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집 이어서 2부-4...

똥싸다실종 작성일 07.01.19 19:15:59
댓글 0조회 896추천 1
냉동고여서 그런지 서늘한 기운이 안으로부터 느껴졌다.
발밑에는 아까 본 시체의 팔이 어둠속에서 기분나쁘게 나와있었다.
뭔가가 갑자기 튀어나올 것 같아 비를 맞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총을 겨
누고 있었다.
한참을 긴장한 채로 경계하고 있었으나 어둠속에는 아무런 기척이 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들어 가기로 결심했다. 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그냥 여기서 분교로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치밀었다. 공포로 인한 강렬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차가운 빗물이 얼굴에 떨어지는 것이 느껴지자 부끄
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이 순경을 저 안에 버려둔 채로 여기서 도망갈 수
는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 암흑속으로 발을 들여났다.
방아쇠에 손을 건채로 뭔가 움직이기만 하면 쏠 생각이었다.
창고안에 들어서자 마자, 쾌쾌한 냄새와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뼈속까
지 그 싸늘함이 스며들었다.
손전등으로 창고안을 비추어보았다.
문턱에 놓여있는 팔의 주인을 보기 위해 밑으로 비춰보았다.
그것을 보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 팔은 잘려진 채로 거기에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눈을 들어, 창고안을 살펴 보았다.
한구석에는 냉동고를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어름덩어리들
이 반쯤 녹은채로 놓여있었다. 그리고 사방에는 소고기나 돼지고기로 보
이는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걸려있는 고기 때문
에 작은 창고인데도 불구하고 사방을 살펴보기가 힘들었다.
왼쪽 구석에는 쌀푸대로 싸인 덩어리가 몇 개 쌓여 있었다. 시체들을 거
기다 쌓아 놓은 것 같았다. 잔인하게 살해되었던 시체들을 생각하니 등골
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이 순경의 시체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갈고리에 매달려 있는 고
깃 덩어리를 하나씩 밀치며 창고안으로 더욱 들어가 보았다. 자꾸 어디선
가 무엇인가가 나를 쳐다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덮칠 것 같기도 했다.
바닥은 핏물이 여기저기에서 흐르고 있었다.
온 몸이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총을 쥔 손이 나도 모르게 덜덜 떨려왔다.
갑자기 뭔가가 걸렸다.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놀랐다.
또 하나의 팔이 잘려나간 채로 떨어져있는 것 같았다.
누구의 팔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 팔 근처에 칼빈 총이 피묻은 채로 떨
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순경이 들고들어간 그 총같았다.
이 순경에 대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고깃 덩어리를 하나씩 밀쳐나가다가 나는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순경이 피투성이가 되어, 고기 매다는 갈고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역시 팔은 한 쪽 떨어져 나가 있었다.
쾡하게 떠있는 눈은 겁에 질려 있었고, 명치 부근에는 등에서 박힌 갈고
리의 끝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런 끔찍한 모습을 보고 나는 두려움으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머리속에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이 순경이 여기 이렇게 죽어있다면, 그 미치광이 살인마는 아직도 이 창
고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였다.
뭔가가 갑자기 옆에서 튀어나와 나를 덮쳤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전 등을 든 손으로 그것을 막았다.
하지만, 나는 큰 충격을 받으며 뒤로 나가 떨어지고, 손전등은 땅에 떨어
지면서 불빛이 꺼졌다.
사방은 순식간에 암흑천지가 되었다.
나는 자세도 바로 잡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무턱대
고 방아쇠를 당겼다.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총소리와 함께, 총구에서 불이 번뜩였다.
총구에서 불이 번쩍일때마다, 짧은 순간이나마 창고안이 보였다.
낫을 든 그림자가 나를 향해 달려들다가 총을 맞는 것이 순간순간 보였
다. 하지만 총을 맞은 그것은 쓰러지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향해 더욱 가
까이 오는 것이었다.
겁에 질린 나는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순간 번쩍이는 빛에 보
이는 그 놈은 총이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총알을 다 떨어지고, 방아쇠를 당겨도 총은 찰칵하는 소리만 냈
다. 그 놈은 계속해서 내게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총을 뒤집어 들었다. 달구어진 총열을 집어서, 손바닥이
타는 것 같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앞에 그 놈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있는 힘을 다하여 개머리판을 휘
둘렀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를 정확히 가격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있는 힘을 다해 그 것을 향해 총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뭔가가 으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유모를 쾌감과 승리
감을 느꼈다. 다시 한 번 총을 머리위롤 들어올려 도끼를 찍듯이 내려쳤
다. 하지만 이번에는 총이 허공을 갈랐다. 게머리판은 시멘트 바닥을 내려
쳤다. 손에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한번 총을 들고 사방을 경계했다.
주위는 완전한 암흑이었고, 내 가쁜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어떤 소리도 들
리지 않았다. 사방 어디서 그 놈이 덮칠지 몰라, 계속해서 총을 사방으로
휘둘러 되었다.
몇번은 허공을 갈랐고, 몇번은 뭔가를 후려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수십번을 휘두르고 나니, 금새 힘이 빠졌
다. 더 이상 휘두를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나는 헉헉거리며 뒷걸음질 쳐서
벽에 기대었다.
힘이 빠져 벽에 기대어 서있기도 힘들었다.
그때였다.
끼이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쿵하는 소리가 문쪽에서 들려왔다.
그리고는 문고리를 거는 것 같은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어떤 일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문을 잠그는 것 같았다. 그것이 떠올려지자 나는 필사적
으로 문으로 뛰어갔다.
아무것도 안보였기 때문에, 메달려 있는 고깃덩어리에 계속해서 부딪혔다.
더듬어 더듬어 간신히 문에 도착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들어올 때
활짝 열려있던 문이 잠겨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창고문을 걸어잠근 것이
다. 누가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정씨 식구들과 경규씨는 죽어
있었는데...
아무리 열라고 했지만, 문고리 자체가 밖에 있는 문이어서 안에는 손잡이
밖에 없어 열 수가 없었다.
몇번을 문을 차고 소리쳤지만, 문은 열릴 생각을 안했다.
문을 두드리고 있으려니, 뒤에서 그 놈이 나와 나를 덮칠 것 같았다.
이런 끔찍한 창고안에 그 살인광과 같이 갖혀있다는 생각이 들자, 너무
무서워졌다.
아무리 어둠에 눈이 익었다고 하지만, 사방이 밀폐되고 한 점의 빛이 없
는 창고안은 암흑 그 자체였다.
나는 가만히 벽을 더듬으면서 자리를 이동했다.
가만히 있다간 어디서 그 놈이 나를 난도질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놈역시 이런 어둠에서는 나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를 바랬다.
그 놈이 사람이라면 나처럼 안 보일 것이지만, 만약 아니라면....
생각마저 무서웠다.
최대한 아무 소리도 안 내고 벽을 타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 놈도 온갖 신경을 곤두선채로 나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죽고
싶을 정도로 두려웠다. 더구나 이 창고안에는 끔찍하게 살해된 시체들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 마저 생각나자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잠시나마 가만히 있다가는 공포에 미쳐버릴 것만 같
았다. 이런 암흑 지옥에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아까 떨어뜨리면서 꺼
진 손전등이었다.
천천히 벽을 더듬아 아까 내가 있던 장소로 가보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어두워서 어디가 어디인지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어 바닥에 없드려 조심스러게 바닥을 더듬어 갔다.
피인지 물인지 모를 액체들이 바닥에서 만져졌다. 피라고 생각하니 구역
질까지 났다. 하지만 참아야했다.
몇번을 더듬다 보니, 뭔가 차가운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것이 뭔가인가 깨달았을때는 소름이 쫙 끼쳤다.
바로 아까 본 이 순경의 떨어져나간 팔을 더듬은 것이었다.
무서움으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손전등이 이 근처에 떨어져있을 것 같아 앞으로 나갔다.
잠시 후 손전등같은 것이 손에 잡혔다.
나는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허겁지겁 손전등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면서, 손전등을 켰다.
한손에는 무겁고 총알도 떨어졌지만 칼빈을, 다른 한손에는 방금 찾은 손
전등을 들었다.
갑작스럽게 빛이 비추어지자, 눈이 부시면서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빛에 비친 창고 안이 보였다.
나는 긴장과 두려움을 가지고 창고안을 두루두루 비쳐보았다. 하지만 이
상하게도 나를 덮친 그 놈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혹시 어디서 튀어나
올지 몰라, 총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온 신경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매달린 고기덩어리들을 헤치며 그 놈을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 놈을 찾아봤자 내가 가진 무기는 빈 칼빈 총밖에 없어서 별로 대
적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손전등으로 여기저기 비추어 보았지만, 그 놈은 보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 놈이 보이지 않자,
구석에 쌓여있는 시체들의 푸대에 눈이 갔다.
핏물이 흘러나와 시뻘겋게 물들어 있는 푸대들을 보니, 다시 한 번 두려
움이 느껴졌다. 잔인하게 살해된 시체들과 함께 갇히다니 괜히 무서워졌
다. 머리속이 두려움과 혼란함으로 가득찼다.
아직도 창고 구석 어디선가 그 살인마가 나를 노리고 있을 것 같았다.
냉동고의 서늘함 때문인지, 뼈속까지 싸늘한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순간, 뭔가가 천정에서 나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천장으로 손전등을 비추어보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푸대 속에 들어있어야 할 시체들이, 마치 박쥐처럼 천정에 거꾸로 매달려
나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재원이가 편지에 썼던 그 버려진 집에서 봤다
던 그 장면과 똑같았다. 그 시체들은 쾡한 눈으로 나를 노려 보고 있었다.
언제든지 밑으로 내려올 것 같았다. 그 시체들은 살아있는 것 같았다.
정수리에 낫이 박혀 죽은 무당하며, 목에 상처가 있는 시체, 팔이 잘려나
간 소년의 시체등등.. 여기에 놓은 시체들이 다 보였다.
소름이 쫙 끼쳤다.
그런데 내가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그 매달려 있는 시체가운데 재원이
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떨면서 그쪽으로 비춰보았는데, 분명히 재원이였
다. 기괴한 눈빛을 하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재원이의 눈을 보니, 온 몸이 공포로 마비되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그 시체들의 눈길은 계속해서 나를 쫓아오는 것 같았다.
뒷걸음치다가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져 손전 등을 놓쳤다.
나는 필사적으로 손전등을 잡은 다음, 일어나려고 했다.
그 순간 손전등에 내가 걸려 넘어진 것이 비춰졌다.
비춰진 것을 본 순간, 나는 머리속이 강한 충격으로 멍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반쯤 썩어있는 재원이의 시체였다....

