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집 이어서 2부-2...

똥싸다실종 작성일 07.01.19 19: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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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씨! 여기좀 들어와서 이것좀 봐주겠소!"

나는 그 방에 들어가기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싫었지만, 김반장의
강압적인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방에 발을 들여놓았다.
방안은 기분나쁘게 우리가 시체를 발견하던 그대로였다.
김반장은 앉아있는채로 정수리에 낫이 박혀 죽어있는 노파 무당의 시체
앞에 서서 골똘히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시체들의 모습은 이미 본 것이긴 하지만, 여전히 소름이 끼칠정도로 끔
찍한 모습 그대로 였다. 벌써 썩기 시작하는지 고약한 냄새마저 풍기고
있었다. 구역질을 참으며 김반장에게로 다가갔다.

"여기 박힌 낫좀 자세히 봐요. 날이 왼쪽을 향해 박혀 있고, 손잡이가
오른쪽을 향한 것을 보면, 상식적으로 범인은 오른손 잡이라는 얘기죠.
하긴 범인 자체가 상식적인 놈이 아니긴 하지만... 낫을 이용해 사람의
두개골을 뚫고 이정도 박는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해 보인는
데..
그런데 여기 방바닥에 놓여져 있는 낫을 잘 봐요?
좀 이상하죠?"

나는 김반장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노파 무당의
정수리 박힌 낫을 보고 범인이 오른손 잡이라는 것을 추측한 것은 이해
했지만, 피투성이가 된채로 놓여있는 다른 하나의 낫을 보고 이상하다는
것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손잡이 역시 피가 튀어져있고, 누군가가 다
쓰고 가지런히 놓은 것처럼 낫 놓여있는 것이었다. 의아해하고 있는데
김반장이 자기 추리를 얘기해 주었다.

"이 방바닥에 놓여진 낫을 잘 보세요.
날 끝이 오른쪽을 향하고 있죠.
한 번 생각해보세요. 오른손에 낫을 쥐고 사람을 난도질해 죽인 후 그
흉기를 가지런히 놓았다면, 낫의 날 끝이 왼쪽을 향해야 되죠. 그런데
이 낫의 날끝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어요. 다시 한 번 상식적으로 생각
하면 이번엔 범인은 왼손잡이가 되어 무당의 딸을 난도질해 죽인 것이
예요. 그 후 자랑이라도 하듯이 낫을 가지런히 놓았어요. 왼손으로...
무당 딸 시체의 상처를 보더래도, 대부분의 상처가 왼쪽에서 오른쪽으
로 나있어요. 그것은 범인이 낫을 왼손으로 들고 휘둘렀다는 얘기예요?
혹시 이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 너무 놀라 낫의 방향을 건드린 것 아
니예요?"

나는 그제서야 김반장이 얘기하는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
시체들을 발견할 때 전혀 건드린 것이 없었다. 김반장은 나의 대답에 고
개를 끄덕이면서 자기의 논리를 계속해서 폈다.

"하긴 여기 놓여진 낫에 튀긴 피자국을 보아도, 누가 움직여놓은 것은
아닌 것 같군요. 또한 범인이 살인 직후 낫을 던진 것이 아니고 가만히
바닥에 놓았다는 것은 주변에 고여있는 핏물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그럼 생각해보죠.
결과적으로 그 놈은 무당노파는 오른손을 이용해 낫을 정수리에 꼿았
고, 무당의 딸은 왼손을 이용해 난도질 했다는 거요.
놈이 양손잡이일 수도 있고, 아니면....
범인 두 명일 가능성도 있는거죠...
그렇게 된다면 문제가 커지는데...
그리고 그 놈이 이방으로 칩입하고 나간 흔적이 전혀없다는 거예요.
정밀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육안으로 보면 안에서 잠긴 창문이나,
문에는 특별한 흔적이 없다는 거요 그리고 더욱 이상한 것은 방바닥에
이렇게 많은 피가 튀었는데 놈의 발자국이 하나도 안 찍혔다는 거요.
여기서 이렇게 낫으로 내리찍었다면, 피가 사방에 튀고 움직일 때 발작
국이 나야 정상인데, 여기난 발자국은 우리 발작국밖에 없다는 거요.
그 놈은 마치 허공에 뜬 상태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귀신처럼 사라진
것 같소. 참 이상하죠....
또 하나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무당은 앉아서 아무런 반항없이
당했다는 거요. 그 얘기는 즉 그 살인범은 무당을 알고 있었던 놈 같아
요. 그러니까 그 놈은 이 방에 들어와 아무런 저항없이 이 무당 노파를
오른손으로 죽이고, 겁에 질려 반항하는 무당의 딸을 왼손으로 난도질
했다는 거요.
좀 이상하죠?
두 사람을 죽인다고 가정할 때, 아무리 침착하다고 해도 첫 번째 희생
자의 머리에다 낫을 박아놓고, 반항하는 두 번째 희생자에게는 낫을 바
꿔들고 죽였다는 것이...
그 놈이 양손잡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죠...
하지만 만약 살인마가 둘이라면....."

김반장의 추리에 나는 한기까지 느껴졌다.
무자비하고, 치밀하고, 힘도 보통 인간정도를 뛰어넘고, 또 살인을 즐기
는 듯한 살인마가 둘이라는 것이...
김반장은 손에 장갑을 끼고 머리에 박힌 낫을 빼보려고 했으나, 워낙 깊
이 박혀 혼자 힘으로는 꼼짝도 안했다. 시체의 상태가 상할까봐 김반장
은 낫을 뽑는 것을 포기하고, 바닥에 놓여진 두 번째 낫을 조심스럽게
가져온 비닐봉지에 넣었다.
그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어가 보라는 정화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순경이 보낸 마을들의 젊은이 네명이 커다란 검은 비닐을 들
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방안의 참혹한 광경을 보고 움직일 줄을
몰랐다. 김반장은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그들에게 소리를 치면서 빨리
비닐에 싸서 시체를 운반하라고 했다.
그들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겨우 시체를 비닐에 싸 운반하기 시작했다.
김반장은 장소를 훼손하지 말라고 주의 주면서 시체 운반을 지휘했다.
마을 청년들은 언뜻 보기에도 겁에 질린 모습들이 역력했다. 그들의 표
정엔 죽음의 공포가 보였다.
김반장은 그들을 트럭에 실어 보내고, 잠시 집 주위를 돌면서 뭔가를 찾
았다. 그러더니 마당 한 구석에서 뭔가를 발견했는지 잠시 멈추었다.
어깨 너머로 보니, 거므스름한 흙이 빗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마당은 원래 황토흙으로 덮여 있어, 검은 흙은 눈에 띠었다.
많지 않은 양이었는지 빗물에 섞여 그리 뚜렷하진 않았지만, 김반장은
웬지 그 흙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아무 얘기도 않 해주고, 시체가 발견된 최씨네로 향했다.
최씨네로 가는 차에서 김반장은 우리에게 무당이 했던 얘기에 대해 자
세히 물어봤다. 과수원에서 하려고 했던 의식에 대해 물어봤다. 나는 대
답하기 뭐했지만, 김반장의 진지한 모습에 있는대로 얘기해 주었다.
과수원 주인이 부인을살려내려고하다가 뭔가 무시무시한 것을 살려낸
것 같다는 황당한 얘기를 했다. 김반장은 그 얘기를 듣고 전혀 놀라는
기색없이 뭔가 골똘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비오는 시골길을 덜컹거리며 달려 최씨네에 도착했다.
어느새 소문이 퍼졌는지, 많은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김반장을 보고 구세주를 만났다는 듯이 모여들었지만, 뒤
따라 내리는 나와 정화씨를 보더니 경계와 분노의 눈길을 주는 것이었
다. 김반장은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오늘 저녁 전체 모임에게 자세히 설
명하겠으니, 꼭들 모이라고 하고 사람들을 헤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에는 이장으로 보이는 사람과 이순경이 구식 칼빈총을 세자루들고 서
있었다. 김반장은 이장에게 다가가 몇가지 얘기하고, 생각지도 않게 우
리를 마을 이장에게 소개시켰다.

"이장님, 이 젊은 분들은 학술조사차 이 동네 왔다가
제 수사를 돕게 된 분입니다. 결정적인 단서도 많이 찾고 능력있는 분
들입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마을 이장은 김반장의 소개에 미심쩍인 표정을 지었지만, 우리를 경계하
는 태도는 처음에 비하면 거의 없어졌다. 나와정화씨는 엉겹결에 인사
하고 김반장을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김반장은 우리들의 의문스러운 표정을 무시하고 이장과 저녁에 있을 모
임과 사건에 대한 대책에 대해 논의했다. 그리고 읍내와 연락할 길을 반
드시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장은 모여든 마을사람들에게 다가가 오늘
저녁 모임에 대해 설명해주고, 각자 맡은 이웃에게 연락을 하라며 해산
을 종용했다.
김반장은 이장이 자리를 뜨자 우리를 거짓으로 소개한 것에 대해 해명
했다.

"마을에는 당신들이 오고서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당신들이 악귀를 이 마을에 데리고 와,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고 있다
는..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이 혹시 희생양으로 무슨 짓을 저질를까
이렇게 소개한거요. 오해말고, 혹시 모르니까 좀 주의하세요.
사람들이 공포에 휩싸이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김반장의 뜻밖에 경고에 나와 정화씨는 겁이 났다.
그럼 마을 사람들이 이번 연쇄 살인 사건을 우리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인가... 갑자기 우리를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의 경계의 눈빛이 무서워
지기 시작했다. 김반장은 이순경을 데리고 시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
다. 한참을 방안에서 조사하고 나와서는 김반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며 얘기했다.

"정말 지독한 놈인 것 같아...
낫을 이용해서, 사람을 완전히 회를 쳐놨군..
아무런 주저없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부부를 피떡으로 만들었소.
그런데 이번에는 왼손만 쓴 것 같아.
아니면, 왼손잡이만 여기에 왔을지도 모르지...."

그러더니 이순경과 나를 바라보고 지시를 내렸다.

