20일, 북한 방송이 광주사태를 생중계 하면서 ‘봉기군’이란 용어를 사용한 후 시민군이 등장했다. 그들은 매복하고 있다가 20사단 인솔대를 습격하여 지프 14대를 탈취하고 아세아자동차에서 차량 60대를 탈취했지만 결코 오합지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과연 그들의 정체는 누구일까. 당시 이름이 공개된 광주사태 공작 간첩 손성모는 스님으로 위장하여 활동했고 왕년의 빨치산들도 광주로 몰려들었다. 간첩 손성모는 2001년 DJ가 북으로 송환했다.
월남참전용사 김 기자의 애국헌신
저자는 ‘역사로서의 5.18’을 집필하도록 용기를 준 김동문 기자의 애국적 헌신을 특기했다. 당시 전남매일 제2사회부 차장으로 나주지사에 근무한 김 기자는 월남전 참전 용사로서 시민군의 나주 공작을 막아낸 영웅으로 묘사된다.
당시 시민군이 해남, 진도, 목포로 진격할 때 나주공략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1975년 4월 월남 공화국의 붕괴와 같은 사태로 발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 기자는 나주에 주둔중인 예비군대대와 함께 시민군 진입을 막아내어 시민군들이 광주로 돌아갈 때 송정리 다리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광주 ‘해방구’가 고립상태로 무장봉기가 크게 확산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었다.
당시 김동문 기자는 “유신 언론인 집이냐”는 불순 협박전화를 받고 예비군대대로 피신했다. 반면에 나주군수는 금성산 정상에 있는 대공포 진지로 피신했다.
김 기자가 예비군대대로 피신했을 때 대대장 정모 소령은 “무장폭도가 300m 앞 마을 어귀에까지 도달했다”면서 불안한 모습이었다. 이에 김 기자는 “군인의 임무는 부대의 사수”라고 말하고 “나주에 남아있는 유일한 부대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격려했다.
당시 대대의 현역병은 16명, 예비군을 합쳐도 60명에 불과했다. 무기는 소총이 전부이고 탄약과 식량도 바닥이었다. 사정이 어려운 점을 확인한 김 기자가 “월남전 참전동지로서 나와 운명을 함께 합시다”라고 정 소령을 격려했다.
무장 시민군 차량에서 공포탄을 발사하는 위급상황에서 김 기자는 벗은 지 14년만에 군복으로 갈아입고 현역들과 함께 뜬눈으로 부대를 지켰다. 상급부대와 끊어졌던 통신이 무선으로 간신히 연결되어 식량을 요청했더니 헬기가 날라 왔지만 시민군의 위협으로 착륙이 어려웠다.
김 기자가 기지를 발휘하여 침낭 속의 흰 천을 뜯어내 착륙지점을 표시했더니 헬기가 M60 기관총과 실탄상자만 내려놓고 돌아갔다. 정 소령이 다시 본대와 교신으로 “부대의 사수가 어렵다, 폭도들이 공격해 온다”고 다급한 지원을 요청했지만 “발포 절대 불가”라고만 지시하니 고립무원 지경이었다.
고립무원 지경에서 대한민국 사수
다음날 나주군청 내무과장이 새로운 유언비어들을 전화로 알려왔다. “경상도 출신 공수부대가 광주를 떠나 나주로 진격한다”, “광주에서는 수만 명이 학살됐다”, “광주 금남로에 탱크가 출현하여 학살을 자행한다” 등등.
김 기자는 이 같은 소문들이 모두 악성 유언비어라고 일축하고 “진압군 300명이 곧 투입된다”고 역선전하여 시민군에게 전해지도록 했다. 얼마 뒤 군청으로부터 시민수습대책위를 구성하여 시민군과 협상할 테니 진압군의 진입을 유보시킬 수 있겠느냐고 제의해 왔다. 대대가 이를 수락한 후 시민방문객을 맞기 위해 정문에 M60 기관총을 설치하고 담장 철조망 1m 간격으로 거총자세의 병사들을 배치했다.
시민대표 5명이 방문하자 수습대책위가 시민군에게 탈취한 총기류를 반납하고 귀향을 설득토록 요청했다. 그 뒤 영산포 예비군이 시민군차량 수십 대가 나주로 진입코자 재집결한다고 알려왔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정 소령이 현역 16명과 함께 최후 방어선으로 출동했다. 김 기자는 조금 뒤 단신으로 뒤따라 나주 전신전화국의 협조로 확성.기를 설치하여 시민군에게 말했다.
“곧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한다. 무기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여기는 나주지역 계엄본부다”라고 반복했다. 읍내 예비군과 주민들이 시민군의 동향을 제보해 오기도 했다. 이때 무장버스 1대가 저지선을 돌파하여 100m 앞에 정지했다.
확성.기를 통해 “모두 손들고 나오라”고 하니 학생시민군이 17명이었다. M1소총과 빵과 라면도 실려 있었다. 고교생 시민군은 “아저씨들이 타라고 해서 버스에 탔다”고 말했다.