...내가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불빛에 비친 것은 분명히 재원이의 반쯤 썩어있는 시체였다.
흉칙하게 상해 있어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틀림없는 재원이의 얼굴이었
다. 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앉은채로 뒤로 물러났다.
친구가 죽어있다는 것에 슬픔이 느껴지기는커녕, 공포와 구역질이 느껴졌
다. 그 썩은 재원이의 시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나를 덮칠 것만 같았
다.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가며 손전등으로 천장을 비추어 봤다.
그런데 아까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보이던 거꾸러 매달린 시체들이 온데간
데 없었다. 눈을 깜빡거리며 내가 잘 못봤나하고 다시 한 번 뚫어지게 보
았지만, 그 시체들은 감쪽같이 사라져있었다.
미친 듯이 창고 안에 손전등으로 비춰보았지만, 그 시체들은 보이지 않았
다. 시체를 쌓아둔 푸대더미도 아까 그 모양 그대로 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재원의 시체로 다시 눈을 돌렸다.
재원의 시체는 다행스럽게(?)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둠 속에서 그 놈이 튀어나올 것을 경계하며
천천히 재원이 시체쪽으로 다가갔다.
불빛에 비친 재원의 얼굴은 흉칙하게 부패되어 있었다.
의학지식이 없는 나로써도, 재원이 죽은지는 적어도 며칠 된 것처럼 보였
다. 가슴 부위에 길게 상처가 나 있는 것을 보니, 그 놈이 낫을 이용해 가
슴을 내리친 것 같았다. 그 시체를 보니 이제까지 품아왔던 재원에 대한
의심은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말도 안되는 얘기여서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사실 내 마음 깊은 곳에
서는 재원이가 이번 사건의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
만 재원이가 알지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리는 없
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까지 알게 된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 분명히 이성적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추리지만 - 재원이 미쳐서 이런 살인을 저지르던가, 아니
면 재원이 원한을 가진 뭔가에 의해 조정을 받아 이런 일들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왔다. 얘기는 안했지만, 김반장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
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재원도 희생자중 하나가 되어 발견된 것이었다.
머리속이 온통 복잡해졌다. 무엇을 어떻해 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없었다.
심호흡을 여러번 한 다음에 최대한 생각에 집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눈앞에 널부러져있는 끔찍한 재원이의 시체와, 어디서 튀어나올
지 모르는 그 놈에 대한 공포, 저쪽 구석에 놓여있는 시체 더미와 천장에
보였던 귀신들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두려움으로 미칠 것 같았다.
자꾸 괴물의 울부짓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람이 극도의 공포심으로 미칠 수 있다는 것이 남의 얘기 같지가 않게
되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벽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뜨고 있던 감
고 있던 그 놈이 나를 죽이려고 하면, 당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어디서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 같아 극도로 긴장되고 불안해졌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미쳐버
릴 것 같았다. 심호흡을 여러번 하면서 마음속에서 난리를 치고 있는 공
포를 없애려 했다. 마음을 비우려고 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약간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우선 여기서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
문은 밖에서 잠겨 있고, 냉동고라 그런지 창문은 아예 없는 것 같았다.
결국 출입구는 굳게 닫힌 문밖에 없었다.
그 문을 열어야지만, 이 창고안에는 도구라곤 얼음찝게와 고기 매다는 갈
고리 뿐인 것 같았다.그것을 이용헤서 문을 내려쳐봤자, 철문은 꿈쩍도
안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재원의 썩은 시체가 갑자기 빨개지는 것이었다.
손전등 불빛 때문에 잘못 본 것 아닌가했지만, 분명히 재원이의 시체가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재원의 몸이 확하면서 타오르는 것이었다.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재원의 시체가 아무런 이유없이 자연발화를 한 것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 불은 마치 살아있는 불처럼 순식간에 창고안으로 옮겨 붙고 있었다.
잘 탈 것 같지도 않은 고기덩어리에도 불이 붙었다.
불붙는 소리였는지 모르지만, 문 밖에서 기분나쁜 괴성이 들려오는 것 같
았다.
불이 난지 몇초도 않 지난 것 같은데, 순식간에 창고안으로 번졌다.
불길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표효하며 내 쪽을 향해 맹렬히 타올랐다.
열기에 머리가 그을리고, 살이 타는 것 같았다.
사람고기인지 동물고기인지 고기타는 냄새가 창고안을 가득 매웠다. 독한
연기로 눈이 따갑고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불길은 점점 거세져서 발디딜틈없이 창고안을 태우고 있었다.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여기서 잠시 지체하다간 꼼짝없이 타 죽을 것 같았다.
온 몸이 불에 대었는지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뜨겁고 독한 연기 때
문에 얼굴을 들 수도 없었다.
그 순간 저기 불길사이로 피묻은 칼빈 총이 보였다.
그 총은 경규씨가 가지고 있던 총으로 이 순경이 이 창고로 끌려올 때 들
고 왔던 총이었다. 이 순경이 몇발을 쐈겠지만, 어쩌면 그 총에 몇발의 총
알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생각으로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그 총을 잡았다.
달구어질대로 달구어진 총을 잡으니, 손바닥이 지지직하고 타버렸다.
고통스러웠지만, 살기 위해선 참아야 했다.
불길은 내 옷가지에 옮겨붙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뜨거운 총을 들고 미친 듯이 문쪽으로 달렸다.
바지에 불이 붙은 것은 개의치 않았다.
굳게 잠겨 있는 문앞에 서서, 문고리가 있을만한 곳을 향해 방아쇠를 당
겼다.
"철컥! 철컥!"
총알이 없는 지 빈 방아쇠만 당겨졌다.
죽음과 같은 절망감이 느껴졌다. 바지에 붙은 불은 더욱 거세졌다.
온 몸이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제는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서을 정도로 맹렬한 불길너머로 뭔가가 보였다.
나는 바지가 타는 것도 모른채, 그 뭔가를 무엇에 홀린것처럼 바라보았다.
불길너머에는 아까 천장에서 본 시체들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었다.
문 밖으로 나가려고 발버둥치는 나를 비웃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소름이 쫙 끼쳤다.
불도 불이지만, 정말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경괘한 소리와 함께 총알이 발사되었다. 나는 연속으로 문고리를 향해 총
을 쐈다. 몇발이 나간 후 온몸을 문으로 던졌다.
어깨에 큰 충격이 느껴지며, 나는 문과 함께 밖으로넘어졌다.
처음 느낀 기분은 시원함이었다. 억수같이 퍼붓던 비로 몸에 붙었던 불은
삽시간에 꺼졌다. 갑자기 산소가 페로 몰려들어와서 그런지 기침이 계속
나왔다. 땅바닥에 나동그라지는 바람에 온 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단지 빗물의 차가움과 숨을 마음껏 내쉴수 있다는데 무한
한 쾌감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생명이라는 것이 이렇게 값진 것인지
창고의 불은 활활 타오르며, 나를 집어삼킬 기세로 문밖으로 번지려 했지
만, 퍼붓는 비때문인지 창고안만 태우고 있었다.
한동안 엎드려서가쁜 숨을 내 쉬었다.
잠시 후 정신을 추수릴 수 있었다.
창고안은 여전히 시체와 고기들을 태우고 있었고, 그 불에 비쳐 보이는
마당 바닥에는 정씨네 집에서 흘러내려오는 핏물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 내가 처해진 현실이 생각났다.
한시바삐 분교로 돌아가야 했다. 그 살인마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도
모르고, 무엇이 나를 덮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니 온몸에 통증이 느껴졌다. 온 몸을 살펴보니 만신창
이가 되어 있었다. 바지는 무릎까지 타 버렸고, 손바닥을 비롯해 온 몸에
크고 작은 화상을 입었다. 차가운 빗물이 닿자 상처들은 더욱 쓰라렸다.
하지만 그 쓰라린 고통이 머리를 더욱 맑게 해주는 것 같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나는 우선 정씨 가족이 몰살되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 그 방에 들어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지만, 쓸만한 손전등은 그 방에서
이 순경과 경규씨가 떨어트린 것 밖에 없었다.
움직일 때마다의 고통으로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신음소리가 났다.
간신히 그 방에 도달한 나는 아직도 주인을 잃은채 켜져있는 손전 등을
하나 집어들었다. 방안에는 이 순경이 떨어트린 것으로보이는 손전등이
벽을 비치고 있었다. 그 벽에는 아까 본 글씨가 써 있는 것이었다.

'....나를....죽여줘.....제발.....끝이....없어....'