"이순경은 이 시체들을 가지고 냉동고로 가고, 보건소로 가서 보건의를
데려와 시체를 살펴보게 하도록. 뭐 자세한 것은모르겠지만 혹시 새로
운 것이 나올지도 모르니.
그것을 다 마치면 지서에서 나를 기다리도록.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지난번 그 탈영병 사건 기록이 있나 찾아봐.
몇 년전에 있었던 과수원 살인사건의 기록도..
그리고 일한씨와 정화씨는 나와 함께 갈때가 있소.
내키지 않으면 그냥 여관에서 쉬어도 좋지만, 친구를 찾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도 나를 따라다는 것
이 좋겠소. 뭔가 수사에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친구 문제는 저녁 마을 전체 모임때 얘기해 보면 뭔가 찾을 수 있을지
도 모르고..."

김반장은 우리의 의향을 물었다. 나는 정화씨를 쳐다보았다. 정화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김반장을 따라나서자고 했다. 여관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기 보다는 차라리 김반장을 따라다니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것 같았
다.
김반장은 여기서도 마당을 조사하다가 아까 무당집에서 본 검은 흙물을
발견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 흙물을 살폈다.
그러더니 우리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어디로 가냐는 우리 질문에 단지 어르신을 만나러 간다고 짧게 대답했
다. 한참을 산길을 걷다 보니, 커다란 집이 하나 나왔다.
김반장은 그 집 주인과 잘 아는 사이인지, 어르신이라고 불리는 노인의
상태를 묻더니 좀 뵈야겠다고 말했다. 집주인 좀 망설이다가 김반장의
간곡한 요청에 허락했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집주인의 얘기에 우리는 대청에서 기다렸다.
김반장은 우리를 보고 어르신이라는 사람에게 대해 설명해 주었다.

"지금 우리가 만나 뵐 분은 이 마을에 최고 연장자고 이 마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분입니다. 아마 거의 백세가 다 되셨을테지...
이 마을에서만 백년을 사신 샘이죠.
나는 이 분에게 그 과수원에 둘러싼 전해내려오는 얘길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요. 혹시 당신들이 무당에세 들었던 얘기와 재원이란 친구에게
들었던 얘기와 뭔가 관련되는 얘기가 나올지 모르니 잘 들어보세요.
한가지 걱정은 어르신이 너무 나이가 많고 지금 풍에 걸려 몸도
불편하셔서 말씀을 제대로 해 주실까 하는거요..."

때마침 집주인이 우리를 그 어르신이라는 분이 계시는 방안으로 안내했
다. 그 어르신이라는 할아버지는 첫눈에 봐도 나이가 엄청 많이 들어보
였다. 몸도 불편한지 누워있는 상태에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김반장은
자리에 앉아마자 큰 소리로 자기를 포함한 우리를 소개했다.

"어르신!
저 방앗간집 둘째아들 종수입니다. 읍내에서 순사질하고 있는..
이 젊은이들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구요!
어르신 몸은 좀 어떠세요?"

그 말에 그 할아버지는 힘겹게 눈을 뜨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거
의 듣기 힘든 작은 소리를 얘기를 했다.

"아.... 종수....
나야.... 이제.... 죽을.... 몸이지...뭐... 콜록 콜록!
그런데...무슨....일이지......"

김반장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큰 소리로 물어보았다.

"어른신!
저 성황당 너머 과수원 아시죠?
거기서 사람이 죽은 적 있죠?
그것에 대해 얘기 좀 해 주세요?"

김반장의 질문에 나는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몇 년전에 있었던 그 살
인사건을 굳이 이 노인에게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거의 죽어가는 노인 그 사건에 대해서 알 리가 없을텐데 무엇을 묻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의 의심은 그 노인의 대답을 듣자 충격과 함께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아....그 일....
오래전 일이지....오래전 콜록콜록...
내가 어렸을적.... 일이니까........."

..아주 무서운 일이었지. 그 과수원에서 있었던... 콜록 콜록!
아마 내가 10살정도 되었을 때 일이었을거야.
그러니까 왜놈들에게 우리나라를 빼았끼고 몇 년이 지난 후였으니까..
그때 우리 마을은 참 못사는 산골이었어.
보리고개때는 나무껍질을 벗겨먹어야 할 정도로 힘들었지..
농사라고 해도 조그만 텃밭에 지었고, 약초나 나물을 캐어 생계를 연명했
어. 참 배고픈 시절이었지..
그런데, 그때 과수원자리에 누군가가 이사왔지.
이상한 일이었지.
이런 산골에 누군가가 이사온다는 것은.
그때는 주민이 50명정도 밖에 안되는 촌구석 작은 마을이었거든.
그 젊은 사람은 젊은 부인과 내 또래의 딸년을 데리고 왔어.
읍내 지서장이 이사올 때 따라온 것을 사람들이 보고 높은 사람이 왔다고
수군거리던 것이 기억나구나...콜록.
그 사람은 돈이 많았는지, 그 과수원 땅을 사고 사람들을 사서 그 버려진
땅을 과수원으로 만들었지...
그러더니 일본에서 들여온 새로운 종자의 과일들을 키우기 시작했어.
마을 사람들은 그 새로운 사람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했어. 그리고 동시에
미워하기 시작했어.
왜 미워한 줄 알아?
특별한 이유없이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이유하나로..
그때 우리동네는 거의 한가족이었지. 모두가 친척인 셈이었지.
그런 동네에 이물질이 들어온 거야.
그 사람은 동네 사람들과 어울릴라고 했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
고 배척했어. 마치 그 사람이 역병 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증오했어.
그 이유없는 증오심과 미움은 눈덩이가 불어나듯 커졌지...
아마 낯선 이방인에 대한 맹목적인 미움이었을 거야...
그렇게 마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그 사람은 묵묵히 과수원을
일구어 나갔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은 참 부지런하고 착실했는데..
하지만 나도 어른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 집 식구가 지나가면 돌을 던
지거나 침을 뱉는등 못살게 굴었지..
그 젊은 부인은 참 괴로웠을거야...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 집밖에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고...
아마 집안에서 서너살된 딸아이만 키우고 있었겠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
그 과수원 집은 귀신의 소굴이라는 거야..
그 젊은 부부는 귀신을 섬기는 사람들이고...
그런 무시무시한 소문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지..
이제 마을 사람들은 그 과수원집 사람을 공포와 증오가 뒤섞인 눈으로 바
라보게 되었지.. 콜록콜록!
나도 어렸지만, 마을 사람들의 그 감정을 그대로 여과없이 가지게 되었어.
밤마다 그 과수원 집 헛간에서 사람이 비명소리가 들려온다는 등, 그 집
사람들은 피에다 밥을 말아 먹는다등 별의별 소문이 있었지.
낮에도 그 집을 지나기가 무서울 정도였지...
그러던 여름이었을거야... 콜록콜록!
그 여름도 올해처럼 비가 많이왔지...
그때는 아무런 시설이 없었으니 물난리는 쉽게 일어났지..
그래도 우리 마을은 높은 곳에 있어 왠만한 홍수에는 별로 피해를 보지
않았어.. 그런데 그 해는 좀 달랐어...
살고 있는 집들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논과 밭은 물에 잠겨버렸어.
그해 농사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지...
콜록 콜록!
지금도 그 해 겨울의 배고픔만 생각하면 괴롭지...
농사에 전적으로 의지하던 우리 마을은 그 홍수로 대 흉년을 맞이했지..
가을이라고 해봤자 거두어 드린 수확이란 보잘 것 없었고...
사람들은 정말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나무껍질을 벚겨먹고, 몇몇은 아예
이 마을을 떠나버렸지..
약초를 캐러 산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었고, 사냥한답시고 산으로 들어갔
다 멧돼지에 박혀 죽은 사람도 있었지...
휴...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과수원 집만 홍수 피해를 보지 않은 거야..
그 과수원이 워낙 높은 지역에 있어서 그 큰 물난리에도 말짱했지..
더욱이 일본에서 들여온 신종자 탓인지 아니면 운이 좋았던지 과수원 농
사도 평년에 비해 잘되었지...콜록콜록!
마을 사람들이 굶주림에 미쳐갈 때 그 집만 풍족하게 지냈어.
그 사람은 착했지...
마을 사람이 어려운 것을 알고 처음에는 나름대로 도우려 했어.
쌀 두가마니를 마을 사람들에게 놔누주었지...
하지만 사람들은 재수없는 쌀이라고 받기는커녕 그 사람에게 욕설을 퍼
붇고 그 쌀을 태워버렸어..
모두들 미쳤지.. 미쳤어...
그 사람은 그 사건 이후 더 이상 마을 사람들을 도우려 하지 않았지...
그래도 남 몰래 그 사람 집에 찾아가 먹을 것을 얻어먹은 마을 사람들도
꽤 있었어...
나도 그때 배고픔에 못이겨 친구들과 함께 그 집에 먹을 것을 훔치러 들
어간 적이 있었어. 귀신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무서움을 참으며 담을 넘어
그 집에 들어갔지..
부엌에 들어가 가마솥에 남아있던 찬밥을 미친 듯이 입안으로 우겨넣다가
그 집 주인에게 들켰지... 콜록콜록!
그때가 그 집 주인하고 처음으로 말을 해본 것이지...
지금 기억에도 그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우리에게 잘 해주었어.
배고품에 찌들린 우리를 불쌍하게 봤는지, 도둑질하러 들어온 우리를 나
무라기는커녕, 싫어하는 부인을 달래서 반찬까지 차려주었지..
우리는 무서움과 체면은 다 잊고 먹기에만 정신을 팔았지..
그때 우리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는 그 사람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
아있어...
그 사건 이후로 우리는 그 사람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어. 하지만 어른들
에게 혼날까봐 그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다는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어..
괜히 그 사람이 칭찬했다가 날벼락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거든...
가을은 지나고 그 혹독한 겨울이 다가왔지...콜록콜록...
그 끔찍한 겨울이...
모든 마을 사람은 굶주림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지...
마을에 식량이란 식량과 가축은 모든 먹어치웠지만, 그 대기근을 해결할
수는 없었어... 정말 지독히도 괴로운 겨울이었어..
아직까지도 그 겨울의 고통은 생생할 지경이니....
그러던 어느날 밤, 동구밖에 살던 최씨가 그 과수원집 헛간에 들어간 음
식을 훔치다 과수원집 주인에게 들킨 일이 발생했어. 과수원 집 주인은
망설이다가 최씨를 놔 주었데.. 콜록콜록..
그런데... 그 최씨는 자기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 날 이후 마을 사람
들에게 과수원집 헛간에는 먹을 것이 넘쳐나고 있고, 그 집 주인은 탐욕
스럽게 그 음식들을 왜놈들에게 바친다고 소문냈어. 그 집 주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증오는 더욱 심해졌지...
굶주림이 심하다보면 이성이 마비 되는지.... 며칠 후 눈이 심하게 오던 날
누구의 주동도 없었는데도 저절로 마을 사람들이 모였어..
아직도 기억나... 그 살벌했던 분위기를...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광기가 가득했고, 모두들 낫이나 곡괭이들을 들고
누군가를 죽일기세로 모여들었지...
바로 그 과수원집에 쳐들어가려고 모인 것이야...
나는 어른들 몰래 거기에 따라갔어.. 어쩌면 나를 따뜻하게 대접했던 그
집 주인이 걱정되었을 지도 몰랐어...
마을 사람들은 한손에 횃불을 들고 살기 등등해서 과수원집으로 향했어.
그리곤 그 집 문앞을 애워샀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을 부시고 그
과수원 집으로 쳐 들어갔지... 콜록콜록..
한 무리의 마을 사람들은 곳간을 부시고 들어가 닥치는 대로 그 집 식량
을 들고 나왔고, 다른 한무리는 곤히 자고 있던 그 집 일가를 붙잡아 나
왔어. 과수원 집 주인 필사적으로 겁에 질려 있는 아내와 목이 터져라 울
고 있던 딸을 달래려 애썼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 참 대단한 사람이야..
자다가 그렇게 험악한 분위기에 휩싸였는데도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이 아
니었어. 차가운 눈 바닥에 가족과 함께 내팽겨쳐지고 주위에는 광기에 사
로잡힌 마을사람들이 살기를 띠고 있고, 자기의 재산이 눈앞에서 약탈당
하는데도 그렇게 겁에 질린 모습이 아니었지...
그리고 당당하게 마을 사람들에게 따졌지...

