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꽤 오래된 양옥집이다.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이 집의 집사로 일하다가 해방이 될 때 이 집을 헐값에 사셨다고 한다. 할아버진 이 집에 대한 애정이 너무 깊어서 돌아가실 때도 이 집을 자손 대대로 물려받으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엄마는 이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가길 원하셨지만, 아빤 할아버지의 유언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게 화근이 되어 두 분은 별거를 하게 되었다. 엄마는 외할머니 댁으로 가시면서 이 집을 팔기 전까진 돌아오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엄마가 집을 나간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우리 집 식구는 이제 아빠와 나, 그리고 남동생. 이렇게 셋뿐이다.
나의 이름은 문선애. 고3이고 XX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동생은 아직 초등학생이다. 아버진 요즘들어 부쩍 회사일 때문에 늦게 들어오시거나 아예 안 들어오실 때가 많다. 그러니 당연히 집안 일은 내 독차지가 되고 말았다. 나도 고3이라 언제까지고 집안 일에만 잡혀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가족은 가정부를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광고를 낸지 일주일만에 한 아주머니가 찾아오셨다. 파출부 경력만 12년째라는 그 분은 아주 인상이 좋은 분이셨다. 마치 우리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분이셨다. 우리는 단번에 승낙을 했고 아주머닌 다음날부터 우리가족을 위해 일해주셨다.
아주머니에 대한 우리가족의 평가는 대 만족이었다. 역시 12년이라는 경력이 말해주듯 아주머닌 아주 능숙한 솜씨로 집안 일을 꾸려 나가셨다. 아주머니 덕분에 우리는 다시 예전의 생활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 엄마의 빈자리를 가족모두가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난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이러다 엄마를 영원히 잊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들게 되었다. 하루 빨리 엄마가 돌아왔으면 좋겠지만, 엄만 한번 결심한 것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라 아마도 이 집을 팔기 전 까진 돌아오지 않으실 것이다. 엄마가 이렇게 까지 이 집을 싫어하게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3년 전의 일이었다. 그 날은 할머니의 제사가 있는 날이어서 엄마는 제사상에 차릴 음식을 장만하시느라 아침부터 분주하셨다. 그런데 혼자서 그 많은 음식을 준비하시느라 그만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시던 홍시 감을 깜빡 잊으셨던 것이다. 귀찮지만 엄마는 그게 빠지면 할머니가 섭섭해하실 거라며 다시 장을 보러 가셨다. 시장은 불과 5분거리. 아무리 늦어도 15분이면 장을 보고 돌아올 수 있었다. 엄마는 빠른 걸음으로 10분만에 감을 사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막 대문 앞에 선 순간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자기가 하루 종일 정신이 없던 탓에 그만 문 잠그는 것을 잊으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열린 현관문 틈 사이로 온통 난장판이 된 거실의 풍경이 엄마의 눈에 들어왔을 때 엄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엄마는 그 짧은 시간에 도둑이 들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엄마는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도둑이야" 라고 외치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잠시후 엄마는 옆집에 사는 해병대 출신의 오빠를 데리고 다시 돌아왔다.
엄마: 먼저 경찰에 신고해야 되지 않겠어? 준철: 그러면 너무 늦는 다니까요. 일단 도둑부터 잡고 신고해도 늦지 않아요. 엄마: 그래도 위험하지 않을까? 칼이라도 들고 있으면 어떡해. 준철: 아 글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무적도로 때려잡을 테니까요. 아주머닌 위험하니까 여기계세요. 엄마: 알았어. 그래도 조심해야돼.
엄마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집안에 들어가는 준철오빠를 바라보았다. 더 늦기 전에 경찰에 신고해야겠다는 생각이 엄마의 불안한 마음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엄마는 1분이 마치 한시간처럼 느껴졌다. 5분이 지나도록 오빠가 나오지 않자 엄마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괜한 짓을 한게 아닌지 후회가 되었다. 그냥 경찰서에 신고하는 건데, 아무리 해병대라도 칼을 든 강도한테는 상대가 안될 거라고 엄마는 생각했다. 만에 하나 옆집오빠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엄마는 옆집아줌마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용기를 내어 집안에 들어가기로 했다. 집안의 풍경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집안에 태풍이라도 지나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먼저 들어온 옆집오빠의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엄마는 불안한 마음에 오빠를 불러보았다.
엄마: 준철아 어딨니? 괜찮은 거야? 준철: 아줌마! 여기로 와 보세요. 엄마: 어디 있는데? 준철: 지하실 쪽에 있어요. 엄마: 거긴 뭐 하러 간거야. 준철: 일단 와보세요.
