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4년에 고구려는 요서를 공격했었다.

미연시다운족 작성일 06.12.31 12: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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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모아둔 자료~

많은 역사책에서 고-당 전쟁의 묘사의 시작을 645년 당군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출발하는 것부터 시작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644년 2월 당나라가 실질적으로 전쟁을 선포한 후 고구려는 이를 알고 당나라를 선제 공격한다.
그것은 598년 영양대왕이 영주부를 공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요서지역의 당나라 군사거점을 파괴하여 장차 있을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644년 전쟁을 이해해야만 이후 645년 전쟁 상황에 대해서 좀 더 쉽게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는 644년 고구려군이 요서지역에서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료들을 공개하고 이를 번역한 후, 그 의미를 풀어보도록 하겠다.

『新唐書』, 卷111, 「列傳」, 第36, 〈張儉〉, p4133 "營州部與契丹,奚,습,靺鞨諸蕃切畛, 高麗引衆入寇, 儉率兵破之, ?斬略盡, 復拜營州都督. 太宗將征遼東, 遣儉率蕃兵先進, ?地至遼西, 川漲, 久未度, 帝以爲畏懦, 召還, 見落陽宮. 陣水草美惡, 山川險易, 幷久不進狀, 帝悅, 拜行軍總管, 使領諸蕃騎, 爲六軍前鋒, 時高麗候者言, 莫離支且至, 帝詔儉自新城路邀擊, 虜不敢出, 儉進度遼, 趨建安城, 破賊"

"영주부에서 거란, 해, 습, 말갈 등 여러 종족들과의 경계를 엄중하게 하여 서로 교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고구려에서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장검이 병사를 이끌고 격파하여 포로로 잡거나, 죽이거나, 물건을 빼앗은 것이 많아서 그를 다시 영주도독으로 봉했다.
이세민이 장차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장검으로 보내어 번(蕃)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진격하게 했다.
장검이 군대를 몰아 요서에 이르렀는데, 물이 불어나서 오랫동안 장검이 건너지를 못했다. 이세민이 장검이 나약하여 가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그를 불러 들였다.
그런데 장검이 낙양궁에 와서 이세민에게 요하 일대의 수초가 무성한 곳과 덜 무성한 곳, 산천이 험하고 쉬운 곳을 조사한 것과 아울러 오랫동안 나아가지 못한 이유를 보고하자, 이세민이 기뻐하였다.
장검을 행군총관에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여러 번(蕃)의 기병들을 이끌고 6군의 선봉대장으로 삼게 하였다. 이때에 고구려의 첩자가 잡혀서 말하기를 막리지 연개소문이 영주에 온다고 하였다.
이세민이 장검을 시켜 신성로로 나가 고구려 군대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고구려 군대가 감히 나오지 못하였고, 장검은 마침내 요하를 건너 건안성으로 달려가 고구려 군대를 격파했다"

이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첫째 고구려군은 644년 7월 이전에 영주를 공격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군이 영주를 공격한 것은 당나라가 그해 2월에 고구려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한 것에 대한 고구려의 대응이었다. 비록 이 공격은 장검이 영주도독에 임명된다는 기록으로 볼 때 큰 성과는 얻지 못했다고 하겠지만, 당의 공격 선언이 나오자 곧 군사행동을 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강한 대결의지의 소산물로 볼 수 있겠다.

둘째 644년 하반기에 고구려군은 요서에서 군사 활동을 했다.
그 해 7월 이세민으로부터 고구려를 선제공격하여 요동의 형세를 관찰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장검은 오래도록 요하를 건너지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는 나약하다는 질책을 받아 그해 11월 낙양으로 소환되었다. (7월, 11월 기록은 자치통감에 근거가 있다. 원문 생략)
장검이 요하를 건너지 못한 것은 기록 그대로 홍수로 인해 요하가 범람했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요하 일대의 지형지물에 대한 조사까지 할 수 있었다면 강물의 범람이 원인이었다는 것은 사실일 수가 없다.
진짜 원인은 고구려 군대가 요서지방에서부터 장검의 군대를 막아냈기 때문에 요하를 건널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군이 요하 동쪽에서 방어만을 했다면, 장검이 요하 일대를 조사한 것이 큰 공일 수도 없다.
644년 당시 당군은 요하 서쪽에 다가오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요하의 도강 지점 등을 조사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요하에 대해 조사를 한 장검이 이것을 공으로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는 요하를 가까이에서 접해보지도 못했었다. 즉 요하는 고구려 내지의 하천이었다.