'여러분, 배가 고프면 저희 집 곡식을 가져가시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강탈하지는 마시오! 부탁하면 드릴 생각이었소.
뭐하는 짓들이요!
한밤중에 아녀자를 놀라게 하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소!
다들 집으로 돌아가시오. 헛간에 있는 것도 이제 다들 가져 가지
않았소!
없었던 일로 할테니, 다들 돌아가시오!
우리를 그만 괴롭히고...'

어린마음에 보기엔 정말 용감하고 위풍당당해보였지...
그런데도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던 그 사람의 모습에는 이상하게도 슬픔이
보였어.. 뭔가 안타까워하고, 허탈하고 희망을 잃은듯한...
살기 등등하던 마을 사람들도 그 사람의 꾸짓음에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
를 숙이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어. 여기 저기서 제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던 낫과 몽둥이들을 힘없이 떨구기 시작했어.
마을 사람들도 자기들의 강도질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서로의 시선을 피
했지.... 나는 안도했지.. 어느새 그 과수원 주인의 편이 되었거든.
그냥 그렇게 그날 밤일은 끝나는 것 같았지...
그때였어.... 콜록콜록...
휴....
어디선가 날카로운 외침소리가 들려왔어

'저 놈을 이대로 놨두면 순사에게 신고할지도 몰라!'

그 외침소리 하나로 가라앉던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는 갑자기 험악해지기
시작했어. 모두들 다시 이유모를 살기에 사로잡였지..
아마 그 과수원 주인이 순사들과 친한 관계로 보여진데다, 이 사실이 마
을 지서까지 신고되면 마을 사람들 모두 서슬퍼런 왜놈 경찰에 끌려고 고
초를 겪어야한다는 것이 겁이 나서 더 그랬을지도 몰라...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터져나오기 시작했어.

'맞어! 저 놈은 분명히 신고할꺼야!'
'저 놈은 왜놈 지서장과 한통속이니 이대로 가만있지 않을거야!'
'저 놈말은 믿을 수 없어!'

이런 저런 험악한 말이 터져 나오더니, 어디선가 끔찍한 말이 나오기 시
작했어

'저 놈을 죽이자! 죽여서 입을 막자!'
'그래 죽이자!'
'저놈은 죽어도 싼 놈이야!'
'죽여!'

삽시간의 분위기는 무시무시해졌어.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악귀같았어.
피에 굶주린 도깨비 같았지.
그 과수원 주인도 심각함을 느끼고 필사적으로 점점 다가오는 마을 사람
들을 말리려 애썼지... 콜록콜록..
하지만 소용없었어.
이미 미쳐버린 마을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절규하던 과수원 주
인을 덮쳤어. 마치 늑대떼가 먹이를 발견하고 게걸스럽게 덮치듯이..
비명소리와 낫과 몽둥이가 난무하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어..
콜록콜록..
어렸던 나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지.
하지만 알 수 없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눈을 돌릴 수 없었어..
달려들었던 마을 사람들이 한두발 떨어지자 그 사람의 처참한 모습이 보
였지.. 휴...
정말 순식간에 멀쩡하던 사람이 피투성이 고깃덩이가 되어버렸어..
평소에 그렇게 양순하던 마을 사람들이 그때는 그렇게 다르게 보였지...
자기 남편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 그
부인은 실성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지.
목이 터져라 울고 있는 어린 딸을 품에 꼭 안고, 애 만은 살려 달라고 처
절하게 외쳤지.. 콜록콜록..
이미 한 번의 살인을 저지를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여자와 어린아이도 전
혀 불쌍하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
몇몇은 차마 여자와 어린아이는 그냥 두자며, 물러섰어...
하지만 이미 칫솟은 광기는 아무도 막지 못했어..
자기들이 살인한 모습을 본 그 가련한 모녀를 살려둘 생각은 들지도 않았
을 거야.. ㅉ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애엄마는 필사적으로 딸을 품안에
안고 보호하려고 했지.
마을 사람들은 최면에 걸린 사람들 처럼 피묻은 낫과 몽둥이를 들고 천천
히 다가갔어..
휴... 콜록콜록..
그때는 이미 마을 사람들이 아니었지.. 완전히 악귀였지, 악귀...
무서웠어.. 지금 생각해도 몸이 떨리곤 해..
뒤에서 본 마을 사람들은 허겁지겁 먹을 것을 먹어치우는 들개처럼 보였
어. '퍽퍽'하는 소리와 피가 튀기는 것은 그 모녀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등뒤로 보였어.
기계적으로 낫과 몽둥이로 희생자를 내려치는 모습은 정말 지옥을 보는
것 같았어..
곧 아이와 엄마의 비명소리도 없어지고 '퍽퍽'하는 내려찍는 소리만 들렸
어. 마을 사람들은 살육을 마치고 천천히 물러났지..
마을 사람들 사이로 보인 아이와 엄마는 정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
하게 보였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ㅉ겼으니...
하얀 눈은 사방이 빨간 피로 물들었어..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일을 감상이라고 하는 듯이 가만히 서 있
었어. 기분나쁜 적막이었어..
그때였지.. 콜록콜록..
분노로 피를 토해내는 듯한 처절한 절규가 들렸어..

'이 놈들! 이 놈들...'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그 과수원 주인이 살아서 자기 가족이 처첨하게 죽
는 것을 본 것이야..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낫과 몽둥이에 맞아 죽는 모습을...
그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고, 살점이 너덜거리는데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
키려고 애섰지...
마을 사람들은 범죄현장을 들킨 사람들처럼 그 모습을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겁이 났는지 움직이지 못했어..
그 사람은 몸을 일으켰어..
그 모습이야말로 정말 처참했지..
한쪽팔은 팔꿈치 밑으로 거의 잘려나가 대롱거렸고, 핏물을 뒤집어쓴 것
처럼 머리위부터 발끝까지 피투성이였어..
하지만 그 빨간 피 사이로 분노와 증오를 불타는 눈은 보기만 해도 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무서워 보였지...
그 사람은 비틀거리며 천천히 자기 가족의 시체더미로 다가갔지..
아무도 막지 못했어.. 그 사람이 지나가니까, 주위에 마을 사람들은 겁에
질린 듯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쳤어..
그 사람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아내와 딸의 시체를 안고 주위의 마을
사람들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보고, 잊을 수 없는 한마디를 했지...

'이 놈들, 내가 반드시 복수한다..
너희들 모두, 내가 받은 만큼 돌려준다...'