그런데 아까 발견 못한 이상한 점이 그 글에서 보였다. 자세히 손전등으
로 비춰보니 글씨체가 다르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를 죽여줘'와 '제발'의 필체는 같아 보였고, '끝이 없어'의 필체는 달라
보였다. 피로 쓴 것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이 쓴 것 같이 보
였다. 나는 더욱 자세히 보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다시한번 살육의 장소
로 들어갔다. 이 순경이 떨어뜨린 손전등마저 줏어들어 두 개를 비추어
가며 글씨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피가 흘러내려 지워진 글씨가 몇 개가 보였다. 피가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바람에 글씨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한참을 뚫어지게 보니 대충 무슨 글짜인지 알 수
있었다.
'...안...돼...' '원...한...'
이 두 단어 였다. 그런데 이 두 단어의 필체는 같아 보였다. 혹시나 하고
먼저 발견된 문장의 필체와 비교를 해보니, 일치하는 것이 보였다.
바로 '나를 죽여줘'와 '제발'은 같은 사람이 쓴 것이고, '안돼' '원한' '끝이
없어'는 다른 한사람이 쓴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이 다른 필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생각하다 그 문장의 의미를 알아차렸을 때 충격을 느낄 수 밖에 없
었다.
필체가 다른 것을 사이사이 배열해 보았다. 마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
는 것처럼.. 그랫더닌 이런 말이 되었다.

'나를 죽여줘...'
'안돼...'
'제발...'
'원한.. 끝이 없어...'

필체뿐만 아니라 내용도 완전히 두 인격체의 대화 같았다. 하지만 그 대
화속에 담긴 의미는 알 수 없었다. 한참을 보고 있다보니, 무엇인가가 뒤
에서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잊고 있던 두려움이 느껴졌다. 얼른 그 피바다의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한손에 총을, 다른 한손에는 손전등을 들고 분교로 뛰기 시작했
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 집을 피범벅으로 만들어 놓고, 이 순경과 경규씨를 난도질한
그 놈이 갈 곳은 한 곳밖에 없을 것 같았다.
바로 모두가 모여있는 분교를 덮칠 것 같았다. 분교에는 김반장과 많은
사람이 있어 안전할 수도 있지만, 아까 창고에서 불이 난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면 큰 일이었다.
빗가 오는 밤길을 양손에 뭔가를 들고 뛰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엉망이 된 몸을 가지고는 더욱 힘들었다.
뛰어가면서 이번 사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이성과 과학이라는 선입견을 배제하고, 인과관계 하나만 가지고 생
각해 보면 오히려 간단해 보일 수도 있었다.
일제 시대때 마을사람들에 의해 잔인하게 몰살당한 가족이 있었다.
그 원한을 가진채로 죽은 사람이 원귀가 되어, 사람속으로 들어와 살인을
저질렀다. 그 살인의 매개체가 된 것이 바로 재원이었고...
아주 간단한 가정이었다.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하지만, 이 에는 악귀가 사람에 빙의된다는 말도 안되는 가정은 차제로
한다고 하더라도, 원한에 의한 살인이라면 틀린 점이 발견되었다.
희생자들만 보더라도 이상했다. 자기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을 응징한다고
한다면, 그 사건과 전혀 관계없이 살해당한 사람은 누가 죽인것일까?
거기에는 중학생도 끼어 있었다. 심지어는 겨우 몇 년전에 이 마을로 이
사온 사람들도 희생자에 끼여있었던 것이었다.
그 희생자들의 공통점은 단지 이 마을에 현재 고립되어 있다는 것 밖에
없었다. 결국 그 살인마는 그 버려진 집과 아무런 관련 없이 닥치는 대로
죽있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무당도 그렇고, 우리에게 버려진 집에 얽
힌 얘기를 해준 그 어르신도 그렇고 뭔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살해당했
다. 그런데 심증적 용의자였던 재원이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타 버리고...
그러면 정화씨가 본 그 놈은 도대체 누구였고....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머리 속을 어지럽게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밤길을 달리다 보니, 여러번 미끄러져 흙탕물에 쳐박혔
다. 점점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아까 올때는 그 놈이 어둠속에서 우리를 덮칠까봐 겁이 났었지만, 지금은
그 놈에 대한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욱 강하게 느껴져서 별로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웬일인지 그 놈은 이미 그 분교로 향했고, 나 자신
은 그 놈을 쫓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올때는 그렇게 길게 느껴지던 길이, 혼자서 뭔가에 홀린 듯이 뛰어오니
분교까지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저 멀리 분교의 희미한 빛이 보이자, 갑자기 긴장이 풀리며 온 몸에 피로
감이 느껴졌다. 허파가 터질듯해서 더 이상 뛸수도 없었다.
거세게 내리던 비는 어느새 좀 약해졌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희미하지만 분교의 불빛을 보자, 이유모를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과 함께, 바로 얼마전에 있었던 정씨집에서의 지옥
은 먼 옛날 얘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정씨네 집의 일을 생각해보니, 갈
때는 세명이었는데, 혼자 살아온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느껴졌
다. 긴장이 풀어지자 온 몸에 난 상처들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천천히 분교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그때였다.
분교에서 처절하고 ㅉ어질듯한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총소리가 메아리쳤다.
불길한 얘감이 들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그 비명소리 때문인지 분교안에서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나오자 마자 분교
뒤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분교 뒤쪽에서 난 비명 같았다.
나는 죽어라 하고 뛰어 갔다. 천천히 걷다가 뛰니까 더욱 힘이 들었다.
간신히 분교에 도착해서, 건물뒤로 헉헉거리며 뛰어갔다.
분교 뒷 뜰에는 스무명이 넘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나는 심할 정도로 불길한 예감을 억제할 수 없어 모여있는 사람들을 거칠
게 밀치고, 중앙으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무슨 이유인지 겁에 질려 있었다. 거기다 나의 처참
한 모습을 보고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참담해졌다.
중앙에 가니, 김반장이 보였다.
나는 김반장을 보고 무슨 일인가 물어보려고 했다.
김반장은 나를 보자, 재빠르게 나의 앞을 가로막고 더 이상 접근하지 못
하게 했다. 내가 그를 안 이래로 그렇게, 냉정하던 김반장이 그렇게 처참
한 표정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을 보니 무슨 일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반장님, 도대체 무슨 일이죠?
왜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죠?"
"일한씨, 우선 내 얘기부터 들어봐!
좀 진정하고 얘기하세...
그건 그렇고, 이 몰골은 어떻게 된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정씨네 가족들은?"

나는 그 질문을 받으니 정신이 퍼뜩 났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고 정씨네에
서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말해주었다. 같이 갔던 이 순경과 경규씨 그
리고 정씨네 가족들은 그 놈 손에 처참하게 죽어갔다는 것과 그 집 고깃
간에서 내 친구 재원의 시체를 발견했으나, 모두 타 없어졌다는 것까지
얘기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깊은 절망이 느끼는 것 같았다. 자기들도 곧 살해될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얘기를 듣고 김반장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게 다시한번 물어보았다.

"일한씨, 그 창고에서 발견된 그 시체가 분명히 친구 재원씨가
확실한가요? 어둡거나 무서워서 잘 못 본 것은 아닐까요?"
"아니요.. 확실합니다. 아무리 무서워도 제가 본 것은
바로 재원이 그 친구의 반쯤 썩은 시체 맞습니다..
왜 그것을 자꾸 물어보는 것이지요?"

내 질문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나를 외면했다. 김반장마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바보라도 이 상황이면,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불안함을 느끼며 김반장을 다그쳤다.

"반장님!
분명히 무슨 일이 있는 것이죠?
얘기해 주세요... 무슨 일이예요?"

김반장은 나의 질문에 어렵게 입을 땠다. 평소의 침착한 김반장 답지 않
게 더듬거리며 얘기를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충격으로 무너지듯 바
닥에 쓰러졌다.

"저... 일한씨... 모든 것이 제 잘못이예요....
죄송합니다.....
좀더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휴...
조금 전에 여기서 정화씨가 살해당했습니다.
그 놈에게요...
저는 여기 왔을때는 이미 그 놈의 낫이 정화씨를 난도질하고 있었어요.
제기랄!
그 놈은 저를 보고, 정화씨를 팽개치고 순식간에 저 어둠속으로 사라졌
어요. 총을 쐈지만, 그 놈은 다시 한번 유유히 사라졌어요..
미안해요.. 정화씨가 이렇게 된 것....
그런데 정화씨가 죽기 전에 그 놈보고 하던 외침을 제가 들었어요..
간절한 애원이었죠..
정화씨는 자기를 낫으로 내려치려는 그 놈을 보고 이렇게 소리쳤어요.

'재원씨!
제발! 이제 제발 그만해요!!
재원씨!!!!!'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재원씨라고 처철하게 외치던 정화씨의 목소리를...."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땅바닥에 주저 앉은 채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정화씨가 죽다니...
재원이를 걱정해서, 고생고생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죽다니...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만류하는 김반장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며 정화
씨 시체를 보러 갔다. 피투성이가 된 정화씨의 얼굴을 보니, 더 이상 쳐다
볼 수 없었다.
모두 내 책임 같았다.
이제 까지는 이 마을 사람들이 희생자였다. 엄격히 따지면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던 사람들이 죽어나간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경우였다.바로 내 옆에 있던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것도 친구의 여자 친구가....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분노, 슬픔, 절망, 공포, 증오...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뭘 어떻해 해야 하는 걸까...
나는 간신히 정신을 추스리고, 김반장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냐고 힘
겹게 물어보았다.

"휴... 다 내 잘못이라네...
내 잘못...
일한씨 일행이 출발하고 나서, 우리는 분교 안에다가 남자 5명씩 한조가
되어 1시간씩 불침번을 서기로 했어요. 혹시 미친 살인마가 여기를 덮칠
지도 몰랐으니까... 그렇게 대비를 해놓고, 나머지 사람들과 아녀자들을
안심시켜 놓고 잠을 자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정화씨의 행동이 좀 이상했어요.
그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정화씨는 이상하게 잠을 잘 생각을 하지 않고, 안절부절 하는 것이였어
요..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아요..
저는 일한씨를 걱정해 주고 있는 줄 알았아요.
아무일 없을 거라며 위로했지만, 정화씨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창밖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어요.. 일한씨를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정화씨가 나를 올려다 보며 이상한 질문을 했어요..

