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라면 금요일에 돌아왔어야 했는데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늦게 돌아왔습니다.
내심 “기왕 늦은거 그냥 금요일에?”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 부족한 글이나마 기다려 주시는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이틀정도 늦긴 했지만 뒤늦게라도 써야겠다 싶어서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생각보다 길어진 중동의 전반적인 이야기는 이번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끝내고
구체적인 나라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 게시글은 “삼프로 tv”의 코너 “중동을 이해해야 세계를 이해한다.”를 토대로 함과
저는 3프로 tv로 부터 어떠한 경제적 이익을 제공받지 않음을 밝힙니다.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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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랍민족주의를 다루었으니
이번에는 아랍민족주의의 퇴조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사조 “무슬람주의”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슬람주의? 그게 뭐야? 이슬람 근본주의는 들어봤는데???”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 텐데요.
대충 설명하자면,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시면 되고..... 굳이 차이를 두자면
“무슬림주의”는 순한맛
“이슬람 근본주의”는 매운맛
으로 보시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결국은 같은 뿌리에서 좀더 독한 놈들이 삐져나오기도 하니까요. 음..... 이게 적절한 비유일진 모르겠으나
디씨에서 일베가 나왔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2) 무슬람주의의 특징
이전편에 다루었던 아랍민족주의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던 과거의 영광이 외세에 의해 산산이 조각난 문제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너도 아랍인”
“나도 아랍인”
“우린 아랍인”
“우린 같은 민족”
“우리 모두가 평등한 하나의 나라를 만들자”라는 것이었다면
무슬람주의는 같은 문제상황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우리가 이렇게 산산이 조각난건 ‘알라의 뜻’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봐라 무슬림이 제일 알라의 뜻에 가깝게 살아온 시기가 무함마드 시기인데, 그때는 100년도 안되서 엄청난 대 제국을 만들었잖아.”
”꾸란만 잘 봐도 대 제국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의 근거를....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온 것이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나라 버전으로 생각해 보자면
”야 우리가 광개토대왕때 얼마나 잘나갔냐? 그때의 문화와 전통을 잘 지키면 그때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다고.”라는 주장인거죠.
3) 아니 이게 설득이 된다고?
우리나라 사람 입장에서 보면 “무슨 팔만 대장경 같은 소리를 21세기에 하는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선 말도 안되는 소리가 실제로 먹힌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죠. 이제 그 이유를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3-1) 역사가 그랬는데 어쩌겠냐?
중동지역의 역사는 세계 다른 지역들의 그것과는 차별화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이 뭔고하면, 종교가 국가보다 먼저 성립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무슬람교가 성립되기 전에도 나라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1) 무슬람이라는 종교 공동체가 먼저 성립하고,
(2)그들이 성장하면서 무력을 갖추고, 이전에 있던 나라를 뒤엎은 다음
(3) 종교적 도그마가 나라의 운영의 근간이 되는 방식이 천여년 넘게 지속되는
역사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중동사람에게 있어선 국가와 종교가 분리될 수가 없어요.
우리나라 입장에선 “저거저거 후진적인 제정일치 사회네? 고조선인가?ㅋ”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그들이 만든 제국이 커도 너무 컸다는 것이죠.
북아프리카~중동~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문화권을 만들었으니, 그들의 입장에선 “종교와 국가는 불가분의 관계이다.”라는 명제는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만큼이나 당연한 거였던 거에요.
3-2) 독재를 참아주는 두가지 조건
물론 독재 부역자들 빼곤 독재를 환영하는 이들은 없을 겁니다. 저번에 말씀 드렸지만, 아랍민족주의는 독재로 변질되는 부작용을 낳았어요.
하지만 아랍민중들이 그냥 봉이라서 독재를 참아준 것은 아니었어요. 그들이 권력자에게 권력을 줄 때는 두가지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첫째, 무슬림들이 외적의 위협으로 부터 안심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호 할 것
둘째, 무슬림들이 경제적인 문제로 신앙생활이 위협받지 않도록 보호할 것
이 두가지만 만족하면, 지배자의 사생활이야 개판을 치든 말든 “그래 너 계속 권력 잡아”라고 허용을 해줬다 해요.
