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집 이어서 2부-3...

똥싸다실종 작성일 07.01.19 19: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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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김반장의 얘기를 듣고, 최면에서 깨어난 사람들처럼 움직이기 시
작했다. 아무도 김반장의 반명령조의 말에 이의를 두지 않았다. 명령에 복
종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지옥같은 자리에서 한시바삐 빠져나가고 싶은
것인지 민첩하게 움직였다.
김반장은 보건의가 감다만 붕대를 자기 손으로 대충 감아버리고 웃옷을
입었다. 누기 봐도 김반장의 눈에는 분노와 굳은 결의가 서려있었다. 이제
그 놈을 용서할 수 없다는 강렬한 의지를 풍겨냈다.
하지만 내눈에는 그런 김반장의 모습에서 웬지 모르게, 김반장 자신의 두
려움이 느껴졌다. 자기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공포를 억지로 억
누르고 있는 자의 모습이 느껴졌다.
김반장이 몸을 일으키며 움직이려 할때, 이순경이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이 허름한 수첩을 내밀며 말을 했다.
처음에는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의아해했는데, 그 얘기의 의미를 알아차
렸을때는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저.. 김반장님, 아까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저런 일이 발생하는 바람에..
주순경의 과수원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 기록 있잖습니까...
전부 없었졌는 줄 알았는데... 지서 캐비넷을 뒤지다 보니 이걸 발견했습
니다. 앞에 보니 주순경 이름하고, 그 과수원 살인 사건에 대한 요약이
있는걸 보니, 아마 없어지지 않은 그 사건의 개인적인 기록 같습니다.
저는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반장님이 찾던 것입니까?......"

...나와 김반장은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허겁지겁 이순경이 내민 그
그 주형사의 수첩을 받았다. 이순경은 우리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면서
말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단서가 될까요...
정신병으로 자기몸에 불을 지른 사람이 끄적거려 놓은 것 같은데...
제가 신참시절에 듣기에는 주형사는 그 사건을 맡은 이후로 점점 이상해
져서 결국은 사표를 냈다고 하는데요...
더구나 점점 자폐증상까지 보이며 남과의 접촉을 끊더니 그렇게
죽었는데...
그것이 쓸모있을까요?"

김반장은 그 수첩을 뒤적이니라 고개도 들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이순
경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소문에 가려 진실을 보지 못한다면 좋은 경찰이 될 수없네.
나는 이 주형사를 알고 있어... 내 밑에서 일한적도 있고...
그렇게 능력은 뛰어나지 않았어도, 사건 하나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지.. 그것 때문에 오히려 출세도 못했고 비극적인 최
후를 맞이했지만...
요즘같은 세상에, 몇가지 의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추적하는 경찰은
점점 사라지네...
이 주순경은 요즘은 거의 보기 힘든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사건을 포기하고 사표를 썼다면 반드시 그런 이유가 있었을
꺼야.. 혹시 그의 자살도 뭔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고..."

나는 김반장에게 내가 들었던 주형사의 얘기를 해주었다. 재원이 편지에
나왔던 얘기며, 그 사람이 자살전에 나와 통화했던 내용을 얘기해 주었다.
김반장은 그 얘기를 듣고 수첩을 읽는 것을 잠깐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혼잣말인지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정말 그 집에 뭔가가 있는 것일까....."

그러더니 그 낡은 수첩에 다시 몰두했다.
나는 치밀어오르는호기심을 억제할 수 없었다.
갑자기 그 주형사와의 마지막 통화가 생각났다.

'...걱정마쇼. 안 그래도 내가 오늘 신나를 사오고 다 준비 해 두었소.
오늘 밤에 그 빌어먹일 집을 태워버릴 작정이요. 더 이상 그 악귀같은
집을 그대로 나둘 수가 없겠소. 또 다른 사람이 희생될 지도 모르잖소.
그래서 그 집을 싸그리 태워버릴 생각이요..
재원이 학생이 회복되면, 이 얘기 전해주고 연락해달라고 전해주쇼...'

그러더니 그는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이었다. 그 과수원 살인 사건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을 그 사람이 비
밀을 품고 영원히 가버린 것이다. 또한 주형사가 작성한 수사기록과 동생
지철이의 일기는 재원이가 그 버려진 집으로 가져갔다가 사라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 수첩만이 지금의 피비린내나는 연쇄살인 사건과 그 과
수원 사건의 단서를 줄 것만 같았다. 이 두 사건은 버려진 집을 가운데
두고 뭔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설사 아니더라도 지금 상황은 지푸라
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나는 이것저것 생각을 하면서 지서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김반장은 집중해서 그 수첩을 읽고 있었고, 보건의는 책상을 수술대 삼아
그 아이의 끔찍한 시체를 검사하고 있었다. 이장은 정신을 제대로 추스르
지도 못한 그 아이의 부모를 어디론가 데리고 나가고 있었다. 이순경은
어쩌정한 자세로 김반장이 수첩을 다 읽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몇 명의 청
년들은 혹시나 총이라도 나누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이것 저
것을 돕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지서안에는 숨길 수 없는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내가 너무 민감하게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모두에게서 공포
내음이 진하게 풍겨나오고 있었다. 뭔가에 쫓기는 듯한 초조함과 두려움
들이 느껴졌다.
숙직실에 누워있을 정화씨가 생각났다.
문을 노크했더니. 정화씨를 돌보고 있던 아주머니가 들어오라고 했다.
정화씨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기절 상태에서도 몸서리를 치는 것을 보니 뭔가 무서운 것을 무의식중에
서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안쓰러웠고, 한편으로는 연민의 정
이 느껴졌다. 사라진 남자친구를 찾으러 왔다가 온갓 험하고 끔찍한 일을
경험하고 정신까지 잃다니... 나의 책임도 느껴졌다.
착잡했다.
아주머니 말로는 좀 시간이 지나면, 정신을 차릴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의사도 아닌 그 아주머니의 말은 쉽게 믿겨지지 않았다.
그때 마침 그 아이의 시체에 대한 검시를 끝냈는지, 보건의가 김반장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재빠르게 숙직실을 나왔다.
김반장은 읽던 것을 멈추고 시체가 놓여있는 책상위로 다가갔다. 보건의
는 진저리치는 표정으로 얘기했다.

"휴....
정말 끔찍하군요... 제가 검시관이 아닌 이상 정확한 사인이나 기타 사항
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없네요. 더구나 아무런 장비도 없고부검도 하
지 않은 상태에서 뭔가를 밝히기란 불가능하죠.. 특히 저같은 보건의로써
는 더욱더 힘든 일이죠...
그래도 대략적인 사인은 잘려나간 두 손을 제외하곤 특별한 외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출혈과다로 사망한 것 같습니다. 두 손이 잘려나간 부분은
뭔가 매우 날카로운 것에 잘린 것 처럼 매끔하게 잘렸습니다. 뼈까지 깔
끔하게 잘려나간 것을 보면, 사람이 아닌 기계에 의해 잘린 것 같습니다.
이런 상처는 제가 인턴시절 응급실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절단기에 손
을 잘려서 병원에 실려온 기술자때와 똑같은 형태입니다. 날카로운 것에
엄청난 힘을 실었을 때 나타나는 상처죠.. 아마 사람 힘으로는 힘들걸
요... 큰 도끼로 내려친다면 자르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런 상처를
남길 순 없어요...
그리고 여기 이상한 흔적이 보입니다.
누군가가 팔뚝근처에 지혈해준 흔적입니다. 자국이 보이죠?
강한 힘으로 밧줄 같은 것으로 동여맨 자국입니다.
양쪽 팔에 모두 자국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두 팔을 피가 안통
할 정도로 강하게 조여 놓았다는 얘기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손을 잘라내고 지혈을 하다니...
만약 살인이라면, 정말 끔찍한 살인 방법입니다.
이 아이는 자기 손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맛본후에 거기서 피가 흘러나오
는 것을 보면서 죽어간 것이죠.. 더구나 팔뚝을 지혈했기 때문에 피는 천
천히 흘러나왔겠죠.. 물론 주체도 못할 정도로 많이 흘러나왔겠지만, 사
망시간은 좀 늦츨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는 천천히 죽어갔습니다. 온갖 공포와 고통을 느끼며...
휴...."

지서안은 죽음과 같은 적막이 흘렀다.
이순경이 "제기랄! 어떤 새끼가 그런거야!!!" 라고 목쉰 목소리로 욕지거
리를 할 때까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모두들 큰 충격에서
깨어난 것처럼 행동했다. 기다리던 마을 청년은 그 가련한 아이의 시체를
푸대에 싸서 옮겨갔다. 그래도 지서안은 바닥이며 책상이며 피범벅이 되
어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닦아낼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김반장은 보건의에게 몇가지 질문하고,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한참을 김반장의 생각이 끝나길 기다리고만 있었다.
이윽고 고개를 든 김반장은 먼저 이순경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
렸다.

