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캠프를 코앞에 둔 2월 말까지 팀을 찾지 못한 박찬호는
결국 워싱턴 네셔널스와 1년 단기계약에 합의하면서 새 둥지를 찾게 된다.
계약조건은 연봉 400만불에 옵션 200만불.
박찬호는 그동안의 부진을 만회하겠다는 듯 투지를 불사르며 호투를
거듭하고 스스로 건재를 과시한다. 전반기 3.20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짠물 투구를 선보인다.
이로서 사람들은 그의 '부활'을 더이상 의심하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리는 여러팀으로부터 박찬호에 대한 트레이드 공세가 줄을 잇는다.
결국, 트레이드 마감시한인 7월 31일 극적으로 트레이드가 성사되는데, 그 팀은 데릭로가 부상으로 빠진 LA다저스다.
박찬호는 친정팀으로의 복귀 이후 전성기 시절의 다이내믹한 투구를 되찾고,
17승 8패 3.10 210이닝 170K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다저스는 샌디에이고에 반게임차로 뒤짐으로써 플레이오프 진출에 좌절하게 된다.
시즌 후, 박찬호는 다저스와 3년간 3000만불, 평균연봉 1000만불의
재계약에 사인하고 친정팀에서 선수로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게 된다.
2010년 시즌이 종료하고 통산 190승을 기록한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생활을
마무리하고자 했으나, 통산 200승을 갈망하는 팬들의 성원에 못 이겨 1년을 더 뛰기로 결정한다.
통산 202승을 달성하면서 동양인 최초로 200승을 돌파한 박찬호는 2012년
어느덧 39살이 된다. 그는 친정팀 다저스로부터의 강력한 재계약 의사를 뒤로 한채 고국으로 향한다.
2012년 시즌 박찬호는 송진우 감독이 이끄는 한화에 입단하여
마무리 투수로의 전향을 꾀한다. 한국프로야구사상 최초의 50세이브를
기록하여 변신에 성공한 박찬호는 이종범 감독이 이끄는 기아를 누르고 한화의 우승에 일조하게 된다.
박찬호는 이후 2013년 40살의 나이로 은퇴를 결심하고, 정든 그라운드와 이별을 하게 된다.
그는 새로운 프로구단을 창설하여 선진야구기술을 도입하면서 프로야구에 돌풍을 불러 일으킨다.
그의 선진 경영 기법은 각계 각층에 파급효과를 낳으면서 97년이후 제2의 박찬호 신드롬이 일어난다.
사회적인 존경 속에 그는 60세가 되던 2033년에 대선출마를 선언하게되고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대통령이 된 박찬호는 이른바 '베이스볼 외교'로 북한과의 적극적인 교섭에 나선다.
즉, 야구의 불모지인 북한에 야구를 보급하고 야구열풍을 일으키는 것이다.
야구의 매력에 매료된 북한주민동포들은 남한과의 자유로운 이동을 요구하지만
북한 정부당국은 이에 대한 탄압으로 일관한다. 급기야 2035년에 이르러, 북한주민들의 난동이 발생하여
휴전선의 철망이 붕괴되고 북한주민들이 대거 남하하는 사태가 이어진다.
더이상 대세를 거부할 수 없었던 북한은 남한과의 통일을 선언하고 이후 2035년 통일한국의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찬호가 당선된다. 그는 통일 한국의 기틀을 다진 뒤 통일헌법에 근거하여 2039년 대통령 중임에 성공한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이른바 '라이징 패스트볼 외교'로 적극적인 북방정책을 추진하여
백두산을 비롯 간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이로써 조선이래 한국의 영토를 회복한 박찬호는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영웅으로 기억되며 숨을 거둔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