지옥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였지...
마을 사람들은 겁에 질려 아무 짓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지...
그 사람은 중상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딸과 아내를 안고 눈물을 흘리며,
중오의 눈으로 마을 사람들을 쏘와보고 있었어..
그때 어디선가 '끝장내자!' '죽여!' 라는 말이 들려오고, 마을 사람들은 그
말에 최면에 깨것처럼 불안한 적막을 깨고 그 사람에게 달려 들었어.
가느다라게 숨이 붙어있던 그 사람은 순식간에 무지막지한 몽둥이질과 낫
질로 죽임을 당했지...콜록콜록..
마을 사람들은 한동안 가만히 있었지..
그때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지..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아니면 그 과수원 주인의 마지막 말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하지만 이내 모두들 제정신을 차렸는지, 자기들이 저지른 엄청난 일에 놀
라기 시작했어..
모두들 차마 자기들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죽였는지 인정하기 싫어하는
눈치였어.. 서로 아무말 없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어..
몇몇 어른들이 남아 처참한 세식구의 시체를 헛간으로 날라 그 바닥에 묻
기 시작했어. 땅이 얼지 않아서 파기가 쉬었을테고, 들키지 않기 위해서
였나봐... 그리고는 마당에 핏자국을 없애려고 짚더미를 모아 불을 부쳤어.
검은 잿더미가 핏자국을 덮을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지...
불을 활활타올랐지..
나는 몸이 꽁꽁 언것도 못느끼고, 그 참혹한 살육을 목격했지..
모든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때까지 있다가 나도 집으로 돌아왔지..
그 이후에 마을 사람들은 그날 밤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고된 생활로
돌아갔지... 콜록콜록...
모두들 그 날 밤일은 기억에서 없어진 듯이 행동했어..
그 과수원 집에서 가져온 곡식으로 우리 마을은 겨울을 났지..
그런데 어느날 읍내 지서장이 나타나 없어진 과수원 주인에 대해 찾기 시
작했어.. 그 지서장을 통해 충격적인 사실을 알 수 있었지...
우리가 왜놈의 앞잡이며 쪽발이 지서장과 한통속이라고 생각했던 그 과수
원 주인이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다는 거야..
독립운동하다가 왜놈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중국으로 쫓겨나가게 되
었댔지... 그렇지만 그 과수원 주인은 조국을 떠날 수 없다고 이 시골에
내려와 농사를 짓기로 약속했대...그래서 지서장이 감시를 하고 있었고..
그 사람은 농사를 지으면서 새로운 종자를 실험해서 가난한 민족을 풍족
하게 먹여살릴 방도를 연구하고, 여러방면으로 독립운동을 몰래 지원하고
앴었대지.... 휴...
내가 그 집에 밥을 훔치러 들어갔을때나, 마을 사람들이 헛간을 강탈했을
때 왜 그 사람이 화를 내기보다는 허탈해 했는지 알 수 있었지..
동포의 헐벚은 모습이 슬펐던 것이지...
그런 사람을 그렇게 처참히 죽여버리다니...
마을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지...
그때만 해도 독립운동가는 우리 촌구석에서도 추앙받는 존재였지..
너무 크나큰 죄악을 저지를 셈이었지.....
그 이후로 누구도 그 과수원집에는 근처에도 가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
과수원 주인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금기로 여겼지...
그 과수원은 수십년동안 버려진 집이었지...콜록콜록...
그 후에 전쟁이 나고, 또 데모다 혁명이다 시끄러웠지...
공장이 들어서고, 그 당시 사람을 죽였던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죽거나
떠났지...
이제 누가 남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가물가물해...
나도 평생을 괴로워했지...
아무리 잊어버리려 해도, 가끔식 그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지..
휴......콜록콜록..
이게 자네가 듣고 싶어했던 살인얘기인가...
너무 무서운 얘기지...."

나는 그 노인의 얘기에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한 마을이 이방인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로 가족을 몰살시키는 일을 저지르다니...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다니....
내가 멍해있는 가운데도, 김반장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많은
얘기를 해서 지친 듯이 눈을 감고 있는 노인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마치 용의지라를 심문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몇가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있는데...
좀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주세요... 그날밤 주동했던 사람과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사람들 기억하세죠?
방앗간 김영감님하고, 사과골 최영감님이 그 일에 가담했죠?
어르신 기억하시고 있는 것 모두 말씀 해주세요...
다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예요..
그리고 그 이후에 그 집에 일어났던 괴상한 일들하고..
제 어렸을때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알아요..
어른들이 쉬쉬해서 잘 몰랐지만...
부탁입니다. 꼭 얘기해주세요...."

무례하다면 무례할 수 있는 김반장에 질문에 노인은 움칠거렸다. 나는 그
노인인 화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노인은 한참을 눈을 감은채로 있다
가 결심을 했다는 듯이 그 충격적인 얘기를 계속했다.

"휴...자네도 뭔가를 알고 있군... 콜록콜록...
죽어가는 마당에 숨겨야 뭘 하노....
숨기는 것도 이제 그만이야....
하지만 사실을 알게되면 김반장 자네도 그 멍에에서
벗어나기 힘들겔세....
괴롭고 두려울거야...
하지만 원한다니 다 말해주지...."

...콜록콜록
언제던가...김 반장 자네가 전쟁끝난 이듬해에 태어났지..
그러면 그 사람들 얘기를 알겠군....
모두 사실이야...
감추고 싶지만, 죽을 때 까지 따라다닐...
자네 할아버지. 내 아버지, 사과골 최씨, 밤골 김씨 모두들 그 사람을 죽
이는데 있었지..
아니 앞장섰어..
특히 내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끌고 그 집에 갔지.. 또 죽었는 줄 알았
던 그 사람을 멈칫거리던 마을 사람들을 선동해 죽인 것도 내 아버지였
지... 콜록 콜록..
휴.... 천벌 받을 짓이야! 천벌....
자네 할아버지... 최씨... 김씨 모두 앞장섰지...
그 일가족을 몰살하는데....
그리곤 모두들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일을 잊었지...
요즘 얘기로 하면 은폐인가...
하지만 모두들 잊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악몽같았을거야...
그것때문인지, 몇몇 사람들은 마을을 떠났지..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그렇게 죽어 버렸지...
그 사건 이후로 그 집은 버려졌지...
아무도 그 집에서 살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 넓은 과수원은 버려진 채 수
십년이 지났지.... *나 다름없는데도 아무도 거기 살려고 하지 않았어...
언제 부터인가, 마을 사람들은 낮에도 그 집 앞길을 지나기를 꺼려했어..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일이 있어도, 저 언덕배기 길로 한참 돌아갔지...
더구나 무서운 일도 가끔씩 일어나곤 했지....
콜록..콜록...콜록...
그 집에서....콜록...콜록.. 일어났던 일들은...콜록...콜록..
나 말고도 아는...콜록 사람이 있을테니...콜록....
그 사람들에게...들어보게...
콜록...
너무 말을 많이 했는지..콜록...더 이상 얘기 못하겠네...
콜록...
무서운 일이야...
진작 죽었어야 했었는데...
콜록..."

그 노인은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얘기를 멈추었다.
더 많은 충격적인 일들이 있는 것 같았지만, 안색까지 새파래지며 기침을
해대는 노인을 보니 더 이상 얘기를 재촉할 수 없었다.
김반장도 그 노인이 나이에 비해 너무 시간동안 얘기를 시킨 것 같아 불
만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노인은 지친 듯이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누웠다.
그래도 정중히 인사를 하고 나가는 우리들에게 마지막으로 힘겹게 한마디
던졌다.

"콜록, 콜록...
김반장, 자네... 할아버지 죽음이 기억나나? 콜록...콜록...
그것 한 번 잘 생각해 보게....콜록....
다들 이상하게 생각들했지....콜록....
이게 다 업보지...업보야..."

그 노인의 마지막 말에 김반장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순간적이지만,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밖에는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대문을 나서며 나는 머리속에 맴돌고 있던 수십가지 의문을 참지 못하고
김반장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 영감님이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 무당의 얘기와 뭔가 통하는
것이 있지 않겠어요? 이번 살인은 그 옛날 원한과 관련이 있겠죠?
그리고, 그 이후에그 집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죠?
김반장님도 이 마을 출신이시니까 아는 얘기 있으시죠?
그리고 할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어떤 일이 있던것이죠?"

김반장은 쉴새없는 나의 질문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시종일관 뭔가 골
똘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김반장의 무반응에 머쓱해진 나는 천천히 걸
어갔다. 같이 말이 없던 정화씨는 내게 한마디 했다.

"일한씨.. 정말 무슨 일이지요?
뭔가 뒤죽박죽인 것 같지만 결국 여러사람이 참혹하게 죽고 있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죠?
그리고 재원씨는 어디에 있는 것이에요?"

체념과 공포가 뒤섞인듯한 정화씨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살인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우리가 여기에 온 진짜 목적인 재원이를 찾는 일을 잊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재원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살인 사건들과 재원이가 관련되 있지는 않을까?
갑자기 머리속이 재원이 생각으로 가득찼다.
그때 갑자기 말없이 빗속을 걸어가던 김반장은 한숨을 쉬며 나를 돌아보
았다.

