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를 맞는 3월, 기숙사에 짐을 옮기는 날이었습니다.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끌고 대학가를 걸으며 좋은 날씨를 만끽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르막길을 보니 한숨이 나왔습니다. 손에 힘을 주고 가방을 끌며 올라가는데, 어느 순간 손이 가벼워졌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인자한 미소를 띤 아저씨가 계셨습니다.
“이 학교 학생이지? 딸내미 데려다 주고 가는 길인데, 혼자 힘들 것 같아서. 도와줄게, 거절하지 마.” 사양하려는 마음을 읽었는지, 그분은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가방을 들어 주셨습니다. 모르는 분에게 괜한 신세지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습니다. 오르막길이 더 길게 느껴지려는 찰나, 그분이 입을 여셨습니다.
“나도 이 학교 다녔어. 여기서 공부하고, 집사람도 만났지. 캠퍼스 커플 알지? 신입생으로 들어온 집 사람을 내가 딱 찍었잖아. 내가 다른선배들보다 잘해주고, 수업도 같이 들으니까 집사람 마음도 움직였겠지. 내가 운이 좋았어. 그렇게 결혼했는데 이번에 큰딸도 이 학교 들어왔어. 나처럼 경영 전공으로. 참 감개무량하지.” 모르는 아저씨가 학교 선배님으로 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르막길을 다 오른 뒤 자판기에서 음료수라도 뽑아드리려는 나를 붙잡고, 그분은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힘들지? 그래도 열심히 해. 공부가 제일 쉽다는 거, 허튼 말이 아니야. 장학금도 받아보고, 연애도 해보고, 동아리 활동도 하고. 허구한 날들은 말이겠지만, 경험이 중요한 거야. 내가 하려는 일이 잘 맞을까 고민하고 실패도 해봐야 젊은이지. 그게 다 뒷날의 밑거름이야. 안 그래?” 말을 마친 그분은 음료수도 사양하고 내려가셨습니다. 도움을 받고, 귀중한 조언도 얻은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기숙사에 들어갔습니다.
방문을 열자 한 학기 동안 같이 생활할 학생이 와있었습니다. 몇 마디 나눠보니 경영학과 신입생이었습니다. 방금 만난 아저씨가 생각나혹시 아버님이 같은 학교 나왔느냐고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기도 이 학교 들어온 게 신기하다고 웃었습니다. 웃는 얼굴이 아저씨와 똑 닮아 물어볼 필요도 없었겠다 싶었습니다.
모르는 학생을 후배로, 딸내미로 여기고 도와주신 아저씨에게 보답할 기회였습니다. 주인을 못 찾은 음료수를 건네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는 그 학생. 왠지 즐거운 기숙사 생활이 될 것 같아 기뻤습니다. 누군가에게 베푼 친절은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이제는 룸메이트(방친구)의 아버님인 그분에게 확인시켜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