김 기자는 시민들에게 “체포된 17명의 무장폭도는 안전하게 보호되어 있다”고 알려주었다. 곧이어 시민대표 6명이 부대를 방문하여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로써 무장 시민군에 의한 나주 함락 기도는 저지됐다. 저자는 김 기자의 용맹정신으로 나주를 넘어 대한민국을 사수했다“고 평가했다.
http://www.econotalking.kr/xe/index.php?document_srl=88724&mid=interview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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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장기표 "미국 주도 도박판 세계 경제 망쳐"
장기표 "미국 주도 도박판 세계 경제 망쳐"
미국 주도의 도박판 경제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신문명정책연구원 대표 장기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다. 우선 국민총생산(14조달러)과 국민소득(4만8천달러)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미국의 부존자원 또한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석유와 석탄은 물론 토지까지 후손을 위해 미개발상태로 남겨둘 정도이니 자원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인구(3억 1천만명)는 전 세계의 20분의 1밖에 안 되면서도 전 세계 물품의 5분의 1 넘게 사용하고 있으니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풍족하게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만 세계 제일이 아니다. 우선 과학기술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해 있고, 언론을 비롯한 국민의 민주역량 또한 세계 제일이며, 그리고 군사력 또한 세계 최강이다. 그밖에도 미국이 세계 제일인 부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고, 자랑할 만한 일도 많다.
그러면 미국은 살기 좋은 나라이며, 세계에서 모범이 될 만한 나라일까?
전혀 그렇지 못하다. 우선 빈부의 차가 너무 심하다. 인구의 약 48%(1억4600만명)나 되는 빈곤층은 의식주와 의료, 교육 등 기본생활마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 가운데 4900만명은 극빈층으로 생존마저 영위하기 어렵다. 건강보험이 없는 사람이 인구의 15.3%(4570만명)나 되고, 개인파산자의 60%가 의료비를 못낸 때문이라고 한다. 인구 대비 교도소 수감자가 세계에서 가장 많아 유럽이나 일본보다는 10배 이상 될 정도이다. 범죄가 많아 불안하기 짝이없는 나라다.
그런데 국민의 삶의 질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자기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빚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연간 재정적자가 1조달러 이상 되어 총 국가부채가 15조8천억달러에 달한다. 특히 해외부채가 5조1천억달러나 된다고 하니 부자나라이기는커녕 거지나라라고 말할 만하다. 한마디로 빚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국채를 팔아서 재정을 메우고 있는데, 미국의 국채 가운데 중국이 1조2천억달러, 일본이 1조1천억달러를 보유하고 있다. 결국 미국은 중국과 일본에 국채를 팔아 살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부끄러운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빚은 무역에서 적자를 보기 때문인데, 미국의 연간 무역적자는 약 5천억달러에 달한다. 미국의 제조업이 거의 붕괴되다시피 했기 때문인데, 제조업이 붕괴하고서는 나라 자체가 유지되기 어렵다. 미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자원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수입품에 의존해서 생활해 왔는데, 어떻게 정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미국이 달러를 찍어내지 않는 나라라면 미국은 이미 오래 전에 국가부도를 맞았을 것이고, IMF도 구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 등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 국채의 상환을 요구할 경우 미국은 국채를 발행해서만 이에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미국은 제조업을 발전시켜 국가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생각은 하지 않고 월스트리트에 큰 도박판을 차려놓고 전 세계의 투기자본을 끌어들여 돈 잔치를 벌이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미국사회에 돈이 넘쳐흐르도록 하여 소비를 조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 세계 금융시장을 투기장화하여 거기서 엄청난 이자와 이윤을 챙겨왔다.
이것이 미국이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달러를 찍어내거나 빚을 얻어 살아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박판을 벌여놓고 전 세계로부터 투기자본을 끌어들여 돈을 벌고 있는데, 이래도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미국에 이롭기는 한 것일까?
이것은 세계경제를 교란시키면서 파탄으로 내모는 일인 동시에 미국을 망하게 하는 일이다. 제조업과 농업이 붕괴한 나라는 존속하기 어려우며, 달러를 찍어내는 데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은 금융산업(사실은 도박판임)을 통해 전 세계로부터 엄청난 투기자본을 끌어다 20년 넘게 흥청망청 쓰면서 살아왔으나, 그 결과는 금융위기를 불러일으켜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물론 GM이나 포드 등 제조업까지 파산으로 몰아갔다.
그런데 미국발 금융위기는 미국만 파산으로 몰아간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기업도산을 불러와 많은 국가들을 국가부도사태에 직면하게 하였고, 마침내는 전 세계적인 공황을 초래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주도하여 만들어낸 도박판 경제는 미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도박판 경제가 되었다. 세계경제가 도박판 경제가 되어 비틀거리고 있다. 전 세계가 비정상을 넘어 미쳐 있다. 생산적인 활동이 없이 도박판을 벌여 서로 속고 속이면서 뜯어먹고 산다면 이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겠는가? 도박판에서는 판돈이 많은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어 지금까지는 미국이 그런대로 돈을 벌어왔으나, 결국은 다 망하게 되어 있다.
세계 최대의 부국인 미국이 도박판 경제를 만들어 세계경제도 망치면서 미국경제도 망치고 있다. 근본적인 대책이 있어야 하겠다.*
가자서작성일 2012-07-02추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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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제3의 선택으로 광주사태 선동한 김대중
제3의 선택
김대중씨가 3월부터 자유스런 몸으로 정치현장으로 되돌아오게 되면서부터 신민당내에 잠재해 있던 김대중씨 지지세력과 김영삼씨등 주류계의 알력은 표면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김대중씨는 야권의 단결을 위하여 신민당은 초당적 차원에서 유신체제하에서 고생한 재야인사를 대폭 영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신민당내에 재야세력이 우위를 점함으로써 당내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무혈입성작전임을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김영삼씨측의 당권파는 당헌에 따라 부총재 1명, 정무위원5명, 중앙상무위원회에 30명의 범위내에서 재야인사를 영입하겠다고 맞서고 있었다. 3월 중순경에는 신현확국무총리가 유신체제를 비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물의가 일어났으며, 정부헌법개정심의 위원회에서는 2원집정부제를 구상하고 있다는 등 밑도 끝도 없는 갖가지 풍설이 나돌고 있었다. 아무렵 동교동에서는 연일 김대중씨 주재하에 정책연구실과 비서실 그리고 민주헌정연구회 간부들이 회합을 거듭하며 정국의 추이를 예의 분석, 검토하고있었다.
