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니?

휴대호빵 작성일 17.07.30 00:3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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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심심할때 짱공와서 덕보고 갑니다

감사한 마음에 존경하는 스님글 공유합니다


 

 

 

스님이 출가하신 이유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고민하셨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답을 얻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24살이라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서요. 








그건 자기가 찾아야지, 남의 이야기를 들어서 뭐해요? 

질문자 인생인데 질문자가 찾아야죠. 

모든 인생이 다 이렇게 해서 이렇게 간다고 정해져 있다면 

제가 찾은 길을 질문자가 따라가도 되겠지만 인생의 길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각자 인생의 길은 각자가 가는 거예요. 질문자가 찾아야 해요. 








감사합니다. 








질문자는 짧고 간명한 답변을 바로 알아듣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청중들도 모두 웃으면서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왜 인생은 각자 자기 길을 가야 하는 것인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가는 길이 한 길밖에 없다면 저의 스승님이 제게 그리 물으실 이유가 없지요. 

이리 가면 되니까 그냥 따라오라고만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저더러 ‘너, 어디 가니?’ 하고 물었어요. 

그냥 그렇게 물은 게 아니에요. 

스승님이 ‘이리 와봐라’ 하고 부르는데 

제가 이튿날 시험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 길어지기 전에 빨리 도망가려고 

‘저 오늘 바쁩니다’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면 빨리 보내줄 줄 알았거든요. 

그냥 어디로 가냐고 물어본 게 아니고 제가 바쁘다고 대답하니까 

‘어, 그래? 어디 가는데 그리 바쁘냐?’ 하신 거예요. 

‘저 오늘 바쁩니다’ 

‘왜 바쁘냐?’ 

‘내일 시험칩니다.’ 

‘그래? 너,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야?’ 

‘학교에서요.’ 

‘학교 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어?’ 

‘집에서요.’ 

‘집에 오기 전에는?’ 

이렇게 자꾸 묻고 답하다 보니 결국은 끝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났습니다’가 되었어요. 

‘그러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기 전에는?’ 제가 답을 모르니까 ‘모르겠습니다’ 했죠. 

그랬더니 이번에는 지금 어디로 갈 건지 물어요. 

‘지금 어디로 갈거니?’ 

‘도서관에요.’ 

‘도서관에 간 다음에는?’ 

‘집에요.’ 

‘집에 간 다음에는?’ 

‘내일 학교에요.’ 

‘학교 간 다음에는?’ 

이렇게 자꾸 묻다보니 제가 ‘그럼 죽죠, 뭐’ 이랬어요. 

그랬더니 ‘죽은 뒤에는?’ 하고 물어요. 

이번에도 ‘모르겠습니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벽력같이 고함을 치는 거예요. 

‘야 이놈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놈이 바쁘기는 왜 바빠?’ 

그러니까 스승님은 제가 바쁘다고 한 말에 대답한 거예요. 

그래서 어디서 왔냐고 물었는데 모른다 하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도 모른다 하니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놈이 왜 바쁘냐는 거지요. 

어디로 가는 방향이 있으면 바쁘다는 게 이해되지만 

어디 가는지도 모르면서 바쁘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처음에는 스승님이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나한테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디서 왔냐고 묻고 또 묻고 또 물어요. 

가는 것도 학교 가면 됐지 그 다음은 어디 갈 건지 도대체 왜 묻나 싶었는데, 

대화의 요점은 이거였어요. 



‘저 바빠요.’ 
‘너, 어디서 왔니?’ 
‘몰라요.’ 
‘어디로 가니?’ 
‘몰라요.’ 
‘그런데 왜 바쁘니?’ 



그제서야 제가 정신이 번쩍 든 거예요. 

‘어, 내가 왜 바쁘지?’ 왜 바쁜지 나도 모르겠어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빨리 가야 된다니 이상하잖아요? 

제가 이렇게 저렇게 답한 걸 불교에서는 알음알이라고 해요. 