"이순경, 지금 당장 무기고에 있는 칼빈 총과 실탄을 챙겨가지고 나오게.
그리고 좀 쓸만한 마을 청년들을 무장시키게. 총이 없는 사람들은 몽둥
이라도 들려서 무장시켜.
그들을 데리고 마을 한바퀴 돌면서 마을 사람들 전부를 분교로 데려오
게. 마을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 데리고 오는 것이야! 반항하거나 지
시에 따르지 않는 마을 사람들이 있으면 강제로라도 데리고 오게.
단단히 각오해야 할걸세!
자네도 알고 있듯이 그 미치광이 살인마는 어디서 누구를 살해할지 몰
라. 어쩌면 지금도 누군가를 갈기갈기 ㅉ고 있을 지도 모르지...
어두어지기 까지는 앞으로 2, 3시간 남았으니 서두르게.
어두어지면 그 놈의 살인행각에서 피하기가 더욱더 힘들어 지니까.
그리고 마을을 돌 때, 읍내 본서와 연락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게.
휴대폰이나 무전기나 아무 것이라도 좋아.
읍내와 연락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 가져오게!
이렇게 비오는 날, 한집 한집 들르며 마을 사람들 전부를 데리고 다닌다
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어나갈 것 같아.
수고스럽고 위험하겠지만 부탁하네...
명심하게!
그 놈은 미친놈이지만, 멍청한 놈은 아니라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버려진 집 근처는 지나지 말게!
이유는 묻지 말게, 나도 잘 모르니까...
마을을 돌다가 그 놈 같으면 생포할 생각말고, 가차없이 발포하게.
ㅅ불리 덤벼들다간 자네들만 다칠테니까!
그런 놈은 잡을 생각하지말고 죽일 생각을 해!
그것이 그 놈의 살인 행각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먀...
그럼 부탁하네!"

이순경은 김반장의 단호하면서 진지한 얘기에 아무런 불만도 표시 못하고
무기고로 갔다. 이순경의 굳은 얼굴에는 두려움과 강한 책임감이 느껴졌
다. 이순경은 칼빈총을 꺼내와서 실탄을 장전하고 자기가 하나들고 나머
지는 마침 지서에 있던 청년들에게 나누어줬다. 간단히 사용법을 설명해
주었다.
마을 청년들은 처음 총을 받아들때는 약간 들뜬 모습마저 보였지만, 심각
한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차츰 긴장된 모습으로 이순경의 설명을 들었다.
이순경은 마을 지도를 펼치고 마을 사람들을 안전하고 최대로 짧은 시간
에 데리고 올 루트를 정했다.
그리곤 우비를 입고, 굳은 표정과 함께 지서를 나섰다.
김반장은 나가고 있는 이순경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제발 조심하게...
그 놈은 정말 위험한 놈이야!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몰라..
단지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일지도 모르니까...."

이순경은 잠시 발길을 멈추었지만, '괜찮습니다!'라고 자신감넘치는 대답
을 남기고 청년들을 이끌고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불안감을 느
꼈지만, 이순경의 힘찬 대답에 그 불안감을 애써 떨쳐버렸다.
이제 지서에는 나와 김반장밖에 남지 않았다.
김반장은 한숨을 내쉬며 그 문제의 수첩을 내밀었다.

"일한씨..
이거 한 번 읽어 보세요...
여기 쓰여진 내용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만약 모두 사실이라면, 이번 사건과 어떻게 연관지어야 하는지..
뭔가 알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안개 속에서 더듬는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일한씨도 읽어보세요..
혹시 일한씨가 재원씨에게 받았다는 편지와 관련되어 뭔가 새로운 사실
이 밝혀질 수도 있으니까요..."

나도 모르게 그 수첩을 받아든 손이 긴장으로 떨렸다.
이 수첩에는 분명히 뭔가가 있을 것 같았다.
이 끔찍하고 계속되는 살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낼 수 있는 그 무엇이...
나는 심호흡을 하고 그 수첩을 펼쳐보았다.
그 무시무시하고 기괴한 사건의 기록을.....

....주형사의 수첩에 적혀져 있던 것은, 수사에 관한 일정한 형식이 없는
메모들이었다. 한 번에 쓰여지지 않고, 몇 달에 걸쳐 쓰여진 것이었다.


[ 과수원 살인 사건
- 3명의 희생자와 1명의 목격자가 발견
- 살인 도구는 낫으로 추정
- 살인 도구로 추정되는 낫에는 4명의 지문이 모두 채취됨..
- 1명의 목격자는 사건 당시의 일을 기억못함..

모든 가능성을 감안해 최대한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자....
1. 희생자중 살인범이 있다면....
(즉, 범인도 자살또는 정당방위에 의한 타살로 죽었다는 가정)

가) 한병식(과수원 주인)이 살인범이라면....
- 살인 동기: 정신질환?
- 타당성 있는 결론. 그러나, 안중위와 아들인 지철을 죽인다음에 자기
목을 스스로 잘라 자살하는 것은 불가능. 또한 그렇다면 사라진 그
머리는 어디에..
- 안중위나 지철이 정당방위로 한병식을 죽이고, 자신들도 죽었다고 하
는 것도 이해가 안감. 정당방위로 상대방의 머리를 잘라버리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함. 더구나 마지막에 낫을 쥐고 있던 사람은 한병식....


나) 안 현(인근 모부대 ROTC 중위)이 살인범이라면....
- 살인 동기: 한병식의 딸 한지희와의 결혼 문제로 빚어진 갈등?
너무 모호하고, 일가족 몰살의 동기로는 약함.
- 먼저 지철의 등을 낫으로 찍어 죽이고, 격투 끝에 한병식의 머리를
자른후에 자기도 깊은 상처를 입고 죽었다? 그렇다면 없어진 한병식
의 머리또한 안 현이 처리했다는 것인데, 죽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 왜 이미 자기가 죽인 사람의 머리를 잘라 숨켰을까?
또한 마지막에 낫을 쥐고 있던 사람은 한병식이었다.

다) 한지철(과수원 집 아들, 중학생)이 살인범이라면..
- 살인 동기: 정신질환?
- 안중위와 아버지를 죽이고 그때 입은 상처로 죽음? 또는 살인을 말
리던 누나인 지희에게 피살됨? 중학생의 힘으로 사람의 머리를 잘라
낼 수 없음. 또한 안중위와 한병식의 시체에는 서로 격투한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지철과 격투한 흔적은 없음.

라) 한지희(과수원 집 딸, 안중위와 결혼 예정)이 살인범이라면...
- 살인 동기: 정신질환? 또는 결혼 문제로 일어난 갈등?
- 유일한 생존자이기 때문에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될 수 있음.
과연 혼자서 세명을 남자들을 죽일 수 있었을까?
또한 여자 힘으로 사람의 머리를 잘라 낼 수 있을까?

마) 살인자가 두 명이상이라며...(가능성 있는 조합을 보면)
- 한지희와 안 현이 공범: 타당성 높음
살인 동기는 결혼에 방해가 되는 가족의 처치?(우발적) - 일리 있음.
안 현과 한지희 한병식과 한지철을 죽이고 그 과정에서 안중위도 죽
임을 당함? - 일리 있음
사라진 한병식의 머리와 마지막에 한병식에게 쥐어진 낫은 수사의 초
점을 흐리게 하기 위한 한지희의 속임수? - 일리 있음
한지희의 실성은 속임수? - 정신과 전문의의 소견으로는 절대로 속
일 수 없다고 함. 결국 한지희는 진짜로 정신병 환자로 밝혀짐.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 충격으로 한지희가 진짜로 실성? - 타당성 높
음. 하지만 왜 한병식의 머리는 숨기고 낫을 쥐어줬을까? 또 하나의
의문... 한병식이 낫을 쥐고 있던 향태로 봐서 남이 죽은 후에 쥐어준
것은 절대 아님.

2. 제3자가 범인이라면...
- 살인동기: 과수원 가족과의 원한?
- 과수원 집에 제 3자가 침입한 흔적을 발견 못함. 피바다가 된 과수원
집 바닥에서 제3자의 발자국을 발견 못함. 흔적없이 들어왔다 살인을
저지르고 사라지는 것을 불가능.
제 3자가 살인을 했다면 안중위와 한병식이 쥐고 있던 서로의 머리카
락과 계급장은?
결정적인 목격자가 될 수도 있는 한지희를 살려둔 이유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제대로 된 결론은 하나도 없다. 글자 그대로 미
궁이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한지희가 제정신을 차려 그때 사건을 말해
주지 않는 한 진상을 영원히 알 수 없을까?

분명히 이 사건은 가정 불화로 인한 자살 따위가아니다. 누군가가 무지
막지한 원한또는 악의를 가지고 저지른 끔찍한 범죄가 확실하다..하지만..