'반장님, 만약 살인범을 잡으면 어떡하실거죠?
혹시 그 자리에서 죽이시지 않겠죠?'

그 질문이 좀 이상했지만, 나는 솔직이 대답해줬어요..

'나는 겅찰의 입장으로써, 그 놈을 잡아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의무죠... 하지만, 이렇게 고립된 상태에서 그 놈을 잡게되면, 희생자의
가족들이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경찰은 나와 이 순경 둘밖에 없으니 분노한 마을 사람들을 막을 수 있
을지... 자신 없네요..
하지만, 경찰로써 저는 그 살인범을 잡을 수 있으면 잡아서 법대로
처리할 것입니다. 보나마나 이 정도면 사형이 뻔하지만...
잡을 수 없다면, 죽이기라도 해야줘... 그 위험한 놈은...'

내 대답에 정화씨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어요.
뭔가 굳은 결심을 한 사람처럼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것을 보았지만, 나
는 대소롭지 않게 생각했죠. 그리곤 정화씨 곁을 떠나 불침번 서는 마을
사람들을 살피려 교실을 나갔어요. 교실을 나갈 때 정화씨를 돌아보니
그때까지도 무엇에 홀린 듯이 창문을 뚫어지게 보는 것이였어요..
좀 이상한 예감이 들었지만, 무시했어요..
그리고는 정화씨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서는 잊고, 불침번 서는 마을 청
년들을 점검하며 담베를 피우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죠....
10분정도 되었나...
나는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교실쪽으로 돌아왔어요.
교실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바닥에 누워 뒤척이며 잠을 청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창가에 있던 정화씨가 보이지 않는 것이였어요..
나는 문앞을 지키던 청년에게 정화씨에 대해 물어보았어요.
화장실 갔다는 거예요.. 한 5분쯤 전에..
내가 바로 화장실에서 나왔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요.
다급하게 분교밖으로 뛰어 나왔어요.
그런데 뒷 뜰에서 비명소리가 났고, 그 쪽으로 뛰어갔지만 아까 말한 것
처럼 너무 늦었던 거예요..."

김반장의 말을 듣고보니, 정화씨의 행동에는 이해하기에 석연치 않은 구
석이 너무 많았다. 분명히 정화씨는 자발적으로 그 살인마를 만나러 갔다
가 살해당한 것이다.
그런데... 김반장의 말로는 정화씨가 죽어가며 말한 이름은 재원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까 내가 본 시체도 분명히 재원이었다.
알 수 없었다.
내가 전해준 소식을 듣고 경규씨의 가족들이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분위기와 함께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번져갔다.
몇몇 마을 사람들이 정화씨 시체를 부대로 싸서 치워버렸다.
그 모습을 보니, 두려움과 슬픔보다는 그 살인마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오
르기 시작했다. 김반장도 정화씨와 자기 아랫사람인 이 순경을 잃은 것을
용남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침착하던 사람이 비를 맞으면서도 담배를 물고 연신 성냥불을 부
치려 하고 있다.
다행히 이장님이 나서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어느새 뒤 뜰에는 나와 김반장만이 비를 맞고 서 있게 되었다.
우리 둘은 아무말 없이 떨어지는 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안에서 정화씨를 간호해 주었던 아주머니가 나오더니 내게 쪽지
하나를 건네 주었다.

"아까 그 불쌍한 처녀가 학생 돌아오면 주라고 남긴 것 같아요.
잠이 들어 몰랐는데, 내 머리맡에 남겨 두었더라고요..."

그 얘기에 나도, 김반장도 최면에 깨어난 사람들처럼 눈이 빛났다.
접힌 종이에는 내 이름이 써있었다. 정화씨의 유서인 셈이었다.
나는 그 쪽지를 들고 분교안으로 들어왔다.
촛불 밑에서 정화씨가 남긴 글을 읽기시작했다.

<일한씨에게..
일한씨가 만약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저는 죽어있겠네요..
혹시 일한씨도 이 글을 못 읽게 된다면, 김반장님이 이 쪽지를 읽고있겠
죠.. 제발 일한씨가 무사히 돌아와 이 글을 읽기를 바랍니다.
일한씨...
그 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철없이 따라온 저에게 신경쓰느라고 힘드셨죠..
제게는 이 모든 일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무섭고 괴로운 일들의 연속이
었어요.. 처음에는 재원씨를 찾으러 왔을 뿐인데...
우선 일한씨와 김반장님께 사죄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거짓말 하게 된 것에 대해서요..
사실 오늘 저는 그 집에서 살인범을 봤습니다.
피 묻은 낫을 든 재원씨였어요..
처음 봤을 때, 그 광기어린 눈빛과 무시무시한 표정 때문에 재원씨가 아
닌 줄 알았어요. 하지만 재원씨가 맞았어요.
재원씨는 정신 이상이 있는지, 처음에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낫으로
내려치려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비명을 지르자, 가만히 나를 보더니
치켜든 낫을 내려놓았어요. 나는 계속해서 정신차리라고 절규했죠..
재원씨는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잡고 괴로워했어요.
그러더니 땅바닦에 무릎을 꿇고 괴로워하면서, 간신히 한마디 던졌어요.
목소리가 너무 음산해 딴 사람이 말하는 것 같았어요.

'오늘.. 밤에... 보자.... 어디까지도....찾아간...다......'

그러더니 괴성을 질러대는 것이였어요. 나는 무릎을 꿇고 있는 재원씨를
흔들면서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애원했어요.
그러나 방안으로 나를 무시무시한 힘으로 확 던져 버렸어요..
그리고는 기절한 것 같았아요.
정신차린 다음에 일한씨와 반장님이 내가 본 것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재원씨를 봤다고 솔직이 대답할 수 없었어요. 솔직이 말하면 재원씨를 살
려둘 것 같지 않았아요..
그리고 내가 아는 재원씨는 그런 살인을 저지르고 다닐 사람이 절대 아니
예요... 분명히 무슨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제가 재원씨를 만난다면, 설득해 볼 생각이예요...
예전에도 재원씨는 내 말은 잘 들어줬거든요...
무서워요...
하지만, 이 일은 제가 해야 할 일 같아요...
저기 재원씨가 온 것 같네요...
모든 일이 잘 되어 이 메모가 필요 없어지길 바랍니다.
일한씨,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제게 무슨 일이 나더라도, 재원씨를 끝까지 믿어주세요.....
그럼...>

결국 이 모든 살인을 저지른 것은재원이였단 것인가...
내가 본 재원의 시체는 무엇이고...
머리속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솔직이 생각하기도 싫어졌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그 놈이 재원이라면, 반드시 내가 만
나야 할 것 같았다. 진실이 얼마나 두려운 것이라고 해도, 나는 그 진실을
받아 들여야 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김반장에게 그 쪽지를 건넸다.
김반장은 그것을 읽어보더니, 한 숨을 내쉬며 한마디 했다.

"결국 재원이라는 친구가 범인이구뇨...
그런데 왜 이 마을과 관계도 없는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것일까....
휴.... 이제 선택하는 것 밖에 안 남았군...."
"선택이라뇨? 무슨 선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김반장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담담한 어조로 그 선택에 대해
말해 주었다.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죠.
하나는 이 분교에서 구조가 올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빗줄기도 약해진 걸 보니, 내일 날이 밝으면 본격적인 구조활동이 시작
될 것 같네요.. 헬기라도 올 것 같으니.. 그러니,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일단 접고 있다고, 홍수가 끝난 다음에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는 것이죠.
그때까지 그 살인마가 여기를 습격하지 않길 바라고, 또한 이 마을에서
사라지지 않길 바라는 것 뿐이죠...
다른 하나의 선택은....
그 놈을 찾아 잡던지, 죽이는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이고, 위험해 보이고, 아마 아무도 지원자가 없을 것 같네요..
그렇지만, 앉아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방법이지요...
그리고 사건을 우리 손으로 마무리 지울 수 있다는 것이죠...
필요없는 것은 덮을 수 있고...."

나는 김반장의 얘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범인은 내 친구인 재원이였다. 그런데 이 상
황에서 고립이 풀리고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펼쳐지면,
마을에 얽힌 얘기는 모두 밝혀지고, 이 마을은 글자 그대로 유령마을이
될 판이었다. 누가 이렇게 끔직한 살인이 일어난 곳에서 살것이며 이사올
것인가... 그 이후에 벌어질 엄청난 일들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김반장
은 자기 마을이 그런 식으로 몰락하는 것을 막고 싶은 것이었다. 또한 살
인마에 대한 김반장의 증오는 이제 한계에 다달은 것 같다. 경찰의 의무
라기 보다는 살인범에 대한 심판을 내리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나의 생각은 달랐다. 이 마을의 장래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
았다. 또한 살인범에 대한 심판도 재원이라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한 다
음에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직 살인마로 돌변해 자기 여자친구마저 죽여버린 재원이를 꼭 만나야
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놈이 진짜 재원인지.. 재원이라면 왜 그
지경까지 갔는지...
끝 마무리는 내가 하고 싶었다.
결심을 굳힌 나는 김반장에게 내 결심을 말했다.

"저라면 두 번째 선택을 택하겠습니다.
저 혼자라도 그 놈을 쫓아 지옥 끝까지 가서라도 그 놈의 얼굴을 내 눈
으로 똑똑히 봐야 겠습니다."

김반장은 흥분한 나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한 마디 했다.

"목적은 다르지만, 나도 일한씨와 같은 선택을 하겠소..
나는 이제까지 그 놈을 범인으로 생각했소..
그러나 이제부터는 악마로 규정할 생각이오.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하는...."