책에서 본 이야기, 경험한 이야기, 생각한 이야기, 

이렇게 아는 이야기를 알음알이라고 하는데, 

결국 알음알이가 끊어지니 ‘너, 어디서 왔니?’라고 하니까 ‘모르겠어요.’라고 하죠. 

처음부터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아요. 

아는 소리를 자꾸 하다 보니 결국 어머니 뱃속까지 갔는데, 

뱃속에서 나오기 전을 물어보니 

그건 생각도 해본 적도 없고 책에서 본 적도 없어서 모르겠다고 한 거예요. 

어디 가느냐는 것도 그래요. 도서관에 가고 학교에 가는 건 내가 다 아는 소리예요. 

죽는다, 여기까지는 제가 안단 말이에요, 

‘죽은 뒤에는?’ 이건 책에서 본 적도 없고 생각해본 적도 없으니까 ‘모르겠어요’ 이랬단 말이에요. 

이렇게 정말 모르는데도 지금 나는 가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의문이 생겨요. 

‘왜 바쁘지?’. 

살다보면 바쁘지요. 

바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왜 바쁘지?’ 

이 물음의 핵심은 현재 자기에게 깨어 있으라는 겁니다. 

질문은 다양할 수 있어요. 

‘너, 누구니?’라고 할 수도 있고 

‘어디 가니?’라고 물을 수도 있고, 

‘너, 지금 뭐 하니?’라고 물을 수도 있어요. 

‘너, 누구니?’ 이렇게 세 번만 물으면 대답이 궁해져요. 

바쁘게 가길래 어디 가느냐고 하니까 모른다 하고, 

내가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내세우길래 네가 누구냐고 하니까 모른대요. 

자기가 자기를 모른다는 거예요. 

세상 온갖 것 다 아는 박사한테도 네가 누구냐고 물으면 ‘몰라요’ 이래요. 

화두라는 건 이런 거예요. ‘Who are you(너는 누구냐)?’ ‘Who am I(나는 누구인가)?’ 

나, 나, 나라고 내세우는데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 

이것이 무엇인가’를 중국말로 하면 ‘시삼마’라고 해요. 

이걸 한국말로 하면 ‘이 뭣고’라고 해요. 아무것이나 보고 그러는 게 아니고,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이에요. 

이것을 탐구라고 해요. 

남한테 듣고 하는 소리, 아는 소리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정말 궁금한 것을 탐구하는 것이 자기 인생이에요. 

그래서 스승님은 제가 제 인생을 살아가도록 방향을 잡아준 거예요. 

지금까지는 어떤 인생을 살았어요? 

초등학교도 엄마가 보냈으니 갔죠. 

중학교도 부모가 가라 하고, 친구들도 다 가니까 혼자 안 가면 안 되었잖아요. 

남이 장에 간다니 거름 지고 따라가는 거죠. 

고등학교도 다들 가니까 따라 올라가고, 대학교도 전부 다 따라 올라왔잖아요. 

왔더니 또 취직해야 한다고 하죠. 

스승님 말씀은 ‘네 길을 가라, 네 인생을 살아라’는 거예요. 

지금 이렇게 공중에 붕 떠서 무작정 남 따라 살아가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도록 한 거예요. 

대학 가면 취직해야 돼, 취직하면 결혼해야 돼, 결혼하면 애 낳아야 돼, 애 낳으면 또 키워야 돼, 

그것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보내야 돼, 또 취직시켜야 돼, 결혼시켜야 돼, 손자 낳아야 돼, 

손자 봐줘야 돼... 사람이 굉장한 것 같지만 토끼 한 마리 태어나서 자라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어요. 

시스템을 따라 그냥 쭉 흘러가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너, 누구니?’ ‘지금 어디로 가니?’ ‘지금 뭐하고 있니?’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저라면 질문자에게 ‘여기 왜 왔니?’라고 물어볼 수 있겠죠. 

세 번만 물어보면 말문이 막혀서 ‘몰라요’ 이래요. 

‘몰라요’ 이걸 무지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이 이렇게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는 굉장히 똑똑한 척 하고 살지만 실제로는 허황되게 사는 겁니다. 

