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미를 비롯 박홍철,사자머리 그리고 남학생 셋이 날 향해 장난스런 웃음을 짓고는 손을 흔든다.
난 그들의 행동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는 조용히 고개만을 떨구고 있는데
기철의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든다.
"야 박홍철이.."
"어라 기철아?니가 여기 왠일이야?"
"왠일은 새꺄..본드걸 행님 좀 만나러.."
난 잽싸게 고개를 들고는 기철을 노려보았다.
기철 역시 자신이 말실수 했음을 느꼈는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나의 눈을 응시한다.
"본드걸?"
"아,아니..그니까 이 근처에서 아는 행님 좀 만났다가 편의점에 잠시 들렸다이가."
기철이 대충 둘러댄 변명을 박홍철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상황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버렸는지도 모르겠고,
왜 이런 말도 안되는 연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난 더이상 예전의 본드걸이 아닌 최준일 뿐이고
그냥 편의점에서 일하는 마음 좋고 이해심 넓은,반면에 겁도 많은..그런 청년일 뿐이다.
박홍철은 자신의 친구들을 기철에게 소개했다.
"석주,종민,영현이는 같은 학교니까 말 안해줘도 잘 알겠고 저기 머리 볶은 여자애는 미선이,여기 털모자 쓰고 있는애는 박진..악;;"
박진미가 박홍철의 뒷통수를 소리나게 후려치며 말한다.
"이새끼가..내 소개를 왜 니가 해?뒤질라고.."
"미,미안;;"
아따 그뇬 성질 참..-_-;
진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철을 향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니가 박기철?"
기철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내 아나?"
"물론.이 근처 학생들중에 성x공고 박기철을 모르는 애가 있을까? 니가 싸움을 그렇게 잘한다며?"
"하하.싸움은 무신..그냥 덩치로 밀어붙이는 거제.."
진미는 그런 기철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난 안x 여상에 다니는 박진미라고 하는데..나 알지?"
"내가 니를 우예 아노?"
-_-;
기철아.역시 너답다;;
저런 쭉쭉빵빵 미녀 앞에서 표정 하나 안 변하는 새끼는 너 밖에 없을 거다;
"너 진짜 나 몰라?!!나 안x 여상 얼짱 박.."
"그니까 니가 눈데?(누군데?)"
진미의 표정이 잠깐 흔들리는 듯 싶더니 갑자기 박홍철을 향해 고함을 질러댄다.
"아 시발;박홍철!!!"
그러자 박홍철은 깜짝 놀라며 그녀를 응시한다.
박홍철..정말 여기서도 시다바리;저기서도 시다바리;불쌍한 시다바리 인생;;
그러고 보면 내가 학교 다닐때도 저런 새끼들이 꼭 한명씩은 있었지..
여기서 맞다가 저기로 피하면 저기서 또 맞고있는...-_-
"야 얘한테 내가 누군지 설명해."
"으,응..근데.."
"근데?"
"꼭 해야 돼?"
진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박홍철을 노려본다.
"아,알았어.할께-_-;"
하지만 곧 들려오는 기철의 목소리.
"됐다.치아라.소개는 최대한 짧고 간단히..오케이?"
진미는 기철의 무관심에 무척이나 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게..
그녀는 자신이 안x여상 얼짱이라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했는데..
기철이 녀석이 관심 없다는 투로 말하니 흥분을 할 수 밖에...
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계속 듣고 있으면서..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연신 웃음을 자아냈다.
그런데 나의 그런 웃음이 박진미의 눈엔 상당히 거슬렸나 보다.-_-
"어이 아저씨?"
갑자기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난 절대 조용히 살 수 없는 인생인가 보다..
진미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다시 나에게 말했다.
"재밌어?"
"응?"
"지금 이 상황이 재밌어?"
"아,아니.."
"근데 왜 웃어?장난해?"
난 아무렇지도 않았지만..중요한건 기철의 놀란 표정이였다.
기철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던지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박진미와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재빨리 분위기 전환을 시도해야 했다.
"아니 그냥 분위기가 삭막하고 그래서 좀 웃었지.^^;"
그러자 진미 옆에 있던 박홍철이 소리를 지른다.
아마도 자신으로 인해 상해버린 진미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서 일 것이다.
"저새끼가 저번부터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겁대가리 없네?"
순간 속에서 엄청난 회오리가 몰아쳤지만..재빨리 갈아 앉았다.
늘상 있어왔던 일이기에..이젠 참는데는 도가 튼 것 같다;;좋은건지 나쁜건지..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점점 찌푸려지고 있는 기철의 표정에 있었다.
기철아.제발..-_-;
'웃는자에게 침 못 뱉는다'라는 말도 있잖은가?
난 입가에 잔뜩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이녀석들.우리 매일 보는데 이젠 화해 좀 하자.응?"
하지만 나의 얼굴에 침은 뱉어졌다..-_-
"저 아저씨 진짜 병신아냐?나이 쳐먹고 저렇게 비굴해지고 싶을까.."
