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와 2부를 안 보신 분들은 먼저 읽고 오실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1부 : http://fun.jjang0u.com/chalkadak/view?db=160&page=10&no=224412
2부 : http://fun.jjang0u.com/chalkadak/view?db=160&page=7&no=224501
대망의 3부(완) 이순신과 한산도대첩 그 마지막 이야기
@ 왜군진영에 끝없이 날아드는 패전보
옥포에서 도도 다카도라가 대패했다는 소식이 왜군 진영에 날아들었습니다. 왜군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이미 괴멸 된 줄 알았는데, 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들인지. 도도의 패전소식이 조금 더 놀라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도도라는 인물 자체가 치밀하기로 소문난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상대해본 조선군의 실력은 그야말로 조무래기 였는데, 이번 패전의 결과는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 수준의 압도적인 패배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연이어 합포, 적진포에 있던 수군들도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아 괴멸되었다는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연이어 도착하는 패전소식에 왜군들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개전 후 한 번 도 지지 않고 전승을 거두고 있었던 그들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합니다. 그리고 곧 왜군은 그 의문의 함대가 전라도 여수에 거점을 삼고 있는 전라좌수군이라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옥포, 합포, 적진포 에서의 패배. 왜군 입장에서는 개전 후 첫 패배였음에도, 그들에게는 다소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1부의 내용을 더듬어 보십시오. 개성 이북까지 진출해 있던 왜군들은 보급의 문제 때문에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수군의 북상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군의 ‘북상’을 앞장서서 시작해야할 도도의 수군이 괴멸된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끔찍한 악몽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라좌수군의 등장과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의 패전은 곧바로 전쟁의 전체판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부분을 위해서 1부에서 언급했던 <왜군의 대조선 전쟁 제1전략>을 기억해 내셔야 합니다. 최단 시간 내에 선조를 사로잡는 것. 그를 위해 왜군은 길 따라서 한양만 보고 진격한 터였습니다. 그런데 전라좌수군의 등장 이후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전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의병’이란 규모와 훈련수준을 떠나 왜군에게 심각한 골칫거리였습니다. 조선 전역에서 발생하는 그 의병들이 자신들의 보급선에 게릴라전을 펼쳤기 때문이죠. 안 그래도 평양까지의 보급선이 멀어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 육로 보급선마저도 의병들에게 공격당하기 시작하자 왜군 입장에서는 매우 난처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이순신의 승리는 전쟁의 판도를 서서히 바꿔놓고 있었습니다. 제가 1부에서 <왜군의 대조선 전쟁 제1전략> 이 그들의 목을 조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그 재앙이 바로 시작된 것입니다. 만약 왜군이 선조를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 병력을 보내어 땅을 점령코자 했다면, 이런 문제에 봉착하지 않았을 겁니다. 육로의 보급선이라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을 것이고, 전라도와 같은 곡창지대를 점령하여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방법도 강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남쪽바다 끝자락에서의 패배가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는 육군부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접한 나고야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분노를 금하지 못합니다. 이에 즉각 전라도를 공격하여 원정군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왕만 사로잡고자 했던 전략지침을 대폭 수정한 것이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전라좌수군을 격파하는 것이었기에 히데요시는 일본내 해적단 출신으로서 맹위를 떨쳤던 구루지마 미치유키를 조선으로 보냅니다. 구루지마는 자신이 이끄는 병력을 이끌고 곧바로 부산으로 향하여 이순신과의 일전을 준비합니다.
구루지마 미치유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하지만, 아이고나.. 구루지마정도면 전라좌수군을 꺾을 수 있다고 판단한 히데요시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습니다. 구루지마의 수군 역시 전라좌수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 것이죠. 이 전투가 2부에서 잠시 언급했던 사천해전입니다. (거북선이 최초로 전장에서 쓰인)이 전투에서 구루지마의 수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고 구루지마 미치유키 본인도 전사합니다. (구루지마 미치유키의 친동생이 바로 구루지마 미치후사입니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과 일전을 벌인 장수로 영화 <명량>의 류승룡에 해당합니다. 형제가 모두 이순신에게 죽임당한 것이죠.)
이순신의 2차 출전의 첫 해전이었던 사천해전. 이 전투를 뒤로한 채 당포, 당황포, 율포에서 연이어 전라좌수군은 왜군을 격파합니다. 그리고 이 즈음해서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 우수군이 전장에 합류합니다. 패잔병이었던 원균의 경상우수군까지 합치면 삼도의 수군을 모두 합쳐 판옥선만 약 60척에 달하는 대 함대였습니다.