『舊唐書』, 卷78,「宗室列傳」, 第3,〈江夏王道宗〉, pp3515~3516 "帝將討高麗, 先遣營州都督張儉. 輕騎度遼規形勢, 儉畏, 不敢深入, 道宗請以百騎往, 帝許之. 約其還曰, 臣請二十日行, 留十日覽觀山川, 得還見天子. 因?馬束兵, 旁南山入賊地, 相易險, 度營陳便處. 將還, 會高麗兵斷其路, 更走間道. 謁帝如期"

"이세민이 장차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먼저 영주도독 장검으로 하여금 가벼운 무장을 한 기병으로 요하를 건너 고구려 군대의 형세를 살펴보게했다. 그런데, 장검이 두려워하여 감히 깊숙이 들어가지 못했다.
이때 이세민의 종친인 강하왕 도종이 이세민에게 청하여 100명의 기병으로 갔다 오겠다고 했다. 이세민이 허락하자, 돌아올 것을 약조하며 말하기를 20일간 갔다올 것이며 10일간 고구려의 산천을 살펴보고 이세민을 뵙겠다고 했다.
이로써 말을 먹이고 병사들을 결속한 후, 남쪽 산을 끼고 적의 땅으로 들어가서 그 땅의 지세를 살펴보고 고구려 군대의 진지를 헤아린 후, 돌아오려고 할 때 였다. 도종의 군대는 고구려 군사들을 만나 돌아갈 길이 막혔다. 그리하여 사이길로 도망쳐서 기일에 맞추어 이세민을 만날 수 있게되었다"

『신당서』〈강하왕군도종전〉에는 장검이 요하를 건너지 못한 것을 강물이 불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못 갔다고 지적하고 있다.
장검 대신 644년 12월 경 임무를 맡은 이도종은 정찰 업무를 수행하다가 고구려 군사들과 만나 돌아올 때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 장검이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고구려군이었다.
결국 644년 하반기에 고구려군이 요하 서쪽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장검이 요하를 건너지 못했던 것이고, 이도종 또한 매우 위험한 정탐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군은 이도종을 잡기 위해 영주까지 추격해갔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 고구려군은 영주를 직접 공격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644년 말에 장검은 재신임을 받아 다시 영주로 오게 되는데 이때는 1만 이상을 거느리는 행군총관이 되어 온다. 그가 영주에 올 무렵 고구려 첩자가 당나라에 잡혔는데, 연개소문이 이 곳 즉 영주지역으로 온다는 자백을 했다.
연개소문이 영주에 온다는 것은 실제 이루어지지 않은 단순한 첩보에 불과했지만, 고구려군이 영주를 공격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이 있었던 것만큼은 사실이라고 하겠다.
이도종 군대를 추격하는 고구려군으로 하여금 영주까지 공격한다거나, 아니면 신성에서부터 대규모로 군대를 출동해 영주를 초토화 시키려는 작전이었을 것이다. 이 작전을 위해 첩자를 미리 영주에 파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는 연개소문이 직접 요서지방에 온다는 첩보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세민은 장검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신성로로 나아가 맞서 싸우게 했다. 장검은 별도의 증원 없이 여세를 몰아 건안성까지 공격했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 원정군의 선봉장으로써 나선 것이며, 첩보대 수준이 아니었다.
장검의 군대는 신성로(新城路)로 출격했다. 신성로는 영주 즉 조양에서 고구려 신성으로 향하는 길이란 뜻이며, 고구려 국내성이나 요동성에서 신성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즉 요서지역에 위치한 길이다. 오늘날로 보자면 영주에서 의현을 지나 북령시와 흑산현을 통과해 요하 중류를 넘어 심양-무순으로 가는 길이 된다. 이 길은 645년 당나라 요동도행군이 통과했던 길이기도 하다.
고구려군과 당군과 신성로에서 충돌을 했다면 전투 시점은 이도종의 첩보대의 활동이 끝난 645년 1월에서 2월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군이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음으로써 양국의 정면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고구려로서는 당나라가 이미 영주에 장검 등을 보내 1개 행군 정도를 주둔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겨울철에 전투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당군이 신성로에서 활동하는데도 직접 충돌이 없었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도 당과 마찬가지로 요서지역에 거대한 군사기지가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고구려의 주력군은 여전히 요하 동쪽에 있었으며, 요서지역에는 회원진과 같은 소규모 군사기지만 있었다.
한편 당나라는 장검이 선봉대 역할을 하는 동안, 영주에 대규모 보급기지를 건설할 계획은 세운다. 당나라는 644년 7월 장검으로 하여금 요동의 형세를 관망하러 보내는 동시에 장작도감 염입덕을 시켜 군량을 보급할 함선 4백 척을 만들게 하고, 태상경 위정을 궤운사로 임명하여 군량을 보급하는 임무를 맡긴다.
그런데 다음 기록을 보면 중요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新唐書』, 卷98,「列傳」, 第23, 〈韋挺〉, p3903 "帝將討遼東,擇主餉運者. 周言挺才任粗使,帝謂然. 挺父故爲營州總管,嘗經略高麗,故札藏家,挺上之. 帝悅曰 自幽距遼二千里無州縣,吾軍靡所仰食,卿爲朕圖之. 苟吾軍用不乏,是公之功.
自擇文武官四品十人爲子使,取幽,易,平三州銳士若馬各二百以從. 卽詔河北列州皆取挺節度,許以便宜. 帝親解貂?及中廐馬賜之. 挺遣燕州司馬王安德行渠,作漕?轉糧,自桑乾水抵盧思臺,行八百里,渠塞不可通. 挺以方苦寒,未可進,遂下米臺側,?之,待凍泮乃運以爲解. 卽上言 度王師至,食且足. 帝不悅曰 兵寧拙速,無工遲. 我明年師出,挺乃度?歲運,何哉. 卽詔繁峙令韋懷質馳按. 懷質還劾 挺在幽州,日置酒,弗憂職,不前視渠長利,卽造船行粟,?八百里,乃悟非是,欲進則不得,還且水?. 六師所須,恐不如陛下之素. 帝怒,遣將作少監李道裕代之 勅治書侍御史唐臨馳傳,械挺赴洛陽,廢爲民,使白衣從."