"일한씨...
친구 걱정이 되지요?
하지만 지금이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해요.. 그래야 친구분의 안위를 알 수
가 있고... 그리고 솔직이 고립된 지금, 누가 언제 그 미친 살이마에게 죽
음을 당할지 모르니, 살기 위해서라도 해결을 해야되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듣고 느낀 바로는 이번 사건
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아니 많이 이상하지...
모든 것이 그 버려진 집과 연관되어 있고, 그 연관성은 불가사이할 뿐이
고...
그 영감님에게 들은 얘기는 나도 처음들은 얘기예요..
어렸을 때 어른들이 그 집 근처에 가는 것도 꺼려한 것은 기억이 나지만,
그런 일이 있었는 지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이 영감님을 찾아와 본 것은 어렸을 때 이유도 모른채로 그 집을 무
서워하고, 어른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한 것이 생각나서예요...
이 영감님이 그 집 근처에도 못가게 야단치던 생각이 났거든요..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죠...
하지만 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그 영감님이 말해주신 살인 정말 일어났
던 사실인가라는 점이예요... 사실이라면 얼만큼 영감님의 기억이 정확한
가도 문제이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정말 큰 사건이죠..
누군지 모르지만, 충분한 살해동기도 될 수 있고....
다리만 안끊겼다면, 군청이나 읍내에 연락해 무언가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제기랄...
지금으로썬 그래도 그 영감님의 얘기를 가장 중요하게 참고할 수 밖에 없
는 상황이죠...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얘기했는데...
그래 좀 이상하긴 했어...
내가 한 10살때쯤 돌아가셨을 것이예요..
그때도 지금처럼 여름이었어요.. 더웠던 것이 생각나요...
할아버지는 아마 읍내에 무슨 잔치에 갔었을 거예요..
그런데 다음 날 아침이 되도록 돌아오시지 않았던 것이었고...
걱정이 된 아버지는 내손을 잡고, 할아버지가 가셨던 읍내집까지 가셨어
요. 하지만, 그 집 말로는 전날 밤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우리집으로 향했
다는 것이예요..
작은 마을이었으니, 할아버지가 없어진 사실은 삽시간에 온 마을에 퍼졌
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 할아버지를 찾아다녔어요..
술에 취했다니, 집으로 돌아오다가 길가에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하루 종일 마을 곳곳을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예요..
읍내에서 마을로 오는 길은 아까 영감님이 말한 것처럼, 그 집을 지나는
가까운 길을 놨두고 먼길로 돌아다녔거든요...
결국 할아버지를 못찾게 되고 밤이 ㄷ지요..
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요..
한 곳만 빼놓고...
이상할 정도로 망설이던 마을 사람들은 노인 몇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횃불을 들고 그 버려진 흉가로 향했어요..
그 집앞을 지나는 길을 찾아보지 않았거든요..
나는 엄마 몰래 아버지를 따라 그 곳을 향했어요..
그런데 아직도 이상하게 생각되었던 것은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마치 무슨 싸움을 하러 가는 사람처럼 낫이나 몽둥이 등을 들고 가는 것
이였죠.. 겁에 질린 표정들을 하고 내키지 않는 모습들이 역력했어요..
제일 앞에 선 것은 역시 아버지였죠..
철없던 나였지만, 어른들마저 겁을 내는 것 같으니 무서웠어요..
그 집으로 향하는 길도 음산했어요.. 인적이 닿지 않아 무성해진 잡초와
길가의 나무들이 섬뜩하게 느껴졌죠..
횃불을 들고 그 집앞에 도착했어요...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그때 그 집의 모습은 정말 무서웠어요... 하도 어른들이 가지 못하게 해서
그때가 나는 그 집을 처음 보는 것이였어요...
수십년동안 아무런 손이 가지 않았던 그 집은 허름하면서도 횃불에 비친
그 모습은 무슨 살아있는 악귀를 보는 듯 했어요..
마을사람들은 뭔가를 경계하는 모습을 하면서도 무리무리 흩어져 할아버
지를 찾아다녔어요.
나도 '할아버지!'라고 몇번 소리쳤던것도 같고...
여하튼 얼마 안가서 '찾았다!'라는 소리가 저 길가 구석에서 들려왔죠...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여들었죠..
그리곤 모두들 고개를 돌렸어요. 마치 지옥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
으며...
아버지는 사람들을 헤치고 할아버지를 보더니 신음소리와 함께 나의 눈을
가렸죠..
하지만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평생을 잊지 못할 처참한 모습을 보았지
요... 내가 20여년동안 경찰에 있으면서 보았던 어떤 시체보다 그때 할아
버지의 시체는 끔찍했죠...
길가에 버려진 할아버지의 시체는 어떤 무지막지한 살인마에 당했는지 수
십군데 난도질 당해져 있었어요.. 언뜻봐서 누워있는 것 같았는데, 순간
뭔가 이상해 보였죠...
이상한 점을 깨닫자마자, 나는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거기서 도망쳤죠.
할아버지의 얼굴만 하늘을 보고 있고, 몸은 뒤집어져 있었죠..
누군가가 할아버지의 목을 잘라 머리만 뒤집어놓은 것이죠...
휴...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할아버지 시체 옆에 녹슨 낫이 발견되었고, 살인범
은 못잡았다더군요.. 그 당시 허술한 경찰들은 출몰하던 도둑때로 범인을
지목했지만 결국 해결하지 못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할아버지의 그 끔찍한 죽음이후, 우리집은 뭔가에 쫓
기듯이 이 마을을 떠났죠.. 그렇게 해서 나는 이 마을을 떠났고...
그 때 이사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마을 떠났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유모를 큰 공포
를 느끼게 한 것 같아요...
그 이후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가 어떻해 해서 경찰이 되고, 여기 연천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죠..
작년인가 갑자기 생각이 나, 할아버지 죽음에 대한 경찰 자료를 찾아봤지
만, 벌써 수십년 전의 일이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더군요...
지금까지 특별한 의심을 안 했는데, 영감님 말을 듣고 보니 뭔가 좀 이상
해요... 그 때도 낫이었고, 그 사건에 할아버지도 연류되었다니...
그리고....."

얘기를 계속하던 김반장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뭔가를 깨
달았다는 표정과 함께 다급하게 외쳤다.

"그래 맞아!
할아버지 시체를 찾아나섰을 때, 그 버려진 집을 찾아보라고 한 것은 영
감님이었어! 이제 기억나는데 아버지에게 거기 한 번 가보라고 한 것도
이 영감님이었어!!! 그리고 우리가 이사갈 때 끝까지 따라나와 다시는 돌
아오지 말라고 한 것도 그 영감님이었고..
영감님이 말해주지 않은 뭔가 있는 것 같아.
피곤함을 핑계로 그때의 일을 몇가지 숨긴 것 같아!
일한씨, 우리 다시 돌아갑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숨겨진 얘기를 다들어야 겠어!"

김반장은 뭔가 결정적인 단서를 찾은 것처럼 정말 발걸음을 돌렸다. 나도
그 영감의 얘기가 뭔가 미흡했던 생각이 들어 두말않고 따라 나섰다.
김반장은 비 맞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어.
영감님 집에서 얼마 안 갔기 때문인지, 발을 돌린지 얼마안가 그 집이 보
였다.
그때였다.
여자의 ㅉ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그 집에서 들려왔다.
그 순간 김반장은 우산을 내던지고 그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그 뒤를 쫓았다.
나는 뛰면서 정화씨를 돌아보며 외쳤다.
"정화씨는 천천히 따라와요!"
그리고 비에 흠뻑 젖으며 그 집으로 뛰어갔다.
김반장은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이외로 빨리 달려, 젊은 나보다도 한참
을 앞섰다.
숨을 할딱이며 그 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 이미 김반장은 신발을 신은채
로 마루로 뛰어올라 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 영감님 방에서 또 한 차례의 비명소리와 '퍽'하고 기분나
쁜 소리가 들려왔다. 김반장은 민첩하게 권총을 빼어들고 그 영감님 방문
을 차고 뛰어들었다.
동시에 쨍그렁하고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다음 순간 나도 김반장
을 따라 그 방에 들어갔다.
실제 시간으로 따진다면 5초도 안걸리는 순간이었지만, 너무 큰 충격때문
인지 내 눈앞에는 모든 것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펼쳐졌다.
방에 들어가자 마자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글자 그대로 피바다였다.
방안 전체가 시뻘건 피로 뒤덮혀 있었다.
불과 5분전만 해도 우리에게 얘기를 들려주었던, 그 영감님은 누운채로
목이 잘려있었고, 우리를 안내해 주었던 중년의 사내도 갈기갈기 ㅉ겨진
채로 방구석에 널부러져 있었다. 창가에는 비명을 질렀던 것 같은 중년의
부인 피투성이가 된채로 '그륵그륵'하는 숨너머가는 소리를 내며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김반장이 들어갈 때 깨어진 것 같은 창문너머로 뭔가가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김반장은 "서라!"라는 소리와 함께 이미 권총을 움직이는 그
것을 겨누고 발사했다.
그것은 총에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비 속에서 숲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가
고 있었다.
창졸간이어서 자세히는 못보았지만, 내눈에는 사람의 뒷모습으로 보였다.
한 손에는 낫을 든..
하지만 그 모습에는 왠지 모르게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섬뜩함이 느껴졌다.
몸을 부르르떨고 있을 때, 김반장은 나를 돌아보고 짧고 빠르게 한마디
했다.

"그 놈이야! 그 놈..
따라가야해!"

그리곤 창문을 훌쩍 뛰어넘고 그것이 사라진 쪽으로 뛰어갔다.
등뒤로 이제야 도착해 방안의 지옥을 발견한 모양인 정화씨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충격으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던 나는, 정화씨에게 마당에 나가 잠깐
만 기다리라는 한마디만 남긴채, 무엇에 홀린 듯 김반장의 뒤를 따라 창
문을 넘었다.
그리고 숲으로 사라진 그것의 뒤를 쫓았다....

....뭔가에 홀린 듯이 그 놈을 쫓아 창밖으로 뛰어나갔다.
나서자 마자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굵어진 빗줄기가 얼굴에 떨어져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대충 눈위를 흘러내리는 빛물을 손으로 훔치며, 김
반장과 그 놈이 사라진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김반장이 먼저 뛰어나간지 불과 10초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저 멀리 나
무를 헤치고 달려가고 있었다. 나도 필사적으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며칠동안 계속내린 비 때문에 땅은 질퍽거리고, 무성한 나뭇가지에 온 몸
을 할퀴고, 얼굴 정면으로 떨어지는 빗방울로 앞은 잘 보이지 않고, 정말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한 5분쯤 따라갔을까, 어느새 깊은 숲속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김반장은
벌써 울창한 숲속으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 놈도 시야
에서 사라졌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들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몇번을 소리쳐 김반장을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 뿐이었다.
생각해보더라도, 그 놈을 쫓고 있는 김반장이 내 소리에 대답할 처지 같
지는 않았다.
잠시 숨을 가다듬으면서, 어떻할까 생각해보았다.
무턱대고 김반장이 사라진 숲속으로 들어갈까도 생각했지만, 따라가봤자
찾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솔직이 혼자서 따라가는 것이 겁도 났
다. 비는 점점 심하게 내리고, 슬슬 비로 흠뻑적은 몸도 추워지기 시작했
다. 김반장 뒤를 따라가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움도 느껴졌다. 하지만
김반장이 혼자서라도 잘 처리할 것이라며 위안했다. 또한 그 살육의 현장
에 혼자 남겨두고 온 정화씨도 걱정이 되었다.
되돌아 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난감해질 수 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 지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비도 내리고 있었고, 길이 없
는 숲을 헤치고 들어온 바람에 어디로 가야할지 종 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움직이긴 움직어야 했기에, 대충 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도가도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나무들이 모습은 다 똑같
이 보였고, 그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질퍽이는 땅에 발은 자꾸 빠져 걷기마저도 힘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뒤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
는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이었다.
뒤를 돌아보았으나, 무성한 나무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나무들 뒤에 뭔가 기분나쁜 것이 있어 보였다.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었지만, 떨어지는 빗방울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의
움직임만이 보일 뿐이었다. 귀를 기울여 봐도, 후들거리며 나뭇가지에 떨
어지는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마치 뭔가가 내게로 다가오는 발소리처럼 들렸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가 점점 나를 행해 압박
해 들어오는 느낌을 더욱 강해졌다.
겁이 났다.
비 때문에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나를 보고 있고, 점점 다가온다는 섬뜩한 느낌은 더욱 강
해지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봐서, 야구 방망이 크기의 나무 토막을 집어들었다.
나무의 묵직한 촉감을 느끼니 좀 든든해졌다.
천천히 주변을 경계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뭇가지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디선가
나를 덮칠 것 같은 느낌은 점점 강해졌다.
불안한 느낌이 강해지면서, 비에 흔들리는 나무들이 모두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무를 잡은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후드득 소리가 나서 돌아보았지만, 빗방울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비로 젖은 온몸에 땀까지 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포위당한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덜덜 떨려오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탕!'하는 소리가 온 숲속을 메아리쳤다.
총소리 같았다.
뒤어어 '타탕!'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메아리 소리 때문에 어디서 난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김반장이 총을 쏜 것 같았다.
그리곤 죽음같은 적막이 흘렀다. 단지 빗소리만 들려왔다.
그 총소리에도 불구하고, 내 주변을 휘감고 있는 사악한 기운은 수그러들
지 않고 점점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다.
닥치는 대로 뛰기 시작했다. 앞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가지에
온 몸이 ㄱ혔고,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진흙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뭔가가 내 뒷덜미를 챌 것 같았다.
그런 느낌만 들면 지체없이 들고 있는 나무 몽둥이를 뒤로 후려쳤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점점 더 다급해졌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얼마나 달렸을까..
온 몸은 진흙투성이가 되고 엉망이 되었다.
순간 누군가 내 등을 확 잡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놀라가 두려워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있는 힘을 다해 들고 있던 나무몽동이를 휘둘려는 순간, 귀에 익은 목소
리가 들려왔다.