사자머리 미선이가 그 말을 내뱉자 다들 비웃음 한방씩을 터트린다.
...............................
어머니가 항상 말씀하셨다.
"참는자에게 복이 온다는 말도 있제?누가 널 욕하고 때려도 무조건 참그래이. 참으면 결국 니가 이기는 기다.욕하는 자슥들이나 그거에 움찔하는 자슥들이나 똑같은 기라. 내가 니한테 가르쳐 줄 수 있는건 이거 뿐이다. 나중에 니가 커서 사회생활을 하다보면은 이 애미 말을 이해할끼다.알긋제?!"
지금 내 앞에 어머니가 있다면..꼭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있다.
어머니..참고 참아도 끝이 보이질 않으면 어떻게 하죠?
"야이 씨발것들아.뒤질래?!!"
분명 들려왔지만 내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아따 이것들이..사람 존나 빡돌게 만드네?"
아니라고 부정해보지만 이건 분명 기철의 목소리였다.
순간 편의점 안의 분위기는 엄청 살벌해져 있었다.
그 누구도 기철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고 심지어 숨을 쉬는 것 마저 그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건 성x 공고 박기철이라는 이름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카리스마였고
190이 넘는 엄청난 덩치의 사내만이 만들 수 있는 분위기였다.
난 그런 기철을 향해 그만하라는 눈길을 계속 보냈지만..
이미 녀석의 눈동자는 정상이 아닌 듯 했다.
"야 박홍철이.."
박홍철은 자신을 부르는 기철의 목소리에 잽싸게 고개를 든다.
그건 박홍철이 진미를 두려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였다.얼굴색 부터가 달랐다.
"뒤질래?"
"..........."
"대답 안하지?
"아,아니.."
"뒤질래?"
"아니.."
"근데 왜 설쳐?"
"..............."
"니 내가 묻는 말에 한번 더 아가리 다물고 있다간 죽통 날라간다?"
"응."
"너희들 같은 씨발롬들때문에 우리 학교가 꼴통 소리 듣는거 아이가?"
"으응.."
그때였다.
그 살벌하고 일방적인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있었으니..
"저기 잠깐.."
기철은 진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랬다.박홍철에게 쏟아지는 기철의 공격을 진미가 막아 선 것이였다.
그녀는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일까?
"니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저 아저씨랑 친구 먹은 뒤로 항상 이렇게 놀거든?"
친구?;;
하긴 초면부터 반말로 지껄여댔으니..그때부터 친구가 된건가..?
기철은 어이가 없었던지 날 향해 고개를 돌렸고..
난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상황이 더 커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철을 향해 고개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나의 그런 마음은 기철에게 다른식으로 전달되어졌나 보다.
"저 아저씨가 아니라는데?"
기철이 녀석이 머리가 무지 나쁘다는걸 새삼 실감한다.-_-;
순간 진미는 기가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마구 노려본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아저씨.있다가 나 좀 보자?"라고 말하는 듯 하다.-_-
내가 나서지 않고 마무리 되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엄청 다혈질인 기철의 성격으로 보아 결과는 너무나 뻔한 것이였다.
만에하나 사고라도 난다면..내가 이 편의점에서 짤리는건 시간문제일 뿐더러
기철이 녀석의 힘을 빌려 이런식으로 위기를 넘긴다는 건 ..
나의 자존심,내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자의든 타의든 상황이 이렇게 된건 나의 책임도 있었다.
카운터에서 나와 기철과 박홍철의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기철이 들고 있는 검은 봉지에서 소주 한병을 꺼내어들었다.
"얘들아.우리 이러지들 말고 술 한잔씩 하면서 풀자.어때?"
"................"
"................"
음..;다들 이런식으로는 풀기 싫은가 보다.-_-;
난 여전히 웃음을 유지한채 기철의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내가 보아하니 니가 가장 흥분한 것 같은데..우리 술 한잔 하고 풀자.응?"
"................."
날 향해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기철을 향해..
"씨발러마!!그만 좀 하자고!!!"라는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_-
그러자 싸늘한 기철의 얼굴엔 웃음 꽃이 피기 시작했고..
"그,그럴까예?;"
갑작스레 돌변한 기철의 행동에 박진미를 비롯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였고
난 그런 상황속에서 기철이 녀석의 연기점수에 빵점을 매기고 있었다..-_-;
더이상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게 없다는 생각에 박홍철의 손에 종이컵을 쥐어주면서 말했다.
"자자.박홍철군.한잔 마셔."
"예;;"
이새끼 -_-
갑자기 존댓말을 지껄이고 있는 녀석의 면상을 강타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척 미소를 유지한채 기철에게도 종이컵을 쥐어주고는 술을 따랐다
기철은 깜짝 놀라더니 두 손으로 술을 받는다.
그러자 다시 한번 박진미를 비롯 모두의 눈동자가 동그레졌고...