이것 역시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요. 무슬람이라는 종교, 그리고 그들이 이룩한 제국은 무함마드 -> 칼리파 -> 술탄으로 권력자의 흐름이 바뀌어 왔습니다. 이중에서 술탄은 우리나라 표현으로 하면 “왕”입니다.
그들은 무슬림 신앙에 의한 정통성은 없었습니다. 오로지 강대한 무력만이 있을 뿐이었죠. 정통성은 없고 힘만 있는 이들이 권력을 잡으려면 그걸 정당화 할 명분이 필요했는데. 그 명분이 위에서 언급한 두가지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약 10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어지면서 아랍의 민중들도 내재화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저 두가지 기준을 놓고 아랍민족주의를 내세운 “독재자들”과, 지금도 아랍의 큰 형님을 자처하는 “사우디”를 평가해 보겠습니다.
아랍민족주의를 내세운 독재자들은, “아랍 강성대국을 만들어서 빛나던 그 시절을 되찾겠습니다.”라는 명분으로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아랍의 민중들은
“그래 쟤들이라면 첫번째 조건을 만족시켜줄 수 있을거야.”
”야 봤어?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 저 황금알 낳는 거위를 국유화 했네? 이제 우린 부자다!”라고 했을 겁니다.
이때 까지만 하더라도, 이들은 두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었지요. 당연히 아랍 민중들의 기대와 지지를 한몸에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번에 말씀드렸던 대로 아랍 민족주의는 “3차 중동전쟁”을 기점으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랍민족의 강성대국을 만들겠다.”는 대의 하에 독재를 허용해 줬더니, 이건 뭐 쪼꼬미 하나한테 나라 두개가 동시에 털려버리는 모습을 보였으니 당연히 그럴 수 밖에요.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을 해 봅시다.
여러분은 지금 중동 어느 나라의 독재자 입니다.
국민들에게 “아랍민족의 강성대국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라는 명분 하에 독재를 했고, 이미 그 달달한 권력에 잔뜩 취해 있습니다.
그런데 기세좋게 이스라엘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탈탈 털렸습니다.
국민들은 여러분에 대한 신뢰를 접고,
”이제 자리에서 내려 오시죠?”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 네 알겠습니다.”하고 순순이 내려 올까요?
당연히 순순이 내려올 리가 없겠지요.
중동의 많은 나라들이 그런 수순을 겪었습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도 그런 맥락에서 장기 독재를 해 왔던 거지요.
권력자는 더이상 “빛나는 그시절”에 대한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여전히 권력은 내려놓기 싫다고 버티고 있고....
감시와 통제가 일상화 되면서 내수경기가 위축되고, 미국으로 부터 제재를 받으니 수출마저 위협을 받는다면..... 당연히 “두번째 조건”또한 지키기 어려워지겠지요. 아랍민족주의는 이 두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었기에, 사람들로 부터 점차 외면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두번째 평가 대상인 사우디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우디는 넘쳐나는 석유로 국민들에게 복지를 실행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기름국의 위엄”을 실천에 옮겼지요.
그런 점에서는 “두번째 조건”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우디는 외적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 손을 잡다못해, 자국 영토에 미군을 주둔시켰습니다.
그 미군이 좀 얌전히 있으면 말이라도 덜 하겠지만, 비행기와 항공모함에 폭탄을 가득 싣고,
이라크를 두번이나 두들겨 패고, 아프가니스탄은 지금도 두들겨 패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첫번째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볼 수 있겠죠.
이런 점에서 사우디는 현재 무슬람주의자들로 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메카를 수호한다는 놈이 저따위로 하니 중동이 이모양 이꼴이지 ㅉㅉ”라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최근 석유값의 하락에 사우디가 제법 진땀을 뺏을 것 같기는 합니다.
미국 셰일 오일 회사들을 말려죽여버리려고 했다지만..... 장기화 됬다면
사우디 왕가로서도 입지가 위태위태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3) 무슬람주의 비긴즈
무슬람주의는 앞서 언급한 “3차 중동전쟁”의 패배로 인해,
아랍민족주의 독재자들이 망신을 당하면서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랍 강성대국 지어준다며? 그거 믿고 독재하는거 봐줬더니 이게 뭐냐?”
