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 스토리

vtu100 작성일 07.08.18 22: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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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세기의 요정 이라 불렸던 오드리 헵번이다. 그녀는 은퇴 후 유니세프 회원으로 활동하며, 인간이 인간에게 가질수 있는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배우로서도, 안 인간으로서도 너무나 아름다웠던 헵번, 지금부터 그녀의 인생 이야기가 펴쳐진다.


오드리 햅번으 1929년 5월 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부유한 영국인 은행가 였고, 어머니는 네덜란드 남작 가문의 딸이었다. 어린 시절 오드리 헵번은 에다 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오드리 는 그녀가 나중에 유명해지면서 불린 이름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덕분에 에다의 집에선 언제나 아름다운 선율이 흘렀다. 그러나 가끔은 다른 소리가 집 안을 채울 때도 있었다. 에다의 부모가 서로 다투는 소리였다. 결국 에다의 부모는 헤어졌고, 에다는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로 이사를 했다.


1939년 열 살이 된 에다는 네덜란드의 아른헴 음악 학교에서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무용을 좋아했던 에다는 최고의 무용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발레를 배우는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에다, 어서 일어나라. 전쟁이 일어났어!"


그해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독일 나치의 군대가 네덜란드까지 쳐들어온 거였다. 그때부터 에다는 전쟁의 공포와 굶주림 속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튤립 뿌리로 주린배를 채우는 날도 허다했다. 체형도 완전히 바뀌었다. 170cm의 키에 50Kg밖에 안 되는 오드리 헵번의 가녀린 체구는 이때 굳어진 것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만 끝난다면 다시는 불평을 하지 않을 텐데...'


에다는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춤추는 것만은 멈추지 않았다. 토슈즈(여성이 신는 발레 신발)가 헤지면 자투리 헝겊으로 직접 신을 만들어 신고 춤을 추었다. 그 시절의 에다에계는 발레만이 유일한 위로요, 희망이었던 것이다.


에다가 열여덟 살이 되던 1947년, 마침내 길고도 긴전쟁이 끝났다. 전쟁이 끝나자 에다는 어머니와 함께 영국 런던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깨어진 꿈을 다시 이루기 위해 램버트 발레 학교에 입학했다. 이때가 1949년이었다.


'열심히 해서 뛰어난 무용수가 될 거야'


그러나 발레 선생님인 램버트 여사는 에다에게 냉정한 충고를 했다.


"에다. 넌 발레에 대한 재능은 있어도 천부적인 소질은 없는 것 같구나.

예술에 있어서 천부적인 소질은 매우 결정적인 거란다."


하지만 에다는 발레를 그만두지 않았다. 발레는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이었기에.

그 무렵 그녀는 궁핍한 생활 때문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모자 판매 회사의 모델 일도 했고, 여행사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일을 하느라 또래 친구들처럼 영화를 보거나 파티에 참석할 시간도 없었다. 램버트 발레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램버트 발레단에서 무용수로 일했다. 그 좋아하는 발레마저 생계를 위한 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발레를 그만둬야 할때가 왔다. ''에다 뮤지컬 합창단에 일자리가 났는데 해 보지 않겠니?"



발레단 지방 순회 공연과 뮤지컬 합창단 일을 함께 할 수 없었던 에다는 결국 발레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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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에다는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인 마리오 잼피의 눈에 띄어 영화 '낙원의 웃음' 에 단역으로 데뷔했다.

이후'젊은 아내의 이야기'.첫사랑' 등 6개의 작품에도 단역으로 출연했다. 오드리 헵번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한 건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영화배우로서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시절 햅번을 기용한 감독들은 그녀의 얼굴이 카메라와 잘 맞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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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의 어느 날,헵번에게도 드디어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다. 오랫동안 연극 '지지'의 여주인공을 찾고있던 프랑스의 여류 작가 시드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눈에 띈 것이다.


그때부터 햅번은 본격적인 연기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1년 공연되 연극 '지지'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평론가들은 헵번을 향해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연극 '지지' 의 대성공은 헵번에세도 또 다를 행운을 불러왔다.영화'로마의 휴일'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된 것이다. '지지'를 관람했던 영화감독 월리엄 와일러가 헵번을 자신이 연출할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점찍어 두었던 것이다.


