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의 아버지, 강희제
1. 제왕학 수업이든 어떤 것이든 전혀 읽히지 못한 6살의 나이에 즉위. 당시 모든 정권을 가진것은 오보이라는 막강한 권신이었는데 10년 가까이
조용히 힘을 기르다 단 한번에 정리(16살)
2. 당시 청나라 남쪽에는 우싼구이, 상즈신, 겅징중이라는 세 명의 왕이
번왕이라고 해서 엄청난 군사력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대만과 몽골의 반청 세력일부까지 끌여들어와 초반에는
밀렸음에도 불구, 침착한 대처로 9년간을 버티면서 승리로 이끌어 청나라 내부의 안정을 가져옴.
3. 대만을 비롯한
평후 제도등 36개 섬은 정씨 왕조라는 이들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우선 내부적으로 분열을 유도하고 해군 제독 쉬랑을 파견하여 복속시킴. 항복한
대만인들을 탄압하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명나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들은 칭송할만 하다" 는 식으로 정씨 왕조를 세운 정성공에게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림.
4. 표트르 1세 치세이자 소피아 공주 섭정기인 러시아가 국경에서 사람을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하는등 세력을 넒히려고 하자 러시아 군을 격파하고 요새 아르바진을 점령, 대신 색액도를 보내 협정을 맺고 영토와 평화를
얻음
5. 오이라트 부족 계통인 준 가르의 칸인 가르단이 몽골을 통합하고, 이후 티베트와 연합하여 거대한 힘으로
청나라를 공격하려 하려고 투르키스탄을 점령하고 청나라를 노림과 동시에 티베트와 연계하여 달라이 라마에게 대 칸의 직함을 받자,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몇차례 원정을 감행하여 가르단을 자결시킴
6. 명나라 말기 1억 명 이하까지 떨어졌던 인구는
강희제가 죽을 당시 1억 5천만 이상으로 늘어남
7. 강희제 7년에 1,500만 냥이었던 은자는 재위 50년경엔
5천만 냥이 넘는 양까지 증가. (강희제가 죽을 당시엔 준가르와의 전쟁 등 때문에 다시 7백만 냥까지 떨어지는데 옹정제가
해결)
8. 평생동안 하루에 300~400통이 넘는 보고를 모두 보고 처리, 답변까지 달아줌. 오삼계의 난
때는 500통의 문서를 한번에 처리함
9. 명나라 시기 무려 10만명이 넘던 환관과 궁녀를 고작 400명만 남겨두고 그
예산을 40분의 1로 줄임.
10. 옷이 찢어지지 않는한 최대한 개워입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장려함.
11. 흉년이 들면 지체없이 세금을 감세
12. 강희제 시기에 국고는 계속해서
풍족해져 1710년에는 인두세를 폐지하여 서민의 조세 부담을 격감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 당대의 인구로
인두세를 고정한 다음, 이후 태어난 인구의 인두세는 면제해주어 즉 토지세만 받은 정책인데, 이 조치로 조세 부담이 줄었을 뿐만 아니라 인구도
늘고 정확한 호구조사도 가능해짐. 이는 중국 최초의 업적.
13. 팔기군의 둔전지로 쓰던 권지(圈地)를 소작농에게
무상으로 나눠줌.
14. 유교에 심취했었는데 그러한 유교에 대한 이해도 보통 한족 출신 유학자들보다도 대단하여
유명무실해졌던 경연 제도를 일신하여 직접 가르침을 받거나 내림.
15. 서양에서 온 여러 책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실제로 라틴어를 배웠고 구사함.
16. 지리와 역사, 수학등을 배웠고 순순히 서양의 역법이 우수한것을 인정하고
역법도 배움. 물리학, 기하학까지 배움.
17. 심지어 피아노도 침
18. 카톨릭 교회의
교리는 전혀 배우지 않았고 배울 생각도 없었으나 가톨릭의 포교와 종교의 자유는 관대하게 자유롭게 허가(61년의 치세에서 죽기 1년전에 교황과의
마찰로 금지시키기는 함)
19. 근대수학을 공부해서 대수와 삼각함수등도 배움.
20.
대운하를 증축하여 교류를 번창하게 함.
21. 아직까지 청나라에 불만이 많은 강남 한족 출신의 학자들도 대거 포용하여
학사로 삼아 문화를 꽃피우게 함.
22. 청의 태조 누르하치가 설립한 팔기군 제도를 강화하고 군율을 엄격하게 단속하여
군사력을 강화함.
23. 능력이 있으면 만주족 뿐만 아니라 한족 출신의 장군들도 높이 등용. 대만을 정벌할적의 쉬랑만
해도 과거엔 청나라의 적이었던 인물.
24. 화살의 명수로서 강궁을 몹시 잘 다루어 호랑이를 잡기도 함. 일부러
외국의 사신들을 모아놓고 화살 실력을 보여 기를 죽이는 술수도 사용
25. 만주족 전통의 기마술이나 무예도 부지런히
익혀 문무를 겸비
26. 맛있는 음식에 탐닉하는 폭식을 하지 않고 음식을 분별있게 먹으며 나이가 들고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아 오래사는것도 능력임을 보여줌.