@ 발등에 불 떨어진 왜군
왜군 입장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고 여겨왔는데 그 분위기가 급속히 냉각되고 있었습니다. 연이어 수군이 대패하자 모든 육군의 발걸음도 멈춰버렸습니다.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여섯 번도 넘게 싸워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대패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수군과 싸우다가 죽은 병사만 해도 만여명에 달했습니다. 한 번도 조선수군에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는 사실도 큰 부담이었습니다. 바닷길이 절실했던 왜 육군 입장에서도 심각한 우려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에 히데요시는 대 결단을 내립니다. 육군에 배속되어 맹위를 떨치고 있었던 와키쟈카 야스하루를 부산으로 부른 것이죠.
와키자카 야스하루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와카쟈카 야스하루. 용인전투에서 전라도 연합육군 50,000명을 자신의 직속부대 1,500명으로 개쳐바른 장본인 이었습니다. 일본 내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수군장수 였지만 육전에도 워낙 탁월했기에 육군에 배속되어 내륙에 진출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와키쟈카를 부산에 내려 보내어 이순신과 싸우도록 한 것입니다. 동시에 히데요시는 일본 잔여수군에 총 집결 명령을 내립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히데요시는 자신이 꺼내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비장의 카드를 꺼낸 것입니다. 모든 힘과 역량을 끌어 모읍니다. 바로 이 전투에 침략전쟁의 사활을 건 것이죠. 이 남쪽바다에서 펼쳐질 대 해전에 모든 이목이 집중됩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 전쟁을 승리로 끝내기위해 반드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습니다.
다급하기는 조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순신의 연전연승으로 벼랑 끝에서 한 숨 돌리게 된 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싸움에서 지면 그 모든 것도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왜군의 이 카운터펀치를 막아내지 못하면 조선의 운명도 그걸로 끝입니다. 수군싸움에 있어 두 번의 기회란 없습니다. 배라는 것은 침몰하면 그것을 다시 건조하기 위해 수개월이 필요하기 때문에, 수군에게 한 번 패배는 곧 괴멸을 의미했습니다. 삼도수군이 이 싸움에서 패한다면 왜 수군이 남해를 돌아 남포와 인천으로 북상할 것이고 때를 같이하여 대단위의 군수물자와 지원병력이 평양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조선의 멸망은 시간문제입니다.
이제 이 싸움의 그림이 조금 그려지십니까? 양국 모두 절체절명의, 사활을 건 싸움입니다. 패배하는 쪽은 곧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토록 다급했기에, 와키쟈카도 조선수군과의 일전을 위한 대비에 들어갑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거북선이라는 신형전함이 있고, 화포로 중무장한 부대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맞서 와키쟈카도 화포를 자신의 수군에 도입하고자 합니다. 이런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와키자카는 다른 여느 왜군 장수들과 달랐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노획한 조선의 갖가지 총통들을 자신의 함대에서 시험운용해 봅니다. 하지만 왜의 배는 총통을 운영하기에 너무 내구력이 약했습니다. 총통의 격발시 발생하는 강력한 반동을 배가 견뎌낼 수 있어야 하는데, 왜 수군의 전함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결국 함수에 두 문 정도를 줄에 매달기로 합니다. 명중률은 많이 떨어지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포격전에 대한 대비를 한 것이죠.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습니다.
왜군의 대 선단이 견내량에 집결해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습니다. 대선만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에 이르는 대 함대였습니다. 도합 70여척, 예상되는 왜군의 병력은 최소 8천에서 최대 1만에 달했습니다. 그 중에는 전국에서 맹위를 떨쳤던 와키쟈카의 직속부대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전에 없던 대함대요, 대병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수군역시 크게 밀리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군, 이억기의 전라우수군, 원균의 경상우수군이 힘을 모은 터라 판옥선은 60여척에 달했고 거북선도 3척에 병력은 8천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1592년 7월 7일 드디어 역사적 결전이 시작됩니다.
