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날 고향에 들렀다. 선영(조상 무덤)에 참배하고 친구 병문안을 갔다. 태식이는 작년에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경과가 좋았는데 가을이 지나면서 상태가 나빠져 입원했다.
우리는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동기들보다 네 살 많은 태식이는 덩치도 크고 힘도 셌다. 나는 나름대로 졸병 노릇에 충실했는데 졸업하면서 우리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나는 진학해서 대구로 나가고 태식이는 농사꾼이 되었다. 방학 때 마주쳐도 서로 어색해했다.
거북했던 우리 사이가 회복된 것은 중년이 되어서였다. 서로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일까. 가끔 술잔도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태식이는 장정 두 몫의 일을 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농촌 살림살이가 늘 그런데다 집안에 우환도 이어졌다. 그래도 태식이는 씩씩하고 낙천적으로 살았다.
태식이의 상태는 짐작대로 좋지 않았다. 보름 전보다 체중이 더 빠진 것 같았다. 동창들, 그러니까 옛날의 졸병들이 걱정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잠깐 기뻐했다. 한차례 통증이 지나간 뒤 태식이가 말했다.
“니 옛날에 가마소 건너던 거 생각나나?”
마을 앞을 지나는 강, 가장 깊은 곳이 가마소였다. 가끔 청년들이 돌을 안고 물속을 건너는 내기를 했는데, 초등학생 중에서는 태식이가 유일했다. 태식이가 귓구멍에 침을 발라 넣고 물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모습을 모두 숨죽여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의 말대로 이무기를 피하고 처녀 귀신을 뿌리친 뒤 솟구쳤을 때 우리는 환호했고, 태식이가 든 돌 크기에 경탄했다.
“너 참 대단했지! 바위만한 걸 어떻게 들고 건넜냐?”
“무거울수록 중심을 제대로 잡을 수 있어서 뜨거나 휩쓸리지 않고 건널 수 있었제. 그때가 자주 생각나더라. 힘들 때마다, 흔들리지 않고 강을 건너기 위해 돌을 안고 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잘 버텼는데 이번에는 감당이 안 되네. 너무 무겁다.”
나는 태식이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바위는 우리가 같이 들어줄게. 설 지나면 집에서 만나자.”
“그러자.” 기어코 문 밖까지 따라 나온 태식이가 밝게 웃어 보였다. 그 표정이 고맙고 슬펐다.
밖에 나오니 저녁놀이 사라지고 있었다. 태식이도 여기서 걸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마지막 눈길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다음에 들렀을 때는 더 좋아질 것이다. 내 친구는 강을 건너는 법을 잘 아니까.
<좋은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