엄마는 더욱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지하실은 엄마에게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곳 이였기 때문이었다. 그 지하실은 바로 할머니가 돌아가신 장소였던 것이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심한 치매를 앓으셨다. 다정하시던 할머니가 그렇게 딴 사람처럼 변해버리자 우리가족들은 그런 할머니를 감당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발작 같은 증세를 보이시며 우리가족을 괴롭혔다. 그럴 때면은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나오시는지 웬만한 힘을 가진 남자도 할머니를 이길 수 없었다. 할머니의 증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우리가족은 어쩔 수 없이 할머니를 병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것도 실패였다. 얼마 후 병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제발 우리 할머니를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해온 것이었다. 할머니를 도저히 병원에서도 통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할 수없이 우린 할머니를 다시 집으로 모셔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저히 함께 살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우리가족은 할머니를 지하실에 다 모시기로 결정했다. 우린 지하실을 할머니가 지내기 편하게 깨끗하게 도배도 하고 가구도 들여다 놓았다. 이 지하실의 크기는 단칸방 하나정도의 크기로, 일본식으로 지어진 터라 강한 지진에도 끄떡없이 설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린 것은 지하실 방의 입구인 커다란 철문이었다. 안 그래도 할머니를 강금시켜 놓은 것 같은 분위기인데(사실 그렇다) 그 문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보통 문이었다면 할머니의 놀라운(?) 괴력으로 벌써 부서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린 그냥 그 문을 놔두기로 했다. 설마 그 문을 뚫고 나오실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할머니를 볼 수 없다고 해도 그 고함소리마저 안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방음처리는 돼있지 않아 우리 가족은 밤마다 할머니의 소름끼치는 통곡소리를 들어야했다. 할아버지도 그런 할머니가 못내 안타까우셨지만, 그럴 때마다 "늙으면 빨리 죽어야지" 라고 만 하실 뿐 다른 어쩔 도리가 없으셨다. 우리는 하루 빨리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이 집안에 평화가 오길 바랬다. 너무 비정한 말로 들릴지 모르나 우리가족들은 입으론 아무도 그런 말을 내 뱉지 않았지만, 모두의 눈에는 그렇게 써있었다.
우리가 서서히 할머니에게 지쳐갈 때쯤, 우리가족은 오랜만에 여름피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1년 동안 할머니 때문에 많은 희생을 해온 가족들은 한 번쯤은 할머니와 따로 떨어져서 인간다운 생활을 해봐야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린 할머니를 돌봐줄 사람을 고용했다.(하루일당을 무려 20만원이나 주기로 했지만 아무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우리가족의 꿈만 같던 4박5일의 휴가는 장마로 인해 아쉽게 끝나 버렸고, 우리는 처량한 몰골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만 아무도 예상치 못한 끔직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할머니를 돌봐주기로 한 사람은 온데 간데 없었고, 지하실 방문을 열었을 땐 이미 할머니는 머리가 잘려나간 채로 돌아가신 뒤였다. 우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엄마는 그 자리에 실신해 버리셨고, 나와 동생은 비명을 지르며 윗층으로 도망쳐버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모두들 이런 의문을 품었지만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할머니를 돌봐주기로 했던 사람이 돈을 훔치다가 할머니와 마주쳤고, 그 바람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 우린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달리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어째서 할머니의 머리를 잘라갔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냥 살인 만 했으면 됐지 구태여 머리를 잘라서 가져간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그걸 설명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된 결정적인 사인은 바로 머리가 잘려 나갔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럼 할머닌 자신의 머리가 잘려나가는 것을 보며 숨을 거두셨다는 얘긴데........ 아무튼 그 일이 일어난 이후로 우리가족은 더 이상 할머니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소름끼치는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는 이런 사실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기 싫었지만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자 바로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생각나기 시작했다. 한발 한발, 계단을 내려 갈수록 음침한 지하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여길 내려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완전히 폐쇄시켜 놓았던 것이다. 지하실을 비춰 주는 건 계단 중간에 있는 작은 전구의 불빛이 전부였다.