김대중씨는 신민당에의 무혈입성을 위해 매수공작도 병행시키고 있었다. 김대중씨는 비서실장 예춘호씨에게 1천만원, 이용희 의원등에게 1천만원을 주어 공작을 벌였으나 당권파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하에서 김대중씨와 참모전에서는 신민당에 편승하여 정권획득기반을 구축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과도정부에서는 기득권을 이용하여 계엄을 장기화시킨 가운데 정권을 계속 장악하려는 것으로 동교동측은 분석하고 있었다. 야당측이나 정부측이나 그 어느 쪽도 동교동측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시점에서 그들은 답답하고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만약 헌법이 어떤 형태로든 개정이 되고 선거가 치러진다 하여더라도 정당조직을 갖지 못한 동교동측으로는 열세를 면치 못할것은 불을 보듯 빤하게 내다 보이는 것이었다. 결국 집권경쟁은 김영삼 신민당총재와 공화당총재 김종필의 대결장으로 화해 버릴것이고 조직을 갖지 못한 김대중씨가 소외될 것이라는게 동교동측의 정치계산이었다. 사태는 명백해졌다. 이제는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동교동은 정권을 획득하느냐, 낙오가되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것은 제3의 선택을 불가피하게 요구 하고 있었다.
그것은 선거를 통한 정상적 방법을 가지고는 정권획득이 어렵다는 전제위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상대방보다 힘이 약할 때는 정공법으로는 승리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변칙적인 방법으로 상대를 교란시킨 다음 헛점을 노려 맹타를 가하는 방법을 써야 한다.
먼저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신민당총재 김영삼씨도 "총재직 직무집행정지 가처분"파동, 국회의원직 제명파동등으로 선명성에 있어 어느 정도의 평가와 국민적지지를 받고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유신체제하에서는 항상 체제내에 참여 하였으며 투쟁경력으로 보아도 감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조차 못해 본 정치인들이다. 그에 비하면 김대중씨는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데다 가택연금, 교도소등 유신체제하의 가장 큰 피해자라는 점을 내세우면 별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 다음 공화당총재 김종필을 보면 그는 유신체제하의 국무총리로그 체제의 제2인자이며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정치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했듯이 새시대의 창조에 유신잔당은 물러가라고 몰아 붙이면 그 사람도 간단히 끝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다음에 제일 어려운 상대는 정부이다. 정부는 "10.26사태"로 바야흐로 민주화의 열망이 국민들 가슴속에 열화처럼 타오르고 있는 때에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이키려는 음모가 있으므로 우리 국민은 단결하여 이를 분쇄하자면서 먼저 궁지에 몰아 넣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약점을 찾아 공격을 시작한다. 계엄령의 즉각해제, 정부주도하의 개헌작업포기, 유신잔존세력의 퇴진과 민주화일정에 따른 조기 정권이양등...
공격목표는 설정되었다. 남은 것은 이것을 어떠한 수단을 동원하여 실행하느냐의 방법론뿐이다. 그것은 별로 힘안들이고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기자회견, 시국선언문, 성명발표, 학원내의 시국강연, 4.5월에 많은 각종 문화행사에의 참여와 즉석연설등 주로 대중을 상대로 하는 선전, 홍보전을 동원한다.
그 다음은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구호를 부르짖으면서 민중이 자신들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유도하고 이를 거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간다. 이때 민중운동의 주체는 학생, 근로자, 종교인, 농민등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촉발하기 쉬운 사회계층으로 한다. 이같은 민중운동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것은 이미결성된 "민주헌정동지회" "민주연합청년동지회"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등을 활용하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그것을 민중운동의 모체로 전환시킨다...
정권획득전략은 완성되었다.
작전계획이 완성되자 김대중씨는 계획의 첫번째 실험장소로 매주정기적으로 수요강좌를 여는 서울 명동소재 ywca를 택했다. 디데이는 3월 26일, 강연제목은 "민족혼과 더불어"라고 결정했다. 정치활동이 허용된 후 처음 갖는 대중연설인 만큼 김대중씨는 이날 강연이 대성공을 거두도록 용의주도한 세부계획까지 스스로 지시했다. 비서진에게는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민주연합청년동지회, 민주헌정연구회 회원들을 동원하고 요소요소에 사람을 미리 배치하여 자시의 강연내용이 절정에 다다를 때에는 "옳소"하는 함성을 지르게 하거나 박수를 치도록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렇게 까지 않더라도 전 대통령후보까지 했던 네임 밸류나,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던 김대중씨의 첫연설이 라면 많은 사람이 모여 들 것이었다. 또한 알아주는 김대중씨의 말솜씨로 보아 박수도 제법 받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수년만에 처음하는 대중연설이라 신경을 쓰는 모양이었다. 정치가 그런것인지 모르겠으나 무엇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꾸미는 것은 내 성미에는 잘 맞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김대중씨를 따라 ywca강당에 도착했을때는 그런 방법으로 동원된 탓인지 문자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 청중이 장내를 꽉 메우고 있었고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박수소리에 묻혀 연단에 오른 김대중씨는 특유의 억양과 제스추어로 청중들을 휘어 잡기 시작했다. 자신은 현재 법적으로 복권은 되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복권이 되지 않아 tv, 신문과의 단독 인터뷰는 보도가 되지 않으며, 일본에서의 납치사건은 쓰지도 못하에 하며, 3 김대중씨에서 자신의 책만 팔지 못하게 한다면서 현정부가 자신과 다른 두 김시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장관, 총리, 대통령등 몇사람이 몇백억, 몇천억의 부정축재를 하고 있다고 성토한 김대중씨는 현정부의 참여자들을 유신잔당으로 몰아 퇴진을 요구하고 민주세력이 다음 정권을 담당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다 함께 결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김대중씨는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그나라 국민의 피를 마시고 자라며, 민주주의는 국미의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이 말은 결코 하나의 슬로건이 아니라 진실인 것"이라고 클라이막스를 장식했다. 동원된 사람들의 선창에 따라 수시로 "옳소!"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말처럼, 이나 재미 있었던 것은 김대중씨가 뜻하지 안은 실수를 범한 대목이었다.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던 나머지 "예수는 나의 형님"이라고 말해 버린 것이다. 또 자신은 "원할 때면 언제나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예수님과 직접 대화를 한다"고도 했다. 강연이 끝나고 좁은 명동거리로 빠져나온 청중들은 자연히 데모군중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중에는 "김대중만세"를 외처대는 청년도 있었다. 물론 비서진에서는 청중들의 반응이나 태도와 여론등을 면밀히 체크하고 있었다. 이날 밤 동교동에서는 ywca강연이 대단히 성공적 이었다는 평가를 내렸으며 앞으로 전개해 나갈 민중운동에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신민당내 김영삼총재 지지세력과 김대중씨 지지세력간의 대립은 날로 격화되고 폭력사태까지 일으키게 되자 시중에서도 이를 우려하는 여론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같은 사태를 의식한 듯 김대중씨는 4월 4일 김영삼총재를 단독으로 만나게 되었다.
