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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안나지만 매일 꿈 속에서 나에게 말해주셨어.
언제나 나 답게-.. 언제나 활기차게-.. 언제나 웃으면서 힘든 상황을 헤쳐 나가라고.
손에 잡히진 않아도, 눈에 보이진 않아도, 마주 앉아서 말할 수 없어도..
떠오르려고 해도 절대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라도 해도.
언제나 내 마음 속에서 살아 계시니까.
언제나 난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오늘도 힘내는거야.
하늘에서 지켜봐주실거라고 믿기 때문에 난 오늘도 의지하는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난 믿으니까..
■ 여우들의 조건 ■
"다들 빨리 안 일어나??!! 해가 중천이라구!!
역시… 내가 어제 알아봤어야 하는건데.
빨리 일어나 이 아줌마들아!!!!!
아아악!!!! 늦었잖아!!!! 빨리 일어나 다들!!!!
수영아!! 너도 어서 일어나야지!!"
식구가 많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나에겐 좋은 일이 아니다.
내 이름은 유하얀. 올해 고등학생이 된 꿈 많고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나이.
그리고 오늘이 바로 고등학교 생활의 첫 날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걱정과 두근거림을 품고
모두들 3년동안 펼쳐질 고등학교 라이프에 대해 상상하고 있겠지만
난 오늘 아침도 이 아줌마들을 깨우고 있단다.
지금은 잠깐 숨을 돌리고 부엌에 가서 토스트를 만들고 있다.
"수영아..... 오늘 중학교 2학년 첫 날 아니야?
지금 가면 너 분명히 늦을거야.
지혜 언니.... 오늘 블랑카 교수님 다시 오시는 날이라며.
레포트도 아직 다 안썼지?
진주 언니.... 오늘부터 아침 조깅 한다며...
그렇게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면 또 과자 먹을거지?
민서 언니.... 오늘 월요일인데 차 안밀리나?
요번에 지각하면 완전히 작살이라며....
그리고 엄마.... 아침에 포니 목욕시켜준다며......
포니 안씻은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어."
숙달된 솜씨로 토스트를 만드는 내 손은 분주하기만 하다.
이 집에서 내가 전업주부가 된 건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부터다.
엄마에서부터 언니들은 차례 차례 밑으로 일을 내맡기게 되었고 그 타자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아-.. 아직 소개를 제대로 안했나?
우리집은 딸 부잣집이다.
5자매... 그 중 난 넷째.
바보같은 엄마 밑으로
29살.. 서른을 바라보고 있는 회사원 우리 큰언니 유민서.
25살.. 자칭 백조라고 떠들고 다니는 엄마를 가장 많이 닮은 둘째 언니 유진주.
22살.. 학교 안가고 땡땡이 치다가 결국 학사 경고까지 받은 분위기 메이커 셋째 언니 유지혜.
15살.. 내가 가장 아끼는 우리 자매 중에서 가장 정상인 막내 유수영.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3살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나와 수영이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가끔 언니들이 아버지 얘길 해주긴 하는데,
누구 말을 믿어야 될지 모른다. 심지어 엄마 조차도..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이었다고 하면서
갑자기 엄마가 좋아하는 연예인 얘기로 흘러간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사람이었다는 건 인정한다.
우리 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 아줌마들.. 정말로 안일어난다.
어제 거실 앞에 죽치고 앉아서 맥주 마실 때 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거였다.
다행히 수영이는 새나라의 착한 어린이라 일찍 잠이 들었지만...
난 몇 분 만에 토스트 6개를 만들도 한 개는 입에 물고 거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 아줌마들 깨우기 7년 경력이 어디를 가겠는가.
난 천천히 파리채를 들고 입을 헤- 벌리고 자고 있는 지혜 언니에게로 가 등짝을 냅다 후려쳤다.
자연스럽게 언니는 일어나서 멍한 표정으로 눈을 비볐다..
난 계속 차례차례 한 명씩 한 명씩 깨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빨리 토스트를 가지고 와 입에 물어줬다.
"아침 굶는 게 얼마나 안좋은건지 알고있지?? 아침은 꼭 먹어야 되는거야!!
어제 몇 시까지 퍼마신거야?? 수영아. 빨리 씻고 교복 입어. 다려놨어-.."
사실 난 알고있다. 내가 아침에 이 아줌마들을 깨운다고는 하지만 내가 가고나면
다시 기나긴 꿈 속으로 달려갈 사람들이라는 것을.
난 간신히 수영이와 민서 언니를 깨워서 씻기고 대문을 나서게 했다.
비몽사몽의 민서 언니와 수영이..
그리고 토스트는 또 먹고 잠든 엄마와 진주, 지혜 언니.
정말 못말리는 집안이다.
아침에 이렇게 분주한 집은 우리 집 밖에 없을거다.
어쩔때는 이런 생활이 싫고 짜증나기도 한다.
그러나 아버지 없이 우리 가족은 여자 6명으로 잘 살고있다.
난 그래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다.
가끔 언니들과 엄마 때문에 집나가고픈 충동이 들긴 하지만.....
민서 언니와 수영이를 배웅하고 나서 난 나의 애마.. 자전거군을 이끌고 열심히 달렸다.
꽃다운 나이 17에 완전히 주부가 된 나는 주부습진이라는 기막힌 질병으로 손이 다 트고 말았다.
그래서 손잡이를 잡을 때 많이 따끔 거린다.
아무튼 난 민서 언니가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사 준 파란색 애마 군으로
눈썹이 휘날리게 내가 다닐 고등학교로 향해 달리고 있다.
열심히 패달을 밟고 있을 때.....