나는 김반장의 그런 반응이 이외였다. 단지 마을의 장래를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김반장은 자기 부하를 자식 보다 더 아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명령을 받아 수행한 이 순경이 그렇게 끔찍하게 살
해당한 것에 대한 비이성적인 복수심이 발동한 것이다.
김반장은 냉정하게 나보고 간단히라도 상처 좀 치료하라고 했다.
거절했으나, 김반장은 단호한 목소리로 자기도 준비할 것이 있으니 그 동
안 치료하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치료를 받았다. 치료를 해주던 보건의는 내 상처들을 보고
좀 심한 편인지 한숨을 내쉬었다.
치료가 끝나갈 쯤에, 김반장이 들어왔다.

"일한씨, 치료가 끝나면 그 놈을 잡으러 출발하죠...
대충 필요한 것은 다 준비되었으니까...."

김반장은 이장을 설득해, 이장이 이 분교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책임지기
로 했다. 김반장은 분교 주변의 불침번을 8명으로 늘리고, 무슨 일이 있어
도 오늘 밤만은 아무도 분교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공언했다.
마을 사람들은 김반장이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불안해 왔지만, 김반장 대
신 그 놈을 잡으러 나가기 보다는 분교안에 남아 있는 것이 휠씬 좋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김반장은 묵직한 배낭 두 개를 준비했다.
하나는 내게 내밀었다.
나는 뭐가 들었냐고 물었다. 김반장은 짧게 대답했다.

"기름"

기름이 뭐에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하긴 그 놈을 잡으러 간다고 했지만
어디로 가야하는 아직 결정 못 한 상태였다.
우리가 가진 무기는 김반장의 권총, 내가 가져온 망가질대로 망가진 칼빈
한 자루, 그리고 분교를 지키고 있던 칼빈 한자루 이게 다였다.
김반장은 한참 고민하더니, 결국 우리는 김반장 권총 한자루만 가져가기
로 했다. 남아 있는 사람의 안전이 우리 둘보다는 휠씬 중요해 보였다.
솔직이 총없이 간다는 것에 불안했지만, 그 두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그럭저럭 준비가 다 되었다.
나는 아무말 없이 김반장이 건네준 배낭을 매고, 다시한 번 한손에는 손
전 등을, 다른 한손에는 이 분교 창고에서 찾아낸 마지막 야구 방망이를
들었다. 기름이 가득찼는지 배낭은 꽤 무거웠다. 김반장도 권총과 손전등
을 들고 배낭을 맸다.
김반장은 이장님에게 신신 당부했다.

"이장님, 절대로 경계를 늦추지 마세요..
작은 빈틈만 보여도 그 놈은 여지 없이 살인을 해 대니까요..
내일쯤이면 구조대가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버티시면 됩니다...."

우리는 분교를 나섰다.
한동안 흩뿌리던 비는 다시 거세지고 있었다.
묵묵히 분교 운동장을 가로 질렀다.
김반장은 분교에서 벗어나자 말문을 열었다.

"일한씨는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따라오는 것인가요?
짐작은 했을 거요...
그래요, 그 버려진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이예요...
아마 우리는 그 놈을 거기서 만날 수 있을 거요..."
"그렇습니까....
대충 짐작은 했읍니다만은....
그런데 그 과수원 집에 그 놈이 온다는 확신은 어떻게..."

김반장은 씁쓸한 미소룰 짓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르키며 내 질문에 대
답을 해주었다.

"내가 가니까요...
어르신이 해주신 말 기억나요?
그렇게 말씀하셨죠.. 제 할아버지가 그 비극의 주모자 중에 한 사람이었
다고요..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에 관련되어
죽었죠..
그리고 또 하나의 증거가 있어요..
무당집에서도 발견되었고, 사과골 최씨네 집에서도 발견된 흔적이 있어
요.. 바로 검은 흙이죠...
이 지역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토질이예요.. 이 마을은 거의 전부
황토흙으로 되어있어요.. 바로 한군데만 빼고...
맞아요... 그 검은 흙은 과수원 집 근처에서만 볼 수 있어요...
아까 이장님에게 물어봐서 확인했어요..
그 놈은 그 집을 거점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요.
또한 기묘할 정도롤 희생자들을 잘 찾아내니까, 나를 찾을 수 있을 거예
요..
내가 그 놈을 유인할 미끼가 되는 것이죠...
그 놈의 보금자리로 들어가서...."

김반장의 얘기를 들으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추리가 틀리고 맞고를
떠나서 자기 목숨을 걸고 살인마를 유인하다니....
걸어가면서 김반장에게 물었다.

"그런 논리라면....
가족과 함께 살해된 그 이름모를 독립운동가의 원혼이 살아나 재원이의
몸을 이용해, 자기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들을 죽이고 있다는 얘기잖아
요.. 그것이 가장 논리적인 추리같긴 하지만...
이럴 가능성도 있잖아요?
재원이가 완전히 돌아버려 닥치는 대로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는
거요..
그리고 제일 큰 의문점은...
아까 분교안에서 알아차린 것인데, 희생자들 중에 그 집의 사건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도 많았잖아요..
그건 어떻게 된 일이죠..."
"글쎄요...
그게 문제예요... 살인의 동기를 찾아낼 수가 없어요..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 놈은 무작위로 희생자를 고르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아요..
주형사가 남긴 메모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아직은 특별한 답을 못 찾아냈어요...
하지만 뭔가 이유가 있을 거예요.
분명히...."

사실 김반장의 추측은 비이성적인 면도 많았다. 하지만 내 스스로도 이
번에 그런 비이성적인 것을 많이 보와았기 때문에, 김반장의 그런 말을
믿을 수도 있었다. 이유도 없이 그 놈은 그 버려진 집에 꼭 나타날 것 같
았다. 그런데 기름을 가져가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반장님, 그럼 이 기름을 가지고 그 집을 태울 생각이신가요?"
"집을 태운다..
정확한 내 의도는 집을 태운다기 보다는 그 놈을 태운다는 것입니다.
그 악마같은 집과 함께...."

김반장이 그렇게 말하니까 섬뜩했다.
김반장은 이미 재원이일지도 모르는 살인범을 살려둘 생각을 안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모든 살인과 관련있는 그 과수원집을 태울 생각인 것 같
았다. 만약 범인이 진짜 재원이라면 나는 어떻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어느새 우리는 버려진 과수원 근처에 다왔다.
여기를 올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주변의 황폐한 모습만 봐도 그 버려진
집에는 뭔가 사악한 기운이 흐르는 것 같았다. 여름이고 장마인데도 불구
하고 과수원 주변의 나무들은 말라비틀어져 있고, 길 주변에 난 풀들도
모두 시들어 있었다.
낮에 봐도 으시시한 집인데, 밤에 와보니 비교가 안 되었다.
이윽고 김반장과 나는 버려진 집 앞에 섰다.
김반장은 손전등으로 그 집을 비추어봤다.
이 집은 이제까지 수 많은 사람의 생명을 먹어치웠다. 그 살생은 아직도
계속되고....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그 집의 정문이 지옥으로 가는 문같았
다. 긴장되기 시작했다.
뭔가가 버려진 집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그 살인마가 그 집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
다. 김반장도 긴장이 되었는지, 권총을 다 잡고 장전을 했다.
그리고 나를 돌아다보고 한마디 했다.

"가죠.. 이 악몽을 종지부 찍으러..."

...우리는 천천히 그 집안으로 들어갔다.
김반장이 총을 겨누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문은 천천히 열렸다. 나는 김반장 뒤에서 손
전등 불빛으로 집안을 비췄다. 하지만 그 집은 빛을 빨아들이기라도 하듯
이, 여전히 깜깜했다.
우리는 심호흡을 하고 그 집안에 발을 디뎠다.
이번이 내게는 두 번째 방문이었지만, 이런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더구나 지난번에 왔을 때, 내눈에는 이 집에서 죽어
나간 사람들의 유령이 보였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쾌쾌한 냄새가 났다.
나와 김반장은 신중하게 불빛을 비춰가며 집안을 살폈다. 그때도 그랬지
만, 사방에 검은 핏자국이 보였다. 그 핏자국이 튀겨나갈때의 정경을 생각
해 보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최
대한 소리를 죽여 집안을 살펴보았다.
온 몸의 신경이 팽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김반장과 나는 천천히 부엌까지 살펴보았지만, 살인의 흔적만 보일 뿐 살
인범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김반장은 배낭을 내려 놓으면서 나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일한씨, 이제 준비하죠... 그 놈을 환영해줄...."

그러면서 김반장은 배낭안에서 기름통을 꺼내 집안 구석 구석에 뿌리기
시작했다. 나도 김반장을 따라 기름통을 꺼내 집안에 뿌렸다.
집안은 휘발유 냄새로 가득차게 되었다. 휘발유가 뿌려지자 나도 모르게
이곳을 불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이렇게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곳을 불태워버리고 싶어졌다.
김반장은 현관문과 우리가 있을 곳까지의 길만 확보한 채 나머지 집안에
는 기름을 뿌렸다. 성냥개비 하나면, 이 버려진 집은 순식간에 불타는 집
으로 변하게 될 것 같았다.
기름을 다 뿌리고 나자, 김반장은 등을 현관이 마주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벽에 등을 기대고 손전등을 껐다. 나도 김반장옆에 걸터
앉아 손전등을 끄고 방망이를 꽉 쥐었다.
그때부터 나는 죽음과 같은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김반장은 권총을 꽉 쥐고, 라이터를 꺼내놓고 현관에 그 놈이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김반장이 잡은 자리는 적절한 선택이었다. 부엌을 제외한 집안 전체가 한
눈에 보이고, 아무리 깜깜하다 하더라도 벽에 등을 대고 있으니 적어도
뒤에서로부터의 공격은 안심해도 될 것같았다.
나는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반장님, 그 놈이 나타나면 어떡하실 작정이시죠?"
"글쎄요...
우선 그 놈이 기름 뿌린 곳을 밟고 서 있게 만들어 꼼짝못하게 해야죠..
그 다음에 한 번 얘기해 보죠.. 그 놈이 도대체 어떤 놈이고 왜 이런 짓
을 했는지...
그리고는....."