원한이다. 이런 잔학한 살인을 저지린다는 것은 물건이 목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이런 잔학한 살상극을 벌이진 않
았을 것이다. 놈의 목적은 살람을 갈기 갈기 ㅉ어서 최대한 잔인하게 죽
이는 것이었다! 최대한의 고통과 공포를 느끼게 하면서.....]

적혀있는 볼펜 색깔이 다른 것을 보니 며칠 후에 적힌 내용같다.

[ 3. 원한관계
가) 과수원 주인 한병식과의 원한
- 5년전에 이곳으로 이주. 이사를 주선한 사람은 친구라는 성일 여관
주인(최성일)이 했다. 이사 후 1년만에 부인 사망.
원인 불명. 단지 치료 할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짐.
부인이 죽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
그러나 부인이 죽은 후에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처럼 행동.
항상 술에 취해 살고, 폭력적이 됨. 그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도 나빠짐. 특히 정미소를 운영하는 김은철과 술자리에서 싸움을 벌
여 전치 4주 정도의 상처를 입힘. 김은철의 고소로 치료비와 합의금
조로 500만원 지급하는 등,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과 악화.
가장 가까운 친구는 역시 여관주인인 최성일.


나) 안중위와의 원한
- 서울에서 여유있는 집안 출신으로 제대를 앞둔 ROTC 군인.
재대후 대기업에 입사하기로 되어있는등 안정되고 전망있는 상태였
음. 소속 대대장등 상급자의 증언에 따르면 밝은 성격으로 원만한
복무 생활을 했음. 하지만 안중위가 지휘하던 소대원들의 증언에 의
하면, 소대원 중 상병 한명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자세히는 말해주지 않았으나, 하극상과 관계 있는 것 같다.
도시 출신이며 대졸 학력의 연약한 소대장을 각계 각층의 거친 병사
들이 복종하고 따를 수 있었을까...

다) 첫째딸 한지희와의 원한
-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함.
마을에서 가장 훌륭한 부인감이며 며느리감으로 간주됨.
뛰어난 외모와 착한 성격으로 모든 사람이 좋아함.
원한 관계는 전혀 없다고 주변에서 증언.
하지만.... 가뜩이나 여자가 부족한 마을에서 어디 내어놔도 손색이
없는 일등 신부감을 놓고 아무런 잡음이 없다?
더구나 외부 사람과 결혼하는데...
표면적으로는 없다고 했으나, 이 결혼에 대한 치정 살인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누군가 한지희를 짝사랑했다?
조사가 필요...]

시간이 얼마 지난 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메모가 한지희에 관한
내용에 덧붙여져 있다.

[마을에 한지희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
정신이 나가있는 지금, 한병식의 친구인 여관주인 최성일이 돌봐주
고 있으나, 누군가의 애를 임신하고 있다는등 지저분한 소문이 있다.
불쌍한것... 마을 누군가가 실성한 지희를 농락하는 것 같다..
죽일 놈.....

라) 한지철와의 원한
- 중학생이라 특별한 원한관계가 없다.
전학 와서도 친구를 잘 사귀는등 원만한 관계를 유지.
단지, 같은 반 반장(박윤환)과 성적이나 인기 같은 것에서
경쟁관계여서 껄끄러운 사이였다고 함. 친구들의 얘기로는 반장이
지철을 엄마가 없어 버릇없는 애라는 등 심한 욕도 하고
사이가 나뻤다고 함.
직접 반장에게 물어보니 자신은 지철과 사이가 좋았다고 주장.]

또다시 시간이 지난 후에 적힌 내용 같다.

[무섭다...
이 사건에 대해 집착할수록 뭔가가 나를 압박하고 뒤쫓는 것 같다.
나를 감시하고 나를 위협한다.
무엇일까....

제기랄..
박형사가 오늘 죽었다. 교통사고로..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하지만 믿울 수 없다. 본서에서 파견나와서 이
사건에 대해 정열적으로 조사하던 젊은이였는데...
그도 사건에 파고들수록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사건을 상부의 지시로 말도 안되는 시나리오로 마무리하고 나서
본서로 복귀했지만, 그는 끝까지 석연치 않음을 떨칠 수 없었나 보다.
사고 당하기 전날 밤에 술취한 목소리로 전화해 그가 내게 말한 것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주형사님, 포기하실 것입니까?
저는 무섭습니다. 부끄럽지만 무서워요...
밤마다 끔찍한 악몽에 시달려요... 죽음이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이 사건에는 뭔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이한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무서운....
아직 주형사님께 말씀드릴 단계는 아니지만, 살인 사건이 일어난 그
집에 대해 뭔가를 알아냈아요...
얘기해도 믿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살아있다면 곧 말씀드릴꼐요...
무서워요......'
박형사가 정말 사고였는지. 자살했는지. 아니면 뭔가에 의해 죽었는지..
나도 무섭다.
그 집에 뭔가가 있다.
알수 없지만, 이 공포의 근원인 그 무언가가....

4. 과수원 - 살인사건이 일어난 후 버려진 집.
- 1920년대 지어졌다고 추측됨.
이 집을 지은 주인에 대한 기록은 없음. 해방까지 주인이 나타나지 않
고 버려진 체로 남겨졌다고 함...
그 후 여러 가지 괴기한 얘기가 전해짐
그 중에 신빙성있는 얘기만 몇가지 살펴보면,
6.25 당시 국군 소대가 그 집에 주둔한 적이 있는데, 하룻밤사이에 한
소대가 사지가 잘린 상태로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전쟁때라 아무 조
사 없이 끝났으나 전해진 이야기로는 그때 발견된 한명의 생존자였던
소대장이 낫을 들고 부대원 전원을 죽였다고 한다. 그 소대장은 물론
미친 상태에서 혼란 중에 사라지고....
그 외에도 수사기록 및 사망사건의 자료들을 조사해 보면, 그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어 나온 사망자 수가 이번 사건을 제외하고, 30년간 20
명이 넘으니 뭔가 이상하다. 더구나 그 기간 동안에 특별히 거주자도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것에는 이상한 일이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부랑자나 떠돌이 그리고 술주정뱅이가 하룻밤정도
빈집에서 쉬려고 들어갔다가 다음날 시체로 발견된 경우다. 모든 경우
가 사인은 충격에 의한 심장마비 또는 원인불명으로 기록되었다.
한병식은 왜 그런 집을 사서 이사하게 되었을까?
누가 그 집을 소유하게 되고 한병식에게 팔았을까?
한병식의 그 집으로의 이주는 친구이며 여관주인인 최성일이 주선했
다. 그런데 한병식에게 집을 팔았다는 것도 바로 최성일이였다.
서류상에 보면 소유주가 불분명한 상태였던 6년전에 최성일이 자기 소
유로 신고하고, 그 뒤 바로 한병식에게 판 것이다.
최성일은 그 집이 흉가라는 것을 알고 판 것인가?
한병식은 그 집이 그런 저주 받은 집이라는 것을 알고 그 집으로 이사
한 것일까?
그 집을 처음 짓고 실종된 사람은 누구일까?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어르신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 것도 기억
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확실히 뭔가 숨겨진 얘기가 있다.

그 집이 풍기는 그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것은 과연 무었을까?
그게 무엇이든 나를 압박하고 나를 죽음으로 몰아 넣고 있다.
너무 무섭다..
어디로 가도 나를 쫓아오는 괴물이 있다.
그 집에서 뭔가 나오고 있다.
사악한 기운이......]

그리고 재원이가 그 집에 들어갔다 정신이 나간 후에 쓰여진 듯한 글이
보였다. 바로 주형사가 몸에 불이 붙여 죽기 전에 쓴 글이었다.

[...멀쩡한 의대생이 그 집에 들어갔다가 미쳐서나왔다.
내게도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그 때 얘기해준 내 잘못이다. 말렸어여 하는데....
도망가고 숨어사는 것도 이제 끝이다.
그 집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이제는 정말 끝을 봐야겠다.
불을 지를 것이다.
내가 죽던 그 집이 타 없어지던, 이제 죽음의 공포는 끝이다.
수십명의 피를 먹고도 아직도 사람의 목숨에 굶주려있는 그 집을 이 세
상에서 없앨 생각이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다....]

나는 메모를 다 읽고 더욱 혼란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을 쓴 날 밤 주형준 형사는 몸에 불을 붙여 자살했다.
자살이 아니고 그 집에 의해 죽음을 당했는지도 모르지만......

..주형사의 기록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뭔가 단서를 제공해주는 것 같기도 했지만, 확답을 내 주지는 않고 있었
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번 살인이든, 지난번 살인이든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그 버려진 집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김반장은 내게 그 기록에 대해 물어보았다.