"나야 나 일한씨.. 김반장.."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등뒤를 보았다.
김반장이었다.
그런데 김반장 역시 호된 일을 겪었는지, 한 쪽 어깨가 피버범이 되어있
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간신히 권총을 쥐고 있었다.

"반장님! 무슨 일이죠? 어떻게 된거예요?
괜찮은 것예요?"

김반장은 고통스러운지, 신음소리를 내며 간신히 대답했다

"나는 견딜만하니.... 걱정마....
그 놈이 저기 그 집으로.... 돌아갔으니.....
정화씨가...... 혼자 있는....
빨리 가봐..... 나는... 따라갈테니....
자, 이 총을 가져가게......."

그러면서 내게 피묻은 총을 쥐어졌다. 김반장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
눈만은 공포와 그것을 이기려는 강한 의지가 섞여서 삼뜩할 정돌로 빛나
고 있었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김반장의 어깨 상처를 살펴보았다. 뭔가 날카로
운 것에 왼쪽 어깨부분이 ㅉ겨나갔다. 언뜻 보기에 깊은 상처같이 보였지
만, 김반장은 계속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나는 걱정말라니까.. 좀 쉬었다 금방 따라간다니까...
빨리 가... 그 놈은 벌써 그 집에 갔을가야..
정화씨가 위험하니 빨리....
으윽... 괜찮아 괜찮아...
그 놈을 꼭 잡아...
아니 죽어버려...."

김반장은 헉헉대면서, 나를 재촉했다.
다친 김반장을 이렇게 놔두고 간다는 것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괜찮을
것 같았다. 그의 그런 처절한 모습을 보니, 이유모를 분노가 치솟는 것 같
았다.
김반장의 피가 묻은 총을 꽉 쥐고, 고개를 드니 저기 나무사이로 그 끔찍
한 살인이 있었던 노인 집이 보였다. 길을 잃은줄 알았지만, 그래도 제대
로 온 것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그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김반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하게...
놈은...사람이..아닐지도 모르니....
제기랄! 으윽..."

나는 공포와 이상야릇한 흥분감도 느끼면서, 그 집을 향해 달렸다.
그때였다.
ㅉ어지는 듯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정화씨가 걱정되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렸다.
땅이 질퍽거리는 것이나 미끄러지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느낄 수 없
었다. 달릴 수 밖에 없었다.
아까 그 놈을 쫓아 김반장과 함께 뛰어넘은 창문이 보였다.
그 창문 사이로 언뜻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피빛의...
나는 죽음힘을 향해 뛰었다.
마당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정화씨를 목이 터져라 불렀지만, 아무론 대답도 없었다.
총을 꽉쥐고, 시체들이 나동그라져 있을 방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바닥에 피묻은 발자국이 보였다. 심장이 콩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바닥은 피바다 그대로였다.
시체들은 그대로 널부러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노인의 시체가 감쪽같
이 사라졌다. 겁나고 놀랐다.
그 놈이 여기를 다녀간 것이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정화씨를 찾아보았다.
그 놈이 어디선가 낫을 들어 덮칠 것만 같았지만, 상관할 수 없었다.
정화씨가 걱정되었다. 어디선가 낫에 난도질당해 있을 것만 같았다.
한 구석에서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나는 쪽을 확 돌아보았다.
정화씨였다.
방 한구석에서 피투성이가 된채로 눈만 내놓고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다급히 정화씨에게 다가갔다. 어디라도 다친 줄 알았다. 하지만 정화
씨는 몸을 부르르 떨고있었다.
다행히 살아있었다.
무릎을 앉고 있는 정화씨를 살펴보았지만, 피투성이만 되어있을뿐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어깨를 잡아 흔들며 정화씨를 불러보았지만, 대답은커녕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며 계속 떨고 있었다.
피 범벅이 된 얼굴은 지옥이라도 들여다 본 사람처럼 겁에 질려 있었고,
눈은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빼앗긴 사람의 눈처럼 아무런 초점도 없었다.
정화씨는 부들부들 떨면서 입으로는 뭔가를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흔들어보아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무슨 소리를 중얼거리는 것인가 주의깊게 들어보았지만,
단지 이 두마디의 연속이었다.

"..그가 왔어..낫을 들고..
그가 왔어..낫을 들고..
그가 왔어..낫을 들고......"

...정화씨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었지만, 계속해서 그 말만 대뇌이고 있었
다. 김반장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다가와 넋이 나간 정화씨를 살펴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한마디 했다.

"휴... 정화씨는 지금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 같네요...
뭔가 끔찍한 것을 본 듯한 눈빛이야..
하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면 제정신을 찾을 것 같아요..
안정이 필요하고..."

김반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화씨는 고개를 떨구더니 기절했다.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살펴보니 다행히 정신을 잃었을 뿐이었다.
김반장을 잠시 멍해있는 나를 보챘다.

"일한씨, 이제 서두르지...
빨리 정화씨를 데리고 지서로 돌아갑시다..
거기 가서 좀 차분히 생각 좀 하고, 그 놈에 대해 대비도 해야할 것
같아..."
"김반장님은 다친 곳은 어떠세요?
제가 정화씨를 업고 갈테니, 빨리 출발하죠.."

나는 말을 하면서, 김반장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흘러나오던 피는 좀 멈춘
것 같지만, 그렇게 가벼운 상처같지는 않았다. 기절한 정화씨를 들쳐업고
우리는 그 피비린내 나는 지옥에서 출발했다. 빗줄기는 좀 가늘어져 있었
지만, 쉽게 그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젖을대로 젖어있어서, 우산 쓸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등에
업힌 정화씨에게는 김반장이 웃옷을 벗어 덮어 주었다.

"피는 묻었지만, 그래도 그냥 비 맞는 것보다 나을거야..
제정신이라면 죽어도 피 묻은 옷은 덮지 않겠다고 했겠지...
하하..
그건 그렇고 일한씨 무겁지 않아요?
원래 기절한 사람은 제정신의 사람보다 3배는 무겁다는데..."

김반장은 심각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긴장된 얼굴을 하고 연신 사방을 살피면서 앞장섰다. 그 놈
이라도 갑자기 튀어나올 것처럼 경계했다. 어깨의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손에는 안전장치를 푼 권총을 쥐고 있었다.
나도 긴장이 되었는지, 등에 업힌 정화씨의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앞서가는 김반장의 어깨의 상처가 눈에 띠었다. 날카로운 것에 ㅉ겨나간
상처가 길게 보였다. 꽤 아플 것 같은데도 김반장은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갑자기 잊고 있던 의문이 생각났다.

"저.. 김반장님,
그 어깨 상처 말인데요...
그렇게 다칠 때 그 살인마 보셨나요?
어떻게 다치신거죠?
저는 김반장님을 따라가다가 놓쳐버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볼 수 없었
거든요?"