이자리에서 두 사람은 앞으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신민당과 재야세력이 단합한 모습을 보여 줘야하며 잘 협력해야 한다는 원칙론에만 합의했을 뿐 재야인사의 신민당 영입범위에 대하여는 여전히 의견을 달리하여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미 예견된결렬이었다. 벌써부터 참모진들과 민중운동에 기반을 둔 정권획득투쟁에 나서기로 방침을 굳힌 김대중씨는 처음 열린 ywca강연을 통해 민중운동방향에 관한 자신감을 갖고 있어 이런회담은 필요가 없었다. 다만, 이날 회담은 재야인사를 영입하지 않는 책임이 신민당에 있음을 분명히 해 두자는 전술에 불과한 것이었다.
회담결렬 3일후인 7일 김대중씨는 비서진에게 언론기관에 연락하여 기자들을 동교동집으로 모이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 날은 신민당 중앙상무위원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중앙상위가 열리기 앞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김대중씨는 신민당입당 포기를 선언했다.
김대중씨는 기자들에게 "신민당이 재야인사의 적극적인 영입의사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입당교섭 포기가 불가피했다"고 입당포기 이유를 설명했다. 그 3일후 나는 김대중씨를 모시고 "국민연합"공동의장의 한 사람인 윤보선씨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윤보선씨를 비롯하여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고은태, 함세웅, 김종완, 김승훈, 계훈제, 박형규, 이우정씨등이 모여 있었다. 김대중씨는 이자리에서 신민당입당을 포기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앞으로 "국민연합에 복귀하여 민주회복투쟁에 전념하기로 했다"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국민연합인사들은 이 자리에서 김대중씨의 신민당입당포기 지지 및 국민연합 복귀환영성명을 발표하자는데 의견을 모았으나 윤보선씨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윤보선씨는 기자들에게 "김씨가 국민연합에서 활동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지만, 신민당을 성급하게 이탈한 것은 잘못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윤보선씨는 또 정치인은 정당을 통한 합법적인 활동에 주력하는 것이 옳다는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었다.
윤보선씨가 김대중씨의 신민당 입당포기에 반대하자 김대중씨는 윤보선씨를 제외한 나머지 인사들과 저녁8시 북악파크호텔에서 다시만나 이들을 설득하여 만든 김대중씨의 신민당입당포기 지지와 "국민연합"복귀환영성명을 기자들에게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김대중씨는 "국민연합"을 주체로 한 민중운동 투쟁전열을 정비 강화하기 위해 국민연합기구를 개편, 보강토록 지시했다. 개편된 국민연합 기구에는 중앙상임위원장에 문익환목사, 부위원장에 시인 고은씨와 함세웅신부, 중앙상임위원에 예춘호, 이문영, 계훈제, 김승훈씨등 김대중씨 개인의 비서실, 정책연구실 인사들을 선임토록 했다. 그것은 물론 김대중씨가 "국민연합"을 마음대로 조정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개편된 "국민연합"기구의 총무국장에 서울대 복학생인 이현배, 조직국장에 장기표, 홍보국장에 심재권씨 등을 임명하고 매달 20만원씩의 활동비를 지급했다. 나는 김대중씨가 이들 세 복학생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학원에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고 이들을 민중운동의 전위로 삼으려는 의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와같이 "국민연합"의 조직정비를 끝낸 김대중씨는 1일 대전에서 열린 한국카토릭농민회주최 민주농정실현을 위한 농민대회에 참석하는 것을 기점으로 대중연설에 돌입하였으며, 나는 김대중씨를 따라 각지역에서 열리는 대중강연에 자주 나가게 되었다.
한국신학대학 개교 40주년 기념행사의 연사로 초청을 받았다.
행사일인 4월 16일을 앞두고지난번 ywca 강연때와 마찬가지로 대회에 많은 인파가 모이도록 비서진에게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이때에도 청중동원에는 민주연합 청년동지회등 김대중씨의 사조직이 전단 10만장을 인쇄하여 대학가를 중심으로 시내 요소 요소에 뿌렸었다.