"일한씨, 어때요?
무슨 감이 잡혀요? 그 끔찍한 놈에 대해..."
"아뇨. 전혀...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버려진 과수원과의 관계는 분명히 있다는 것입
니다. 형태가 어떠하든, 그 집이 이번 사건의 중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비 이성적인 생각인 것 같지만, 제가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네
요...
반장님은 뭐 좀 아시겠나요?"
"나도 비슷하죠...
그래도 선명하지는 않지만 그림하나가 눈에 보이는 것 같네요.
일한씨 말대로 그 버려진 집이 중심에 있는...."

김반장은 뭔가를 알아차린 것 같지만, 아직 밝힐때가 아닌지 전부 얘기해
주지 않고 있었다. 좀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때가 되면 알게 될 것
같아 참았다.
그때 숙직실 방문이 열리며, 정화씨를 봐주고 있던 아주머니가 나왔다.
정화씨가 정신을차렸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나는 황급히 방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정화씨는 파리한 얼굴을 하며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첫눈에 봐도 대
단하게 고생하고 험한 경험을 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정화씨.. 괜찮아요?
안심하세요.. 여기는 지서 안이니까..
일어나서 다행이네요. 모두 걱정했어요..."

정화씨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해요.. 일한씨..
저 때문에 고생하고...
저는 여기 괜히 따라왔나 봐요.. 방해만 되고...
그때 일한씨말듣고 오지 말 것 그랬어요..."

안 되어보이는 정화씨에 뭔가 위로의 말이라도 해 줘야겠다고 하는데, 갑
자기 김반장이 끼어들었다.

"정화씨, 일어나자마자 이런 질문해서 미안한데...
지금 상황이 워낙 급하니까 좀 이해해줘요..
정화씨 기절하기 전에 상황에 대해 기억해요..
기억나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얘기해 주시겠어요.
무리라는 것을 알지만 부탁입니다.."

나는 정화씨가 안쓰러웠지만, 김반장의 다급한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어떻해 보면, 지금 현재 그 놈을 보고 살아있는 것은 김반장과 정화씨밖
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반장의 경우는 제대로 목격한 것이 아니니까, 정화
씨가 유일한 증인이자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정화씨는 김반장의
질문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놈을 목격한 순간을 회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너무 무서웠어요..
사실 그 때 상황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없는 것 같아요..
일한씨가 반장님을 따라 창을 뛰어넘어 간 후, 저는 혼자서 그 끔찍한
살인 현장에 혼자 남아있게 되었어요.
방안에 흐틀어져 있는 시체들을 보니 구역질이 나고 무서워서 방에 있을
수 없었어요. 밖에 나와서도 그 방안 피바다의 전경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아 괴로웠어요. 자꾸 무서워져 딴 생각을 하면서 비 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어요.
갑자기 총소리 같은 것이 메아리쳐서 들렸어요. 깜짝 놀랐어요.
그 소리 후에 사방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 졌어요. 단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어요. 그러니까 더욱 무서워지는 것이였어요.
일한씨나 김반장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났을까 걱정되기 까지 했어요.
한참을 마음 졸이며 떨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발자국이 들리는 것이
였어요. 너무 무서워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머리에 큰 충격을 느꼈어요.
순간 주변이 깜깜해지고, 의식을 잃었어요..
그리곤 아무 것도 기억이 안나내요..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방에 낯선 아주머니가 저를 보살피고 있었어요...
이것이 제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정화씨의 대답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의
문에 대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정화씨..
정말 전혀 기억이 안나나요?
제가 정화씨를 발견했을때는 정신을 잃고 있지 않았을 때 였거든요..."

내 질문에 정화씨는 이상할정도로 깜짝 놀라면서 반문했다.

"정신을 잃고 있지 않았다고요...
그럼, 그때 제가 무얼 하고 있었죠?"

나는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반장이 담담
하게 말해 주었다.

"그때 정화씨는 '그가 왔어. 낫을 들고..'라는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어요... 그것은 전혀 기억이 안나나 보죠?
그러다가 기절했어요. 우리는 그 말을 듣고 정화씨가 최소한 그 놈을 봤
으리라 생각했지요..
하긴 그 놈과 마주쳤으면, 정화씨도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르죠...
다행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물어보는데요....
정화씨가 무의식중에 중얼거리는 '그'가 누구인지 기억나세요?"

정화씨는 김반장의 질문을 듣고 이상할정도로 당황하는 것 같았다. 평소
의 정화씨와 달리 침착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납득이 갔다. 정화씨는 더듬거리면서 김반장의 질문에
간신히 대답했다.

"그건... 음...
모르겠어요.... 제가 왜 그런 얘기를 중얼거렸는지....
아무것도 기억 안나요...
단지 머리에 얻어맞고 정신을 잃었다는 것 밖에요...
전혀 모르겠어요..."

좀 이상한 대답이었지만, 김반장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솔직이 정화씨의 대답을 듣고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말이 안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기억이 안난다는 데는 특별히 할말이 없
었다. 김반장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달리 김반장은 더
이상 묻지않고, 오히려 정화씨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듯이 행동했다.
힘들더라도 몸을 일으켜 모두들 분교로 옮기자는 얘기를 했을 뿐이다.
정화씨는 자기는 괜찮다는 듯이 옮길 준비를 하겠다고 했다.
방에서 나와서 나는 나지막히 김반장에게 물었다.

"반장님,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정화씨의 대답이 약간 말이 안되는 것 같기도 한데..."
"글쎄요...
약간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좀 많이 틀리는 것 같은데...
좀 더 기다리죠.. 정화씨가 직접 얘기해 주겠죠.. 뭐....
우선 분교로 옮기고 봅시다.
이순경도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곧 분교로 돌아올 것 같으니까..."

김반장은 정화씨의 대답에 대해 의문점만 동의했을뿐이고, 더 이상 얘기
하지 않고 분교로 옮기는 데에 신경을 ㅆ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김
반장은 나름대로 정화씨의 대답에 대해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김반장은 지서안에 있던 사람들을 재촉해서 분교로의 이동을 지시했다.
밖에는 약간은 가늘어졌지만,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나는 몸이 불편한 정화씨를 부축했다.
자그마한 몸짓의 정화씨는 뭐가 그렇게 겁나는지 연신 바르르 떨고 있었
다. 나는 그런 정화씨에게 우산을 바쳐주고 묵묵히 분교로 향했다.
가녀린 정화씨를 보니,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실종된 남자친구를 찾으러 왔다가 온갓 끔직한 일들을 목격하고 경험한
것이다. 그때 갑자기 재원이에 대해 생각이 났다.
한동안 그 살인에 쫓기다 보니, 우리가 여기에 온 직접적인 목적인 재원
이를 찾아보겠다는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재원이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미친채로 비를 맞으며, 이 무시무시한 마을을 배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따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이며, 재원이에 대해서 물어봐야 겠
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교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교실의 책걸상을 치우는등 준비를 하고 있었
다. 이장님도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지도자는 김반장으
로 보였다. 전시에는 행정가보다 군인이 강한 권한을 갖게 되듯이, 이런
위급상황에는 이장보다는 김반장의 말이 더욱 신뢰가 가는 것처럼 보였
다. 그래서 인지 마을 사람들은 김반장의 지시에 한마디 불평없이 잘 따
랐다.
분교는 분교라는 이름에 걸맞듯 아주 작았다. 작은 방 만한 교실 두 개에
양호실과 창고도 겸하고 있는 듯한 자그마한 교무실 하나가 전부였다.
김반장은 몇몇의 마을 사람들을 지도해서, 먹을 것이나 식수 등을 분교로
옮겼다. 책상과 걸상들을 복도로 몰아내었는데도 여전히 교실들은 여전히
비좁아 보였다.
정화씨는 여전히 몸이 불편해 보였다. 김반장은 일을 도우려는 나보고는
정화씨나 보살피고 있으라고 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수해에 익숙한지, 그리 당황하지 않고 분교를 자신들
의 보금자리겸 대피처로 만들어 나갔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니 이
런 시련을 잘 몰랐던 내가 얼마나 행운이었는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창백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있는 정화씨에게 담요를 덮어주면서 나는 조심
스럽게 재원이 얘기를 꺼냈다.

"정화씨, 미안해요...
제가 괜히 이런 곳까지 끌고 와서...
재원이 그 자식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
비가 그치고 고립이 끝나면, 여기를 빨리 떠나죠...
재원이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화씨도 집에 돌아가서 좀 쉬어야 할 것
같네요.. 이왕 시작한 일이니, 재원이는 제가 끝까지 찾아볼께요..
방학이라 특별히 할 일도 없는데요..."

정화씨는 내 말에 아무말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떨구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지만,
정화씨가 당한 끔직한 일들을 생각하자 이해가 되었다. 정화씨는 울먹이
면서 말했다.

"흐흑... 너무 무섭고... 힘들어요...
이제... 제원씨를 포기할래요.... 내 힘으론 흐흑...
어떻게 할 수가 없을거예요.... 흐흑....
용서해요....흐흑....
일한씨... 빨리 나를 여기서 내보내줘요...
이제 제원씨는 만나기도 싫어요...."