박기철..이 엑스트라만도 못한 새끼;;넌 진짜 스턴트 맨도 하지마!!
"자자.둘이 한잔하고 어서 화해해^^"
둘은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술을 단번에 비워버렸고
이번엔 진미를 비롯 사자머리,박홍철 패거리 들에게도 술을 따랐다.
내가 따라주는 술을 받고 있던 진미는 날 가만히 응시한채 입을 열었다.
"아저씨."
"응?"
"근데 우리 편의점에서 술 마셔도 돼?"
"물론.사장이 없을땐 내가 여기 사장이야!! 걱정말고 마음껏 마셔!젊을땐 싸우고 화해하고 술 마시고 그렇게 크는거야..가 아니네?"
사장이 왜 내 뒤에 서 있지?;;
모두 눈치를 보며 밖으로 나가버리고 사장과 나 둘만이 편의점에 남게 되었다.
난 사장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사장은 기가막힌다는 콧방귀 소리를 내었고..
"죄송해?이게 죄송해서 될 문제예요?"
"죄송합니다.정말 죄송.."
"아 시끄러워요.."
".............."
"일도 잘하고 해서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뒷통수를 치네?참나..."
"그게요.어떻게 된거냐면요.."
"지금 변명이 통할 것 같아요? 아르바이트생이 고등학생들에게 술을 판 거 까지 모자라서 술을 따르고 있는데..뭘로 변명할려고? 혹시 경찰이라도 들어왔어봐.벌금이 얼만지나 알어??"
"..............."
"고등학생들이 무서우면 나한테 말을 하고 관두던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비굴하게 그게 뭔 짓이래?? 생긴것도 얍삽하게 생겨서는..어휴.;"
이런 경우는 예전에 학교 다닐때도 종종 있던 일이였다.
선생들은 학교에서 사고만 났다하면 사고뭉치인 나부터 의심하기에 바빴고..
심지어 누명을 썼다가 퇴학 당할뻔한 경우도 한 두번이 아니였다.
변명을 아무리 해봤자 소용 없을 것이다.
어차피 사장은 날 당장 내쫓아도 시원치 않을 기분일테니..
"여기서 나가요."
"............."
"뭐해요?나가래두?"
"할말이 있는데..."
"뭐 돈 달라구요?"
"아뇨."
"그럼 뭔데요?"
"제가 뭐라고 변명드려봤자 믿지 않으실테고.. 나가는 입장에서 한마디만 드리죠. 제 앞에 일하던 아르바이트 생들이 전부 한달도 못 채우고 그만뒀다던데.. 제가 모를줄 알았죠?"
"..............."
날 바라보는 사장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건 사장인 당신이 해결해야할 문제 아닌가요? 언제까지 아르바이트생 핑계만 댈꺼유? 뭐 당신이 사장이니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지요."
그렇게 사장에게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편의점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아..어머니 앞에선 또 뭐라고 변명한단 말인가..?
밤 하늘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호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어 입에 물자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지어진다.
이유야 어쨋든 현재의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마저 짤려버리니
내 자신이 못견디게 한심해보일 뿐이였다.
담배를 피며 터벅터벅 길을 걷고 있는데 호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려댄다.
011 - xxxx - xxxx 박기철
받기 싫었다.아니 받을 수가 없었다.
지금 전화를 받으면 기철이 녀석에게 무슨 말을 내뱉을지도 모른다.
핸드폰을 닫고는 다시 호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다시 발걸음을 향하는데..
내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 사이로 누군가가 내 시야속으로 들어온다.
교복에다 털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는 여고생..
아니 여고생이라는 표현을 붙이기도 어색한 그녀..박진미였다.
난 그녀를 무시한채 그냥 지나치자 뒤에서 진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일 관뒀다고..쌩까니?"
알 수 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짧은 시간동안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참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었다.
난생 처음보는 고등학생들의 반말,삥뜯기기,주먹다짐..그리고 첫키스 까지...
지금 이 시간 이후로 다신 안보게 되더라도 박진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여고생은
내 기억속에 있어 쉽게 잊혀지진 않을 것 같다.
"그래도 계속 가네?"
발걸음을 멈춰서고는 입을 열었다.
"할말 있냐?"
진미는 내 옆으로 다가와서 날 빤히 쳐다보더니 씨익 웃는다.
답답하고 화나고 기분은 완전 엉망인데도...
그녀의 그 웃음은 날 잠시나마 얼어붙게 만든다..
사람의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은 박진미 앞에선 아무 소용 없는 것이였다.
그녀를 가만히 쳐다 보고 있으면..그 어떤 생각도 나지 않는다.
단지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 자체가 아깝다는 생각 뿐..
"아저씨 보니까 너무 웃겨서.."
"내가 뭐?"
"지금 아저씨 모습 보니까 꼭 대기업에서 짤린 사람 같다? 겨우 그따위 아르바이트 짤려놓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