내가 김대중씨를 수행하여 수유리에 있는 한신대 캠퍼스에 들어가니 과연 강연장에는 수만명의 청중이 몰려 들었고 주최측도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몰릴 줄은 예상치 못했던지 그때에야 옥외확*를 몇개더 가설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날의 강연제목은 '도덕정치의 구현'이었는데 김대중씨는 특권층은 수억 혹은 수십억의 호화주택에 살며 몇백만원짜리 비단잉어를 기르고 고래수염으로 이쑤시게를 한다면서 부유층의 부도덕성을 신랄히 비난했다. 김대중씨는 이 무렵 신민당총재 김영삼이 "민주화의 구심점은 신민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반해 "재야세력이 민주세력의 구심점"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강연에서도 독재하에서 감옥에 가고 고문, 연금, 공민권박탈을 당하고 학원과 직장에서 추방되었던 사람들이 새로운 민주정부의 횃불이 되고 중심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김대중씨는 또 정권의 부도덕성을 폭로하는 가운데 "박정권은 정적을 살해하기 위해 자동차충돌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 말은 물론 71년 8대국회의원 선거당시 지방유세를 나갔던 자신이 무안부근에서 대형트럭과 부딪친 교통사고를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제2장에서 썼듯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 사건이 단순한 우발적 교통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내 입장에서 김대중씨의 주장을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틀 후 동국대학 학생회측은 4.19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4.19혁명과 민족통일"이라는 제목으로 김대중씨 초청강연회를 열었다. 이때도 청중 동원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였는데 김대중씨는 자신의 사조직인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박정훈 부소장에게 지시하여 확*를 가설하도록 했다. 나는 김대중씨를 수행하고 다니면서 자연히 김대중씨가 다른 곳에서 했던 강연내용과 비교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약5만여명이 모인 동국대학 강연에서 김대중씨는 "10.26사태는 어떤 단체에 의해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독재에 항거해 온 전국민의 혁명"이라고 찬양하면서 "탄압을 받더라도 우리가 끈질기게 저항하면 기필코 성공 할 것이라"고 열번을 토했다.
김대중씨의 강연내용은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강경해 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날의 강연도 듣는 사람에 다라서는 "10.26사태"와 같은 것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이해할 만큼 선동적이었다. 강연이 끝난후 청중들은 빠져 나가면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여러가지 구호를 부르는 청년들이 눈에 띠었는데, 청중에 선두에 선 학생은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연신 외쳐 대고 있었다. 이런 광경은 다른 곳 강연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청중속 이곳 저곳에 몇사람씩 끼어 구호를 외쳐대면 그 청중의 행렬은 영낙없이 시위 대열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 시위행렬과는 대조적으로 동국대학 강연에서는 또 색다른 데모가 벌어 져 청중들의 눈길을 끌었다. 김대중씨의 강연이 시작되기 30분 전쯤 이 대학 승가과 학생 몇명이 승복을 입고 교정에 세워져 있는 불상앞에서 피켓을 들고 데모를 벌였다.
학생들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예수동생 김대중씨, 대한민국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 됩니다"
"신성한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동국대학 강연도중에는 학교기물이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하여 김대중씨는 비서를 보내 "강연회로 인해 기물이 파손되는 등 물의를 빚은 데 대해 깊은 사과의 뜻을 표한다"는 사과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1주일후 나는 김대중씨와 서울 태평로에 있는 코리아나 호텔로 갔다.
중견언론인들의 친목단체인 관훈클럽 토론회에 초정을 받은 것이다. 오후 6시 반쯤 호텔 글로리아룸에 우리가 도착하니 각 신문, 방송, 통신사의 중견기자 3백여명이 꽉 들어차 있었고 동교동에 취재차 자주 들르는 낯익은 기자들도 많았다.
김대중씨는 동국대학 강연에 이어 여기서도 "10.26사태"의 의의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10.26사태는 민중이 주체였던 동학농민혁명, 민족이 주체였던 3.1독립운동, 민주학생이 주체였던 4.19혁명을 총괄적으로 계승한 민중, 민족, 민주의 국민적 의지의 집약적 표현이라 하겠읍니다. 이것은 분명히 자유, 통일을 거부해 온 반민중 반민족, 반민주 세력에 대한 국민적 투쟁의 결과였읍니다."
김대중씨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10.26사태"는 국민투쟁의 시작이지 결코 그 완결은 아닙니다. 유신체제의 장벽을 헐고 민주체제를 열기위한 돌파구의 구실을 한 것이지 그것이 바로 민주대로를 닦아 놓은 것은 아니며 민주대로는 이제부터 온 국민의 새로운 각오와 결단에 의해 마련되어야 합니다"라고 해ㅤㅆㅏㄷ.
이렇게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을 계속하는 한편 김대중씨는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이 강연하는 장면을 비디로 테이프에 담거나 강연내용을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하여 이를 산하 조직을 통해 전국의 대학가와 지방에 배포토록 하고 있었다.
관훈클럽 토론회 4일후 우리는 윤봉길의사 서거 48주년 기념추모제에 참석하기위해 충남 예산으로 내려갔다.
그곳 덕산여관에 투숙한 김대중씨는 추모제에 참석하기에 앞서 서울에서 수행해 내려 온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①계엄령해제 ②정부개헌작업포기 ③정치일정단축 ④연내정권이양등을 위해 "국민연합"을 주축으로한 "민주화촉진국민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중심체는 "국민연합"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자신의 희망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국민연합" 3인 공동의장의 한 사람인 윤보선씨는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입후보 하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인데 그가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돌아 다니는 것을 누가 국민운동이라고 보겠느냐"고 못마땅하게 말했다. 윤보선씨는 또 "국민연합은 순수한 국민운동이지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고 김대중씨의 발언에 반대의 뜻을 표시하면서 민주화 운동은 시기도 적절치 못하며 운동이 지나치게 되면 계엄연장의 구실이 될 것"이라는 우렬르 표명했다. 그러나 대권이 눈앞에 보이는데 노정치인의 충고가 귀에 들어올리 없었다.