김반장은 거기서 얘기를 멈추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그는 범인인 것을
확인한 다음에 성냥에 불을 붙여 범인을 태워 죽일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
렸다. 나도 그 범인이 재원이만 아니라면 그 즉시 태워죽이고 싶었을 것
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화씨를 죽인 것이 재원인지, 그리고 재원이라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아야 했다. 만약 재원이라면, 김반장의 생각대로는 따
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빗줄기는 좀처럼 가늘어질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그 순가 번개가 쳤는지, 갑자기 주위가 순간적으로 환해졌다.
그 짧은 순간에 문 너머로 보이는 마당에 뭔가가 보였다.
낫을 들고 있는 검은 그림자였다.
김반장도 그 모습을 봤는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다음 순간 다시 주위는 깜깜해지고, 천둥소리만 들려왔다.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김반장도 천천히 총을 들어 현관쪽을
겨낭했다.
긴장감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이 느껴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니, 귀에 모든 신경이 쏠렸다. 그 놈이
집에 들어오는 것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쥐죽은 듯한 적막을 빗소리가
깨고 있었다. 하지만 그 놈의 인기척은 전혀 안들리고 빗소리만 들릴 뿐
이었다.
언제 나타날 것인가 불안에 떨면서, 암흑속에서 문ㅉ을 뚫어지게 보았지
만 아무런 것도 보이지 않았다. 긴장된 상태라서 그런지시간 감각이 전
혀 없었다. 우리가 그 놈을 보고 집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린지 1분이 지났
는지 10분이 지났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한참동안 그 놈이 집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옆에 있는 손전등을 켜서 비춰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불안감이 고조되어 참을성의 한계까지 다달았다.
어쩌면 우리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 지도 몰랐다. 그렇
지 않고서는 오는데 30초정도도 안되는 거리를 이렇게 오래 걸릴 리가 없
었다. 하지만, 밖에서 이렇게 어두운집안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휘발유 냄새를 맡을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비오는 날 집안에 들어
오기 전에는 그 냄새를 알기가 힘들었을 것이었다.
그 놈이 안들어오니, 김반장도 나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김반장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손전등을 집어들더니 켰다.
그런데 불빛에 비친 모습을 보는 순간 우리 모두는 충격을 받았다.
그 놈은 흔적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불빛에 비친 것은 텅빈 현관문과 비가 내리는 마당이 전부였다.
분명히 집쪽으로 들어오던 그 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나도 손전등을 켜고 둘러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김반장도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얘기했다.

"일한씨, 우리가 뭔가 잘못봤나 봐요...
바보같이 너무 긴장해서 헛 것을 봤나....."

그때였다.
김반장이 말을 제대로 맺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
리더니, 손이 벽에서 튀어나와 김반장의 목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김반장이 등을 대고 있던 그 벽을 뚫고 두 손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갑작스런 공격으로 김반장은 두 손에 들고 있던 권총과 손전등을 모두 떨
어뜨렸다.
"어억! 어억!"
김반장은 발버둥치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그 두손은 강철 갈고리처럼
김반장의 목을 무지막지하게 조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할 겨를 없이 있는 힘을 다하여, 벽에서 튀어나온 팔뚝을
방망이로 내려쳤다. 왠만한 사람이라면 뼈가 뿌러졌을 만한 충격이었을텐
데고 그 손은 아무 충격도 안 받았는지 계속해서 김반장의 목을 졸랐다.
발버둥과 저항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조금만 지체하면 김반장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가진 방망이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침 김반장이 흘린 권총이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그 권총을 집어
들어 그 무지막지한 팔을 향해 쐈다.
제대로 맞았는지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하지만 그 팔은 김반장의 목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총구를 아예 그 팔에다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피가 사방으로 튀어 김반장과 나는 피범벅이 되었다.
그제서야 그 팔은 김반장의 목을 놓고 벽너머로 사라졌다.
쿵하고 떨어진 김반장은 헉헉거리며 몸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했다.
그 팔이 사라지자 나는 더욱 공포를 느꼈다. 언제 어디서 그 놈이 덮칠줄
모르기 때문이다.
김반장은 몸을 가누기도 힘든 것처럼 주저앉아 계속되서 헉헉댔다.
나는 김반장옆에 서서 권총을 든 채로 손전등으로 사방을 비춰가며 그 놈
을 찾았다.
여기저기서 그 놈이 왔다갔다하는지 나무로 된 마룻바닥을 밟는듯한 삐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권총을 든 손이 나도 모르게 덜덜 떨려왔다.
어디서 그 놈이 나타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삐그덕 거리는 소리는 마치 사냥을 앞둔 인디언들이 사냥감이 겁에 질리
게 하기 위해 지르는 위협적인 소리처럼 들렸다.
원래는 우리가 그 놈을 잡으러 왔는데, 이제는 상황이 거꾸로 된 것이다.
발자국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 뒷걸음질쳤다. 김반장은 그제서야 기침을 하면서 간신
히 몸을 일으켰다.

"반장님! 괜찮으세요?"
"콜록!콜록!!.. 나는 괜찮아요... 그런데 그 놈은?"

나도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집안에 그 놈이 있는 것은 확실하
지만, 어디서 우리를 노리고 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김반장에게 권총을 건네주었다.
아무리 손전 등을 사방으로 휘둘러 봐도,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벽에 얼룩진 핏자국만이 보일 뿐이었다.
김반장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면서 내게 나지막히 얘기했다.

"빨리 여기에서 나가 불을 질러요..."

나는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여기에 있다간 언제 그 놈에게
당할 지 몰랐다. 우리는 사방을 경계하며 뒷걸음질로 현관으로 향했다.
갑자기 그 삐그덕 거리는 발소리가 멈추었다.
집안에는 우리둘의 발자국만이 울렸다. 그 놈이 움직이는 소리가 멈추자
두려움이 더욱 느껴졌다. 그 놈이 저 어둠 속 어디선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다. 빈틈만 보이면 어디선가 나타나 우리를 덮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다리마저 후들후들 떨렸다.
마음만 같아서는 뒤돌아서 후다닥 뛰어서 나가고 싶었다. 뛰어가면 5초도
안걸려서 이 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가 뒷덜미를
낚아챌 것 같아, 돌아서 뛰아나 갈 수 없었다.
사방을 경계하며 한발씩 천천히 뒷 걸음질 쳤다.
불빛에 비추어 지는 곳에는 움직이는 것이라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문까지 3미터 남짓 남았을 때였다.
이제 다 왔다고 약간 안도감이 느껴질 때, 어둠속에서 뭔가가 나를 향해
확 덥쳐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재꼈다. 하지만 왼쪽 어깨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피가 튀겼고 들고 있던 손전등을 놓쳤다.
몸을 피하면서, 들고 있던 야구 방망이로 나를 공격한 것을 휘둘러 쳤다.
한손으로 쳤는데다가, 자세도 흐틀어져서 강한 충격을 주지 못한 것 같았
다. 하지만, 나를 공격한 그 놈은 나의 반격에 움찔하더니 옆에 있는 김반
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우선 옆으로 몸을 피하고, 상처가 난 왼쪽 어깨를 만져봤다.
길게 ㅉ어져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떨어진 손전등을 급하게 줏어 그 놈 쪽으로 손전등을 비춰보았다.
그 놈은 나를 공격한 후, 쉬지않고 김반장을 공격했다. 하지만 김반장이
날쎄게 옆으로 피하고 권총으로 한 방 쐈다.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놈은 현관앞에서 우리의 길을 막아
섰다. 한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낫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어깨
상처도 그 낫으로 찍은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벽쪽으로 뒷걸음질쳤다.
김반장은 그 놈의 머리를 향해 권총을 겨누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손끝 하나라도 움직이면 머리통을 날려 버릴거야!
빨리 낫을 내려놔!!!"

그 놈은 김반장의 말대로 하는 것인지, 아닌 것이지 그냥 우리의 퇴로만
막고 가만히 서 있었다. 현관 앞에 버티고 서서 우리들을 내보내지 않겠
다는 듯이 서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미치광이 살인마가 우리앞에 나타난 것이다. 수십명을 잔인하게
난도질한 미친놈이 이제 우리를 죽이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나와 김반장 역시 이제는 살기 위해서 그 놈과 사투를 벌어야만 되는 상
황으로 몰렸다.
도대체 어떤 놈인가 궁금해졌다. 정화씨가 본 것처럼 이 놈이 바로 재원
인지, 아니면 내가 본 것이 진짜 재원이 시체고 이 놈은 재원이마저 죽여
버린 다른 놈인지...
나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손전등을 그 놈의 얼굴로 향했다.
그 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큰 충격으로 머리속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지고 미치광이의 얼굴이었지만,
그 놈은 확실히 재원이였다.
무시무시한 빛이 나는 광기어린 눈빛과 살기를 풍기는 표정을 하고 있었
지만, 재원이가 맞았다.
그럼 아까 내가 본 썩어가는 시체는 어떻게 된 일인가...
설마설마 했는데, 살인마는 재원이였던 것이었다.
나는 더듬 더듬 말을 했다.

"재원아....네가..네가... 왜... 여기....여기 있는거야.....
왜...이런..이런...지짓을 하고....."