김반장은 내 질문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뒤도 안돌아보고 계속해서 걸어
갔다. 내가 다시 한 번 물어보려는 순간, 김반장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놈말이지요...
그 놈...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 때 솔직이 나도 무서웠어요..
무서웠지...
죽는 줄 알았어.. 어깨가 낫에 찍혔을 때는...
나도 창문을 뛰어넘어 숲으로 그 놈의 뒤를 필사적으로 쫓아갔어요..
평소에 나쁜 놈들 잡으러 다니는 것 때문에, 달리기만은 자신이
있었는데 그 놈은 도저히 잡을 수 없었어요..
그 놈은 달리는 것이 아니고, 마치 땅위를 떠 가는처럼 순식간에
숲속으로 사라졌지.. 숨은 차왔고, 허탈했죠..
도망가는 범인을 따라가 잡는 것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였는데도,
어떻게 된 것인지 그 놈은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점점 멀어지더니 순식간
에 사라져 버린 거예요...
잠시 숨을 돌리며, 사방을 둘러 보고 있었는데..
그때였어요..
갑자기 등뒤에서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어요.
뒤를 돌아보았죠.
그놈이었어요.
정말 아무 인기척도 못 느꼈는데, 어느새 내 등뒤에서 낫을 높이 쳐들고
나를 치려고 하는 것이었어요. 분명히 내가 사방을 한바퀴 돌면서 둘러
보았는데.... 글짜 그대로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어요.
실제로 그 놈이 나를 낫으로 내려치려고 하는 순간은 1초도 안되는 ㅈ은
순간이었을 거야.. 하지만 나에게는 죽음같은 시간이었어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어요. 어깨위로 떨어지던 빗방울마저도...
단지 느낄 수 있던 것은 공포뿐이었어요..
그 놈의 낫이 내 머리를 향해 내리치는 모습이 보였어요.
이상하게도 움직일 수 없었어요. 마치 입체 영화관에서 낫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장면을 보는 것 같았어요. 그것도 슬로우 비디오로...
천천히 그 낫이 내 머리로 점점 다가왔죠..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순간적으로 어디서가 튀었는지 빗방을이 내 눈에 튀었어요.
정신이 들었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괴기한 최면에 들려있었던 갓 같아요.
전혀 반항을 할 수 없었으니까..
다행히 그 빗방울 때문에 나는 움직일 수 있었던 것같아요.
생각할 새도 없이 몸을 틀었어요.
머리를 향해 내리쳐지던 낫은 내 어깨를 내려쳤어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뒤로 넘어졌어요.
그리고는 쓰러진 나를 향해 다시 한 번 낫을 힘껏 치켜든 그놈에게 들고
있는 권총을 겨냥하고 아무런 거림낏없이 방아쇠를 당겼죠.
2미터거리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였는데, 아무리 권총이라도 빗나갈 거리
가 아니었는데, 그 놈은 총에 안맞았었는지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어쩌면 그 놈은 내총에 맞았는 지도 몰라...
나는 분명히 그 놈의 심장을 정확히 겨냥했거든... 순식간의 일이었지만,
가까운 거리여서 확신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놈은 분명히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다가왔어요.
나는 공포에 떨며 2번째, 3번째 방아쇠를 당겼어요.
그런데 운 좋게 3번째 총알이 그 놈이 낫을 들고 있던 손을 명중시켰죠.
낫이 저쪽으로 날아갔어요.
그러니 총알 세레에도 꿈쩍않던 그 놈이 잠시 멈추더니, 낫을 떨어뜨린
곳으로 가더니,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순식간에 그 노인이 죽
어있던 집쪽으로 사라졌어요.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워 멀어져가는 그 놈의 등뒤를 향해 총
을 발사했지만..
하지만, 그 놈은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그때서야 나는 어깨의 통증을 처음 느꼈어요..
휴...
그런데 일한씨가 궁금했던 것에 대한 답은....
그 놈이 누구였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부끄러운 얘기지만, 솔직이 나는 그 놈에 대해서는 하나도 기억나
는 것이 없어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너무 무서웠던지..
단지 기억나는 것은 그 놈이 입었던 붉은 색 체크무늬 상의 뿐이고.
그것도 내가 그 놈의 심장을 겨누고 총알 쐈기 때문에 기억나는 것 뿐이
예요. 그리곤 아무것도 생각해낼 수 없어요.
단지 그 놈에게 풍겨나오던 사악함과 무시무시함만 기억날 뿐이지...
부끄럽네요..
경찰이라는 작자가 범인을 잡기는커녕 겁에 질려, 인상착의도 제대로
기억못하고 있으니...."

얘기를 마친 김반장의 어깨는 축늘어졌다.
부끄러움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기 힘든 얘기었는지 얘기
하는 동안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이전부터 마음에 제일 걸려오던 것을 김반장의 얘기를 통해 확
인하고 싶었었다. 그런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놈이 혹시 사라진 재원이
가 아닌가하는 것이었다.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김반장이 기억을 못하는 것으로 봐서 재원이가 아닐 수도 있었다.

"김반장은 정말 큰일날 뻔 했네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그런데 그 놈을 다시 보면 아실 수 있겠어요?"

"그건 걱정 말아요..
그놈의 얼굴은 기억못해도, 그 놈이 뿜어내는 그 숨막히는 살기와
공포감은 죽을때까지 잊을 수 없을테니까...
그건 그렇고, 일한씨 안 힘들어요?
정화씨가 아무리 여자고 가볍고 하더라도, 이렇게 비맞으면서
걸으려면 힘들텐데..."

김반장은 그러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가늘어졌던 빗줄기는 다시 굵어지는 것 같았다.
머리속에는 수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이렇게 계속해서 비가 오면 고립된 이 마을은 언제 외부와 연결될 수 있
을까?
그 때까지 우리 모두는 이 미치광이 살인마를 잡을 수 있을까?
아니, 그 놈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도대체 재원이는 어떻게 된 것일까?
버려진 집에 얽힌 괴기한 이야기들, 재원이의 정신착란과 실종,
정체 모를 살인마의 잇따른 연쇄 살인, 이 모든 것이 도대체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도저히 감
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생각이 떠올랐다.
그 살인마는 도대체 왜 계속해서 살인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닥치는대로...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이유로....
이제까지 그 놈의 계속되는 살인을 뒤쫓다보니, 너무 그 놈에 이끌려온
것 같았다. 제대로 그 놈의 동기를 파악할 틈도 없이...

"김반장님,
지금 떠오른 사실인데요?
그 살인마는 왜 마을 사람들을 계속해서 죽이고 있을까요?
그리고 희생자들은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 그 놈에게 죽음을 당한 걸
까요? 아니면 무차별적으로 살육을 감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김반장은 나의 질문에 다시한번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뭔가 생각하는
것 같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얘기를 시작했다.

"그래요...
일한씨 말이 맞아요.
이제까지 우리는 너무 그 놈의 살인 하나하나를 쫓고만 있었어.
하긴 순식간에 너무 많은 살인사건이 발생했으니...
연쇄 살인 사건에서 가장 중요하고 제일 먼저 조사해야 하는 것은 살인
범의 살해 패턴을 찾는 것이죠..
희생자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나 등을 밝혀내서 범인의 살해동기를
알아내고 다음 살인을 예방하거나 그 놈에 대한 단서를 발견해야 하는
것인데...
우리도 한번 생각해 봐요...
이 사건의 제일 첫 번째 희생자는 누구였지.....
우리가 수사에 나선 것은 탈영병이 이곳 근처에 숨어들었다는 신고와 동
시에 성일여관 주인인 최씨가 상체와 하체가 잘린 채 발견되었다는 신고
를 받고나서였지.. 그리고 며칠있다가 정미소 김씨가 시체로 발견되고..
두 사건의 용의자는 알다시피 그 거구의 탈영병었지..
하지만 일한씨가 그 탈영병의 시체와 낫을 발견하고 나서 일단은 사건이
종결되었지..
그 바보같은 군 수사관놈들...
그저 자기들 책임인 탈영병이 시체로 발견되자 얼씨구나 좋구나 하고 사
건을 종결시켜 버리고...
그리고 홍수로 마을이 고립되고, 무당과 그 조수가 시체로 발견되었지..
그 살인도 일한씨와 정화씨가 발견하고...
같은 시간 사과골 최씨 부부가 난도질당한 끔찍한 시체로 발견되고...
그리고 지금 어르신과 어르신을 모시던 부부가 당했어요..
모든 피해자는 낫으로 당했고...
탈영병을 제외하고는 이 마을에 산지 오래되는 사람이고...
뭔가 연관성이 있을텐데...
그것이 뭘까...."

"김반장님,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버려진 집에 몇 년전에 발생했다는 살인 사건이요...
과수원 주인이 자기 딸과 사윗감었던 장교, 그리고 아들을 낫으로 죽이
고 자신은 자살한 사건, 그 어르신이 얘기했던 일제 시대에 있었던 끔찍
한 사건들과 이번 사건과의 무슨 연관성을 없을까요?
괜히 꺼림직하네요...
모든 사건들이 다 그 버려진 집과 낫이라는 매개체로 얽히고 ㅅ힌 실타
레같아요... 원한과 중오, 복수, 뭐 이런 것이 동기 아닐까요?"

"글쎄요...
일한씨 말도 일리가 있지만, 너무 모호해요...
뭔가 더욱 명확한 살해 동기나 패턴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아요..
어짜피 읍내의 지원이 앞으로 얼마간은 불가능하니 우리끼리 그것을 찾
아내야 해요...
앗! 그런데 저건 뭐지....."

김반장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앞으로 뛰어갔다.
나는 정화씨를 업고 있어 뛰어 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빠른 걸음으로 김
반장의 뒤를 따라갔다. 김반장이 발견한 것은 길 한폭판에 뭔가가 널부러
져 있는 것이었다.
먼저 달려간 김반장은 그것을 보더니 허리를 굽혀 두손을 무릎에 올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제기랄!! 이럴수가!!
똑같잖아! 똑같아...."

김반장의 소리를 듣고 나는 정화씨를 업고 더욱 빨리 뛰어 뭔가가 널부러
져 있는 곳으로 달려 갔다.
그것을 보는 순간은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시체였다.
시체가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몸은 엎허져 있고, 머리만 잘라
하늘을 향하게 돌려놓은 것이었다.
끔찍한 모습에 정신이 멍해져 있는데, 김반장의 목이 쉰듯한 목소리를 듣
고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때와 똑같아..
내가 어릴적 할아버지 시체를 그 과수원 근처에서 발견했을 때와...
그때도 할아버지 시체는 이렇게 놓여있었어..
머리만 하늘을 향한 채로....
제기랄! 똑같단 말야....."

...길복판에 가지런히 놓여진 그 끔찍한 시체 주위에는 피와 빗물이 섞인
붉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 시체로 다가갔다.
바로 아까 그 집에서 사라진 노인의 시체였다. 우리에게 과수원 집의 숨
겨진 비밀을 얘기해 주었던... 하지만 뭔가를 숨기고 있다가 이렇게 처참
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 놈이 어르신의 시체를 이렇게 여기다 이런 모양으로 가져다 놓은 것
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의미하는 것 같네요..
우리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죠...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무슨 의도가 있다면 이 시체 배열을 봐서는 일한
씨에게 보다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어쩌면 그 놈이 아무생각없이 여기다 시체를 버리고 간 것일지도 있잖
아요.. 단지 정말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모르겠어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진실인지를...
휴....
그건 그렇고, 어르신의 이 끔찍한 시체를 여기다 버리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떻게 옮길 수도 없고....
어떻게 하지...."

김반장은 난감한 표정을 한참 짓다가,주위를 둘러 보았다.
다행히 길가에 쓰다버린 듯한 가마니가 몇 개 보였다. 김반장은 그 가마
니 몇 개를 가져와 시체를 덮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이렇게라도 수습을 하죠..
빨리 지서에 돌아가 사람들을 보내 시체를 처리해야 겠어요...
이런 식으로 가다간 온 마을이 시체로 넘쳐나가겠어요...
큰일났군.. 큰일났어..."

