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제주 4.3 사건 관련하여...당시에 벌어진 학살 사례를 덧붙여봅니다.

발광머리 앤 작성일 12.08.06 21: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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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5.10 선거로 단정이 들어서면 어찌되었든 간에 나라가 양분된다는 것은 제주도민도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조국분단을 초래할 5.10 단선을 거부하여 선거 며칠전부터 한라산으로 피신했지요.

 

그리하여 당시 치뤄진 5.10 선거의 결과중 제주도는 당시 단독선거 퍼센트 사상

 가장 최하위 투표율및 개표율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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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일 봉기 당시 무장대 병력 350명도 일본제 99식 소총 21정. 권총 3정. 나머진 죽창이 전부였기에

제주도 전 지서를 습격하되, 국방경비대 본기지로 사용되던 모슬포 지서만은 습격을 하지 못했지요.

5.10 선거의 최하위 개표율, 즉 실패이후 기존 주둔군에 더욱 증강된 국방경비대 (후일 국군의 전신)와 경찰 병력을 투입합니다.

 

그리고 벌어진 것은 아비규환의 지옥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군에게 군함을 지원받아 제주도 외곽을 포위해서 제주도를 탈출하는 모든 배에게 함포사격을 가해서

그 시체가 일본 근해로 흘러들어가서 일본 정부의 항의가 빗발쳤으나, 이승만 정부는 간단히 무시했지요.

후일 일본인들에 의해 위령비와 무덤이 세워진 걸로 압니다.

 

한편 이런식으로 학살이 벌어지자 입산한 무장대들도 보복학살을 전개하는데..

이 무장대들에 의해 살해된 사람도 4.3사건 피해자의 10프로 이상 된다는 연구도 있지요.

 

이런식으로 낮엔 군경 진압병과 서청단들이 , 저녁엔 무장대 세상이 되니까 주민들은 궁여지책으로

토벌대가 오면 깃대를 눕혀서 알리고, 경찰이 마을에 들어오면 "검은개 온다 (경찰 제복이 검정..)"

국방경비대면 노란개 온다 (국군은 당시 카키색 장비를 착용..) 이런식으로 빗개(보초)를 세워서 살아남았지만

후일 군경 진압대가 마구 잡이로 학살을 벌였을땐 그마저도 소용이 없었지요. 

 

그리고 당시의 참상 중 하나를 시인 고은이 자신의 시집 만인보에 옮겼는데..그중 일부를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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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담배꽁초를 던졌다

침 뱉었다

오라리 마을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할아버지 따귀 갈겨봐


손자는 불응했다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세게 때려 이새끼야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세게 때렸다

영감 손자 때려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쎄게 쳐

세게 쳤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울면서

서로 따귀를 쳤다


빨갱이 할아버지가

빨갱이 손자를 치고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이게 바로 빨갱이의 놀이다 봐라

 

그 뒤 총소리가 났다

할아버지 임차순과

손자 임경표

더 이상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총소리 뒤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당시 제주도민 임차순과 임경표는 서청 단원의 노리갯감이 되어 돌림 뺨을 당하다가

총알 세방으로 그 한많은 치욕을 끝내게 되지요..

 

 

가족이 한라산에 입산한 부모들은 도피한 자식을 대신해 '대살'당한 것은 아마 밑의 게시글에 나와있을겁니다.

사례를 일일히 들기도 끔찍하기 그지없지요

 

서청단원이 젊은 처녀를 강간하고, 가슴을 도려냈는데, 그 처녀가 고통을 못이겨서 손가락으로 땅을 마구 긁었는데.. 그 자리는 풀한포기 자라지 않는 곳이 되버렸다든가

 

자식이 보는앞에서 부모를 총살하거나 목을 매어놓곤 "부모가 죽는걸 잘 구경해라" 라고 진압병들이 비웃고.

혹은 총살 당하는 부모를 보면서 박수를 치게 하기도 했지요.

 

 

당시 군경 진압대 정보에도 추산된 무장대 병력이 500명 가량인데,죽은 사람은 최소 27000명 가까이 되고

실종자를 합치면 거진 5만 가까이 됩니다.

 

나중에 가면 이 군경 진압대의 학살에 분개하여 무장대에 지원하는 도민도 생길 정도지요.

 

 

그러나 사건의 주체가 어디까지나  제주도 남로당 지부의 좌익 폭동인 점은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 정통성에 반기를 든 것은 맞습니다만, 군경진압병들의 빈대보단 초가삼칸 다 태워버리는 방식의 마구잡이 학살로 비극적으로 끝난 근현대사 최악의 학살 사건이지요.

 

당시 협상을 진행했던 김익렬 연대장은 창군원로임에도 이떄의 일을 담은 회고록을 수십년간이나 비공개에 붙였다가 지난 80년대 후반에 가서야 이 사건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중립적인 시각의 내용의 회고록을 내놓습니다.

이 회고록은 4.3사건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료중 하나로 손 꼽히는 것이지요.

 

창군 원로조차도 말을 못 꺼낼 만큼 서슬퍼런 시대 아래 벌어진 이 비극은 그 후 수십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제대로 밝혀지게 되지요.

 

 어떻게 제주도에서 이런 유혈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는가, 일본 경찰에서 미군 경찰로 탈바꿈한 이들의 횡포라든가,등의 문제는 내용상 예민한 부분이라 수십년동안 금기의 대상. 금단의 영역이었고...

 

앞으로 좀더 명확하게 연구가 되어서 당시 억울하게 희생당했던 사람들의 넋이 조금이라도 풀리길 기대해봅니다.

 

이 일의 피해자는 좌도, 우도 아니며

진정한 피해자는 이런 싸움에서 끼어들은 민초들이었던 셈이지요..잠시나마 그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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