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학술원 창립 회원이자 한국 법학과 재야 사학계의 최고 원로였던 최태영(崔泰永) 박사가 지난달 30일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105세였다.
4일 학술원 관계자는 “고인이 별세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고 가족장으로 조용히 장례를 치르라는 유지를 남겼으며, 유가족들도 이에 따랐다”고 말했다. 장례는 2일 부천 순천향대학병원에서 치러졌으며 학술원에서도 문상을 가거나 조화를 보내지 않았다.
1900년 3월 28일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고인은 한국 법학사(法學史)에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여든이 넘어서부터 상고사(上古史) 연구에 매진하면서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체를 주장했다. 그가 88세 되던 해 낸 ‘한국상고사 입문’(이병도·李丙燾 공저)은 단군조선이 대륙에 실존했던 광대한 고대국가였으며, 한사군은 랴오허(遼河) 서쪽 중국의 동북 지방에 있었다고 주장해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는 평생 학자였다. 그리고 언제나 젊은 눈을 지녔다. “70대는 나의 한창 때였다. 내가 늙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흔이 넘어서였다”고 회고했던 그는 1977년 원고지 1만4000장 분량의 ‘서양 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을 내면서 “전부 머릿속에서 수십년간 정리해 쓴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바빌로니아 법부터 근대에 이르는 방대한 서양 법철학을 해설·비판한 이 책으로 학술원상을 받기도 했다.
2000년 출간한 ‘인간 단군을 찾아서’에서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충격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학문에 정진했다. 그럭저럭 내 나이 백 살이 되었다”며 담담히 말했다. 당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아직도 할 일이 있다”며 “죽기 전에 남겨야 할 것은 부지런히 기록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02세 때인 2002년에도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를 내는 등 왕성한 저작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젊은날 그는 2·8 독립선언과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으며 1925년 25세의 나이로 보성전문학교(고려대의 전신) 교수로 취임함으로써 한국인 최초로 법학 정교수가 됐다. 경신학교 교장을 지내던 일제 말기엔 신사 참배와 일본어 상용을 거부하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고, 김구·안창호·이광수·정인보·김성수 등 당대의 주요 인물들과도 교분이 깊었다. 서울대 법대 학장, 경희대 대학원장, 청주대 학장 등을 지냈으며 1954년 학술원 창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회원으로 있었다. 국민훈장 모란장(1994), 국민훈장 무궁화장(2004) 등을 받았으며, 유족으로는 아들 원철(77·의사)씨, 딸 정철(70)씨 등 1남1녀와 사위 서권익(70·변호사)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