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내곁에

온리원럽 작성일 13.07.16 18: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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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 다가구 주택에서 사 년간 살았다.
결혼하고 이십 년 동안 이사를 여러 번 다녔지만 다가구 주택으로 이사할 때는 형편이 어려워 집을 줄였다.
그러다 보니 매사에 의욕이 없고, 좁은 집만큼 마음도 옹졸해졌다.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도 마음의 무게를 덜어 주지 못했다.

남편이 하던 일 또한 전부 막혔다.
모든 것이 꽁꽁 묶인 줄처럼 풀리지 않고 눈만 뜨면 돈 걱정이었다.
대학 진학을 코앞에 둔 아이들을 학원조차 보낼 수 없어 속상했다.
더구나 그해에는 큰 평수에 입주하는 지인이 유난히 많았다.
집알이에 가서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 못했다.
그저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쫓기다시피 이사 온 집은 세탁기 물이 넘쳐 주방 한쪽에 곰팡이가 슬었고,
벽지 살 돈이 없어 대충 바른 시트지는 제대로 붙지 않아 너덜너덜했다.
지인들이 집에 온다고 할까 봐 겁났다. 옆집과도 소통하지 않고 마음도 대문도 굳게 닫고 살았다.

유난히 더운 어느 날, 자정이 되도록 잠이 안 와 집 앞 벤치로 나갔다.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앉았는데, 멀리서 유모차에 폐지를 싣고 오는 할머니가 보였다.
이 시간에도 일하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 유심히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분은 어릴 때 우리 집에 세 살던 아줌마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언니를 따라 아줌마를 뵈러 갔는데 그사이 이렇게 늙으신 줄도, 폐지를 줍는지도 몰랐다.

나는 일곱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
그때 삼십 대였던 아줌마는 우리 집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아줌마는 단칸방에서 올망졸망한 다섯 아이를 키우며 살았지만 큰소리 한번 내시는 일이 없었다.
아이들 챙기기도 바쁠 텐데 내 도시락까지 싸 주고, 소풍을 따라와서 동창생인 아들보다 나를 더 챙겨 주셨다.

아줌마도 나를 알아보곤 당황하셨다.
나는 아줌마를 벤치에 앉히고 그동안 어떻게 사셨는지 물어보았다.
아줌마 눈가가 붉어졌다.
야맹증이 있던 아저씨는 몇 년 전에 실명했는데 베란다 문을 잘못 여는 바람에 낙상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자식들도 사는 것이 여의치 않고, 며느리가 집을 나가 손자들을 떠맡으셨단다.
아이들 과자 값이라도 벌려고 폐지를 줍는다고 하셨다.

그 순간 내가 얼마나 감사한 줄 모르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줌마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콩이며 깨, 시댁에서 준 김치와 쌀 등을 나누어 드렸다.
그날 이후 종이 한 장 소홀히 하지 않고 모아서 아줌마에게 드리고,
저녁 찬거리 사러 가면 간식도 유모차에 실어 드렸다.
받을 때보다 나눌 때가 더 행복하다더니 진실이었다.

아줌마의 웃는 얼굴을 보면 내 마음도 평온해지고, 원망 대신 기쁨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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