너무 힘들고 지쳐서 한 말같지만, 재원이를 포기한고 만나기 싫다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렸다. 찾기를 포기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왔다. 오죽
하면 재원이를 만나기까지 싫어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화씨를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재원이를 만나기 싫으니, 여기서 빨리 내보내달라니?
혹시 정화씨는 이 마을에서 재원이의 흔적이나 뭔가를 발견한 것은 아닐
까? 혹시 우리에게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러 가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정화씨에게 뭔가를 물어보려는 순간,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난 것 같았다.
나는 정화씨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얘기하고 분교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이 순경이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분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들어오
고있었다. 100여명 남짓한 마을 사람들이 보따히 하나씩 들고 다가오는
모습은, 마치 6.25전쟁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피난민의 모습 그대로 였다.
지치고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표정은 뭔가 쫓기는듯한 두려움으로 가득차있었다. 걸어오다가, 분
교 운동장에 들어서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뛰어오다시피 분교를 향
하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들 엄청난 것을 목격한 사람들 같았다. 사람들이
서두르는 바람에 애들은 울고, 넘어지는 사람도 있고, 삽시간에 분교 운동
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제 다 왔으니까, 마지막까지 질서 지켜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이러다가 모두들 큰일 납니다!!!"

이들을 이끌고 있던 이 순경은 목청터져라 외쳐되었지만,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은 막무가내였다. 총을 들고 있던 마을 청년들은 최선을 다해 마을
사람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이미 마을 사람들의 두려움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까지 이른 것처럼 보였다.
분교에 있던 사람들까지 가세했지만, 해일처럼 밀려 들어오는 마을 사람
들에게는 어쩔 수 없었다. 분교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창문은 깨지고 난
리가 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최대한 빨리 분교안으로 들
어오려고 몸부림쳤다. 분교 앞에 서있던 나와 김반장은 사람들에 옆으로
밀려났다.
마을 사람들의 겁에 질려 분교 안으로 도망쳐오는 모습은 마치 굶주린 늑
대에 쫓겨 우리로 들어오려고 난리치는 양떼들을 연상시켰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그 늑대에게 갈기갈기 ㅉ겨나갈까봐...
너무 이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두려움에 떨며 분교안으로
들어오는지....
사람들은 그 난리를 치고 분교안으로 들어갔다. 워낙 좁은 분교에 한꺼번
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글자 그대로 생난리였다. 떠밀려나간 나는 마
침 옆에 있던 김반장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김반장 역시 아직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며, 이 순경을 찾
았다. 이 순경은 마을 사람들을 분교안으로 다 들여보낸 후 지친 표정으
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 순경과 같이 총을 들고 마을 사람들을 데리러
갔던 청년들도 두려운 표정을한 채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찌된 일인지 이 순경은 칼빈 총을 하나 더 들고 있었다. 나머지 청년들
은 지저분한 푸대하나를 들고 있다 우리앞에 내려놓았다. 언뜻 보니 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젊은이들은 지옥에 갔다온 사람들처럼 무시무
시했다. 김반장은 이 순경을 보고 물어보았다.

"수고했네..
그런데, 도대체 마을 사람들 왜 이런거야?
무슨 일 있었나?
그리고 정식이 그 친구 어디갔나? 화장실 갔나보지?
그 친구 총을 왜 자네가 들고있지?"

김반장의 질문에 이 순경은 목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겁에 질렸는지 아니
면 분노했는지 떨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이 순경의 대답을 들으면서, 청년
들이 가져온 푸대를 열어보았다. 처음에는 이 순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식이 그 친구는 저 푸대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 안에 든 것이 전부입니다....."

나는 푸대안을 열어보고, 온 몸이 얼어붓는 듯한 큰 충격을 받았다. 푸대
안에는 너덜너덜하게 찢겨나간 사람의 다리 한쪽이 들어있었다....

...그 끔찍하게 잘려나간 다리를 보는 순간, 나는 구역질을 느끼며 그 푸대
를 덮어버렸다. 이 순경의 말은 내가 놀라는 것에 게의치 않고 김반장에
게 보고를 계속했다.

"정식이 그 친구는 그 놈에게 당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우리 모두는 눈을 빤히 뜨고 당했습니다.
그 놈을 끝까지 쫓아 가서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
로 이리로 데리고 오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이 순경의 목소리를 분노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청년들은 겁에 질
림 모습이 역력했다. 김반장은 급박한 목소리로 이 순경에게 보고를 재촉
했다.

"반장님 말씀대로 우리는 마을을 돌면서, 마을 사람들을 차례로 합류시
켰습니다. 대부분 소문을 들었던지 무서워하던 차에 잘 되었다는 듯이
자발적으로 분교로 가는 것에 따라왔습니다. 사람들은 분교에서 먹고 잘
생각을 했는지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나왔습니다.
마을 어귀까지 다 돌고,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분교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는 10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비까지 와서 제각기 우산 쓰고 짐
도 들고 해서 여간 통제하기가 힘들었어요. 김반장님도 당부도 있고, 정
말 언제 그 놈이 나타날지 몰라 앞뒤로 사람들을 배치했어요. 제가 앞장
서고, 칼빈 총을 든 정식이가 뒤에 섰어요. 나머지 친구들은 몽둥이와 총
을 들고 마을 사람들 행렬에 양 옆에 섰습니다.
마치 전쟁때 포로를 후송하는 것처럼 마을 사람들을 호위하며 분교로 향
했죠.
제기랄! 반장님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정식이가 이렇게 된 것은 제 잘못입니다.
반장님이 그러셨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과수원 집은 피해서 오라고..
저도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죠. 하지만 그 과수원을 지나지 않고 오려면
한 20분은 돌아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그 살인마가 그 근처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 많은 사람앞에 나타
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버려진 집을 지나는 지름길을 택했
죠. 약간은 긴장되었습니다만, 우리는 총과 곤봉으로 무장도 했고 사람도
많아 아무 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수원을 지나려니 겁이 났습니다.
비오고 어둑어둑해지는 가운데, 보이는 그 집은 정말 섬뜩했습니다.
무슨 지옥의 문처럼 보였고, 그 집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을 생각하니 솔
직이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앞장서서 더욱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것이 실수였습니다.
선두에서 빨리 가니, 당연히 뒤에 따라오던 사람들은 더욱 처지게 되었
습니다. 더구나 노인분들은 더욱 쫓아오기가 힘들어졌고....
책임감이 강한 정식이는 맨 뒤에서 쳐져서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휴....
드디어 그 집을 앞을 다 지나게 되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아 안
도감까지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때 뒤쪽에서 '아악!'하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소리에 놀라 우왕좌왕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재치고 있는 힘을 다해 뒤로 뛰었습니다.
맨 뒤가 얼마나 쳐져있었던지, 뒷 사람들은 그제서야 과수원 집을 지나
가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달려왔습니다.
비명이 난 곳에는 석중이 할머니가 땅바닥에 주저 앉은채로 있었습니다.
석중이 할머니는 깜짝 놀랐던지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정식이는 보이지
도 않았고, 총만 근처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석중이 할머니는 떨리는 목
소리로 우리에게 자초지정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이 순..순경.. 정식...이이..느는...
어떤...사람....이.. 숲..속...에에..서.. 나...타...나...서
끌....고고....가갔아....'

석중이 할머니가 가르치는 쪽을 보니 숲으로 핏자국이 나있었습니다.
저와 중달이는 총을 들고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머지한테는 마을 사람
들을 지키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숲으로 뛰어들어갔지만, 빗물에 흘러가
는 핏자국만 보일뿐이지 정식이나 그 놈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한참을 정식이를 찾았지만, 결국 찾아낸 것은 이 다리 한쪽 뿐이었습니
다. 그 때 그 살인마를 지옥끝까지라도 쫓아가고 싶었지만, 나머지 사람
들이라도 안전하게 분교로 데려와야 했습니다.
간신히 마을 사람들을 진정시켜 여기 앞까지는 왔지만, 결국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은 분교를 보더니 앞다투어 뛰어들어 온 것입니다.
반장님, 정식이가 이렇게 된 것은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그 처벌은 제 손으로 그 놈을 잡아 죽일때까지 밀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이 순경의 얘기를 듣고 우리 모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또 한사
람의 희생자가 생긴 것이다. 김반장의 눈에는 이제 분노의 불이 타는 것
같았다. 그래도 김반장은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면서 얘기를 했다.

"이 순경,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고, 지금 당장은 이 끔찍한 살인마로 부터 마을 사
람들을 보호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야.
휴.... 이장님께는 내가 말씀드리지... 애지중지하던 외 아들이 그런식으로
죽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얼마나 충격이 클까...
이 순경은 이 친구들을 데리고, 마을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모두들 한 교
실로 모이게 해.
그리고, 휴대폰이나 외부로 연락할 만한 것 구해왔나?"