김대중씨는 80년 5월을 민중운동의 결정적 시기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김대중씨가 조성우, 심재권, 장기표, 이현배씨등 학생운동 출신자들에게 학생운동의 임무를 부여하고 그 결행시기를 5월 중순경으로 방침을 결정한 점, 정부전복후 과도내각 역할을 맡게 될 "한국민주제도연구소"의 구성을 서두르는 점등이 그런 전망을 가능케 하는 것들이었다. 김대중씨는 샤도우캐비넷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민주제도연구소의 이사장에 예춘호씨, 소장에 이문영씨를 선임하고 각 분야별 전문위원 위촉을 서둘러 일부 인사로부터는 취임승낙서를 받기도 했었다.
대중연설을 위한 김대중씨의 발걸음도 잦아지기 시작했고 학원가의 소요도 날로 격렬하기 시작했다. 5월 8일 경주에서 열린 김유신 장군 추모행사에 참석한 뒤 김대중씨는 11일"동학제"에 참석하기 위해 전북 정읍으로 내려 갔다.
5만여명의 청중앞에 선 김대중씨는 "동학혁명이 처음부터 폭력주의가 아니라 상소를 하고 주의주장을 건의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아 봉기한 것으로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라고 강경한 어조로 연설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의 민주주의 하에서도 정부가 재야세력의 민주화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민중봉기"를 일으켜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되었다. 정읍 유사이래 초대의 인파가 모였다는 이날 강연장에는 김대중씨의 3개 산하조직에서 동원한 청중과, 전라도지방 정치지망생들이 버스를 몇대씩 대절하여 동원한 광조, 전주 지역 주민들도 많았다. 이 호남지방 주민들에게 김대중씨는 "박정권 18년간 가장 큰 과오는 신라통일 이후 지방색을 다시 불러 일으킨 것"이라고 지역감정에 호소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서울을 깃점으로 충정도, 경상도, 전라도등의 순회강연을 마친 김대중씨는 다음날 북악파크호텔로 "국민연합"과 재야인사 들을 불러 모았다. 5백21호실에 김대중씨를 중심으로 한승헌, 이문영, 이해동, 예춘호, 서남동, 문익환, 심재권, 계훈제, 김종완, 이현배, 장기표씨등이 좌정하고 있었다. 이날 회의는 마치 그동안 전개해 온 작전 결과를 점검해 보는 전략회의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씨는 "민주화운동을 하자는 것은 궁극적으로 반민주 유신세력들의 음모를 분쇄한 다음, 민주주의에 역행하여 온 독재정부를 무너뜨려 우리 민주인사들이 참여하는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대중씨는 또 동석한 장기표, 심재권씨등에게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등 명문대학의 동정을 잘 살필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13일밤, 그동안 교내에서 시국성토를 하던 대학생들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동국대, 서강대 등 서울시내 6개대학 3천여명이 도심진출을 *로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4일에는 서울시내 29개 대학 4만여명의 학생들이 가두시위에 나섰으며 지방에서도 부산, 대구, 광주등에서 학생데모가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다. 15일에는 전국 66개 대학생들이 일제히 거리로 진출하여 학생데모의 결정을 이루었다. 서울역앞 광장은 서울시내 35개 대학의 10만여 학생들로 꽉 메워진 가운데 밤늦게까지 큰 혼란을 빚었다. 이날 데모대에낀 청년 1명이 시내버스를 탈취하여 데모진압경찰대열로 차를 난폭하게 몰고 들어가 전경대원 한명이 차에 치어 숨지고 네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날 낮 2시쯤 동교동에는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서남동, 이해동씨등이 속속 모여 들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민주화촉진국민대회 선언문"초안이 검토되었다. 동교동은 이제 숨쉴 겨를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뭔가 막바지에 온 느낌이었고 비서진은 바쁜 가운데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다음날인 16일 언론기관과 각 대학에 배포된 "국민연합"명의의 선언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비상계엄의 즉각해제, 신현확국무총리의 퇴진, 정부 개헌 심의위원회의 즉각해체등에 대해 5월 19일 오전 10시까지 정부의 명확한 답변을 국민앞에 밝힐것을 요구하며,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에는 "국민연합"은 5월 22일부터 국민과 더불어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는 민주화투쟁을 전개할 것이며 이 경우에 발생되는 모든 책임은 정부당국에 있음을 경고해 둔다. 그것은 "민중봉기"를 앞둔 "최후통첩"이었다.
그 아래에는 국민들의 "민주화투쟁"동참을 위한 행동강령이 여러개 나열되어 있었다.
17일 아침 8시 김대중씨는 북악파크 호텔로 갔다.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씨등 7.8명이 모여 있었다.
김대중씨는 이 자리서 "민주화촉진 국민운동본부"를 빨리 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최규하대통령이 시국대책에 관한 태도가 불투명하면 선언문에서 예고한 것처럼 전국민적 궐기를 결행할 것을 결의했다.
"민주화촉진 국민운동본부" - 그것은 김대중씨가 실행해온 민중운동의 지휘본부와 같은 것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북악산 산록 너머로 "서울의 봄"은 천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10.26이후 우리에게 주어졌던 민주화의 가능성과 함께...
이날 밤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 선포되었고, 나는 계엄군들의 총뿌리 앞에다 가슴을 들이밀어야 했다.