재원이는 나의 질문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우리를 노
려볼 뿐이었다. 그런데 김반장은 내 손을 움켜쥐며 이해하기 힘든 말을
했다.

"일한씨... 재원이라뇨...
어디 재원씨가 보여요? 자세히 봐요 저 놈은 재원씨가 아니예요.."

김반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재원이가 맞았
다. 하지만 김반장도 재원이의 사진을 봤기 때문에 재원이를 알아볼 텐데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김반장은 권총을 재원이에게 계속해서 겨누며, 낫을 버리라고 명
령했다. 하지만 재원이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우리를 노려보기만
했다. 재원이의 무반응은 오히려 우리를겁나게 했다.
김반장은 두려운지 아니면 불안한지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당장 낫을 내려놓지 않으면 머리통에 구멍을 내 주겠어!!"

재원이는 그 말을 따르기는커녕 아무말 없이 한발을 우리쪽으로 내딛혔
다. 재원이가 우리쪽으로 움직이자, 우리는 무시무시한 위압감과 공포를
느꼈다. 특히 재원이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 공포심은 극도에 다달은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재원이를 설득해보려 했다.

"재원아! 정신차려! 제발!
이 새끼야! 뭐하는 짓이야!!!"

재원이는 아무 반응이 없고, 오히려 반응을 보인 것은 옆에 있던 김반장
이었다.

"일한씨!
저 놈은 재원인가 뭔가하는 친구가 아니라니까요!
재원인가 그 친구가 서른 살이 넘고 흰 한복을 입고다니냔 말이예요!!!"

김반장의 신경질적이고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니 나는 혼란에 빠질 수 밖
에 없었다. 내가 보고 있는 재원이는 청바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런
데 흰 한복이라니...
나와 김반장 둘중 하나는 엉뚱한 것을 보고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 놈이 낫을 천천히 치켜들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지금, 그런걸
따질 새가 없었다.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우리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공포
를 느꼈다.
김반장은 도저히 못 견디겠는지, 두 손으로 권총을 잡아 그 놈의 다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그 놈의 왼쪽무릎에서 피가 터졌다.
그 놈은 앞으로 넘어져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김반장은 조심스럽게 총을
겨누며 한 번 더 경고했다.

"이번엔 진짜 머리야!
그러니 낫을 빨리 버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재원이는 김반장의 경고에도 꼼짝을 않
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을 보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재원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럴수가! 극도의 공포에 의한 환상인가...
옆에 있던 김반장도 신음소리와 함께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당...신....은... 이 집 주인...이었던.... 한병...식...
이럴수가...."

김반장의 말에 나는 더욱 놀라 수 밖에 없었다. 불과 몇초전에 내 눈에
재원이었던 놈이 한순간에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다니...
그것도 과수원 살인 사건때 머리가 발견되지 않은 시체였던 한병식씨의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모든 논리와 이성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어깨에 난 상처에서 나는 통증도 까맣게 잊게 되었다.
그렇게 큰 충격을 받으니, 오히려 생각은 단순하게 한군데로 모였다.
이 지옥에서 살아나가는 것으로....
한병식의 얼굴을 한 그 놈은 무릎에 맞은 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낫을 쳐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김반장은 이번에는 총을 놈의 머리로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가까운 거리에서 쏴서 그런지 김반장의 총알은 정확히 그 놈의 머리를 관
통했다. 피가 사방으로 터지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엄격히 말하면 지금 김반장은 살인을 저지른 샘이었다. 김반장은 정당방
위를 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그 놈을 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놈이 그렇게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니, 이유모를 승리감까지
느껴졌다.
우리는 손전 등을 비추면서 천천히 쓰러진 그 놈에게로 다가갔다.
김반장이 한병식이라고 한 그 놈은 뒤로 쓰러진 채로, 시체처럼 뻗어 있
었다. 나는 몽둥이를 들고, 김반장은 권총을 겨눈채로 발로 그 놈을 툭툭
찼다. 하지만 그 놈은 진짜로 죽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손전등으로 그 놈 얼굴을 비췄다.
아까는 분명히 재원이었는데, 피투성이가 되어 잘 알아볼 수 없지만, 지금
은 난생처음 본 중년의 사내 얼굴이었다. 너무 이상했다.
김반장도 이 살인마의 생사가 궁금한지 권총을 겨눈채, 무릎을 꿇고 그
놈의 맥박을 잡기 위해 목에 손을 대었다.
나는 옆에서 손전등으로 그 놈을 비추고 있었다. 피 때문에 미끌어서인지
김반장은 한 번에 맥박을 못 잡고 여러번 집ㅎ다.
결국 김반장은 나를 돌아보며, 모든 것이 끝났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휴.... 이제 다 끝났군요...
이 놈 여기서 죽었네요... 모든 비밀을 간직한채...."

그 순간 나는 무슨 일이 발생했느지 잘 알 수 없었다.
단지 보였던 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그 놈이 눈을
갑자기 뜬 것이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김반장은 뒤돌아 나를 보고 있어, 그 놈이 눈을 뜬 것을 알아차리지 못해
다. 소리를 질러 김반장에게 경고하고 싶었지만, 너무 놀라서 그런지 목소
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놈은 누운채로 오른손에 쥔 낫을 들어 김반장을 향해 휘둘렀다.
내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고, 그제서야 그 놈쪽을 돌아보던 김반장은 작
기를 향해 휘들러지는 낫을 보고 총을 든 손으로 막았다.
김반장의 오른 손은 총을 쥔채로 떨어져 나갔다.
사방에 피가 튀기고, 김반장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그 놈은 상체를 일으켜 쓰러진 김반장을 향해 다시 한 번 낫을 처들었다.
나는 타자가 야구공을 때리듯이 상체를 일으킨 그 놈의 머리를 힘껏 내려
쳤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그 놈은 다시 한 번 뒤로 자빠졌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고통스러워 하는 김반장을 부축해서 부엌ㅉ으로 달려갔다. 예전에
여기 왔을 때 부엌에서 과수원으로 나가는 뒷문이 있었던 것이 생각이 난
것이다.
김반장을 어깨에 매고, 손전 등을 들어야 했기 때문에 야구방망이는 들고
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방망이를 버리고 부엌쪽으로 향했다.
김반장은 심한 출혈과 고통으로,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는 것 같았
다. 나 역시 어깨에서 피가 계속흘러나왔지만,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언뜻 뒤를 돌아다 보니, 그 놈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다급해졌다.
나는 김반장을 부축해서, 부엌쪽으로 갔다.
필사적으로 이동했다.
부엌으로 들어간 나는, 과수원 쪽으로 난 뒷문을 찾았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분명히 내가 뜯어낸 그 뒷문이 없어진 것이다.
손전 등을 사방으로 비춰봤지만, 나갈 곳이라곤 한군데도 안 보였다. 하다
못해 창문도 없어졌다. 지난 번에는 분명히 있었는데...
당황하고 겁이 났다.
이 집은 마치 우리들가 나가길 원하지 않는 듯이 모든 출구를 없앤 것 같
았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나는 김반장을 부축한채로 헉헉 거리며 출구를 찾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피로 얼룩진 벽 뿐이었다.
마루쪽에서 부엌으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너무 무서워져서 어떻해 해야 할지 몰랐다.
지옥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삐그덕 거리는 소리는 점점 다가왔다.
나가는 문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무기 될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쓸만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우선 김반장을 벽에 기대어 놓고 무기로 쓸
만한 것일 찾았다.
부엌이라는 것이 생각이 나자, 찬장을 뒤졌다.
녹슨 식칼이 하나 나왔다. 급한 김에 그 식칼을 들어 마루 쪽을 노려봤다.
식칼을 든 손이 덜덜 떨려왔다.
이윽고, 삐그덕 소리가 바로 눈앞에서 들려왔다.
나는 손전등으로 소리가 멈춘 쪽을 비춰보았다.
이번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은 재원이도, 이집 주인도 아니었다.
중학생 정도의 아이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낫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의 광기어린 눈빛을 보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벽에 기대고 있던 김반장이 힘겹게 말을 했다.

"너...는....지.철...이..잖아....
너...는....죽었는...데........."

나는 김반장의 말에 다시한번 충격을 받았다.
지철이라면, 이 집에서 살해당한 과수원집 아들이였다. 그런데 그 애가 내
눈앞에 낫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 애는 스르르 미끄러지듯 우리에게 다가왔다.
겁에 질린 나는 본능적으로 들고 있던 식칼을 있는 힘껏 지철을 향해 던
졌다. 운이 좋았는지 그 식칼은 정확히, 그 놈이 들고 있던 낫을 정확히
맞추었다.