“저것들 강성대국 만든답시고 코쟁이 놈들이 가지고 온 ‘민족주의’를 들먹일 때 부터 불안불안 하더라”
“민족주의? 꿈 깨! 그 시절을 돌려줄 수 있는건 오로지 꾸란뿐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운동권 세대의 모습과도 겹쳐보이는 것 같습니다.
권력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비전제시.... 물론 완전히 1:1로 대응할 수는 없겠지요.
우리나라의 운동권이 든 비전은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것이였다면,
무슬림주의자들이 꺼내든 비전은 옛것인 “꾸란”이니까요.
4) 무슬림형제단
이쯤에서 무슬림형제단에 대해서 언급을 안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얘를 언급할까 말까를 두고 고민이 많았어요.
왜냐면..... 무슬림 형제단은 “오사마 빈라덴”의 탈레반, “ISIL”의 뿌리가 되는 단체인지라....
얘를 언급하면 결국 “무슬림 무장단체”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것 같아서
“이번편에 이 모든 이야기를 끝내겠다”는 제 공약이 지켜지지 못할 가능성이 급격히 커지거든요.
그래도 이 단체가 “무슬람주의” “무슬람 근본주의”가
현실 세계에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예시이기에,
울며 겨자를 먹는 심정으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사전에 밑밥을 깔자면, 무슬림 형제단(무슬림 브러더스)은 “순니파”계열의 단체입니다.
저저번편에 순니파와 시아파의 차이를 설명 드렸었는데요.
시아파는 카톨릭 처럼 사제들의 위계질서가 확고하다면,
순니파는 개신교처럼 사제들의 위계질서가 확고하지 않아서 이른바 “목소리 큰 놈”이 짱먹는 분위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슬림 형제단의 창설자 "하산 알 반나")
무슬림 형제단을 만든 “핫산 알 반나”는 정식 신학자가 아닌 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시아파였다면 “듣보잡 A가 뭐래?” 할 인물이.... 유럽을 뒤집어 놓은 “시리아 난민 사태”의 도미노의 첫 단추를 시작한 셈이지요.
“핫산 알 반나”는 이집트 사람이었습니다. 아랍 민족주의도 이집트에서 시작된걸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영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이집트의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극복하려면 무슬람교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그는 “무슬림 형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이 단체는 처음에는 기독교의 YMCA와 흡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어요.
청년들을 모아 교육시키고, 친목의 장을 열고, 나아가 사회 봉사활동을 하는 단체였습니다.
아랍사람들 입장에선 “야 얘네들 좋네” 싶었을 겁니다.
교육도 시켜주고, 봉사도 하는 단체인데 누군들 거기에 돌을 던지겠어요?
이집트에서 시작한 이 단체는 규모를 키워가면서 이집트를 넘어 중동 여러나라에 지부를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이 단체에 회원들이 늘어가면서 별에 별 사람들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커뮤니티에 “분탕종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무슬림형제단은 어느샌가 “온건파”와 “급진파”간 대결의 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온건파는
“우리도 의회 선거에 후보를 내서 의회에 사람좀 보내고,
정당한 입법 과정을 거쳐서 점차적으로 무슬람주의로 나아가야돼”
라고 생각했다면
급진파는
“그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세상이 바뀌냐?
총, 칼 같은 효과적인 의사소통 수단 놔두고 종이에 도장찍힌거에 매달리는게 말이 돼?”
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런 급진파의 대표자는 “사이드 쿠트비”라는 사람이었어요.
(무스림 형제단의 급진화의 계기가 된 "사이드 쿠트비")
4-1) 문제적 인물 “사이드 쿠트비”
이 사람은 “핫산 알 반나”과는 달리 정식 신학자였고, 동시에 미국에 유학도 다녀온 사람이었어요.
“이야 엘리트가 미국물도 먹었으니 친 서방파였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사람의 직업은 “신학자”였습니다.
철저하게 무슬람적인 가치관에서 살아온 그에게 있어서 미국은
고돔과 소모라 따위는 귀여워 보일 정도로 타락한 곳이었던 겁니다.
“여자들이 차도르도 안쓰고 빨개벗고 다닌다고?”
”이거 뭐야? 술 아냐?”
“라마단인데 안굶고 뭐하는 거여?”
그런 모습을 본 사이드 쿠트비는
“서구 문명? 볼 것도 없다.”
