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

분신사바오딧 작성일 06.02.11 23: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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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7대 불가사의는 일반적으로

1.쿠푸왕의 대피라밋
2.고대 바빌론의 공중정원
3.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4.에페수스의 아르테미 신전
5.할리카르낫소스의 마우솔루스 왕 능묘
6.로도스의 거상
7.알렉산드리아의 피로스의 등대

이 7가지를 말합니다.

이 중, 현존하는 것은 1번 뿐이고, 7번은 지금 이집트 당국에서 복원중입니다.

이 외에, 아래 7가지를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1.쿠푸왕의 대피라밋
2.피사의 사탑
3.콜로세움
4.스톤헨지
5.만리장성
6.성 소피아 사원
7.알렉산드리아의 피로스의 등대

7번 빼고 모두 현존

L. 코트렐이 선정한 7대 불가사의는

1.클라크 데 슈발리에 요새
2.바위의 돔 사원
3.하트샤푸스트 여왕의 장제전
4.팔미라 고도
5.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6.미노스의 궁전
7.이집트 왕가의 계곡이 있습니다.

피라미드 ---------------------------------------

이집트의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는 모두 제4왕조(B.C. 2600 ~B.C. 2480)에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큰 것은 쿠푸왕의 피라미드로 높이가 148미터에 이른다. (현재는 137미터) 다음으로는

카프레 왕의 것으로 136미터 세번째가 멘카우레 왕의 것으로 62미터에 달한다.

밑변의 길이가 233미터인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각 모서리가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있고 거의

완전한 직각을 이루고 있다. 이 피라미드는 입구와 조그만 내실을 제외하면 모두 석회석으로

이루어 졌는데 돌의 크기는 높이 1미터 폭 2미터 길이는 각각 다르다. 평균 2.5톤의 이 돌을

밑변에서 꼭대기 까지는 210단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230만 개(또는 250만 개)의 돌

이 필요하였다. 가령 이런 돌로 돌집을 쌓으면 12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전문

가는 이런 돌을 30센티미터로 잘라 연결하면 지구의 2/3을 에워 쌓을수 있다고 하며 높이 3미

터 두께 30센티미터로 자른다면 프랑스의 전체를 둘러쌀 수 있다고 한다. 이 돌들의 무게를 합

치면 684만 8,000톤으로 만약 적재량 7톤짜리 화물로 운반하면 97만 8,286량의 화물차가 필요한

데 이 화물차들을 연결해보면 그 길이는 6,200킬로미터에 이른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건설 사업

은 돌을 캐네어 뗏목으로 운반하고 공사를 하기 위한 도로를 만들고 피라미드의 지하공사를 하

는데만 적어도 10만명의 노예가 석 달씩 교대로 해서 10년이 걸렸고 돌을 높게 쌓아 올리는데

도 20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피라미드 건설당시 이집트인은 수레나 말을 이용한 운반법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지레나 굴림대를 제외하면 오로지 인력에만 의지하여 작업이 이루어 졌다. 즉 수백명의

사람이 채석장에서 운반해온 무거운 석재를 땟목에 올려 강을 건넜고 역시 강기슭에

도착한 석재를 건설현장 까지 운반하였다. 어쨋든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건조물이 지금부터

4,800년전에 만들어 졌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평균 2.5톤의 돌을 230만개나 250만개

쌓아올리면 그 무게가 엄청날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무거운 건조물은 상당히 탄탄한 기초위에 세우지

않으면 세월이 흐르면 토대가 무너지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그 건조물도 붕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4,800년의 기간동안 장엄함을 드러내며 우뚝 서있다. 진정 세기의 신비이며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만리장성 ---------------------------------------

장성은 중국 고대의 중요한 군사 시설로 기원전 7세기에 건조되기 시작하였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북방 흉노족의 남하 교란을 방지하기 위해 기원전 214년부터 각 제후국이