너무 손이 따끔 거려서 한 손을 손잡이에서 떼고 말았는데
난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미쳐 보지 못했다.
콰--앙.............
"아........ 아파라...."
아.... 꼬인다.....
많이 늦은 것 같은데 이젠 넘어지기 까지 하다니.
윽..... 무릎이 까진 것 같다.
그런데 아까 분명히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갔지??
내가 헛 것을 봤나??
"흐에에에??? 분홍 스누피?? 너무하다 너무해.
난 그래도 섹쉬한 레이스를 기대했다구."
.............. 이건 무슨 소린고....
"순수한 건가.. 아님 바본거야??
에이... 뭐, 그래도 본 게 어디야."
난 내 등 뒤에서 소리나는 쪽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검은색과 갈색이 약간 섞인 머리카락에
장난기 가득한 눈빛의 내 또래의 남자애가 있었다.
난 그 남자애가 보고 있는 시선을 따라 보았다.
그랬다................
나의 팬티였다..............
난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난 나의 자세 때문에 더욱 더 입이 다물어지고 말았다.
난.... 그야말로..... 올림픽에서만 볼 수 있는 육상 레이스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 뒤로 그 남자애는 바로 내 팬티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던 거고.
난 그제서야 소리를 질렀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 놈(어느새 그 놈이 되버렸다)은 내 비명에 놀랐는지 뒤로 물러섰다.
난 벌떡 일어나 벌건 홍당무가 되어 그 놈에게 다가갔다.
내 스누피...... 내 스누피..........
"너......... 너....."
"응....응???"
"너.... 너....."
난 당황하여 말을 할 수가 없었고 고개를 숙였다.
이 쪽팔리는 상황과 이 똥밟은 상황을 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 것인가.
아마 지혜 언니 였다면 저 놈을 밟아 황천길로 보냈겠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그 놈은 내 표정이 궁금한지 계속 고개를 왔다갔다 요리조리 흔들어댔다.
난 쓰러진 애마군을 이끌로 교복을 탁탁 털어서 그 놈을 외면하고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려고 했다.
그 때.............
"아, 미.... 미안합니다!!!!"
"엥...?? 너 언제 왔냐??"
난 아까 그 놈과는 다른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양반 다리를 하고 갸우뚱한 표정의 그 놈 옆으로
까만 머리에 단정한 모습의 친구로 보이는 녀석이 나에게 사과를 했다.
"이 녀석이 좀 그런 녀석이라서..."
"뭐라?? 내가 그런 녀석이라고??? 난 어떤 녀석인거야~~~"
확실히 나사가 좀 풀어진 것 같은 그 놈 보다는 나사가 정확히 들어간 것 같은 녀석이었다.
난 쉼호흡을 하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또박또박 자세하게 말했다.
그리고 한 손가락으로는 그 놈을 가리키며...................
"언젠가는 니 팬티도 보고 말거야. 다시 만날 일도 없겠지만 다시 만나면 너 죽는 줄 알어."
내가 왜 그런 말을 한 지 의문이 간다.
왜 어째서 그런말을 했을까-........
더 멋진 말도 많았는데.. 더 확 강타할 말도 많았는데....
왜 난 어째서 그런 말을 한걸까??
난 정말로 그 놈의 팬티가 보고싶었던 것일까??
아직도 기억난다. 당황.. 아니 황당해서 쳐다보던 그 놈과 그 친구의 표정.
아아아..... 유하얀. 고등학교 첫 날 아침부터 정말 뭔가 이상하구나.
난 힙겹게 자전거를 이끌로 내가 다닐 고등학교 정문에 도착했다.
[청동 고등학교]
청동으로 만든 고등학교 냐고.. 니 머리랑 잘 어울린다고 놀렸던 언니들의 말을 뒤로한 채
난 천천히 교문으로 들어섰다.
앞으로 3년동안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까.
난 애마군을 매어놓고 교복을 다시 정리하고 운동장을 가로 질러서 걸어가고 있다.
난 고개를 빼꼼히 들어 교실을 돌아보고 있다.
학교를 돌아 보는 것이다.
................. 사실 난 우리 반을 모른다.
왜 아침에 책상에 있는 그 중요한 반 배정표를 못 봤던 것일까.
중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이 그렇게 반 배정표가 중요하다고 이 학교는 안가르쳐 준다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난 왜 한 번도 그 종이를 펴보지 않았고 오늘도 보지 않았던 것일까.
지금쯤 아이들은 다 교실에 있는 것일까??
아아아... 이러면 안되는데....
내가 울상을 짓고 있자 갑자기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이 불쑥 튀어 나오셨다.
"신입생인가??"
"네, 네..."
"반을 모르니??"
"아하하하하하하.............. 네....."
난 머쓱해서 웃다가 무서운 선생님의 표정을 보고 굳어졌다.
아무튼 난 그 선생님을 따라 내가 1년동안 지낼 반이 1학년 3반이라는 걸 알게 됐다.
[드르륵]
시선집중.
난 머쓱하게 선생님을 바라봤다.
선생님은 남자셨고, 안경을 끼고 새우처럼 생기셨다.
이상 소개 끝.
새우 선생님은 안경을 슬쩍 들어올려 나를 보더니
빈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다.
그 자리는 창가 옆이었고 난 내 옆에 옆에 있는 여자아이와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 창가를 바라봤다.
내 옆에는 자리가 비었다.. 나처럼 지각한건가??
난 천천히 새우 선생님께 시선을 돌리다가 다시 창가를 바라보고 말았다.
내 스누피 팬티를 봤던 그 놈과 그 놈의 친구가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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