한산도대첩 (1) 조선군의 유인작전
견내량은 좁은 해협으로 포격전을 감행할 조선군에게 있어서는 불리한 위치였기에, 이순신 장군은 특공선단을 꾸려 견내량에 있는 왜군함대에 유인작전을 위한 선제공격을 가합니다. 몇 차례 포격을 주고받은 후 특공선단은 재빨리 남쪽으로 도망쳐 왜선단을 견내량 밖으로 끌어냅니다. 그럼 나머지 조선함대의 주력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은 한산도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었고, 나머지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은 주위에 있는 여러 섬 뒤에 매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학익진을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한산도대첩 (2) 전라좌수군의 거짓패주
특공선단 뒤로는 수많은 왜군들이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특공선단이 전라좌수군 진영에 합류한 후, 이번에는 전라좌수군 전체가 놀라 도망치는 척, 남쪽으로 계속해서 이동합니다. 이에 와키쟈카 야스하루는 신이나서 전라좌수군의 뒤를 쫓고 있었습니다.
한산도대첩 (3) 조선함대 분향의 시작, 학익진의 완성
그런데 갑자기 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도망치던 조선 수군이 분향(여러 방향으로 나누어 항진함)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왜군입장에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이었습니다. 곧이어 왜군들은 믿지 못할 광경을 자신들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분향하던 함대들이 일제히 급선회하며 자신들의 함대를 둘러싸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주위에 있는 섬에 매복해 있던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이 양 측면에서 합류하며 순식간에 조선수군 전체가 반원의 테두리와 같은 형태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학익진이 완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학익진이 완성되어 조선수군이 공격을 감행하기 직전의 이 시간을 임시로 알파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자세한 설명을 위해 여기서 전장의 시계를 잠시 멈추겠습니다.
(이 당시의 학익진이 왜 함대의 반만 둘러싼 학익진 이었는지, 아니면 완전히 구 형태로 포위한 쌍학익진 이였는지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했으나, 최근에는 쌍학익진설(빈틈이 없는 완벽한 포위)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한산도대첩 (4) 학익진의 이해
학이 날개를 편 듯한 모양으로 적을 둘러싼다는 개념의 학익진은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던 육군 진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순신 장군은 이 학익진을 한산도 대첩에 사용했을까요? 자 그럼 이 한산도대첩의 백미인 학익진을 완전 후벼 파 봅시다잉.
첫째, 학익진은 완벽한 포망 구축을 가능케 해 주는 진형이었습니다. 학익진이 완성된 바로 그 알파의 순간을 딱 잘라서 단면적으로 살펴봅시다. 조선수군이 학익진을 완성했을 때, 60여척의 모든 판옥선은 모든 화포를 가용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함포는 함의 측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판옥선 한 척이 모든 화력을 내뿜으려면 함의 측면이 적을 향하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적함과 자신의 배 사이에 또 다른 아군함대가 없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대가 중구 남방으로 섞여 있다면 즉각적으로 사격에 참여할 수 있는 판옥선은 최전방에 있는 몇 척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창조해낸 이 전략에서는 보시다시피 진이 완성된 순간, 삼도연합수군의 모든 판옥선의 총통들이 일제히 적을 향하고 있으며, 화력을 내 뿜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 이 순간 왜군함대는 맹추격을 하고 있었으므로 전열이 흐트러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더욱이 함포를 함수에 매달았을 뿐이었으므로 혹 즉각적인 대응사격을 하더라도 최전방의 몇 척만이 전방을 향해서만 사격할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 바로 이 학익진이 완성된 이 순간. 양측의 화력은 비교 불가능한 수준으로 격차가 나 있었던 것입니다.
쉬운 이해를 위해 스타크래프트를 예로 들겠습니다. 똑같은 마린 한 부대가 다른 마린 한 부대를 상대할 때, 싸움의 승부처는 곧 누가 잘 펼쳐서 싸우느냐가 될 것입니다. 이때, 마린을 펼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양측 마린의 교전이 막 시작된 순간을 사진 찍었을 때, 펼쳐진 측의 마린은 12기가 모두 사격에 참여하지만, 뭉쳐있는 측은 전방에 있는 소수의 마린들만 사격에 참여합니다. 분명 머릿수는 12:12 이지만 순간 화력수는 12:4 또는 그 이상의 차이로 벌어집니다. 그렇게 발생한 화력차이로 뭉쳐있던 측에서 먼저 마린이 죽을 것이고, 머릿수에서조차 밀리기 시작하며, 기아급수적인 피해를 받는 법입니다. 그나마 마린은 자유자재로 움직임이 가능한 유닛이지만, 당시 일본 함대는 추격하는 중이라 모두 전방만을 향하고 있었기에 당시의 순간화력은 말씀드렸다시피 하늘과 땅차이로 벌어졌던 것입니다.