건조한 장성을 수축, 중축, 연결하기 시작, 10 년을 거쳐방대한 장성이 구축 되었다. 그 후 역대

왕조들이 방어 수요에 따라 개수 하였다. 명나라때에 와서 선후로 약 200여년간 장성을 18차나 수축,

그리하여 장성이 서쪽의 감숙성 가욕관에서 동쪽의 하북성 산해관까지 뭇산을 넘고 초지를 건너고

사막을 경유하여 6개 성, 1개 시를 가로 지난 총 길이가 6,70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현재의 장성이

되게 하였다. 장성은 대부분 오늘까지 기본적으로 완전하게 보전되어 있다. 북경 팔달령 구간의 장성은

명나라 장성의 대표이다. 성벽의 높이는 8.5미터, 윗 부분의 너비는 5.7미터이고 성가퀴의 높이는

1미터이다. 장성은 세계일대의 가관으로서 구불구불 끝없이 뻗어나가는 기세 웅장하다. 운대는 거용관의

주요 건물의 하나로서 원래는 사탑 기반이며 그 아래는 북상 요로이다. 운대의 아치벽에는 4대 천왕과

무늬 부조가 조각되어 있는 데 정교하고 생동하여 석조 중의 정품으로 꼽히고 있다. 팔달령 장성의

성벽은 남과 북으로 각각 산세를 따라 뻗어 올라 갔는데 남북 두 봉우리에 각각 4개의 망루가 우뚝

솟아 있고 기세 웅장하고 경치 화려하다. 황화진은 옛날 군사 요충지로 모전욕을 비롯한 90 킬로미터

장성을 관할하였는데 명나라때 황릉을 직접 호위하던 으로 으로 불리웠다.


스톤헨지 유적 ---------------------------------------

커다란 돌을 조각하여 만든 스톤헨지는 지금부터 4000년전에 만든 유적이다. 근대영국이 탄생하기

오래전에 영국에 살던 원주민들은 25톤이나 되는 돌을 20마일 이상 운반하여 이 유적을 만들었다.

그 당시에는 이러한 건축물을 이용하여 태양과 달이 뜨고 지는 시각과 고도를 측정하여 시간을

측정했다. 그런데 스톤헨지의 돌들은 현대적 기준에는 물론 당시의 기준으로도 정확하게 배열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현대의 학자들은 스톤헨지가 시간을 재기 위한 건축물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계절을 반복하게 하는 태양을 기념하기 위한 거대한 기념물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모아이 ---------------------------------------

광막한 남태평양 한구석에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이 조그만 화산도를 사람들은 "세계의 배꼽"

또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가장 외롭게 고립되 어 있는 이섬의

주민들은 번영하는 복잡한 사회를 이룩했으며, 그 엄청난 크기 때문에 과학 자들도 경탄해 마지않는

거대한 석상들을 섬안에 세워놓았다. 현대과학은 섬 주민들이 이 거대한 석상을 어떻게 제작,

운반했는지를 밝혀 주었다. 그러나 왜 만들었는지는 아직 수수 께끼다. 폴리네시아인들은 뛰어난

항해가들이었다. 그들은 선체가 이중으로 된 커다란 카누를 타고 동남아에서 와서 마침내 이스터섬에

도달했다. 여기서 일부는 페루까지 진출하여 무역을 했는지도 모른다.