27.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치세(61년).
28. 장정옥등에 명령하여 명사(明史)를 편찬. 총 336권. 본기, 열전, 지, 표등이
완성될때마다 다 살펴보고, 경박하게 명나라의 황제들을 비난하는 편찬차에겐 주의를 줌. 강희제 왈 "나는 군주로서 그들의 단점 뿐만 아니라 장점
또한 보고 싶다."
29. 현대 중국어의 어법을 확립한 강희자전(康熙字典) 완성
30.
유교를 숭배하면서도 불교를 탄압하지도 않았고, 앞서말한대로 카톨릭 교회의 교리를 믿지도 않았지만 그 포교를 금지시키지도 않음.
31. 자기가 저지르지 않았지만, 양저우 대학살로 분노가 큰 백성들을 위문하기 위해
노력함
32. 대규모 강남 순행하여 민심을 다독이고 지주들의 호응을 얻는 한편, 예산이 초과하게 되면 가져온 내탕금을
활용해서 백성들이 돈을 지불하는 고통이 없게 배려.
33. 의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약의 조제법등을 세심하게 알아보는가
하면, 불로장생 할 수 있다고 하는 도사들은 헛소리 하지 말라고 그냥 무시하거나 내쫒아버림. 서양인 의사들의 치료법과 처방도 살펴보며 자기 몸에
써보기도 함.
34. 자신의 공덕비를 세우려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고위 관리를 한번에 다섯계급 강등시키면서 말함.
"진실로 뛰어난 관리는 백성들이 알아서 공덕비를 세워줄 것이며, 사악한 관리는 아무리 공덕비를 세워도 나중엔 백성들이 전부 부셔버릴
것이다."
강희제의 말
"홍무제와 영락제는 위대한 황제이며 숭정제도
'나라를 멸망시켰다'며 크게 비난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그에게는 나라를 잘 다스리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수단이 없었다. 책임은 만력,
태창, 천계 황제에게 있으니 제사도 지내면 안된다."
"관료의 도는 다음 사항 이외에 별다른 것이 없다. 애정으로 감싸주고,
다스리는 일에 성실하고, 말썽을 너무 많이 일으키지 말며, 관리와 백성이 그대를 어머니처럼 사랑하게 만들어라. 그것이 곧 훌륭한 관료가 되는
길이다."
"한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을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대, 백대에
우환거리를 남긴다."
"모든 비용은 백성들의 피땀으로 얻어진 것이니 주인된 황제로서 절제하고 절제함은 당연한
것이다."
강희제 ─ 《근검록》중에서
“제왕이 천하를 다스림에 능력이 있는 자를 가까이 두고, 백성들의 세금을 낮추어
주어야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위태로움이 생기기 전에 나라를 보호하며, 혼란이 있기 전에 이를 먼저 파악하여 잘 다스리고,
관대하고 엄격함의 조화를 이루어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해야 한다.”
강희제 ─
〈고별상유〉(告別上諭)
"강희제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입니다. 그럼에도 황제인 그의 생활용품들은 사치스러움과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못해 소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역대 제왕들 가운데 전례없는 일입니다."
조아생 부베 ─ 루이 14에게 보낸
보고 중에서
그 기술은 서양에서 왔네
그러나 우리도 배워서 그 기술을 익힐 수 있지
톱니바퀴가 돌면 시간도
흐르고
바늘은 1분 1분 지나는 것 보여주지
두건 쓴 파수꾼이여 새벽이 온다고
알릴 필요 없다
나의 황금빛 시계가
알려주니까
저녁에 불 밝힐 때까지 정사를 돌보느라 열심이네
"왜 이렇게 상주문이 더딘가?" 물어보면서
─ 1705년에
강희제가 쓴 시(수필?)
나라와 집안과는 다르지만 배우는것은 마찬가지란다.
나는 지금 강남에 있고 너는
삼천리나 떨어진 베이징의 구름 아래 있지만
나의 생각은 너를 떠난 적이 없단다.
새벽에 편지함을 열어 촘촘히 쓰인 너의 편지를
꺼낸다.
너는 솔직하게 한마디 한마디 이야기 해주는구나.
사서 읽기는 어떻게 다 끝마친 것이냐?
나이가 들면 지식은
늘어나야 하는데, 네가 이를 깨닫고 그려려고 애쓰니 나는 참으로 기쁘구나.
일취월장하도록 힘쓰고, 중단하지는
말거라.
사람들이 옥을 항상 보물로 여기는 것처럼, 너는 흘러가는 시간을 귀중이 여기거라.
네가 펼치는 책 속의 옛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사건 속에 드리워진 깊은 뜻을 살피거라.
그리하면 고기맛을 알아가듯, 시간이 지나면 가슴으로 기쁨을 느낄테니
말이다.
─ 1684년 난징에서 황태자에게 쓴 편지.
출처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gugji&no=286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