그걸 지적해준 것뿐이에요. 

그러니 제 이야기를 듣고 ‘나는 어디로 갈 건가? 나는 무엇인가?’ 이렇게 탐구를 해야 합니다. 

스님도 부처님도 예수님도 하나님도 아닌 ‘내’가 누구냐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느냐,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느냐를 봐야 해요. 

이게 없으니까 인생이 괴롭고 한 치 앞도 못 보는 거예요. 

저 사람 없으면 못 살겠다고 좋아하다가 금방 너 때문에 못 살겠다고 헤어지고, 

또 그래도 그 사람이 나았다며 울어요. (청중들 웃음) 

들어가고 싶은 직장에 재수까지 해가며 시험 쳐서 들어가 놓고 

그 직장 때문에 못살겠다며 사표 내고 나오죠. 

가게 하나만 내면 다 될 듯이 목을 매지만 그 가게가 또 잘 안 되면 가게가 고통의 덩어리가 되잖아요. 

다들 애 낳으니 나도 낳겠다고 부처님 코까지 베어가서 아들 낳아놓고는 

애 때문에 못 살겠다고 죽는 소릴 해요. 

취직이 어떻고 결혼이 어떻고 하지만 딱 본질을 짚는다면, 

괴로움의 원인은 자기가 누군지, 어디로 가는지, 지금 뭐하는지도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게 요지예요. 이걸 먼저 찾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걸 스승님이 딱 지적해준 거예요. 

그때 그런 기회를 안 가졌으면 저도 친구따라 대학을 갔을 텐데, 그래서 안 갔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저더러 미쳤다고 했어요. 

제가 생각해보니 갈 이유가 별로 없었거든요. 

그래서 스님이 되고 보니 조계종에서 스님들이 쭉 가는 길이 또 있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거기로 갈 일이 별로 없어요. 

스님이 되었다 뿐이지 그건 그냥 우르르 따라가는 길이에요. 

그래서 안 갔더니 거기서도 왕따가 되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북한 때려잡자며 데모할 때 생각해보니 아니다 싶어서 안 갔더니 

또 왕따가 되었어요. 

여러분은 왕따 당했다고 서러워하는데 왕따를 당한 게 아니라 

제가 전부를 왕따 시켜버렸다고 볼 수도 있죠. (청중들 웃음) 

천 명이 자고 있는데 한 명이 깨서 책상에 앉아 있자니까 천 명이 자면서 잠꼬대를 해요. 

‘불이야, 불이야, 불이야!’ 그러면 한 명이 천 명을 깨워요, 천 명이 그런다고 그 한 명도 따라가요? 

깨어 있다면 잠꼬대 하는 사람이 비록 천 명이라 하더라도 

‘아이고, 이것들 잠꼬대가 심하구나’ 이러고 천 명을 흔들어 깨워주잖아요. 

그러니까 그 질문은 다른 게 아니고 

‘네가 네 길을 가라’는 겁니다. IS에 가담하듯 어리석게 외통수 고집해서 가는 게 아닙니다. 

네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뭐 하는지를 스스로 보라는 거예요. (청중들 웃음) 




저녁에 술 마시면서 다음날 속 쓰릴 것까지 생각 안 하잖아요. 

주면 넙죽넙죽 받아 마시고 퍼져서 전봇대 껴안고 울고, 아침에 눈 떠보면 가관이죠. 

그런데 저녁 되면 또 마셔요. 

담배 피우는 사람은 담배 중에서도 더 좋은 담배 피우려고 야단이에요. 

그런데 아무리 좋은 담배도 안 피우는 것보다는 건강에 안 좋아요. 

영화 보면 마약 밀거래 할 때도 그 하얀 가루 보면서 고급인지 아닌지 따져요. 

마약을 하는 사람에게는 마약의 저급 고급이 중요하지만, 

밖에서 보면 아무리 좋은 마약도 안 하는 것보다는 못 해요. 