이 순경은 주머니에서휴대폰 하나를 꺼냈다. 하지만 전기가 끊어진지 벌
써 하루가 지나서인지, 휴대폰 밧데리는 거의 다 닳은 것 같았다.
그래도 그것이 이 고립된 마을과 외부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통신수단
인 셈이다. 김반장은 그 자리에서 즉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몇번을 시도한 후에야 간신히 통화가 된 것 같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 김종수 반장이요! 잘 안들리니까 크게 말해요!
지금 우리 내분리에 고립되어 있는데, 언제 구하러 올 거요!
뭐라고!!! 우리도 급하단 말야!!
사람들이 막 죽어간단 말야!!
헬기라도 보내줘!!!
지금 당장!!!
여보세요!! 여보세요!!!
제기랄!! 밧데리가 다 닳았잖아!!"

김반장은 휴대폰을 집어던질 기세로 욕설을 퍼부었다. 읍내로 부터의 구
조는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이 지역 전부가 침수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고지대인 이 마을에는 구조가 더욱 늦어지는 것 같았다.그 통
화내용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절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미치광이 살인마가 날뛰는 여기서 고립된 채 며칠을 더 버터야 된다니....
김반장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실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에 이장을 구석으로 데리고 가 정식이란 젊은이의 죽음에 대
해 말해주었다. 정식이는 이장의 외아들었던 것 같았다.
아들의 끔찍한 죽음에 대해서 들은 이장은 자리에서 무너지듯 쓰러졌다.
김반장은 사람들을 불러 이장을 교무실로 데려가 보살펴달라고 했다.
가뜩이나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 앞에서 이장마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
면 큰일날 것 같았던지, 김반장은 이장을 다른 방으로 옮긴 것이었다.
이 순경은 김반장의 말대로 마을 사람들 전부를 한 교실로 모이게 했다.
밖은 어느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전기가 안 들어오기 때문에, 분교 안에는 여기 저기 초를 켜 놓았다.
하지만, 어둠을 좇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촛불에 비친 그림자들
이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교실안에는 충격을 받아 교무실로 자리를 옮긴 이장과 부인, 그리고 그
사람들과 같이 있어주는 친구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모여있었다. 이 순
경과 젊은이 하나는 칼빈을 들고 복도에 서서 경계하면서, 교실안을 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겁에 질려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 하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김반장은 얘기하기전에 아이들은 옆교실
로 보내라고 했다. 갑작스런 부탁에 사람들은 웅성거렸지만, 김반장 말대
로 따랐다.
김반장은 복도를 지키고 있던 이 순경에게 마을 사람들 인원을 파악해 보
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야 호기심에 가득찬 마을 사람들 앞에서 얘기를
시작했다. 나는 정화씨 옆에 서서 그 얘기를 들었다.

"여러분들 중 대부분은 지금 우리 마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
실 것입니다. 한마디로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방금전 읍내 본청과 통화를 했는데, 이번 비로 워낙 많은 지역이 침수되
는 바람에 우리 마을이 구조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답니다.
결국 우리는 비로 인해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 일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마을에 고립된 것은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미치광이 살인마가 우리 마을을 배회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아직 그 놈이 누구이며, 왜 우리마을 사람들을 차례로 죽이는 지는 모릅
니다. 확실한 것은 그 놈은 매우 위험한 놈이며, 아직도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인을 멈추지 않고 더할 놈입니다.
더구나 그 놈은 사람을 곱게 죽이지 않습니다. 온갖 잔인한 방법을 사람
을 죽입니다. 쉽게 말해 미친 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치긴 했지만, 바보는 아닙니다. 이제까지 제대로 된 흔적조차 안 남기
고 그 많은 사람을 죽일때까지 잡히지 않은 것을 봐도 그렇고, 가장 중
요한 것은 갑자기 나타나 희생자를 도살하고 깜쪽같이 사라진다는 것입
니다.
저와 저기 일한씨가 그래도 그 놈에 대해 수사해서 어느 정도 밝혀내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것은 그 놈의 정체와 동기에 대해 알아보자는
것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 놈의 위협으로 피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따로 지내시게 되면, 그 놈은 활개치고 다니며 살인을 계속
해서 저지를 것입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외부와의 고립이 끝날때까지 여기모여 안
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가능하면 그 놈의 정체를 밝혀내고 더 이상의 살
인을 막는 것입니다.."

김반장의 말에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죽음같은 침묵이흘렀다. 모두들 겁
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김반장은 담담하게 얘기를 계속
했다.

"그래서, 제가 그 놈을 잡기위해 여러분에게 몇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중요한 얘기니까, 솔직이 대답하여 주십시오. 우리 모두의 목숨이 달렸다
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제가 알아낸 것에 의하면, 이번 살인은 일제 시대에 이 마을에
있었던 어떤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생긴 원한에 대한
복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유가 있어서, 그 사건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할아버지 때 이상부터 이 마을에서 쭉 살고 계신 분들은
손 들어주시겠습니까? 좀 자세하게 말씀드리면, 1910년대에 선대분들이
이 마을에서 살셨던 분들은 손 들어 주십시오?"

나는 김반장이 무엇을 알고 싶은지를 알 수 있었다. 김반장은 그 노인이
들려준, 그 버려진 집 주인에게 마을 사람들이 저지른 끔직한 범죄와의
관련성을 알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어
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웅성거리더니 한 두명씩 손을 들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고, 이주해왔기 때문에 해당하는 사람은 생
각보다 작았다. 10명도 못되는 것 같았다.
김반장은 한명, 한명 살펴보았다.
김반장은 자신이 생각했던 추리와는 다른 결과가 나와서인지 불만족스런
얼굴로 더 이상 없냐고 계속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더 이상 손을 드는 사람이 없자, 김반장은 실망스런 모습을 짓었다.
그때 복도쪽에서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고조 할아버지때부터 여기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소리나는 쪽을 보았다.
이장님이었다. 아들의 죽음으로 정신을 추스리기가 어려웠을텐데, 어느새
자기 자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큰 충격을 받아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들었
을 텐데, 이장이라는 책임때문인지 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이장은 모든 것
을 달관한 사람처럼 담담하게 말을 계속했다.

"반장님이 결과적으로 원하시는 답이 이것이라면 제가 알고 있습니다.
사과골 최씨네도 오래전부터 여기서 살아온 일가고, 무당네도 그렇고,
저기 동구밖에 사시던 어르신네도 그렇습니다. 말했듯이 저의 집도 그렇
습니다.
이 답이 맞습니까?
제가 말한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또 있습니다.
모두들 이번에 살해당한 것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김반장도 그렇겠지만, 나도 큰 충격을 받았다. 설마했는데, 우연치고는 너
무 기묘했다. 그 옛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이 그 후손들에게 피의
복수를 한다는 것인가....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나머지 희생자들은 무슨 관계인가?
김반장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 질문을 했다.

"이장님께서 지적하신 점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군요..
그런데, 나머지 희생자들, 그러니까 여관주인최성일씨, 정미소 김씨, 박
씨네 아이, 그리고 탈영병, 이 사람들도 여기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
입니까?"
"아닙니다. 모두들 이 마을 이주한지 10년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다들 외부에서 이 마을로 와서 정착해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시체로 발견된 탈영병은 어디서 사는 지도 모릅니다."

이장의 그 대답에 나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 살인범의 동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도 가장 타당성있던 동기라고 생각되던, 그 버려진 집에 얽혔던 원한
관계도 일부만 해당될 뿐이지 절대적인 진실같지는 않아 보였다.
김반장도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대화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마을 사람들의 인원을 파악하고 있던 이 순경이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김반장님!
큰일났습니다!
제 실수같은데, 정채석씨 가족들을 여기로 대피시키지 못했습니다.
마을 사람들 명단을 가지고 한명 한명 체크해가며 데려왔는데, 실수로
빠트린 것 같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 당장 가서 모셔오겠습니다...."

이 순경의 충격적인 얘기에 모든 사람들이 얼어붙은 듯이 조용해졌다.
정채석씨 가족이라는 얘기가 나오자, 모두들 술렁대었다.
살인마가 설치고 다니는 이 상황에 한가족만이 저 어둠속에 아무것도 모
르고 있다니...
나도 모르게 몸이 무르르 떨렸다.
김반장 역시 긴장된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 순경 확실한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리고 이장님, 정씨네는...."

이장은 김반장이 얘기를 끝마치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물어보는지 눈치를
챘는지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정씨네도 여기에 조상대대로 살고 있어요..."