”친서방? 나라를 고돔 소모라로 만들자고?”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유학을 마친 그는 무슬람 형제단에 가입을 했고, 그곳에서 급진파의 좌장의 포지션에 섰으며,
이 나라(이집트)를 무슬람주의로 갈아 엎자는 일념 하에 꾸란을 “혁명교본”으로 재해석 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석을 해보자면
사이드쿠트비는 “레닌”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거에요.
마르크스가 만든 “철학”을 레닌은 “혁명 이념”으로 바꿔버린 것 처럼
무함마드가 만든 “종교 경전”을 사이드 쿠트비는 “혁명교본”으로 해석해버렸으니까요.
모난돌이 정을 맞듯이, “이 나라를 뒤집어 엎어버리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예뻐 보일리가 만무하겠죠?
사이드 쿠트비는 나세르 정권 하에서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이집트를 떠나 뿔뿔이 흩어졌지요.
이런 사람들을 받아준게 사우디아라비아였습니다.
“잉? 카타르가 아니고?” 사우디가 받아준 때는, 무슬림 형제단이 본격적으로 깽판을 치기 전이었습니다.
카타르는 그 이후에 받아준 것이구요.
새삼 중동의 빌런 카타르가 담력이 쎄구나 할 대목입니다.
4-2) 다죽어 가는 놈들 받아 줬더니....
“근데 사우디가 왜....?”라고 생각하실텐데요. 그 이유를 설명드리자면,
당시 사우디는 “하심가문 국가들”이 쿠데타로 차례 차례 무너져서 공화정이 수립되는 걸 보고 겁에 질려있었습니다.
그래서 “공화국의 적”들을 적극적으로 받아주었지요.
물론 걔네들이 나중에 더욱 더 골치아픈 짓거리를 할거라곤 그때 당시엔 상상조차 못했을 겁니다.
어쨋거나 무슬림 형제단이 사우디 아라비아에 왔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어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있어
무슬림 형제단은 “청년들 모아서 교육하고, 봉사하는 단체”로 인식되어 있었거든요.
“그 착한 사람들을 탄압하고 죽이다니 나세르 나쁜놈”이라는게 사우디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이집트에서 도망쳐나온 “사이드 쿠트비”(급진파의 대표)의 제자들이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들이 강의를 할 때 수많은 청년들이 구름떼같이 몰려왔다고 해요.
처음에는 “좋은 일 한다니까 들어볼까?” 했던 청년들이 강의를 듣다보니 “이야 이거 새로운데?” 싶었습니다.
짱공인들도 겪었지만, 젊은 시절에는 “사회에 대한 삐딱한 시선”이 디폴트로 깔려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무슬림이란 “꼰대나 하는 낡아빠진 잔소리”였을 텐데 대학교 교수님이 “노노~ 꾸란을 그렇게 해석하면 안되죠. 요렇게 해석도 할 수 있어요.”라면서
‘사회를 뒤집어 엎는 101가지 방법’을 이야기 한다면, 그리고 그 뒤집어 엎어진 new world의 비전을 제시한다면, 가슴뛰고 열광하겠죠.”이야, 꼰대들 잔소리 같던 꾸란이 이렇게 읽히네?” 하면서요.
물론 부모님 입장에서도 뿌듯 했을 겁니다.
“얌마 옆집 철수는 꾸란을 3독 했다는데 너는 뭐하냐?” 하면
“아 걔는 걔고 나는 나에요.” 하던 우리 영수가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밥먹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꾸란을 손에서 놓디를 않는다면
엄청나게 기특하게 느껴졌겠지요.
그때 강의를 들었던 청년들 중 하나가 나중에 미국 9.11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 이었습니다.
이때 까지만 하더라도, 상아탑을 벗어나지 못하던 무슬람주의가 실제 적용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79년에 이란에서 “무슬람 혁명”이 일어났거든요.
비록 서로 못잡아먹어서 안달인 순니파와 시아파였지만
시아파에서 이뤄낸 “무슬람 혁명”은 그걸 지켜보는 순니파의 나라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야 이거 진짜 되네?”였던 거지요.
그리고 처음의 놀라움은 이윽고
”그럼 우리도 한번 해볼래?”로 바뀌어갔습니다.
우리의 사우디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걸 깨달았습니다.
공화국의 적이라고 해서 데리고 왔더니 이놈들은 더한 놈 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지요.