그런데 마약을 하는 사람, 담배 피우는 사람, 술꾼은 그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이렇듯 우리가 어떤 것에 중독이 되어 한 방향으로 달려가면 진리의 말씀을 못 알아들어요. 

마약은 이해가 되는데, 

‘아무리 좋은 성형도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하면 또 이해 안 되잖아요. (청중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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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고 건강을 해치고 마약하면서 자기를 해치듯이, 

우리는 이런 중독 때문에 자기 시간과 재능과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소비중독이란 말 들어봤지요? 이 소비중독이 제일 무섭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이 생산해서 많이 쓰는 게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잘 사는 기준이 뭐예요? 1인당 콜라를 몇 병 마시느냐, 전기를 얼마나 쓰느냐, 

물을 얼마나 쓰느냐, 병원 침대 하나당 환자가 몇 명씩 배치가 되느냐... 

전부 소비로 계산하잖아요. 

엄마가 물건을 사서 아이에게 생일선물로 주면 제일 먼저 ‘엄마, 이거 얼마 짜리야?’ 이러잖아요. 

전부 돈으로 계산이 돼요. 지금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소비주의가 결국은 환경을 파괴해요. 

한쪽은 자원을 고갈시키고 다른 한쪽은 쓰레기를 양산해서 결국은 지구환경을 파괴합니다. 

시간이 100년 걸리냐 200년 걸리냐 정도의 차이밖에 없지 공멸하는 거예요. 

원리를 딱 보면 이 문명은 공멸할 수밖에 없어요. 

다들 잘 살려고 하는데 잘 산다는 기준이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는 것이니까요. 

70억 인구 중에 OECD 가입국만 그 길을 가니까 

지구가 그나마 덜 파괴되는 지금도 이렇게 환경 문제로 난리인데 70억이 다 그렇게 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지금의 문명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이 문명은 이미 지속가능하지 않고 종말은 예정되어 있는 거예요. 

봄에 잎이 피고 여름에 무성하게 자라지만 이미 가을에 낙엽이 예정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홍수가 나서 물살이 일 때 이 동네 저 동네 온갖 쓰레기가 떠내려와서 휩쓸려 내려가듯이 

이 거대한 소비주의의 물결 속에 우리가 지금 휩쓸려가고 있는 거예요. 

그 속에서 ‘누구는 눈을 고쳤다는데 나는 못 고쳤다,’ 

‘누구는 눈이랑 코를 다 고쳤는데 나는 눈밖에 못 고쳤다’ 이런 작은 걸로 괴로워하며 사는 거예요. 

‘너 어디서 왔니?’, ‘너 어디로 가니?’ 라는 평범한 질문을 했는데 

그 평범함이 지속되다 보면 평범을 넘어 우리의 삶의 본질에 근접해 갑니다. 

이걸 ‘출가하고 스님 되면 좋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안 돼요. 

스님만 된다고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면 인생 바꾸는 건 간단해요. 

머리 깎고 옷 갈아입고 이름 하나 지어서 붙이면 되잖아요. 

그런다고 인생이 바뀌겠어요? (청중 웃음) 

그래서 이 질문은 ‘그래서 스님이 되었다’는 게 핵심이 아니에요. 

내가 이 길을 가는 게 남 따라 가는 건지, 필요해서 내가 가는 건지, 

남이 마시니까 목도 안 마른데 마시는 건지, 

정말 내가 목이 말라서 마시는 건지 늘 돌아보라는 겁니다. 

‘남 마시면 나는 안 마신다’ 이건 아니에요. 

남이 마실 때 내가 목이 마르면 같이 마시고, 남이 마셔도 내가 목마르지 않으면 안 마시는 겁니다. 

세상을 무조건 거스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길을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니까 그냥 결혼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어떻든 내가 결혼이 필요하면 하고, 천하가 다 해도 내가 필요 없으면 안 하는 거예요. 

천하가 다 차를 사도 내가 필요 없으면 안 사면 돼요. 

남들 다 산다고 따라 샀다가 타지도 않으면서 창고에 넣어둘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아요? 지금 장롱 속에 입지도 않는 옷 많죠? 