엄마: 준철아 준철: 아줌마, 여기에요. 엄마: 여긴 뭐 하러 왔어? 준철: 그거 못 보셨어요? 엄마: 뭘? 준철: 거실에서부터 여기까지 핏자국이 쭈욱 이어졌잖아요. 엄마: 뭐라고?...... ! 준철: 아무튼 범인은 이 문 뒤쪽에 있어요. 보세요. 핏자국이 이 문앞에서 끝났잖아요. 엄마: 주 준철아, 우리 그만 나가자. 나가서 얼른 경찰에 신고하자. 준철: 안돼요 아줌마. 그러다가 도둑이 달아나기라도 하면 어쩔려구 요. 이제 놈은 독 안에 든 쥐라구요. 이제 이 문 만 열면.... 엄마: 안돼! 준철아. 준철: 왜 그러세요? 엄마: 안돼. 열지마. 열면 안돼. 준철: 왜 안돼요. 여기에 뭐 라도 숨겨 놓으셨어요? 엄마: 그 그런게 아냐....... 아무튼 안돼. 그냥 나가자. 파출소가 가까우니까 신고하면 바로 올 거야. 준철: 아이 참 아줌마, 글쎄 그러면 늦는 다니깐요...... 앗! 잠깐만요. 엄마: 왜 그래? 준철: 방금 무슨 소리 안 들렸어요? 엄마: 무슨 소리?..... 준철: 쉿! 방금 또 들렸어요.
준철은 차가운 철문에 귀를 갖다댔다. 그리고 아주 작게 들려오는 소리. "스스슥..... 스스슥........스스슥....... 그것은 마치 발을 땅에 끌면서 다닐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준철: 아줌마, 놈은 분명 여기 있어요. 아마도 다리를 다친 것 같아요. 이 피하며 문 뒤에서 나는 소리가 그 증거잖아요.
엄마도 문에다 귀를 댄 채 그 소리를 들어보았다. 간간히 들리는 발끄는 소리. 엄마는 이 안에 칼을 든 강도가 있다는 생각을 하자 등골까지 소름이 돋았다.
엄마: 뭐 하는 거야? 준철: 이 문 밑에 약간의 틈이 있는 것 같아요.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움직이는 게 있다면 어렴풋이 나마 볼 수 있을거예요.
준철오빠는 엎드려서 문 밑의 작은 틈 사이로 방안을 살펴보았다. 역시 어두워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어두운 방안 한쪽 구석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범인의 머리였다. 범인은 지하실 방안에 무언가 찾고있는 것 같았다. 준철은 범인이 탈출구를 찾는 거라고 생각했다.
준철: 아줌마, 이 방안에 무슨 통로 같은 게 있어요? 아줌마: 그 글쎄, 하도 지은 지 오래 된 집이라...... 그런 게 있을 수도.... 준철: 안 되겠어요. 지금 쳐들어가야지. 아줌마: 뭐? 준철: 녀석이 비상통로라도 찾아서 도망치면 끝이라 구요. 이 문 안에서도 잠글 수 있는 거예요? 아줌마: 아니. 밖에서만 잠글 수 있어. 준철: 그거 잘 됐네요. 자, 그럼 도둑 잡으러 가 볼까나. 아줌마: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신고해서....... 준철: 에잇, 하나 둘 셋......!
준철오빠는 셋과 동시에 문을 열었다. 그러자 어둠에 싸여있던 지하실 방에 빛이 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의 진실이 밝혀지고 말았다. 안에 도둑은 없었다. 다만 바닥에 까맣고 둥그런 물체만이 방안을 스믈 스믈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라진 할머니의 머리였다. 발을 끄는 그 소리는 도둑이 낸 것이 아니라 바로 할머니의 머리가 방안을 쓸고 다니며 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돌이 되어버렸다. 너무 경악한 나머지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것이다. 할머니의 얼굴은 이미 썩어 문드러져 있어서 표정이 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인기척을 느끼자 눈을 부릅뜨며 두 사람을 돌아다보았다. 순간 두 사람과 할머니의 눈이 마주쳤다. 엄마와 준철오빠는 이 순간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준철: 아 아주머니, 저게 대체 뭐죠? 엄마: 우리 시어머니야..... 저건 시어머니 머리야...... 준철: 그럴수가 ! 저게 그럼 사람의 머리란 말예요? 엄마: (미친 사람처럼) 그래 저건 우리 시어머니 머리야. 오늘이 제삿날이어서.... 그래서 오신 거야. 준철: 서 설마요. 저게 어떻게....... 그럼 저게 지금 살아있다는 거예요? 엄마: 아니야, 죽었어 분명 돌아가셨다구.
할머니는 더욱 크게 눈을 부릅뜨며 입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두 사람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준철: 그럼 집안을 저렇게 만든 건 누구의 짓이죠? 설마 저 머리가 그랬을 리는 없고..... 엄마: 허억! 설마..... 준철: 왜요? 엄마: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준철: 도대체 무슨 일이냐구요.
준철오빠는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누군가 지하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아주 천천히, 그러나 끊이지 안고 계속 계단을 내려 왔다. 잠시후 두 사람은 견딜 수 없는 공포에 치를 떨며 계단에 비치는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목이 없는 그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