사실 사우디가 마냥 멍청했기 때문에 받은건 아니에요.
사우디 아라비아는 “사우드 가문”과, “와하브”라는 무슬람주의자의 연합으로 형성된 국가였거든요.
그들에겐 “무슬람주의자”는 우리나라를 만든 한 축이었으니.....
이집트에서 쫓겨난 무슬람주의자도 그와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자기들이 잘 다스렸다면 “우리도 해볼래?”라는 이야기가 나오진 않았겠지요.
분명 사우디에서도 빌미를 주긴 했습니다.
그 빌미란, 오일머니였어요.
석유파동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돈들이 물론 백성들에게도 흘러갔지만 대다수는 왕족들에게 흘러들어갔고,
왕가의 2세들은, 창업군주였던 1세대들과 달리 $wag넘치게 돈을 쓸 준비가 되어있었거든요.
그리고 그 돈을 재미있게 쓰다보니 자연스럽게 서구 문화가 사우디에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객식구”들의 눈에는.....
“이거이거 무슬림들의 독재 참아주는 첫번째 조건 어기네?” 싶었던 겁니다.
(무슬림들의 제 1 성지 "카바신전")
4-3) 피바다가 된 카바신전
그냥 그들이 불만을 가지는 선에서 끝났으면 좋겠지만......
사우디에 들어온 무슬림 형제단은 “사이드 쿠트비”(급진파의 거두)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한번 혁명 일으키려다 쫓겨난 애들이 두번이라고 못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들의 영향을 받은 급진단체들이 메카에 있는 “그랜드 모스크” 혹은
“카바신전”(현지 발음을 고려해 이후에는 카으바 신전으로 표기하겠습니다.)을 습격했습니다.
카으바 신전이 뭐냐 싶을 텐데요.
인터넷에서 메카에 성지순례 짤을 보신적이 있을 겁니다.
수많은 무슬림들이 검은색 돌로된 건물 주위를 돌고, 절하잖아요? 그게 카으바신전이었습니다.
그곳은 무슬림들의 제1성지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이 있기에, 사우디가 “엣헴 우리가 바로 이슬람의 큰형님이다.”라고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이고요.
여담으로 카으바 신전은 “검은색 돌”로 됐을거라고 생각하실텐데요.
사실은 외벽은 화강암으로 되어있다고 합니다.
검은색은 돌의 색상이 아니라, 신전을 검은색 비단천으로 덮어 놓은거에요.
무슬림들에게 메카의 카으바 신전을 순례하는 것은 무슬림의 5대 의무일 뿐 만 아니라,
“평생에 한번은 꼭 하고 싶은 소망”일 정도로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어요.
그런 성소중에 성소를 총칼을 들고 습격을 한 것입니다.
당연히 경비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다 쏴 죽여버리고 카으바 신전을 점거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음..... “우리나라로 치면”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 딱히 떠오르진 않지만,
엄청난 역대급 사건인건 확실하죠.
사우디는 “이걸 어쩌냐?”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마음 같아선 다 쏴 죽여버리고 싶지만.....
쟤들도 총가지고 있는건 마찬가지니,
총격전을 피할순 없을 것이고,
그랬다간 1000년 넘게 원형을 유지하는 카으바 신전이 스펀지 마냥 총알구멍이 숭숭 날테니까요.
하지만 시간을 마냥 질질 끌 수도 없는게,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중동 사람들 사이에서
“얌마 메카의 수호자라며 대체 뭐하는 거냐?”라고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고 결국
사우디 아라비아는 특공대를 파견해 무력진압을 해버렸습니다.
무슬람교가 성립된 이래 제 1성소의 위상을 지켜온 카으바 신전은 총격전의 현장이 되어버렸고,
신전 벽은 총알구멍과 피범벅이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4-4) 무슬람판 십자군,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러는 동안에 중동에서 조금 떨어진, 파키스탄의 옆에 붙어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큰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이지요.(1979년)
(소련-아프간전쟁에 참여한 무슬람 형제단)
안그래도 무슬림 형제단 출신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졌고
이란 혁명을 보면서 “이거 실제로 가능하겠는데?”라는 가능성을 본 이들에게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이젠 행동으로 옮길때다”라는 확신을 주게 된 거지요.