남들이 산다고 따라 샀다가 한 번도 안 입어본 옷도 있을 거예요. 

그건 말이 옷이지 쓰레기 아니에요? 옷장이 쓰레기장이에요. 

겉에 쓰레기장이라고 안 쓰고 옷장이라고 써놨을 뿐이에요”. (청중들 웃음) 








감사합니다. 








말씀이 너무 좋아서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 말씀을 하기 전에 서두에 하신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 이야기 뒤에 들으면 마음에 더 와다을꺼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밑에 남깁니다. 








인생이란 살다 보면 누구나 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세상일이라는 게 제 뜻대로 다 안 된다는 말이에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루어진 사람 있으면 한번 손들어 보세요. 없죠? 

세상일이라는 게 우리가 바라는 대로 다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다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누구나 그래요. 

그래서 천국이나 극락에서는 원하는 대로 다 된다고 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가 없어요. 

다 될 수가 없는데 다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었을 때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원래 이 세상이라는 것은 사람이 원하는 대로 다 될 수가 없다는 점을 

사실 그대로 알고 있으면 어떨까요? 

되면 다행이고, 안 되어도 그만이에요. 괴로워할 이유가 없어요. 

원래 다 되는 게 아니니까요. 

안 되었다며 괴로워한다고 또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안 되면 그만두면 돼요. 

그래도 하고 싶으면 또 하면 돼요.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그만이에요. 

두 번 해봤으니까 됐다며 그만두던지, 그래도 하고 싶으면 또 하면 돼요. 

괴로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안 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원하는 대로 다 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과 생각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그래서 똑같은 일을 당했는데도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많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진다면 반드시 좋다는 보장이 없어요. 

자기 혼자만 생각해서 ‘내가 원하는 게 이루어지면 좋다’고 하지만 실제로도 그럴까요? 

대전 시장 선거에 10명이 나왔는데 모두 시장이 되고 싶어해요. 

기독교인은 하나님한테 빌고, 불교인은 부처님한테 빌어서 다들 원하는 대로 이루었어요. 

시장이 10명이 되면 대전이 잘 될까요? 

이렇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두 이루어지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려요. 

기차나 버스 타고 갈 때 내가 좀 늦었을 때는 좀 기다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면 기차는 출발을 할 수 없어요. 

먼저 온 사람은 ‘왜 안 출발하지? 빨리 가자’ 하고 늦게 온 사람은 ‘아직 가지 마’ 이러니까, 

다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면 아무것도 안 돼요.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곳이 천국이라고 하지만 그런 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극락(極樂)이라 하지만 그것은 극락이 아니라 극고(極苦)입니다. 

즐거움이 지극한 것이 아니라 고통이 지극해요. 

어떻게 보면 오늘날 여러 어려움 속에서나마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돌아가고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는 덕분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루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자기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 이루어지면 힘 있는 자에게 부탁해서라도 이루려 들어요. 

힘이 무지무지하게 커서 뭐든지 다 알고 뭐든지 할 능력이 있는 존재, 

즉 전지전능한 신을 하나 내세워놓고 빌면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불교든 기독교든 지금의 종교가 이런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종교 믿는 인구가 많다고 해도 세상이 좋아지지 않아요. 

합리적이고 올바른 사유 위에 생겨난 게 아니라 인간의 잘못된, 

어리석은 생각과 욕망에 바탕해 생겨났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세상이 평화로워지거나 좋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원래 부처님,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땠을까요? 

이런 어리석은 생각,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서 바른 생각, 

바른 마음가짐을 갖도록 해서 괴로워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안내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되어버렸어요. 

부처님, 예수님을 팔아서 어리석음을 합리화하고 있지요.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똑똑해서 종교를 잘 안 가지는지도 모르겠어요. 

현실의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저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공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현실의 종교에 있는 예수님과 부처님이 아니라,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을 바르게 깨우쳐서 

이 답답함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해준 위대한 스승들입니다. 

이렇게 아셔서, 종교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조금 재고해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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