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게임은 12월초부터 시작해서 이브인 24일까지의 아주 짧은 기간에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다. 짧아서 그런 탓인지 이 게임에는 질질 늘어지는 추태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간단한 몇가지의 사건을 가지고 할 얘기만 해주고 싹 빠지는 편이라서 어찌 보면 약간은 허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시나리오는 더없이 탄탄하고 잘 짜여진 편이다. 그 근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개연성과 설득력이다. 바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구사하는 능력’이다. 흔히 에로겜을 할 때 느끼는 이건 좀 억지가 심하다라고 느낄 법한 부분이 이 게임에는 거의 없다. (억지가 심하다고 하는 부분은 열쇠사의 에로 신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모든 캐릭터는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개성에서 이끌어나온 행동들은 설사 처음 대했을 때는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이야기 전체를 통틀어 통일성 있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과연 그래서 그랬구나’라고 게이머가 수긍할 수 있게 해준다. 즉,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각 개인당 3-4시간 정도 걸리는 짧은 플레이타임 속의 이야기 배치는 참으로 절묘하다. 이야기의 페이스가 변경되고 변경된 페이스를 즐기는 시간을 보내다가 게이머가 조금은 지루하다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 깜빡깜빡 떠오를 즈음에 사건이 터짐으로써 게이머는 지루함을 느낄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조금도 길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시나리오의 내용상 충분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시나리오 라이터의 능력을 높이 살 수 밖에 없는 부분은 바로 5개의 이야기가 동등한 위상과 재미와 참신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시나리오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서로 다른 전개를 보이면서 각각의 다른 모습을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게임이 메인 히로인이나 핵심 캐릭터 2-3명을 클리어하면 나머지는 더 볼것도 없는 오마케 시나리오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본 게임에서는 초반의 선택지 하나로 분기가 갈라지고 이후 거의 겹치는 부분이 없는 각각의 시나리오로 흘러가기 때문에 ‘도코이쿠’의 초반 동일 시나리오의 압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각 캐릭터의 시나리오를 음미하며 즐길 수 있다
이 게임의 주제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주어진 하나님의 작은 선물’이라고 하겠다. 천사가 없다는, 구원도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삭막한 주인공들에게 주어진 작은 기적. 그것이 이 게임의 핵심이자 중심주제이다. 그래서 이 게임의 시나리오는 전혀 어둡지도 암담하지도 않다. 단지 답답하고 어두운 상황을 연출하지만 그것을 결말까지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돌아보면 단지 그들은 어떤 점에서 너무나 순수하고 어리고 서툴뿐이라고 생각한다. 화가 난 아이가 ‘다 죽어’라고 외친다고해서 그 말에 말의 의미만큼이나 심각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 게임또한 그것과 마찬가지다. 행간을 읽다보면 이 이야기가 얼마나 따스한 이야기인가를 알 수 있다. 단, 마호시나리오는 제외다.
혹여 엔딩을 본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할런지도 모른다. 영 삭막하고 다크한 이야기뿐인데, 그래서 건조하기만 할 뿐인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결론이 나오느냐고? 그것은 차후에 설명하겠지만 어디까지나 관점의 차이와 객관과 주관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시나리오 라이터에게 좀 속았다는 느낌도 들고…
기적하면 카논을 연상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런 가시적인 기적은 없다. 단지 너무나 삭막한 세상에서 주어지는 단 하나의 따뜻한 기억.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더없는 축복이자 행복의 선물인 셈이다. 토우코 시나리오에서는 잃어버린 갈빗대(?)와 주어진 것을 행복하게 받아들일수 있는 은사를, 시노부 스토리에서는 ‘교감’과 ‘일체감’이라는 감정을, 아스나 시나리오에서는 ‘용서’를, 그리고 유키오 시나리오에서는 ‘동반자’와 ‘갱생’을 부여한다. 참으로 애매한 것이 마호 시나리오인데, 마호 시나리오는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힌트 시나리오이자 다른 시나리오를 부각시키는 역할이 아니었나 싶다. 거기에 대해서는 차후 생각이 정리되는 대로 다른 글을 써볼까 한다.