광막한 태평양에 떠 있는 조그만 삼각형의 화산도 이스터섬(Easter Island)은 세계 최대 수수께끼 중의

하나다. 광범하게 흩어져 있는 풀리네시아제도의 동쪽 끝에 위치한 이 섬은 피 트케언섬에서 동쪽으로

1600km, 그리고 1888년부터 이 섬의 소유국이 된 서쪽의 칠레로부 터는 3700km 떨어져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되어 있는 절해의 고도 이스터섬은 폴리네시아의 다른 섬들과도 망망 대해를

사이에 두고 격리되어 있다. 해저 화산의 폭발로 생겨난 이 섬도 한때는 다른 섬들 처럼 비옥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식물과 동물의 서식이 모두 보잘 것 없어서 파충류도 없고 빵나무도 없으며

또 하천도 없다. 이곳 화산호에는 골풀이 무성하게 자라지만 수목은 별로 없다. 바위투성이의 계곡에는

마른 풀들이 뒤엉켜 노란바위를 덮고 있으며 양떼와 야 생마들이 돌아다니며, 또한 거대한

석상들이 이곳 풍경을 압도하고 있다.

1960년에 아키비아후(제단) 위에 복원해 놓은 이 7개의 석상들은 이스터섬의 가장 유명한 유적이지만

최대 규모의 것으로는 탕아리키에 있는 15개의 석상을 꼽는다. 이 섬의 주민들 은 석상을 세우는 일에

매우 열심이었는데 이를 둘러싸고 씨족들간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 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거대한 석상들이 바로 모아이(moai)다. 다리가 없고 몸통만 있는 위풍당당하면서도 거북 스러운

모습에 머리는 어울리지않게 크고 턱은 힘차게 앞으로 뻗고 귀는 괴상할 정도로 길 다. 지금까지 이런

거대한 석상들이 약 1000개 가량 발견되었는데 키가 3.5-4.5m에 달하고 무게가 20t쯤 되는 것이 많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무게가 90t이고 키는 10m나 된다. 그러나 더한층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것이

이 거대한 석상들의 신체적 측면이 아니라 그 석상들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이 거대한

걸리버들은 면적이 120km2밖에 안 되는 이 작은 섬나라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엄청나게 큰 바위들을 다듬 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이 큰 거석상들을 운반하고 세우는데

사용한 목재들은 어디서 구했을까? 무엇보다도 석상들이 왜 이처럼 많이, 이처럼 크게 만들었고, 도대체

무슨 목적으 로 만들었단 말인가?



빌론 공중정원 ---------------------------------------

바벨 공중정원은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위대한 군주 네브카드네자르 2세의 걸작중 한가지 이다.

공중정원이라고 해서 진짜 하늘에 떠있는 정원이 아니다. 다만 평지에 흙을 쌓아 만들어 작은 산모양의

노대와 비슷하게 보이는 이곳에 풀과 꽃, 과일나무등을 많이 심어 놓아 멀리서 바라다 보면 마치 하늘에

떠있는 정원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네브카드네자르 2세가 공중정원을 만든 이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네즈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의 왕이 되자 메디아 왕국의

키약사레스왕의 딸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아름다운 고향에 푸른언덕을 그리워

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아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해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 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기로 결심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재주가 뛰어난 건축가, 기술자, 미장이들은

곧장 작업에 들어가 왕궁의 광장 중앙에 가로, 세로 각 400미터, 높이 15미터의 토대를 세우고 그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맨 위층의 평면 면적은 60제곱미터에 불과 했지만 총 높이가 105미터로 오늘날의

30층짜리 빌딩정도의 높이였다. 한층이 만들어지면 그위에 수천톤의 기름진 흙을 옮겨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꾸며 꽃이랑 덩굴초랑 과일나무를 많이 심도록 한 이 피라미드형의 정원은

마치 아름다운 녹색의 깔개를 걸어놓은 듯이 보였다. 그런데 비가 거의 오지않는 이곳에서 이렇게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올리고 그 물을 펌프로 각 층에 대어 줌으로써

화단에 적당한 습기를 유지토록 하였으며 또한 그때그때 물뿌리개를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정원의 아랫부분은 항상 서늘함을 유지하는 방을 많이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창너머로

바라보는 꽃과 나무의 모습은 어떤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왕비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세워진 공중정원은 오늘날 바벨탑과 더불어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네브카드네자르 왕의 이름은 구약성서에 남아 있지만 아름다운 메디아 출신 왕비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종에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벨탑이나 공중정원의

흔적은 볼 수 없지만 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 바빌론의 폐허는 오늘날 까지 남아있다. 바빌론의 발굴은

독일 동방협회에 의해 1899년에 처음으로 시작 되어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계속되다가 마침내

최전성기의 궁전, 이슈타르문, 성벽등이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은 장엄함을 드러내게 되었다.