(출처 : 함윤식, 동교동24시 - 191~295p 발췌)
김대중의 공작으로 비극을 당한 당시 광주 시민들께 심심한 애도의 마음을 표합니다.
후장킴작성일 2009-08-13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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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지식ch] 변호사 조영래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 기쁨을 주는,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조영래
[인권변호사 조영래]
1947년 대구출생 경기고등학교 3학년 재학중 전국에 모든 고등학생들을
집결시켜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동한 이유로 정학처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시절 삼성재벌밀수 규탄,6.8부정선거규탄.
3선개헌 반대.교련반대 등을 위한 학생운동 주도
1971년 사법연수원에 있을때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
1년 6개월 복역 후 민청학련사건과 관련 6년동안 피신 .
이 기간동안 전태일평전 집필 (부제: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1980년 3월 수배가 해제되면서 9년만에 사법연수원으로 재입학 .
1982년 변호사 활동 시작 .
1984년 망원동 수재사건의 집단소송 .
1986년 이경숙사건 (여성조기정년제 철폐사건)
1987년 박길래 사건 (상봉동 진폐증사건) . 장미숙 사건
노동.빈민.공해.학생관련사건등 인권변호에 선구자 . 힘이 없고 돈이 없어
제대로 변호조차 못받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변호 .
유고집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
[조영래평전의 에필로그]
한때 우리는 모두 이상주의자였다.
열정과 이상 때문에 목청 돋우어 외쳤고 가슴을 치고 울었다.
걸핏하면 죽음을 생각했고, 시시로 세상의 종말을 들먹거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의 염원 중 극히 일부분만 이루어진다손 치더라도
역사는 엄연히 진보하는 것이 아닌가.
수없는 난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는 커다란 진보를 이루었고 앞으로
더욱 크게 진보할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없이도 우리는 살아왔고, 많은 것을 이룰 수가 있었다.
오늘 우리가 먼저 떠난 그의 삶을 아련한 그리움 속에 되새길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믿음과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인권변호사 조영래의 일생]
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시위 당시 고교 3학년인 그는 처녀작 ‘선언문’을 작성하고
국회 앞까지 진출했다. 이 시위 이후 그는 정학당한다.
그는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법대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투신한다.
삼성 재벌의 사카린 밀수, 6·7 부정선거, 박정희의 3선 개헌,학내 교련 실시 등
주요 사태때마다 그는 시위를 주도했다.
70년 11월13일의 전태일 분신은 그의 양심을 격렬하게 뒤흔들었다.
요란한 산업화의 후미진 뒤안길에서 스스로 불타죽는 극한적 수단 이외에는
신문의 1단 기사로도 관심을 끌 수 없었던 노동 현실...
71년 4월 대선에서 이긴 박정희는 10월15일 전국 대학 서클 해체, 문제학생 1,800명 연행,
300여명에 대한 강제 입영 등을 조치를 취하였다 사법연수원에 입소해 있던 조영래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로 장기표·심재권·이신범 등과 함께 관제재판을 받고
18개월간 투옥된다.
출옥후 그는 바로 유신 통치의 서슬 푸른 긴급조치와 만난다.
민청학련 주모자로 분류된 그는 기나긴 잠행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도망자의 신분으로 이후 6년을 보낸다.
이때 그는 전태일의 삶을 복원하고 그 철학적·정치적 의미를 세우는 일에 몰두한다.
그는 전태일의 수기에 적힌 대로 전태일의 삶을 경험한다.
허리를 펼 수 없는 평화시장 다락방 작업대, 미성년 여성 노동자와의 만남과 대화,
평화시장에서 쌍문동까지의 도보 귀가 등 노동자의 궁핍했던 삶과
그는 점차 일체화되어갔다.
3년 만에 ‘전태일 평전’은 완성됐다.
하지만 이 원고는 출판사를 잡지 못한 채 일본을 떠돌다가 83년에야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 출간됐다.
지은이를 밝히지 않은 이 책은 변혁을 꿈꾸는 수많은 이들의 지침서가 됐다.
유신을 구국의 통치로 교육받은 새내기 대학생들의 순결한 양심을 뒤흔들었으며
자신의 몸을 낮추어 스스로 노동현장으로 달려간 ‘80년대 현상’의 나침반이 됐다.
조영래는 죽음 직전까지도 자신이 이 책의 저자임을 밝히지 않았다.
77년 11월 전태일 7주기를 기해 발표된 장시 ‘노동자의 불꽃, 아아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바친 헌사였다.
당시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이 구속되고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활동공간인 ‘노동교실’이
강제 폐쇄되는 등 고난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저 처절한 불길을 보라
저기서 노동자의 오랜 억압과 죽음이 탄다
아아, 노예의 호적은 불살라지고 끝없는 망서림도 마침내 끊겨버린
저기서 노동자의 저항이 노동자의 자유가 불타오른다.”
민청학련과 인혁당에 대한 당국의 용공조작과 고문의 실상을 폭로한 김지하가 재수감돼
사형 위기에 빠지자 조영래는 감옥 안의 김지하로 변신, 그의 이름으로 양심선언문을 쓴다.
후에 국제사회의 지식인들이 김지하 구명운동에 나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 명문은 조영래 사후에야 그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80년 서울의 봄과 동시에 복권된 조영래는 수배생활 내내 그의 곁을 지킨 이옥경과
늦은 결혼식을 올리고 83년부터 본격적인 인권변호사의 길에 접어든다.
그는 점점 ‘인권변호사’로서의 이름이 올라갔고, 주로 노동자와 여성,
빈민들에 대한 무료변론을 포함한 인권변호에 주력하였다.