둘째, 전광석화의 속도로 진법완성이 가능했습니다. 도망치는 척을 하던 조선수군이 분향을 시작한 시점부터, 진이 완성되어 선제공격직전단계인 알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 그 시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그 시간이 적장인 와키자카가 무엇인가 판단해서 대응할 정도로 긴 시간이 된다면 작전은 실패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일반적인 병법에서 적이 학익진을 구사할 경우 가장 확실한 대응책은 학익진의 측면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와키자카에게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학익진인지조차 판단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조선함대의 유기적인 움직임에 짐짓 놀라 있을 때쯤, 이미 알파의 시간에 이르렀기 때문이죠.
이쯤 되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조선수군은 분명 전속력으로 퇴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함대전체가 어떻게 진행방향의 반대로 급선회하며 순식간에 진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피나는 연습도 있었겠지만 조선수군전함의 구조적인 특징이 이를 가능케 했습니다
평저선 이었던 조선수군의 판옥선들은 도망치다가도 이순신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급히 선회하여 진법완성을 위한 위치로,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만약 판옥선이 왜군함대처럼 첨저선 이었다면, 이순신의 학익진은 아마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평저선의 선회력이 우수한데 반해, 첨저선의 선회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바로 선회시 물로부터 받는 저항 때문입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였는데, 이순신 장군도 이처럼 아국 함대의 장점을 명확히 알고 창조적인 전술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술은 일본 함대에게 대응할 시간조차,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순식간에 완성되었습니다.
셋째, 적의 예봉을 단숨에 꺾어버릴 계책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전투가 진행 중입니다. 그 와중에 어느 한 쪽이 패할 때는 다음과 같은 네 단계의 양상을 보이며 패하게 됩니다.
교전의 단계 => 밀리는 단계 => 붕괴되는 단계=> 패주하는 단계
교전의 단계는 서로가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고 있을 때의 단계입니다. 어느 한 진영이 밀리는 단계에 이를 때는, 수적인 열세가 원인일수도 있고, 갑자기 나타난 적의 지원군이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일단 밀리는 단계에 접어들면 아군 병사들은 점차 사기를 잃기 시작하며 대열이 흐트러지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반격의 기회를 찾지 못하고 밀리는 상태가 유지되면 이내 붕괴되는 단계에 접어듭니다. 이때부터는 그 군대의 지휘체계가 무너져 명령이 전달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병사들이 동요하며 통제가 잘 되지 않게 됩니다. 그 후 패주하는 단계에 접어드는데, 이 단계는 지휘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상태이고, 병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도망치는 단계입니다. 많은 전쟁사에서 증명된 사실이지만, 붕괴되는 단계와 패주하는 단계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로마토탈워 해 보신 분들은 바로 이해 하실 듯) 그렇기에 수많은 병법서들은 먼저 적을 밀리는 단계로 빠뜨리기 위한 여러 전술들을 가르쳐 줍니다. 예를 들어 매복작전. 매복에 걸려 기습을 당한 군대는 당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교전의 단계를 거의 거치지 않고 곧바로 밀리는 단계로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일기토에서 아군장군이 적의 장수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교전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밀리는 단계로 접어드는 과정을 우리는 삼국지에서 수 없이 봐 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해 봤을 때,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잠시 후 알파시간으로 돌아가 전장의 시계를 다시 재생 할 텐데, 이순신장군의 이 창조적 전략은 히데요시가 가진 최후의, 비장의 카드라고 할 수 있는, 이 와키자카의 대함대를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붕괴되는 단계>로 밀어 넣어버립니다. 단숨에 예봉을 꺾어버리는 것입니다.
한산도대첩 (5) 지옥의 150분, 감격의 150분.