"이세민이 말하기를, 유주에서 요하까지 2천리의 구간에는 당나라의 주(州)와 현(縣)이 없다. 우리 군대는 식량을 우러러 보는 바이니, 위정 그대가 내가 도모하는 바를 해주기 바란다. 진실로 우리 군대가 식량이 부족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대의 공이 될 것이다."

위정이 군량 운송의 책임자인 궤운사에 선택된 것은 그의 아버지 위충이 598년 영주총관을 지내면서 영양왕이 이끈 고구려군과 싸워본 경험이 있었으며, 그것을 위정이 본받았음을 감안한 조치였다.
당나라가 요서지역에 확고한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현지 사정을 잘아는 자가 군량 운송 적임자로 필요했던 상황이라 이세민은 위정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이세민이 유주(북경)에서 요하까지 2천리 구간에 당나라의 주현(州縣)이 없었다고 스스로 실토한 것처럼 당시 영주는 이름뿐인 전진기지였다. 그런 만큼 2천리 구간을 행군하는 당군을 위한 튼튼한 군량보급기지가 만들어지는가 여부는 당군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 당나라는 양자강 유역에서 군량을 배에 실어서 대운하를 통해 황하 하류까지 옮긴 후에 여기서 북쪽의 영주와 동쪽의 고대인성에 쌓아두고자 했다.
그런데 궤운사 위정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는 각 지역에서 사람과 말 등을 활용할 권한이 있었음에도 800리를 나간 후에 운하가 막히고, 추위가 닥쳤다는 이유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위정이 나아간 800리는 대략 대운하가 끝난 지점에서 만리장성에 이르는 거리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만리장성 넘어 요서지역에서 군량 운송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세민은 645년 1월 28일 군량 수송 실태를 점검한 결과 그 실적이 부진하자 감독 태만을 이유로 위정을 해임하고 장작소감 이도유로 하여금 대신 임무를 맡게 한다.
위정이 이렇게 지지부진했던 것은 겨울철에 군량 수송이 쉽지 않고, 요서 지역에 당나라 백성들이 적어 별다른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군이 단독으로 또는 거란족 등을 시켜서 계획적으로 군량 수송을 방해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고구려는 6세기에 거란병을 앞세워 만리장성 주변의 어양, 북평 등을 습격하기도 했다. 소규모 경기병만으로도 충분히 적의 군량 수송을 방해할 수는 있다.
추위 때문에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위정이 변명했지만, 이세민이 그를 평민으로 삼아 백의종군 시킨 것은 단순히 날씨가 변명꺼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위정은 7월부터 시작해서 다음해 1월까지 6개월간 궤운사로 있었다. 어차피 겨울철에 군량을 보급할 것을 감수하고 군량창고를 건설해야 할 위정이었다면, 추위는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이유 즉 고구려군이 기습하여 몇 번에 걸쳐 창고가 불타는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이를 막지 못했다는 것 등이 이유가 되어 신분강등이라는 중형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지나친 추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어차피 당나라와 전쟁을 치르기로 마음먹은 고구려가 적의 군량창고 건설을 그냥 놔두었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요서지역은 고구려 첩자와 기병들이 얼마든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645년 대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두 나라는 치열하게 서로 교두보를 마련하고 적진을 탐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당나라가 영주를 충실한 보급기지로 만드는 것을 방해했고, 당나라는 요하를 건너는데 필요한 사전 정보를 입수하는 성과를 각기 얻었다.
양국은 644년부터는 실질적인 전쟁 상황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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