"쨍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놈이 들고 있던 낫을 떨어뜨렸다. 나는 이 틈을 놓
치지 않고, 몸으로 그 놈을 들이 받았다. 어깨의 심한 충격을 느끼고 나가
떨어졌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서 보니 그 놈도 저쪽 구석에 넘어져서 바
둥거리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있는 김반장을 부축해 다시 마루쪽으로 도
망쳤다. 이 때를 틈타 현관으로 이 집을 벗어나면 될 것 같았다.
김반장도 조금 정신을 차렸는지, 내 부축을 받아 자기 힘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엌에서 현관까지는 길어봤자 10미터도 안되는 거리였지만, 엄
청나게 멀게 느껴졌다. 내 손에 든거란 것은 건전지가 다해 희미해지는
손전등밖에 없었다.
문앞에 다 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무시무시한 힘으 느
껴지며, 우리 둘은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온몸이 우리기 뿌려놓은 기름에 범벅이 되었다.
미끄러운 상태에서도 최선을 다해 몸을 가누어 우리를 잡아당긴 것이 무
엇인가 봐야했다. 손전등은 저기 떨어져 있고, 김반장도 옆에서 기름투성
이가 되어 바둥거리고 있었다.
나는 손전등을 들어 사방을 비추어 보았다.
내눈을 믿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흰 소복을 입은 처녀가 피묻은 낫을 들고 서 있는 것이었다.
김반장의 얘기가 없어도, 나는 직감적으로 그 여자가 재원이도 본 적이
있는 지희라는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김반장 역시 지희라고 중얼 거렸다.
피 투성이가 된 채로 낫을 들고 우리를 바라보는 그 여자를 보니 소름이
끼쳤다. 아무런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지옥같은 공포에서 벚어나지 않으면 나도 곧 미칠 것만 같았다.
뒷걸음질 치다가 뭔가 발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뭔가가 보다, 구역질이 날뻔 했다.
권총을 쥔채 잘려나간 김반장의 손이었다. 끔찍한 광경이었으나, 지금 내
게는 권총이라도 필요했다.
이를 악물고, 손을 뻗쳐 김반장의 잘려진 손에서 권총을 빼려고 했다. 워
낙 세게 쥐고 있었는지 총이 잘 안빠졌다. 총구를 잡고 몇번을 흔들다보
니, 김반장의 손이 휙하고 저기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피묻은 권총을 떨리는 손으로 잡고, 아무 말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여자를 향해 겨누었다.
그 여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 하는데, 김반장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렸
다.

"일한씨.... 총쏘지 마세요....
이제 한발 밖에 안남았어요.....
그 총알은 이 집에 불을 붙일 때 써요......
내가 저 놈을 잡고 있을테니...."

총알이 한발 남았다는 말에 절망감마저 느껴졌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총알이 백발이 있어도 모자를 상황인데...
김반장은 이제 왠만큼 움직일 수 있는지, 자기 웃옷을 벋어 잘려나간 팔
목을 둘둘 감았다. 그리고는 비장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여기서 우리 둘다 살아나가기는 힘들겠소...
내가 저 놈을 잡고 있을테니, 일한씨는 이 집에서 나가 총으로 마루를
쏴요! 그러면 이 저주받은 집은 저 악귀와 함께 불타 없어져 버릴 테니,
어쩌피 우리 마을 일이고.... 나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살기도
힘들 것 같으니.... 살게 되면, 우리 가족에게 안부나 전해 주쇼..
특히 내딸 현지에게..."

김반장은 유언 같은 말을 끝마치고,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무시무시한 기
세로 그 여자에게 달려갔다. 그 여자는 싸늘한 표정하나 안 바뀌고 낫으
로 달려오는 김반장의 왼쪽어ㄲ를 찍었다. 피가 튀기고 김반장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김반장은 어깨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오
는데도 불구하고 그 여자를 붙잡고 있었다.

"일한씨!!!!!! 빨리!!! 빨리!!!!!
제발!!!! 나가줘!!! 제발!!"

김반장의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내 귓청을 때렸다.
그 짧은 시간에 많은 갈등이 생겼다. 나는 어떻헤 해야 하는 것일까..
김반장은 그 여자에 의해 낫으로 난도질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반장은
끈질기게 그 여자를 잡고 있는 것이었다. 김반장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계
속되었다.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이를 악물고 한 손에 총을 든 채로, 현관으로 뛰기 시작했다.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난도질 당한 김반장은 결국 목숨이 다했는
지 고개를 떨구었다. 그 여자는 김반장이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다가 안
되니까 낫으로 김반장의 손을 잘랐다.
그러고는 뛰어나가는 나를 향했다. 다음은 내 차례라는 생각이 드니 다리
에 힘이 빠지고 잘 달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기름에 미끄러져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데, 내 눈앞에는 낫이 보였다.
어느새 그 놈이 쫓아온 것이었다. 저기 떨어져 있는 손전 등에 비춰진 그
놈의 모습은 더 이상 지희라는 여자가 아니었다.
장교 계급장의 군복차림의 사내 모습이었다. 역시 피투성이가 되어 나를
내려치려고 했다. 나는 상체만 일으킨 채로 바둥거리며 뒷걸음질쳤다.
현관까지는 1미터도 안 남은 거리였다.
그 놈은 천천히 낫을 치켜 들었다.
이제는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꼭 감고 다움 순간 닥쳐올 무시무시한 고통에 대비했
다. 하지만 '퍽'하는 소리와 들러더니, 낫이 내려쳐지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죽은 줄만 알았던 김반장이 몸을 날려 그 놈을 덮친 것이었
다. 그 놈은 갑작스런 충격에 기우뚱했다.
하지만, 기분나쁜 미소를 지으며 이제 정말로 죽어가는 김반장에게 다가
갔다. 그러더니 낫으로 김반장의 머리를 내려쳤다.
나는 끔찍해서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머리속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몸을 날려 현관밖으로 뛰쳐나왔다.
지옥과 같은 집안에서는 아직도 그 놈이 불과 1분전만해도 사람이었던 김
반장으로 고깃덩이로 만들어 난도질하고 있었다.
나는 분노와 공포로 눈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쥐고 있던 총으로 집안 마루를 대고 쐈다.
다음 순간 불이 확 났다.
불은 삽시간에 집안 전체로 붙었다.
낫을 들고 있던 그 놈도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거세지는 불꽃으로 더 이
상 집안이 보이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는 있었지만, 기름에 붙은 불은 그 저주받은 집을 활활태우고
있었다.
나는 기어서 마당으로 나와서, 그 불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환청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집이 타는 소리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사람의 비명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게의치 않았다. 지금 그런 소리를 신경 쓸 정신적, 육체적 힘
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아무 생각없이 그 불타는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머리속이 텅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겪은 모든 일은 지독한 악몽같이 느껴졌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
무것도 없었다. 불은 더 거세게 붙어, 그 집은 비명소리를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통쾌함과 승리감이 느껴졌다.
그 집이 무너지는 것을 보니, 내 몸에 난 상처가 아파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상처들을 보니, 내가 겪은것은 꿈이 아닌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때였다.
불에 타고, 무너져서 거의 폐허가 된 그 과수원집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
가 들렸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었으니 했으나, 한 번 더 들리는 것이었
다. 자세히 보니 불꽃속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니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절망감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무너진 집 사이로 불꽃 속에서 사람 형태를 한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었다. 설마.... 그 놈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더 이상 도망칠 힘도 의욕도 남아있지 않았다.
멍하니 딴 사람일을 쳐다 보듯이 그 놈이 불길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두려움이 극도에 다다르면 오히려 담담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주저앉은 채로 가만히 그 놈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 놈은 온 몸에 불이 붙은채로 불길속에서 나왔다.
비 때문인지 불길속에서 나오자 마자, 그 놈 몸에 붙었던 불은 모두 꺼졌
다. 그리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저항할 생각도 못했다.
불길에 비친 그 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화상으로 끔찍할 정도로 일그러지고 상한 얼굴이었지만, 확실히 재원이었
다. 다시 재원이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재원이는 여전히 한 손에는 낫을 들고 있었다.
천천히 내 앞에 서서 낫을 하늘 높이 쳐들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나는 끝까지 알 수 없었던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재원이, 아니 그 놈은 낫을 치켜든 채로 내 질문을 듣고, 동작을 멈추었
다. 그리고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우리고... 우리는....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놈이 마지막으로 던진 대답에 대해 생각했다.
과연 무슨 의미일까....
뭔가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그 놈의 낫은 내 머리를 향해 내리쳐 졌다.
마지막으로 그 놈의 끔찍한 얼굴에서 기분나쁜 미소가 보였다.
그리고 암흑이었다.....

...사방이 모두 흰색이었다.
흰색... 분명히 검은 암흑이었는데...
여긴 어디지....
나는 어떻게 된 것이지..
아무런 기억이 안 났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모두 하얗고 흐릿했다.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인가....
눈을 뜨고 초점을 맞춰보려고 애썼다. 사방에 보이던 흰색이 점점 형태를
갖추어 갔다.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부모님, 동생, 지영이.... 그리고 흰 옷을 입은 의사와 간호원들...
여기는 병원이었다.
내가 눈을 뜨자, 모두들 놀라고 웅성되었다. 어머니와 지영이는 눈물을 글
썽거렸고, 의사와 간호원은 바빠 움직였다.
내가 왜 병원에 있게 되었는지 생각을 해 보았다.
갑자기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 버려진 집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분명히 그때 그 놈이 나를 향해
낫으로 내려쳤는데... 나는 간신히 힘을 내어 물어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그 마을에는 홍수로 인해 많은 사람이 물에 떠내려가 죽었고 또 어떤 사
람들은 창고에 난 불을 끄다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 정신이 이상
하게 되어 그 마을로 돌아간 재원이와, 재원이를 찾아간 정화씨, 그리고
파견나온 두명의 경찰 이 순경과 김 반장도 희생자에 껴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을 사람들을 도와 창고에 난 불을 끄다가 머리를 다쳐 사흘동안
혼수상태였다는 것이었다. 그런 나를 이장님이 구해 준 것이고...
말도 안되는 얘기였다.
살인이라든지, 버려진 집이라든지 내가 경험했던 모든 일들은 깡그리 사
라졌다. 흥분한채로 내가 경험했던 것을 다 얘기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믿
어주지 않았다. 단지 머리를 다친 충격으로 내가 좀 이상해진 것으로 보
았다. 내가 강하게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주변 사람이 나를 보는 시선이
더욱 이상해졌다. 부모님은 재원이의 죽음이 나에게 충격을 준 것으로 믿
고 있었다. 지영이 만은 나를 믿을 것 같았지만, 그렇게 잔인하고 끔찍했
던 일들을 지영이에게 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상황이 닥치자, 내 자신도 나를 믿을 수 없어
졌다.








유일한씨 작품 버려진집 엄청긴장편소설이네요...담편에계속
똥싸다실종의 최근 게시물

무서운글터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