제우스상 ---------------------------------------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에는 뛰어난 건축가와 조각가들이 많았었다.

아테네 화가 카르미데스의 아들인 페이디아스도 그중 한 사람이다.

기원전 490년경에 태어난 그는 그리스 조각의 고전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서, 그가 조각한 것이라고 입증할 만한 작품은 없지만

파르테논 신전에 장식된 조각들을 통해서 그 작풍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책에서는 아테네의 파르테노스상(象)과 올림피아의

제우스상(象)은 그가 조각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제우스상이 있는 올림피아는 그리스의 펠레포네소스반도 북서쪽

앨리스 지방에 있는 제우스의 신역(神域)으로서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로 예부터 알려져 있다.

그리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곳 올림피아는 종교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처음 그리스인들은 땅의 신 크로노스와 여신 헤라를 숭배

했지만 후에는 제우스신을 숭배하게 되어서 기원전 457년에


우뢰의 신 제우스 신전을 만들었고 그 안에 페이디아스가 만든

제우스상을 안치하였다. 대지 위에 우뚝 세워진 신전에는 양옆에

열세개씩,양끝에 여섯 개씩 장엄하고 무거운 도리아식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완만하게 기울어진 지붕이 덮여있다. 이 신전의


한가운데에 있는 제우스상은 높이가 90cm, 폭이 6.6m인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12m정도 되는 상은 거의 천장에 닿고 있다.

제우스상은 보석과 흑단(黑檀), 상아를 박아 장식한 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금으로 된 발디딤대에 올려져 있는


양다리는 거의 예배자의 눈높이와 일치하는 위치에 있다.

오른손으로는 금과 상아로 만든 승리의 여신 니케상(象)을

떠받치고 있으며 왼손은 황금을 박아 장식한 지팡이를 쥐고 있다.

지팡이 위에는 매가 앉아있다. 상아로 만들어진 어깨에는 꽃과

동물이 새겨진 황금의 아름다운 망토가 걸쳐져 있다.

어떤 고대인은 제우스상을 보고 다음과 같은 감상을 토로했다고 한다.

"무거운 짐을 진 사람도, 불행과 비극에서 헤어 나지 못하는 사람도

만약 우뚝 서 있는 제우스상을 보게 된다면 고통과 절망을 잊어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림피아라 하면 누구든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를 생각하게 된다.

전설에는 헤라클레스가 효시였다고 한다.

제1회 대회는 기원전 776년에 벌어졌고 기원후 217년까지는 4년마다 개최되었다.

처음에는 지방행사에 불과 했지만 나주에는 그리스인의 행사가 되었다.

이 경기는 그리스가 지배권을 잃은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394년에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경기금지

칙령을 내렸고 426년에는 이교의 신전파괴령이 내려짐으로써 제우스

신역은 파괴되었다. 더욱이 522년과 551년의 지진으로 크로노스

언덕이 허물어졌고 그라데오스 하천의 범람으로 신역은 3~5미터

아래 모래층으로 매몰되어 버리고 말았다.

후에 그리스가 독립한 1829년에 프랑스인이 제우스 신전이 있던

자리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메도프(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기둥,지붕 등의 파편을 발견하였다.

1875~1881년에는 독일 정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어

올림피아의 전체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제우스상이 있던 신전도 거의 드러나게 되었다.

아르테미스 신전 ---------------------------------------

에베소 시는 소아시아에 있는 고대 이오니아 지방의 열두개 도시 중 하나로서 기원전 6세기경에

이미 서아시아에서 상업의 요충지로 번영하여 가장 부유한 도시로 알려졌다.