알파로 돌아왔습니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60여척의 삼도연합수군 판옥선단에서 일제히 포격을 시작합니다. 단 한척도 포격에서 제외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판옥선에서 일제히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더욱더 기가 막힐 일은 조선수군은 마구잡이로 포를 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수척의 판옥선이 동일한 목표물에 조준하여 동시에 공격을 감행해왔습니다. 이른바 조선수군의 일시집중타. 판옥선단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왜군 입장에서 보면 가장 바깥쪽에 포진해 있던 전함들에 일시집중타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일시집중타를 받은 왜선은 단번에 격침되거나 심대한 타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왜군의 전방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배 3척이 빠른 속력으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와키자카는 직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북선이라는 것을. 70척에 달하는 왜군함대의 진영 속으로 3척의 거북선이 종횡무진 돌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구루지마가 그랬던 것처럼 거북선의 위용 앞에 와키자카라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거북선에게 한 번 들이 받힌 전함은 그 자리에서 가라앉기 시작했고, 좌우로는 끊임없이 방포하며 자신들의 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처음 거북선을 본 병사들중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도선을 시도하는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뛰어든 즉시, 거북선 지붕위의 쇠못에 온 목이 박혀버린 채 전투가 끝날때까지, 거북선의 장식품역할을 자처했습니다. 혹여 와키자카에게 조금의 시간이라도 주어졌다면, 저 거북선에, 저 학익진에 대응해낼 방안이 떠올랐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필요한 명령이 전달되어 무언가라도 해 볼 수 있었겠죠. 하지만 조선수군은 그 어떠한 틈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일시집중타의 재물이 된 바깥쪽의 왜군 함대가 차례차례 격침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조선수군의 공격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날아드는 것이 총통에서 발사된 쇠철환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든 대장군전은 왜 함대의 갑판을 박살내버렸습니다. 그중에는 아예 함 전체를 관통하는 대장군전도 있었습니다. 소발화탄, 대발화탄을 맞은 전함에는 삽시간에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고, 일반 화살이라면 날아올 수 없는 거리였는데도, 화약으로 추진을 받은 수많은 소신기전이 왜군 함대의 머리를 덮고 있었습니다. 삽시간에 왜군 함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천자총통을 통해 발사되던 대장군전 (초대형 무쇠화살)
소신기전 (조선은 당시에 작열탄으로 제작할만큼의 기술을 보유)
명색의 왜군 최고의 장수도, 용인에서 대승을 거둔 그 주역들의 용력과 자신감도, 수십 년간의 전국전쟁으로 인한 풍부한 육지전과 해전의 경험도 이순신 장군이 세운 이 체계적이면서 완벽한 전략 앞에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와키자카로부터의 지휘체계는 붕괴되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멀리서는 사방에서 둘러싼 판옥선단이, 가까이에는 도무지 막을 길이 없는 저 거북선이 일방적인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습니다. 불과 몇 십분 전만 해도 자신들은 저 조선수군을 끝내버릴 듯이 추격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꿈이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거북선3척의 내측 진영돌파와 판옥선단 60여척의 일시집중타의 공격을 받은 왜군함대에게 교전하는 단계란 없었습니다. 알파시간으로부터 왜군은 밀리는 단계에서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게다가 비교불가능한 수준의 순간화력 차이는 왜 수군을 붕괴하는 단계로 급속히 밀어 넣고 있었습니다. 수천 명의 왜군이 바다에 빠지고 수십 척의 대소선이 격침되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가득 매운 조선수군의 탄환들과 갖가지 무기를 보며, 가지런히 정렬되어 불을 내뿜고 있는 저 멀리의 판옥선단을 보며, 당장이라도 집어 삼킬듯한 용의 머리를 가진 저 무지막지한 거북선을 보며 전의를 상실치 않을 왜군은 없었습니다. 더욱이 자신들의 최고 지휘관인 와키자카조차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하고 허둥대자, 왜군 진영은 순식간에 붕괴되었습니다. 이내 살기위해 전장을 이탈하는 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와키자카도 별 수 없이 꽁무니를 빼기 시작합니다. 패주하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죠. 수많은 왜군들은 이미 물귀신이 되었거나 전의를 상실한 채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1592년 7월 7일 한산도 앞바다에서의 150분. 왜군에게는 생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채 세 시간도 안 되어 한산도 앞바다는 고요해 졌습니다. 양 국의 운명을 건 전투는 이렇게 오래지 않아 막을 내렸습니다. 조선의 명운이 걸렸던 이 전투, 일본 입장에서는 침략전쟁의 성패가 달려있던 이 전투,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양군을 합쳐 족히 일만 오천이 넘는 인원이 격돌한 이 싸움에서 왜군은 70여척의 전함 중 14척만이 살아 돌아가고 나머지는 모두 격침되기에 이릅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전사한 왜군의 수는 8,960명에 달합니다. 그 사이 조선수군에서는 단 한척도 격침되지 않았으며, 10여명의 전사자를 냈을 뿐입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경이롭지 않습니까. 전투의 결과만 본다면 저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올린 1부부터 2부까지 의 내용들을 기억하실 수 있겠습니까? 전란 발발 전 남들과 다른 1년의 시간을 보냈던 이순신 장군. 그 1년동안 그분이 가졌던 생각, 철학, 예상, 대비, 훈련을 기억하신다면 말도 안되 보이는 이 압도적 승전 결과를 감동의 탄식과 함께 납득하시리라 믿습니다.