햅번은 와일러 감독의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순수하고 발랄한 앤 공주 역을 완벽하게 연기했다.1953년에 영화가 상영되자 헵번은 단번에 은막의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 영화 한편으로 헐리우드의 샛별이 된 것이다. 헵번이'로마의 휴일'에서 보여준 청순함과 깜찍함은 헵번의 대명사가 되었다. 또 헵번이 영화 속에서 하고 나왔던 짧은 머리는 '헵번 컷'이란 이름으로 크게 유행했다. 이듬해인 1954년, 헵번은 스물다섯의 어린 나이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후로도 헵번은 12년 동안 15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스크린을 화려하게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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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여자로서의 헵번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영화 '전쟁과 평화'에 함께 출현한 멜 페러와

1954년 결혼해 6년 후 아들 숀을 낳았지만,햅번과 남편의 사이는 점점 벌어졌다. 세계적인 스타와 결혼 생활을 한다는 것이 남편에게는 부담스러웠단 것이다. 헵번은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자신이 겪었던 상처를 아들 숀에게 대물림 하고 싶지 앟았다. 그러나 1968년, 헵번은 결국 남편에게 결별을 선언했다. 정신적으로 힘겨워던 생활을 접고 새 인생을 설계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후 헵번은 이탈리아 출신의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와 재혼했다. 도티와의 결혼 생활 동안 그녀는 유명한 영화배우로서가 아닌 평범한 여자의 삶을 살아가려고 애썼다. 재혼해서 얻은 아들 루카도 젖을 물려가며 직접 키웠다. 그러나 두 번째 결혼 생활도 1979년 이혼으로 끝을 맺었다. 이혼 뒤 그녀는 두아들과 함께 살면서 비교적 평온한 날들을 보냈다.


1987년 10월, 쉰여덟 살이 된 헵번에게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국제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 하기 위해 마카오에 들렀다가 페스티벌로 얻은 수익금을 전부 유니세프 (UNICEF . 국제 연합 아동 기금)로 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우니세프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아동의 구호와 저개발국 아동의 복지 향강을 목적으로 설치된 국제 연합(UN)의 특별 기구이다.


'내가 유니세프를 위해 할 수있는 일은 없을까?'


이듬해인 1988년 3월, 햅번은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 수단, 베트남 등을 방문해 굶주리는 어린이들을 돕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부수라고는 1년에1달러밖에 받지 못하는 명예직이지만, 헵번은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친선 대사 활동을 했다. 전지도,물도,난방도,위생 시설도 없는 지역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돌보았다. 배고픔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어린이 한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또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이지요."


그러나 헵번이 구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그녀의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쉬지않고 세계 곳곳을 돌렴 구호 활동을 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드리, 좀 쉬는 게 어떻겠니? 요즘따라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여."


친구들은 그녀의 건강을 염려했다. 그러나 헵번은 친구들의 이런 걱정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구호 활동을 펼치며 조금이라도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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헵번은 마지막으로 구호 활동을 폈던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정말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굶주립 끝에 국음에 이른 아이들의 시신을 보게 된 것이다. 햅번은 그뒤부터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의 비참한 모습을 세계에 알리는 데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더 이상 아이들이 죽어 가는 것을 두고 볼 수 만은 없어. 먹을 음식이 없어 굶어 죽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세계 곳곳에 알려야 해."


그러나 햅번은 지쳐 가고 있었다. 그녀의 정신은 정신은 굳건 했지만, 육체는 이미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제발 좀 쉬세요.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겠어요."


주위 사람들은 모두 헵번을 만류했지만, 그녀는 쉴 때가 아니라며 구호 활동을 계속했다.


1992년 11월, 햅번은 미국 로스헨젤레스의 한병원에서 큰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녀의 대장에서 오래 전부터 악성 종양이 자라고 있었는데 수술로 종양을 제거했지만, 의사는 그녀에게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석 달밖에 안 될거라고 했다.


햅번은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뒤에도 나약해지지 않았다. 체중이 35Kg으로까지 줄어드는 힘겨운 투병 생활 중에도, 그녀는 오로지 굶주리고 있는 소말리아 어린이들 걱정뿐이었다. 침상에 누워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 바쳤다.


다은해인 1993년 1월 20일 저녁, 헵번은 가족과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나이 예순네 살이었다. 마을에는 그녀를 위한 추모의 촛불이 밝혀졌고. 교회에서는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종이 울렸다.


이튿날 이른 아침 부터 마을 사람들이 헵번의 집 앞에 추모의 꽃송이를 바치기 시작했다.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순수한 영훈 앞에서 사람들은 고개 숙여 경외심을 표했다.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그녀의 죽을에 슬픔을 표한 뒤 "하늘은 이제 가장 아름다운 새 천사를 갖게 됐다." 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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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국제 연합과 민간댄체인 '세계 평화를 위한 비전'은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제정햇다. 오랫동안 우니세프 친선 대사로 활동해며 인류애와 세계 평화에 기여했던 헵번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짙은 눈껍, 커다란 눈망울로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던 오드리 헵번.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을 만난 것을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가 아니라, 아프리카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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