그 말은 어쩌면 정씨라는 사람 가족도 그 살인마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더욱더 그 사람을 구하러 가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저 어
둠 어디선가 살인마가 희생자에 굶주린 상태에서 도사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 순경 혼자가는 것은 말이 안 되어 보였다. 나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 순경 자네 혼자 보낼 수는 없네.
여러분, 이 순경과 같이 가서 정씨네를 여기로 모셔올 분 계십니까?
한 두분정도 자발적으로 나오셨으면 하는데...
물론 총과 손전등은 드립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김반장이 얘타게 마을 사람들에게 외쳤지만,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행여 눈이라도 맞주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죽음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김반장은 다시 한 번 재촉했다.

"이런 때 정씨네 가는 것이 꺼려지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같은 마을 사람끼리 이럴 때 모른척 할 순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꿈쩍도 안하고, 오히려 고개만 더욱 숙여질 뿐이었
다. 아무리 살인마가 무섭다고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너무
이상했다. 이 마을 인심이 이정도 였나...
자신을 위해, 같은 마을 사람이 죽음에 위기에 놓여도 모른 척하다니...
어색하고 지리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옆에서 보기에도 민망한 분위기였다.
나는 속에서 뭔가 울컥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을 사람들의 이런 행위가
경멸스럽고, 불쌍해 보였다. 화가 났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며 자원했다.

"제가 이 순경을 도와서 갔다 오겠습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그들의 눈에는 자원한 나를 보고 안도
의 표정이 보였다. 자기들 짐을 덜어주었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
한 점은 그 눈빛에는 동정과 비웃음도 섞여 있는 것이었다.
정화씨는 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애절한 눈으로 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김반장은 복잡한 표정을 띠고,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내게 충격적인 말을 해주었다.

"우선 일한씨, 자원해 주어서 고마워요...
그런데, 일한씨는 모르고 자원한 것 같으니, 내가 해줘야 할 말이 있어
요. 우리가 왜 정씨네 가는 것을 그렇게 꺼려하는 줄 알아요?
정씨네가 고깃간을 하고 있거든요..
이렇게들 무서워하는 것이 고깃간과 무슨 관계냐고요?
다른 게 아니예요..
이번에 그 살인마에 의해 죽어나간 시체들이 전부
정씨네 냉동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죠..."

...김반장의 그 말을 듣고, 소름이 쫙 끼치며 가슴이 덜컹 했다.
그렇게 처참하게 살해된 시체들을 보관하는 곳으로 가야한다니...
자신도 없으면서, 객기를 부린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놀란 표정으로 멈칫하고 있는 나를 봤는지, 김반장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이런 것은 경찰이 할 일이니까, 나와 이 순경이 갔다오도록 하지요..
여러분들은 이장님의 지시를 따라 주십시오.."

김반장이 다녀 오겠다는 말에 마을 사람들의 더욱 동요했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 자리를 비운다는 말에 겁들이 난 것 같았
다.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점점 커지고, 이윽고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
했다.

"김반장님은 여기 계시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요..."
"김반장님은 가지 마시고, 이 순경만 가도록 하지요..."

마을 사람들의 그런 반응은 이해할 수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더욱 싫어
졌다. 이장도 나서서 김반장을 만류했다. 자연히 시선은 다시 내게로 돌아
왔다. 솔직이 겁나고 무서웠지만, 여기서 발을 뺄 수는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김반장님 대신 가기로 하죠.
반장님, 제가 그래도 그 놈에 대해 약간은 알고 있으니, 이 순경 혼자가
는 것 보다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내 말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다시 떨구어졌다.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느
끼는 것 같아 보였다. 정화씨는 나의 소매를 붙잡고 나지막히 그러나 단
호하게 말했다.

"일한씨, 거기 왜 가는 거예요?
그 일은 이 마을 사람들 일이잖아요? 이 사람들 일인데 왜 일한씨가 나
서는 거지요..
일한씨도 지금 밖에 어떤 것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잖아요.
이 일은 장난이 아닌 것 같아요.
혹시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게 되면 어떡할라고요.
그건 정말 쓸모없는 죽음이예요.
그런 잔혹한 살인마는 피해야 해요...."

정화씨가 나를 걱정해주는 것에 고마왔지만, 이왕 뱉은 말을 여기서 줏어
담을 수는 없었다. 약간 후회는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반장은 내가 가겠다는 말에 너무 미안해 했다. 자기 마을 일인데 아무
관계 없는 외지인이 위험한 일에 나서는 것이 부끄럽고 고마운 모양이었
다. 그래서 인지 마을 사람들을 재촉해 한명만 더 나오라고 했다.
결국 아까 이 순경을 따라 마을을 돌았던 젊은이 중에 한 명이나섰다.
그렇게 해서, 이 순경, 박경규라는 젊은이, 그리고 내가 고깃간 정씨네 가
족을 데려 오기로 했다. 정씨네 가족이 아직 살아있다는 가정하에서...
김반장의 주도로 우리는 가져갈 것을 준비했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빨
리 여기를 떠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우선 우비와 손전등, 그리고 총들이었다.
세자루 있는 칼빈 총을 다 들고 갈 수는 없어, 한 자루는 남기고 두 자루
만 들고 가기로 했다. 한자루는 당연히 이 순경이, 나머지 한자루는 내가
박경규씨에게 양보했다. 대신 나는 학교안에 있던 나무로 된 야구 방망이
를 들었다. 총에 대한 혐오증이 있는 나는 오히려 야구 방망이가 좋았다.
야구 방망이를 집어드니, 몇 년전 준수와 함께 겪었던 사이비 광신자들과
의 사투가 생각났다. 그때도 야구 방망이가 내 생명을 구해주었다.
등 떠밀리듯이 신속하게 준비한 우리들은 한손에 손전등과 다른 한손에
무기를 들고 분교를 나가게 되었다.
김반장은 우리 셋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모두들 조심하세요.
여러분들이 가는 것은 그 놈을 처치하거나 잡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세요. 정씨네 가족을 안전하게 여기로 데려오는 것이 여러분
들의 임무입니다.
이 순경, 자네 너무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게 행동하게...
실수에 대해 너무 자책하거나, 그것을 만회하기 위한 무모한 행동같은
것은 삼가고..
지금 비가 오고 어두운 것을 감안하더라도 1시간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거요...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아닙니다.
부디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나는 김반장에 마지막에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를 대충 눈치채었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겨 돌아오지못한다해도, 다른 사람을 보
내 우리를 찾아나설 수는 없을 것이며, 찾아나설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적
어도 동이 트기 전까지는.... 김반장은 솔직이 그 얘기를 해주려다가, 말을
돌린 것 같았다. 정화씨는 문까지 쫓아나와 이상할 정도로 나를 만류했다.

"일한씨, 가지 마세요!
제 옆에 있어서 저를 보호해 주셔야죠..
무슨 일로 남의 일에 자기 목숨을 거는 거예요...
제발 부탁이예요.."
"정화씨 아무 걱정 마세요. 금방 다녀올테니까...
정화씨는 여기 김반장이 잘 돌봐주실께예요.
아무일 없이 돌아와, 속썩이는 재원이를 찾아내야줘...
김반장님, 가능하면 돌아와서 라면이라도 하나 먹게 준비좀
해주시겠어요. 한시간 후면 배고파 질 것 같네요..."

나는 가볍게 정화씨를 달래고, 우비를 뒤집어 쓰고 이 순경의 뒤를 따라
나갔다. 김반장은 정화씨는 걱정말라며 여전히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우리
를 배웅했다. 등뒤로 정화씨가 말했다.

"일한씨, 조심하세요..
설사 그 살인마와 마주치더라도 다른 생각하지 마시고 도망치세요...
아무리 놀라더라도 다른 생각마시고 도망치기만 하세요...
부탁이예요... 제발 부탁이예요..."

정화씨는 듣기 힘들정도로 나를 걱정해주었다. 너무 도망가라는 것을 강
조해서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때는 정화씨가 왜 그런 말을 했는
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여하튼 정화씨의 애절한 부탁에 가슴이 좀 아련
해졌다.
밖에는 많이 누그러졌다 하더라도, 아직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분교 운동장을 가로 질러 나갔다. 분교 운동장을 나
와서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문앞에는 정화씨와 김반장이 서 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어주고 길을 나섰다.
분교 운동장을 벗어나자 마자, 우리 모두는 칠흙같은 어둠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골이라 밤이면 가뜩이나 어두울 텐데, 마을 전체가 정전이어 빛
이라곤 분교에서 세어나오는 촛불밖에 없었고, 별빛이나 달빛은 구름에
가여 보이지도 않고, 글자 그대로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이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공간은 단지 세명의 손전등이 비추는 범위가
전부였다. 한치 앞이 안 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손전 등을 비춰볼ㄸ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 것 같았
다. 어둠 속에서 불빛안으로 뭔가 무시무시한 것이 갑자기 나타날 것 같
아서 였다.
앞장서 가던 이 순경도 두려움을 느꼈던지 발걸음을 천천히 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일한씨라고 했죠..
학생이시라며, 왠 일로 여기에 오셨어요?
참 재수가 없으신 것 같아요.. 하필 이럴ㄸ 이 마을에 오시다니..."
"제 친구를 찾으러 왔어요.
이 마을에 왔다가 사라진 것 같아서요... 그러다가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된 것이죠...."
"아, 그래요... 그래서 김반장님이 도와주셨군요...
근데 일한씨는 아실 것 같아서 물어보는 것인데, 반장님이 말씀하시던
그 버려진 집에 얽힌 얘기가 도대체 뭐예요?
일가족 살인 사건 말고 다른 사건얘기 같던데, 이번 살인마 놈과 어떤
관계라는 것인지, 도무지 말씀을 해주셔야 알죠..."