대충 시체가 안보일정도로 가려놓고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슬슬 팔과 허리가 아파왔다. 처음에는 그렇게 가볍던 정화씨의 몸이 천근
만근으로 느껴졌다. 어느새 땀까지 나는 것 같았다.
아마 그 시체를 봐서, 더욱 힘이 빠진 것 같았다.
김반장은 찹찹한 듯 걸음걸이가 느려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긴장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일한씨...
조심하죠... 우리...
그 놈이 시체를 여기다 놓고 갔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 맴돈다는 얘기
일 수도 있으니까... 혹시 다음 목표가 우리일 수도 있으니까...
여하튼 그 놈은 이 근처에 있는 것이 확실해요....
모르죠.. 어디선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그러고는 사방을 경계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더욱 난감해졌다. 정화씨를 업은 것은 점점 힘들어지는데, 어디선가
그 놈이 낫을 들고 튀어나올지도 모르고...
김반장의 얘기를 듣고 보니, 사방의 인적은 전혀 없고 비만 내리고 있는
것이 으시시했다. 이미 마을 사람들에게는 살인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을
테고, 아무도 이 음침한 길을 돌아다니지 않을 것 같았다. 단지 저녁 모임
시간이 되면 모여들 것이었다.
더구나 우리들을 보니, 영락없는 상처입은 채로 천천히 도망가는 먹이같
았다. 지금 이 상태에서 그 놈이 덮친다면 그 놈을 잡기는, 제대로 저항하
기도 힘들 것 같았다. 올때는 한 20분도 안걸린 것 같은 짧은 거리였지만,
긴장한데다 정화씨까지 업고 있으니 정말 한참 걸리는 것 같았다.
정화씨를 업고 있는 상태에서도 자꾸 뒤에서 뭔가가 쫓아오는 것 같아 돌
아보게 되었다. 체력 소모는 더욱 심해지고...
김반장 역시 신경이 날카로웠는지 쉬지 않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우리를 내려다보는 뜨거운 시선을 느껴진 것 같은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
다. 긴장은 더욱 심해지고, 발걸음 하나하나 떼놓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
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보니 저 앞으로 지서가 보였다.
왔다갔다 하는 사람도 보였다. 이제는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반장이 외쳤다.

"이봐! 빨리 나와봐!
여기와서 일한씨 좀 도와줘!"

그 말을 들었는지, 지서 앞에서 있던 마을 장정 서넛이 달려와 정화씨를
들쳐업고 나를 부축해줬다. 김반장을 부축을 거절한 채로 성큼성큼 지서
로 들어갔다. 나는 정화씨를 지서의 숙직실에 눕혔다. 김반장은 지서로 들
어가자마자 수많은 질문과 보고를 무시하고, 우선 지서에 있던 어떤 아주
머니에게 정화씨의 간호를 부탁했다. 그 아주머니는 피묻은 채로 쫄딱 젖
어버린정화씨를 보더니 '에구머니'하면서, 나를 포함한 남자들을 숙직실
밖으로 쫓아냈다. 우선 젓은 옷부터 갈아입힐 생각이었나 보다.
나는 그 아주머니의 걱정말라는 말을 듣고 등이 밀려서, 숙직실에서 나왔
다. 김반장은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어깨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정화씨는 걱정말라고 했다. 그 아주머니가 잘 해주고, 지금
자기 어깨를 치료하고 있는 보건의가 정화씨를 진찰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무너지듯 빈 의자에 주저앉았다.
젖은 몸이 추워졌지만, 지금 그것을 신경 쓸 수가 없었다.시계를 보니 어
느새 오후 3시를 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먹은 것도 없어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했다.
김반장은 어깨를 치료하면서 이순경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 받고 있
었다.

"..아직 읍내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장님이 오늘 오후 5시에 모든 마을 사람들을 분교 교실로 모이
라고 전달하셨습니다. 시체들은 모두 냉동고로 옮겼고, 의사 선생님이 검
사하셨습니다. 반장님께 직접 몇가지 말씀 드린답니다.
그리고 마을에 있는 총기류를 모아 보니, 지서용 칼빈총 3정과 보관중인
사냥용 공기총 2정이 전부입니다. 실탄은 칼빈용 100발과 권총용 20발입
니다. 모두 지서에 모아두었습니다.
말씀하신 탈영병 사건 기록은 그때 군 수사본부에서 전부 가져가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있었던 그 과수원집 살인사건에 대한
기록들은 본서에 보관되어있고, 그 사건을 담당했던 주형중 순경은 얼마
전에 아시다시피 분신자살했고,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던 사건 기록도
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이순경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지서의 문을 쾅 열고누
군가가 뛰어들어왔다.
머리를 산발한 어느 아주머니였다.

"우리 애가 ...
큰일 났어요!!! 큰 일!!
제발....
제발..... 안돼!!!"

미친 사람처럼 알 수 없는 소리를 외치더니 이내 자리에서 쓰러저 혼절해
버렸다. 지서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아주머니에게 웅성거리며 다가갔다.

"서산댁, 정신차려요! 정신차려..."

이순경이 쓰러진 아주머니를 흔들어 깨우려고 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
었다. 김반장의 어깨에 붕대를 감아주던 보건의는 재빠르게 아주머니의
상태를 살펴보고 단순한 충격에 의한기절이라고 말했다. 정화씨와 비슷
한 경우처럼 보였다. 모두들 어리둥절했다.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멍하고 쓰러진 그 아주머니를 보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지서로 뛰어들어
왔다. 가슴에는 피투성이가 된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
처음에는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무슨 동물의 시체를 가져온 줄 알았
다.
하지만 그 피투성이의 것을 알아보는 순간 너무 큰 충격에 멍해졌다.
속이 매쓰꺼워지며 구토가 나오는 것 같았다.
바로 아이의 시체였다.
더욱 끔직한 것은 그 애의 양팔이 붙어있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애가 죽었어요!!!
흐흑... 흐흑....
누가 우리 애의 팔을 잘랐어요...
제발 살려줘요....
흐흑...."

모두들 그 참혹한 모습에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보건의는 그 사람이 책상위에 내려놓은 거의 고깃덩이나 다
름없는 피투성이의 아이를 살펴보았다. 내가 보기에도 그 애는 이미 이세
상 사람이 아니었다. 의사역시 고개를 가로져으며, 자기 가운을 벗어 그
참혹한 시체를 덮어주었다.
아이를 안고온 그 사람 제정신을 잃은 것처럼 계속해서 흐느끼기만 했다.
또 다른 살인이일어난 것이었다.
김반장은 상처치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나 제정신을 잃고 흐
느끼고만 있는 그 사람을 부여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이봐! 박씨!
무슨 얘기 하고 있는가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안사람은 저렇게 기절해있고!!!
도대체 어떤 일이야?
정신차리고 말좀 해봐!!
이봐 정신 차리란 말야!!!!"

김반장의 과격한 행동에 그 사람은 흐느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
고는 춧점없는 눈빛을 하고 마치 딴사람 얘기하듯이 또하나의 끔찍한 사
건을 얘기했다.

"..아, 김반장님....
오랜만이네요...
언제 마을에 오셨나요...
우리 애를 살리려 오셨나요?
우리 애가 죽었어요....
머리가 잘려나갔어요....
이장님이 마을에 끔찍한 일이 발생하니, 조심하고 오늘 5시에 분교로 온
가족을 데리고 모이라는 말씀을 전해주시고 우리집을 다녀가셨죠....
안사람은 겁에 질려, 물난리 난 것 구경하러 나건 애를 찾아 나서자고
했죠.
우리 애 아시죠.... 우리 부부의 하나뿐이 자랑...
개 공부도 지학교에서 일등 해요...
읍내 중학교에서 서울대학감이라고 다들 칭찬하는데...
방학이라 집에서 농사일 돕고 공부도 하고 있었는데....
강가로 갔죠...
거기는 우리애가 어렸을부터 자주 놀러가던 곳이었어요..
처음에는 여편네가 걱정도 팔자라고 생각하며 투덜거리며 애를 찾으러
간 것인데...
강가로 갔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저 옆을 휙하고 지나가는 것이 언뜻 보였지요..
너무 순식간에 일이었기에, 그냥 잘못 본 것인줄 알았는데....
그 놈이야!
그 놈이 우리 애를 저렇게 만든거야!
흑흑...
아무 생각없이 애 이름을 부르며 강가를 헤맸죠...
그런데......
그런데 말이예요....
저쪽에 뭔가가 보이는 거예요....
그쪽으로 다가갈수록 이상하게도 불안해졌죠......
바로 우리 애였어요....
피투성이가 된채.... 두팔이 잘려나간 채.....
아냐! 이건 아냐!!!!!
아냐!!!!!!!!"

갑자기 그 사람은 발작이라도 한 듯이 악을 쓰고 책상을 쾅쾅 쳐댔다.
이순경은 그 사람을 부여잡고, 진정하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 실성한 사람처럼 악을 쓰고 보이는
것은 모두 부셔버릴 기세였다.
금새 지서안은 아수라장이 될 판이었다. 나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이 그
사람을 향해 달려 들었지만, 그 사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보건의가 진정제를 놓을때까지 처절한 발악을 계속했다. 하지
만 그 진정제가 약효를 보았는지, 발작을 멈추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순간 죽음과 같은 적막이 흘렀다.
모두 참담함과 무력감, 또는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의자에 앉아 계속해서 아들의 이름을 뇌까리며 흐느꼈다.
그 끔찍한 적막을 깬 것 역시 김반장이었다.

"나쁜 새끼....
이제 아이까지....
어디 보자. 잔인한 놈......
모두들, 이제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자, 빨리 움직이자!
이장님, 박씨하고 안사람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좀 안정시켜 주시겠어
요? 댁에 사람들 좀 불러서 같이 계셔 주시죠... 워낙 큰 충격을 받으셨
을테니...
그리고 의사 선생님 수고 스럽겠지만 여기서 이 애가 어떻게 살해되었는
지 좀 봐주시겠어요.. 물론 생소한 일이겠지만, 최선을 다해주세요...
뭔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
김군은 의사 선생님의 검시가 끝나면 몇 명과 같이 이 애를 그 냉동고에
날라주게... 냉동고에 이제 자리가 없겠군...
제기랄...."

너무 길어서 다시수정... 다음편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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