(무슬람주의에 글로벌 지하드라는 개념을 시작한 "압둘라 하잠")
실제로 당시 사우디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압둘라 하잠”이라는 교수님이
대학교수를 때려치우고 아프간으로 달려갔다고 해요.
그리고 그 사람의 수업을 수강하던 학생들도
“교수님이 직접 간다는데 우리도 가야지”라며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
압둘라 하잠을 기점으로 무슬람주의도 변화를 맞이하게 되요.
그동안 무슬람주의는 “우리나라 안에서”에 초점을 뒀다면
압둘라 하잠 이후에는 “우리나라를 넘어서 중동 전체로” 초점이 바뀌게 되었거든요.
“글로벌 지하드”라는 개념이 탄생한 순간입니다.
어쨋거나 중동 각지의 청년들이
“무슬림 형제들을 돕자”라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한번 상상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무슬림이라면, 아프가니스탄을 돕자는 명분으로 그 나라에 갔다면
아마 여러분들은 중동 각지에서 모인 또다른 청년들을 만났을 겁니다.
옆에서 총 나눠주는 최핫산은 이집트에서 왔고,
철모를 받는 김살만은 시리아에서 왔고,
군장차고 펄쩍뛰는 박무함마드는 터키에서 왔습니다.
“이야 무슬림 형제 지키겠다고 나라를 초월해서 이렇게 모인거야?”
아마 엄청나게 가슴이 뜨거워지겠죠?
모르긴 몰라도 “내가 역사를 만드는 현장에 와 있구나” 싶을 겁니다.
그렇지만 전쟁에서 졌다면.....
“어 뭐 잘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 고생 많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라고 했겠지만..... (미국의 은밀한 도움 아래) 전쟁에서 이겨버립니다.
게릴라전에 완전히 질려버린 소련군이
“와 씨 이놈들 어디에 짱박혀 있는지 보이지도 않은데 알라의 요술봉만 뿅뿅 쏴대네 근데 그거 아냐? 그거 미제여 미제”라며 돌아가 버렸습니다.
아마 그들에게 있어선 “잊을 수 없는 성공의 경험”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이 전쟁은 소련이 붕괴하는데 영향을 주게 되었지요.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세계를 양분하던 한 축이 무너지는데 일정정도 공헌을 한 셈입니다.
그렇게 승리를 거둔 청년들은
“야 수고했다. 이제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자.”라며 서로를 끌어안아주고 헤어졌고
본국으로 돌아가선, 아주 훌륭한....... 테러리스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슬람주의자들에게 있어 아프가니스탄은 “무슬람주의의 대학교”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9.11 테러의 배후 "오사마 빈 라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오사마 빈 라덴도 이 전쟁에서 참전을 했다고 해요.
참 우여곡절이 많은 단체죠?
(1) YMCA같은 청년단체로 시작해서
(2) 사이드 쿠트비가 “혁명 교본”을 한 스푼 얹은게
(3) 그 추종자들이 사우디를 비롯해 각지에 퍼져서 세를 증식하고
(4) 이란의 무슬람 혁명을 보고 우리도 따라해보자라며 카으바 신전을 피바다로 만드는 사고를 쳤다가
(5) 세계를 양분하는 소련을 격퇴하는 성과를 거두어서 결국
(6) 중동 각지를 넘어서 9.11 테러같은 대형 사고를 치는 훌륭한 테러리스트가 되는 헬피앤딩까지
이후의 스토리도 다루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 편 안에 도저히 끝낼 수도 없을 뿐 만 아니라,
차후에 다룰 나라들에 대해서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5) 마치며
그냥 가볍게 다루고 넘어가야지~ 했던게 이렇게 길게 늘어질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ㅠㅠ
진짜 길고 또 길었네요.
중동을 이해해야 세계를 이해한다 는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고,
이제 다시 지구본 연구소로 넘어가서 중동의 여러 나라들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다시한번 언급하자면, 이 글은 “삼프로tv”의 “중동을 이해해야 세계를 이해한다”를 출처로 하고 있으며, 저는 삼프로 tv에게서 어떠한 경제적 이익을 약속받지 않고 있음을 밝힙니다. 제가 출처를 공개하는 이유는 홍보를 위한 것이 아닌, 저작권자를 밝히는 것이 최소한의 윤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임을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