이도시는 '만물은 변화 하는것'이라고 설파한 '암인'(暗人), '눈물의 철학자'로 불리던

헤라클레이토스(B.C. 535? ~ B.C. 475?)와 시인 히포나크 등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지만 이곳을

더욱 유명하게 하는 것은 아르테미스 대 신전이다. 이 신전은 그당시 세계 최고의 부호로 일컬어지던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 (재위; B.C. 560 ~ B.C. 546) 때 세우기 시작 했다. 높이 20미터 정도의 훌륭한

이오니아풍의 백색 대리석 기둥을 127개나 사용한 이 신전이 완성 될 때까진 120년이 걸렸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에베소를 방문하여 이 신전을 둘러 보고는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에도, 모에리스에 있는 라비린토스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걸작으로 묘사하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헤로도토스가 에베소를 방문한 지 1세기 정도 지난 뒤 그 훌륭하고 아름다운

신전은 어리석은 한 인간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기원전 356년 10월, '어차피 나쁜 일을 할려면

후세에까지도 알려질 수 있는 악행을 저질러야 한다'고 생각한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자 가 신전을

계획적으로 불태워버린 것이다. 그후 디노크라테스가 불타버린 신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에베소의 여인들은 지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등을 팔았고, 왕들은 크로이소스 왕을 본받아 기둥을

기증 하기도 했다. 야심이 강한 에베소인들은 자신들의 신전을 지

금까지 세워진 어떤 신전 보다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여, 그당시 가장 훌륭했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신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파르테논은 길이가 69미터, 폭이 30미터, 높이 10미터 정도로서,

대리석 기둥을 57개나 사용한 신전이었다. 에베소인들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

정도의 규모로 만들기 시작했다. 높이 18미터짜리 기둥을 127개나 사용했고 길이는 120미터,

폭은 60미터로 했다. 또한 신전의 건축용 자재는 가장 순도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중앙의

넓은 홀에는 네 방향으로 대리석 계단을 딛고 올라갈 수 있게끔 했다. 신전에서 모시는 신은

그리스인에게는 아르테미스로, 로마인에게는 디아나로 알려진 정절의 여신이었다. 날씬하고 활발한

젊은 여신인 아르테미스는 어깨를 노출한채 활을 당기고 있는 모습으로 처녀들의 수호신이자 달의

신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탄생.다산의 신으로도 알려져있다. 아르테미스 신상은 풍부함을 표현하는

듯 살이 쪄 있으며 가장 눈에 띠는 것은 허리위까지 젖가슴을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다. 주변에는

기묘한 모습의 동물들이 얽혀져 있다. 그리고 다리는 미라를 싸는 천으로 휘감겨져 있는데, 이것은

동서양 문화의 혼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260 ~ 268년에 유럽에서

아시아로 칩입해 온 고트인에 의해서 약탈되었으며 이때의 방화로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후 신전은 채석장이 되어버렸고 부숴진 지붕이나 원기둥 등은 건축재료로 쓰기 위해 운반해 갔다.

이렇게 하다 보니 신전에는 돌 하나도 제대로

서 있지 못한채 폐허가 되었고 그 위에 흙과 잡초가 덮여

나중에는 신전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길이 없게 되었다. 후에 1863년 영국의 고고학자 J. T. 와트가

나타나 그리스의 철학자, 지리학자 등이 쓴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에 관한 여러가지 책을 읽고

그 페허를 발굴하기로 결심했다. 대영 박물관의 원조를 받기는 했지만 항상 비용이 모자라 11년

동안을 고생하다가 마침내 지하 7m 지점에서 대신전을 발굴해냈다. 발굴한 건축용 석재,

기둥, 조각을 토대로 예술가들의 도움을 받아 꽤 정확하게 신전의 본래 모습을 복원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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