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10시10분 서울구치소의 하늘색 철문이 열렸다. 회색 원피스에 연한 노란색 보자기를 한 손에 쥔 ‘할머니’ 한 분이 면회 온 사람들과 함께 구치소 안으로 들어갔다. 가운데 노란 선이 그어진 기다란 복도와 쇠창살 문을 지나자 사형수를 뜻하는 빨간 번호표를 가슴에 단 두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한(세례명)아! 토마스야! 잘 있었니?” 반갑게 두 사람을 맞은 이 할머니가 ‘사형수의 어머니’로 알려진 조성애(76) 수녀다. 조 수녀는 소설과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등장하는 모니카 수녀의 실제 인물이기도 하다.
조 수녀는 이날 오전 8시35분쯤 한 손에 보자기를 들고 용산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문을 나섰다. 보자기에는 곰보빵, 단팥빵, 슈크림 등 빵만 한가득이다. “오늘은 빵 좋아하는 애들이거든.” 언덕을 내려오는데 동네 아줌마가 “수녀님, 아침부터 좋은 데 가나 봐요” 하자 조 수녀가 “응, 아들 보러 가지” 하며 웃었다. 함께 마을버스를 타고 신용산역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터 지하철로 인덕원역까지 가야 해.”
조 수녀는 성바오로 수녀원에서 ‘말구’ 수녀로 통한다. “3년 전인가 여자 소설가(공지영)가 찾아와서 이것저것 묻더라고. 그러더니 나도 소설에 등장시키겠대. 내 수도명이 ‘쟌 마르코’인데 너무 어렵다나? 마르코의 한국식 발음 ‘말구’는 우습고. 그래서 내 세례명인 ‘모니카’를 쓰라고 했지.”
조 수녀가 교화활동을 하는 종교위원 자격으로 사형수를 처음 만난 때는 1989년. “1977년쯤부터 하고 싶었는데 노(老)수녀님이 편지부터 쓰라고 하더라고. 10년 넘게 쓰니까 ‘이제 좀 알겠니? 만나 보거라’ 하시는 거야.”
1990년대 말까지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 사형수가 있는 교도소라면 어디든지 갔지만 이제 일흔을 훨씬 넘긴 조 수녀는 매주 화요일 서울구치소만 다닌다. 지금까지 조 수녀가 정기적으로 만났던 사형수는 50여 명. 그 중 40여 명이 형 집행으로 다른 세상에 갔다. 특히 조 수녀는 1997년 12월을 잊지 못한다.
“대구교도소에서 형 집행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게 됐지. 원래 신부나 목사만 들어가거든. 함께 기도한 사형수가 평온한 얼굴로 ‘잘못했습니다… 수녀님 감사합니다’ 하더니 하얀 휘장 속으로 들어갔어. 잠시 후 ‘탁’ 땅 꺼지는 소리가 나더니 그게 끝이래. 그날 하루 5명을 그렇게 보냈어. 그러려고 죄를 뉘우쳤나 싶더라. 허무했지. 수녀원에 돌아와서 20년 가까이 사형수들한테 받았던 사과 한 박스 반 분량의 편지를 다 태웠지. 미안하다, 잘 가라, 잘 가거라. 반 년 정도 눈만 감으면 그 장면이 생각나고 아침마다 목이 뻣뻣하게 아프더라.”
한동안 지하철 기둥을 꽉 쥐고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1998년부터는 그래도 형 집행이 안 되고 있어서 다행이야. 법은 그대로라서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이제 편지도 다시 모으고 있지. 내 보물이야.”
인덕원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서울구치소에 도착했다. 사형수들에게는 면회도 자주 오지 않는다고 했다. “대부분이 버림받았지. 사랑할 줄도, 받을 줄도 모르고 그렇게 컸어. 자기만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도록….”
조 수녀는 피해자 가족들과 사형수 가족들도 만나러 다닌다. 대부분 조 수녀 만나는 것을 꺼리지만 조 수녀는 대신 빌고 대신 감싼다. “큰 죄지. 생명을 빼앗았으니. 피해자 가족들도 사형수 가족들도 모두 마음속으로 죽고 빈 껍데기만 남았어. 죄를 지은 사형수들도 매일 아침 자신 차례가 올까 봐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거고. 이 모두를 껴안아 줘야 해.”
조 수녀를 기다리던 요한과 토마스는 함께 만난 지 각각 10년과 5년이 됐다고 했다. 조 수녀를 통해 세례를 받은 두 사람은 빨간 성경책을 책상 앞에 놓고 함께 기도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 보려 하자 조 수녀가 손사래를 쳤다. “여기까지 왔으면 됐지, 뭘 또 들으려고…. 이제 기자 양반 안녕히 가 주세요.”
하늘색 철문으로 빠져나가는데 조 수녀가 했던 말이 계속 떠올랐다. “언제까지 할 거냐고? 하늘나라 갈 때까지. 그럼 정말 행복하겠네. 가서 먼저 보낸 자식들 보면 더 행복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