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에서 이야기하는 칸트의 정언 명령 부분입니다.
정언 명령
<순수 이성 비판>을 쓴 뒤에도 칸트는 중요한 철학 저작들을 많이 썻다. 그 가운데<실천 이성 비판>과 <도덕의 형이상학 원론>이 있는데, 이 두저작은 특별히 윤리학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칸트의 이론은 의지와 의무를 강조하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보여주며, 의무의 뿌리를 이성에서 찾으려는 점에서 계몽 사상의 자취를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보여주며, 의무의 뿌리를 이성에서 찾으려는 점에서 계몽 사상의 자취를 보여준다. 자유의 근거가 마치 종합적 아프리오리 진리에 있는 것처럼 가정하면(즉, 자유가 없으면 도덕적 행위가 없다는 식으로), 이성의 토대로부터 윤리적 규칙들을 이끌어낼 수 있게 된다. 추론이란 규칙을 따르는 행위이므로 규칙과 법칙에 대한 존중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 측면으로부터 칸트는 도덕적 명령을 연역해내고서, 그것을 정언 명령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원칙이 보편 법칙과 일치하도록 행동하라.” 모든 도덕적 행위는 모순을 빚지 않는 보편화될 수 있는 원칙이나 ‘금언’으로부터 나온다. 칸트는 이성을 지닌 동물로서 인간은 그런 원칙에 따라야 할 의무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칸트의 논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그 생각을 약간 단순화해보자.
여러분이 친구에게서 5,000원을 빌렸다고 가정하자. 친구가 어서 갚으로고 채근하자 여러분은 가만 짜증이 난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한다. “저 놈을 중여버리면 갚을 필요가 없을거야.” 하지만 여러분은 칸트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이므로 먼저 계획된 행동에 관철되어 있는 원칙을 보편화할 수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렇게 자문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를 죽인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한다” 는 보편 법칙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그 법칙에 따른다면, 결국에는 아무도 그 법칙을 따를 사람이 살아남게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죽여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취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좋다. 그럼 친구에게 이미 빚을 갚지 않았느냐고 거짓말을 하면 어떨까? 이 생각의 배후에 있는 원칙은 보편화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은 항상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일반 원칙이 존재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그 법칙을 말하려면 우선 그 법칙을 위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다. 좋다. 그럼 5,000원을 갚은 다음에 다시 그걸 훔치면 어떨까? 이 행위의 배후에 있는 원칙은 보편화될 수 있을까? 즉, “모든 사람은 항상 물건을 훔쳐야 한다”는 일반 법칙을 상상해보자.
하지만 이것은 역시 불가능한 법칙이다. 훔친다는 개념은 소유 개념과 상통하는데, 만약 모든사람이 훔친다면 재산은 있을 수 없게 된다. 오직 물건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넘어가면 일시적인 점유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훔쳐서는 안 된다는 의무도 갖게 된다.(진정 칸트주의자가 되려면 우선 남에게 진 빚은 반드시 갚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칸트는 정언 명령을 보편화 가능성이라는 원칙 이외에도 여러 방식으로 정식화했다. 그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자기 자신을 대하듯 맘을 대할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수단으로서가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의 이 말은 물론, 다른 사람을 나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훈계다. 그는 모든 사람이 각자 인간으로서 지니는 존엄성을 존중해야만 도덕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만약 이 세상에 인간이 없고 사물만 존재한다면 가치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인간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욕구만이 아니라(욕구라면 동물도 지니고 있다) 합리성과 자유도 가진 개별적 존재들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가치의 원천으로서 존엄성을 지닌다. 칸트는 이 존엄성을 어떤 것도 초월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내세우려면 - 즉 존엄성을 주장하려면 - 우리는 존엄성과 인간성을 부여하는 것, 즉 합리성, 자유, 자율을 무엇보다도 더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인간들을 대할 때도 그러한 성질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칸트 식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다른 인간들을 수단으로서가 아닌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 정언 명령의 배후에 있는 보편화 가능성의 원칙은 그것을 합리적 존재로서의 의무를 만든다. 그의 윤리학이 가르치는 내용은 오늘날에도 남성과 여성의 관계, 인종 차별, 고지 동의(의학 실험에 대한 환자의 승낙), 품위 있게 죽을 권리) 등등의 문제에 두루 적용되고 있다.
정언 명령의 일차적 정식화(보편화 가능성의 원칙)만 고려한다면, 칸트의 윤리학은 상당히 냉혹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차적 정식화까지 감안하면 그의 도덕론에서는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견해의 근저에는 다소의 냉정함이 놓여 있다. 그는 도덕을 의무의 문제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개인의 성향 같은 것에는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감정이나 동정심에 마음이 움직여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그다지 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싫어하면서도 순전히 의무감으로 남을 돕는 행위가 훨씬 도덕적이라고 본 것이다.
칸트의 윤리학은 그의 형이상학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성격을 품고 있다. 그의 이론은 그 자신이 받은 루터파 교육에서 찬양하는 모든 덕목을 합리화하고 있다(루터파는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앎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가르쳤으며 살인, 도둑질 등의 행위를 저지르면 안 된다는 것을 도덕이 아닌 의무로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가 신의 계율이 아닌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자신의 원칙들을 이끌어냈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루터파라기보다는 계몽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 흔히들 형이상학적 사변 같은 걸 시간 낭비라 여겨지지만, 칸트는 그런 사변을 통해 인간의 추론이 지니는 한계를 밝혀주었다. 또한 특히 도덕적 행위는 이기심과 전혀 다른 것으로 여기지만, 칸트는 도덕이 감정이 아닌 이성에서 나오는 가르침으로써 윤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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