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객으로 붐비던 밤이 지나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어느 아침이었다.
지구대 앞으로 택시 한 대가 나타나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내려 주고 사라졌다.
어디서 태웠는지 말이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짐도 없이 몸만 달랑인 할머니.
어딘가에 연락처가 있을까 싶어 주머니도 뒤져 보고 목걸이도 살펴보았지만 할머니가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지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머니, 성함이 뭐예요?”
“김○○.”
“주소는요? 집에 가족은 있으세요?”
행운을 기대했지만 할머니는 말을 알아듣기나 하는 건지 내 눈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집 전화번호는 아세요?”
“5XX-XXXX.”
혹시나 했던 질문에 의외로 또박또박 대답하는 할머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주위에 있던 선배 경찰관들은 본인 이름밖에 모르는데 전화번호를 어찌 알겠느냐, 그걸 믿느냐며 어서 보호 기관에 전화하라고 혀를 끌끌 찼다.
그 순간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병원입니다.”
할머니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
“안녕하세요? 서울 강남경찰서입니다. 지금 지구대에 길을 잃은 할머니가 있는데, 혹시 김○○라는 할머니를 아시나요?”
“아, 우리 병원 원장님이세요. 10년 전쯤 은퇴하셨는데요? 가만 있자, 집 전화번호 알려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예상 못한 대답에 가슴이 뭉클했다.
집 전화번호도, 사랑하는 가족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평생 몸담은 직장 전화번호만은 또렷이 기억하는 할머니.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존경스럽기도 하고…….
할머니는 그렇게 연락이 닿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날의 경험은 내 직업에 더 큰 애착을 느끼게 해 주었다.
만약에 나이가 들어 치매에 걸린다면, 그래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도 할머니처럼 평생 몸담은 직장만큼은 기억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다면 전화번호를 묻는 누군가에게 “112.”라고 대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