이 게임에 대해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 바로 엔딩 부분이 아닐까 한다. 특히 엔딩 부분에서의 행복한건지 안타까운 건지 구별이 안가는 대사들이 난무한다. 특히 겐지군이 지적한 대로 어느 쪽인지 구별이 안가는 애매한 엔딩은 게이머에게 일말의 안타까움과 함께 짙은 감동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쪽으로 확정되지 않으며 안타까움과 행복함의 어느 쪽으로도 암시가 가능한 엔딩은 사실 이 게임의 가장 큰 매력이자 난해함으로 남을 것이다.
순전히 필자의 독단적인 해석으로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다. 바로 시나리오 라이터가 노린 점은 관점의 착각에서 나오는 일종의 트릭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필자는 두 가지의 개념을 도입해서 이것을 설명해보고자 한다. 바로 ‘unstable(불안정)’관점과 ‘already(기정사실)’의 두가지 관점이다.
게이머는 처음에 주인공인 기타의 관점에서 플레이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입장에 지나지 않으나 점점 몰입하게 되고 감동이 극대화되는 엔딩 부분에 가서는 거의 기타의 다음 말을 기다릴 정도로 기타와 일체화가 되어 있다. 흔히 1인칭 독백의 시점은 어느 순간에는 거의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뀌어서 주인공의 말과 사고가 마치 상황을 거의 결정지은 것처럼 어느 순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인공의 대사로 상황이 전개되는 비주얼노벨의 특성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안타까움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주인공과 일체화되어 몰입했기 때문이다. 즉, 그때의 관점은 주인공의 불완전한 관점이다. 주인공은 어리고 아직 사리분별이 명확하지 않는 자기 세계에 빠져있는 고등학생이다. 그가 인식하는 세계나 관계는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사실과는 떨어져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현실을 올바르게 반영하지 못하고 혹은 왜곡하는 주인공의 개인적이고 보편성이 없는 ‘unstable’의 관점인 것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 서서 볼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단정지을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는 한 불완전하고 편협한 소년의 조금씩 깨달아가는 인식 속에서 안타까움과 함께, 조금의 진보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처음 할때는 이 관점에서 플레이할수 있는 분이 진정한 게이머라고 생각한다. 몰입은 그리 쉽게 이루어질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몰입해서 게임할 수 있는 것도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already’의 관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인공 기타의 입장을 제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미 기타가 무슨 생각을 하건 현실과 사실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필자는 리뷰를 쓰기 위해 여러 번 되넘겨보면서 대사를 다시 살펴 보았는데, 그때 막연하게나마 대사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시노부 회상신을 번역하면서 확실해졌는데, 대사 중간 중간 사실이 섞여있는데 그것을 주인공이 자기 생각대로 ‘이건 이런거야, 저건 저렇고~’라고 단정지으며 넘어가기 때문에 사실은 잘 살펴보지 않으면 알수없게 되어있다. 즉, unstable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주인공의 왜곡된 사물인식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주인공의 시각에서 벗어나 관찰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시노부의 트루 엔딩은 비극이나 애매모호는 커녕 오히려 주인공과 시노부의 답답한 관계를 터트려주는 일련의 계기와 그것을 통해서 앞으로도 주욱 이어져나갈 희망의 메시지가 군데 군데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찰자의 시선에서 본다면 이 게임의 엔딩들은 전혀 절망적이지 않다. 단지 주인공의 엉뚱한 생각들이 사실을 가릴 뿐이다. 뭐…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지진 않겠지만 말이다.
정리하자면 이 게임은 아주 행복한 이야기를 아주 비관적인 시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은 행복한 이야기인데 어떤 애매모호함으로 인해서 게이머의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는 심리를 끌어내며 몰입감을 높이고 그것이 시나리오에 아주 독특한 매력을 부여하고 있다. 시나리오 라이터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이 게임은 아주 매력적이고 새로운 형태의 에로겜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S를 주는 데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리프~! 지금까지만 같이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