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우리 고향에 남의 땅 빌려 농사짓는 사람이 이사 왔다. 마을에 온지 한 해가 지날 무렵 그는 아들을 장가보내게 되었는데, 다른 것보다도 객지에서 농사만 짓던 신랑에게 후배꾼이 없는 게 가장 걱정이었다.
당시에는 ‘후배꾼’이라 불리는 신랑 들러리가 식에 참석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신랑 친척 K가 조금이라도 연 닿는 다섯 명을 모았는데 나도 선발됐다. 빌린 구두가 헐거덕거려 양말을 두 겹씩 신었지만 처음 하는 후배꾼 노릇에 신이 났다.
다섯 명의 후배꾼에는 평소에 말 한 마디 나누지 않던 선배도 있었다. 흰 두루마기를 걸친 신랑은 고생을 해서인지 우리보다 열 살은 더 먹어 보였다. 어색한 분위기에 신랑이 제안했다.
“우리 마카(모두) 친구인기라, 인자부터 반말만 하제이!”
나이가 제일 어린 나는 밑질 게 없었다. 트럭은 고개 넘고 개울 건너 신부의 초가삼간 앞에 섰다. 멍석 깔린 마당에서 아주머니들은 가마솥 뚜껑에 부침개를 굽고 하객들은 국수와 떡이 가득한 잔칫상에 앉았다. 병풍 앞에 족두리 쓴 고운 각시가 보였다. 나는 처음으로 두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가난한 혼례라 격식도 간단했다. 신랑 신부 맞절로 식을 끝내려는데 선배가 축가를 부르겠다고 나섰다. 축가 제목은 ‘라노비아’였다. ‘오동동 타령’이나 ‘이별의 부산정거장’ 같은 유행가만 듣던 산골마을이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선배는 온몸을 비틀며 목청을 뽑았다.
“비안 케 스피엔 덴테 바 라노비아-”
선배는 어디서 저런 멋진 노래를 배웠을까.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는 ‘아베 마리아’ 뿐이었다. 이렇게 슬픈 노래가 축가로 적절한지는 따질 필요가 없었다. 노래 덕분에 우리는 마을에서 제일 번듯한 집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막걸리로 거나해진 우리는 다시 트럭을 타고 돌아왔다. 우리 다섯은 전쟁을 치르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인 양 산천이 떠나가라 군가를 합창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라노비아(La Novia)는 사랑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가슴 아픈 노래란다. 그러니 우리는 참으로 엉터리 후배꾼들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날의 신랑 신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었다.
<좋은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