1592년 7월 7일의 한산도대첩. 때를 같이하여 다음날인 7월 8일에는 또 다른 구국의 영웅인 권율 장군께서 웅치와 이치에서 전라도로 진격하는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둡니다. 거기에 조선 조정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명나라에서도 원군을 보내주니, 그야말로 전쟁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조선쪽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이후 평양의 고니시의 제1선봉군은 불안한 사태를 버티지 못하고 철수하기에 이릅니다.
한산도대첩의 소식이 왜군 진영에 전달되자마자 왜군 전체는 큰 실의에 빠집니다. 개전한 이래 이순신 장군의 조선수군에게 죽임당한 왜군의 숫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만명이 넘었으니,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왜군이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에 가졌던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요. 도도 다카도라부터 시작해서, 구루지마 미치유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에 이르기까지, 당시 조선에 건너와 있던 모든 수군이 삼도연합수군에 괴멸당하니, 이것은 왜 수군에게 내리는 사형선고와도 같았습니다. 한산도 대첩과 안골포 해전(한산도 대첩 다음 전투이나, 왜군이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감. 구키 요시타카)에서 남아 있던 모든 역량마저 잃어버린 왜 수군.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전란의 보급거점인 부산을 지키는 일 뿐이었습니다. 제1군 선봉장 고니시가 평양을 점령하여 신의주에 있던 선조를 협박하고 있던 시절. 분명히 조선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습니다. 벼랑 끝에 내 몰려 있던 이 나라였지만 저 남쪽바다에서의 승전이 전쟁의 판도를 바꿔놓았고, 왜군은 전쟁의 귀신이라 여기며 백성들의 뼛속까지 파고들었던 왜군에 대한 두려움은 나라를 구해내겠다는 용기로 바뀌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자료가 남아있지 않지만 저는 종종 한 명의 조선수군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곤 합니다. 전란 발발 전, 처음 이순신 장군이 진법훈련의 계획을 밝혔을 때, 장수들조차 극히 반발했다고, 그 이유와 함께 2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병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과연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하고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요? 한쪽 방향으로 전속전진을 하다가 장군의 명령과 함께 급선회하여 완벽한 학익진이 완성되도록, 아마 그들은 수십 번도 넘게 비어있는 바다에서 땀을 흘렸을 것입니다. 손에 잡힌 물집이 터질 때까지 노를 잡았을 것이고 흔들리는 배 위에서 심한 멀미를 앓던 그들이 당당히 서서 활을 쏠 수 있을 때 까지, 나아가, 천자총통의 가늠자에 자신 있게 눈을 가져다 댈 수 있는 그때까지 그들의 수고는 멈추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1592년 7월 7일. 그 병사들은. 전쟁을 겪어본 적도 없었던 그 병사들은, 농사를 지으며, 밭을 일구는 평범한 생활을 해 왔던 그 병사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누군가의 아들로서 평생을 살아온 그 백성들은, 최고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이제까지 훈련한대로, 이제까지 수도 없이 땀 흘려왔던 그때의 기억대로 노를 저었고, 장약을 장전했으며, 심지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러한 그들 앞에 조선백성들을 철저히 유린해왔던 왜군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습니다. 그 150분. 그 150분. 아마 조선백성들에게는 감격의 150분이었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이순신 장군을 어떤 영웅으로 알고 계셨습니까? 저도 여러 책을 읽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에 내가 알던, 고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배웠던 이순신 장군으로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전란이 발발하기 전, 이순신 장군이 보낸 1년의 시간. 그분의 철학, 현실에 대한 직시, 냉철한 판단력, 그에 따른 완벽한 대비. 전쟁터에서 보여준 뛰어난 전략과 전술에 이르기까지. 그 분은 그야말로 영웅의 호칭이 아깝지 않을 우리 역사의 진정한 성웅이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1545~1598)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지켜봐주시는 가운데, 3부에 걸쳐 우리 역사의 영원한 자랑거리인 한산도 대첩을 훑어보았습니다. 즐겁게 봐 주시고 추천해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혹여나 많은 분들께서 원하신다면 정유재란 파트(칠천량해전 - 명량해전 - 노량해전)를 간략하게나마 다뤄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