홍성우 변호사는 조 변호사를 가리켜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던 1세대 인권변호사 그룹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인권변호사 활동영역을 확대해 나간 운동가 출신 인권변호사의 적자”라고
하였다.
또한 조 변호사는 ‘한국의 랄프 네이터’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
네이더는 미국의 탁월한 변호사로 처음에는 주로 소비자 보호운동을 전개하다가
점점 뜻있는 사람들과 단체를 만들어 공해문제, 도시환경문제, 핵문제, 약물피해문제 등
시민들의 공익에 미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노력한 법률가이다.
1984년 9월 서울의 대홍수 때 망원동 유수지의 배수갑문이 무너져 한강물이 역류해 일대
5천여 가구가 물에 잠겼다. 조 변호사는 국가를 상대로 한 2400여 가구 수재민들의
소송을 맡아 3년의 법정투쟁 끝에 승소로 이끌었다.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의 주민집단소송이라고 뜻있는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 변호사는 헌법의 기본권과 관련된 사건은 아주 작은 사건이라도 소홀히 넘기지 않고
철저하게 접근하였다.
직장에 다니는 미혼여성 이경숙 씨가 교통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치자
1심 재판부는 스물다섯살까지만 직장봉급으로 손해배상액을 계산하고
나머지 쉰다섯살까지는 일용잡급직 노임으로 산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미혼여성은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는 관습에 따라 여성의 평균 혼인연령인
25세를 정년으로 본 판결이었다.
조 변호사는 이경숙 씨 본인도 마다하는 것을 설득하여 2심 변론을 무료로
맡아 남녀 불평등의 판례를 바꾸어 놓았다.
즉 항소심에서 ‘여성의 정년도 남성과 똑같이 55세’임을 확인받은
이경숙 사건은 우리 여성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주요 판결이었다.
그러나 조영래의 진면목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은 부천서 *사건 때였다.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도구화한다’는 정권과 관제 언론의 융단 폭격
앞에 그는 우선 고발장으로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국가란 그 구성원인 국민의 인간적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고 실현할 때에만
그 존재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그는 경찰과 검찰, 사법부, 관제 언론이 한 순결한 여성에게 가한 온갖
비열한 박해의 부당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결국 성(性)을 고문의 도구로 사용했던 공권력과 싸웠고,
성폭행을 당한 여성은 발설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사회통념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말보다 글을 잘 쓰는 변호사로 알려져 있다.
동아일보에 객원논설위원으로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는 글들을 실었고,
한겨레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인권수호를 주장하는 힘있는 글들도 많이 발표하였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을 창설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이 무렵 대한변협의 인권위원을 자원한 그는 이 사건의 모든 기록을 모아 변협 최초의
‘인권보고서’에 담았다. 대한변협의 사무실에도 안기부나 보안사 요원들이 상시로
출입하던 시절이라 그는 보고서조차 은밀히 쓰고 출간해야 했다
보고서가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자,
그는 보고서의 후기를 이렇게 고쳐쓴다. “우리의 인권보고서는 할 말을 잃었다.
다만 치떨리는 분노로 이렇게 외칠 따름이다. ‘박종철을 살려내라’고.”
그는 90년 9월 폐암 진단을 받고 석달 뒤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갔다.
[전태일 동지 추모비에 새겨진 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죽임이 있어
여기 한덩이 돌을 일으켜 세우나니
아아 전태일.
우리 민중의 고난의 운명속에 피로 아로새겨진 불멸의 이름이여
1948년 8월 28일 대구의 한 가난한 노동자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낯선 도회지의 길거리를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다니며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 리야카뒤밀이로 허기진 밑바닥 삶을 이어가다가
평화시장의 재단사가 된 그는 거기에서 노동자의 청춘과 생명과 건강을
갉아먹는 지옥과 같은 노동현실을 보았다.
허리도 펼수 없는 비좁은 다락방의 먼지 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번 못본 채
하루 열여섯시간을 기계처럼 혹사 당하는 어린 소녀들의 어두운 눈망울 앞에
절망과 분노로 몸서리치던 그는 뜻있는 재단사들을 삼동친목회로 묶어
작업시간 단축 건강진단실시 임금인상 다락방철폐 등 "인간 최소한의 요구"를
내세우고 싸우던 끝에 업주들과 경찰의 압도적인 폭력앞에 저지 당하자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 길에서 "근로기준법화형식"을 거행하며
스스로 몸을 불살라 스물 두해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이 폭탄과 같은 죽음이 사람들의 억눌린 가슴가슴을 뒤흔들어
저 숨막히는 분단 독재의 형틀에 묶여 있는 노동운동의 오랜 침묵을 마침내 깨뜨렸고
굴종과 패배를 모르는 그의 불타는 넋은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하고 지켜낸 이 소선 어머니와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폭압에 맞서싸우는 모든 사람들의 무한한
용기의 원천이 되었다.
아아, 저 스물 두 해의 아픈 삶을 결단하여 가진 자들의 야만과 횡포에
온 몸으로 부딪쳐 간 그의 피어린 발자취가 있었기에
오늘 이 땅에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사람답게 사는 자주 민주 평화의 새 세상을 쟁취하려는
일천만 노동자와 사천만 민중의 우렁찬 해방의 함성이 있나니,
지나는 길손이여, 이 말없는 주검 앞에 눈물을 뿌리지 말라.
다만 기억하고 또 다짐하라.
불길 속에 휩싸이며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내 죽음을 헛되어 말라!" 하던 그 피맺힌 울부짖음을.
- 1988년 11월 13일 삼동친목회와 청계피복노조가 일천만 노동자의 뜻을 모아
조영래의 글과 장일순의 글씨로 새기다. -
출처 : 다음 - 공돌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