이 순경이 그 사건에 대해 묻는 것이 좀 이상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그
사건에 들은 사람은 김반장, 정화씨, 그리고 나 이 세사람뿐이었다. 그러
니 이 순경이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김반장이 마을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이 순경에게 얘기해 주는 것에 대해
좀 망설였다. 하지만 다 같이 위험을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대충 그 집에 있었던 사건을 얘기
해 주었다. 한 독립투사의 가족이 마을 사람들의 이방인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와 배척으로 끔찍하게 된 사건을... 그리고 그때 가담했던 사람들의
후손들이 희생되고 있다는 얘기도 해 주었다.
심각하게 듣고 있던 이 순경과 경규씨는 그 얘기를 듣고 당황하는 것 같
았다. 서로 눈을 맞추치고 잠시 멈칫했다. 그러더니 이 순경이 한숨을 내
쉬며 한마디 말했다.

"일한씨가 말해준 얘기대로라면... 휴...
저와 경규 이 친구도 그 살인마의 살생부에 올라 있겠군요...
저도 그렇고 경규도 그렇고 이 마을에서 대대로 살고 있었으니까요...
아마 그 살육에 가담했다면, 우리 증조 할아버지쯤 되었겠죠...
그런데 어떻게 그때 원한을 이제와서 복수하는 것일까...
좀 이해가 안되네요..."

이 순경에 질문에는 나도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사이에 꽤 많이 걸은 것 같았다. 수그러지던 빗발은 다
시 거세졌다. 비가 많이 내리니 시야는 더욱 짧아지고, 앞이 제대로 보이
지 않았다. 비소리를 인해 주변에 아무 소리도 잘 들리지 않게 되자 더욱
무서움이 느껴졌다. 정말 바로 옆에서 그 놈이 튀어나와 낫을 휘둘러도
맥없이 당할 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뭔가가 우리를 저 어둠너머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끼마저 들었다. 그런 느낌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
었는지, 이 순경과 경규씨도 자주 옆을 보거나 뒤를 돌아다 보고 손전 등
을 비춰대는 것이었다.
이 순경은 칼빈 총이 비에 젖는 것이 신경쓰이는지, 가능한 총을 우비속
에 집어넣고 걸으려 했다. 나는 야구 방망이의 묵직한 촉감에 위안을 하
며 이 순경과 경규씨의 뒤를 따랐다.
빗발은 더욱 굵어졌다. 가뜩이나 질퍽거리는 길은 완전히 작은 개울이 되
어서 걷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나는 빗물이 안경을 가려, 자꾸 안경랜즈를
부벼야 했다. 우리는 가다가 진흙에 미끌어져 넘어지기도 했다.
그런식으로 비를 맞으면서 걷다 보니, 모두 금방 지쳤다.
숨이 헉헉하고 차오를 때였다.

"저 언덕위로 올라가면, 바로 옆이 정씨네입니다.
이제 좀 긴장해야 할 것 같네요..."

이 순경이 나지막하지만 긴장된 목소리로 얘기하며, 우비 안에서 칼빈 총
을 꺼내 두 손에 들었다. 마치 군인이 수색정찰하는 자세로 총을 들고 손
전등은 허리에 찼다. 그러고는 경규씨보고 불빛을 비추면서 앞장서라고
했다. 이 순경이 이제 부터 긴장해야 할 것이라고 한 말은 솔직이 필요없
는 말이었다. 밖으로 얘기는 안했지만, 우리 모두는 분교를 나서면서 계속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도, 우리는 천천히 사방을 경계하는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50미터도 안되는 언덕이었지만, 한참을 걸어올라간 것 같다.
이윽고 언덕위에 올라서는 순간, 사방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번개가 친 것이다.
그 짧은 순간 정씨네 집이 보였다.
중앙에 고깃간 겸 집이 있었고, 별채로 냉동고롤 생각되는 작은 건물이
있었다. 몇십분의 일초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가 받은 정씨네 집의 모습
은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그런데 그 강렬한 인상에 뭔가 이상한 것이 느
껴졌다. 잠시 생각해보니 그 이상한 점을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냉동고로 쓰이는 창고문이 활짝 열려져 있던 것 같았다.
우르르 쾅쾅하고 천둥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떨리는 가슴속까지 울렸
다. 우리는 정씨네 집으로 다가가며 소리높여 정씨를 불렀다.
하지만 천둥소리와 빗소리에 묻혀 재대로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온 신경이 팽팽하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 집 역시 정전이 된 상태니 불은 켜져 있지 않았다.
손전등 불빛이 비춰질 정도로 다가간 우리는 정씨네 집을 향해 불을 비추
어 봤다. 불빛을 비추다 나는 발밑으로 흐르는 빗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빗물 색깔이 붉게 보인 것이었다.
섬ㅉ했다. 나는 천천히 그 빗물이 흐르는 쪽으로 불빛을 비추어 봤다.
그 불빛에 끝에 보이는 것은 문이 활짝 열린 창고가 보였고, 문틀 사이로
피투성이가 된 사람의 팔이 보였다.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이 순경도 그것을 보았지만, 그걸 애써 무시하고 정씨네 집을 향했다. 이
순경 생각은 우선 정씨네 가족의 생사부터 알아내고 구해야 한다는 것 같
았다. 나는 자꾸 사람의 팔이 걸쳐 놓여진 창고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 순
경 뒤를 따라갔다.
우리는 신발을 신을 채로 거의 뛰다시피하면서 정씨네 마루에 올라섰다.
그리고 이 순경이 안방같이 보이는 방을 향해 계속 불러댔지만 아무 소리
도 안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이 순경은 한숨을 들어마시더니, 문옆에 바짝 붙어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나도 모르게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는 천천히 손전 등의 불빛을 방안으로 비추었다.
그 불빛에 비친 모습은 처음에는 무엇인 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몇초 후에 그 모습이 무엇 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충격
으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경규씨와 이 순경도 '아악'하는 짧은 비명소
리를 내었다.
그것은 피 범벅이 되고 형체를 알 수 없게 ㅉ겨나간 시체, 아니 고깃덩이
라고 하는 편이 더 적당한 묘사일 것이다, 들의 모습이었다. 방안은 온통
피칠이 되있고, 정씨 일가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새빨간 핏덩이로 변해있
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정씨로 보이는 사람이 두 팔을 쫙 벌린채로 천장
에 매달려 있는데, 상체만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하체는 방 한 구석에 던져져 있고...
후레쉬 불빛에 비친 정씨의 얼굴은 공포로 심하게 일그러진 채였다.
정씨네 방안 모습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나는 너무 끔찍한 모습에 충격을 받아 덜덜 떨었다.
그래도 우리 중에 가장 먼저 충격에서 벗어난 것은 이 순경이었다.
역시 경찰은 다른지,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나와 경규씨를 정신차
리게 했다.

"휴... 지독한 놈인군... 놈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일거야....
경규야, 일한씨, 충격 받은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생존자가 있나 방에
들어가 살펴봐야줘... 자 자... 빨리..."

그러면서 얼이 빠져 있는 우리를 재촉해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방에 들어가는 것조차 무서웠다. 하지만, 이 순경과 경규씨가 들어가
는데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갔다.
방안은 피비린내가 가득차있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었다.
이 순경은 그 상황에서도 총으로 시체인지 고깃덩어린인지 분간이 안가는
부위들을 치워가며 생존자를 찾았다. 문옆에는 경규씨가 더 이상 들어오
지 못하고 서있었다.
나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으며, 방안을 살펴보았다.
최대한 객관적인 눈으로 그 지옥을 보려고 애썼다. 사람의 상체와 하체를
자를 정도라면 과연 범인이 보통 사람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단서 될만한 것을 찾아보려고 방안을 둘러보았지만, 피 때문에 보이
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손전등 불빛에 뭔가가 보였다.
저쪽 구석벽에 피로 뭔가가 써있는 것 같았다. 언뜻 보기에는 피가 튀긴
것 같이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글씨 같은 것이었다.
피로 쓰여진 글씨를 읽는 순간, 나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나를....죽여줘.....제발.....끝이....없어....'

누군가 피로 쓴 것이었다. 그 놈이 쓴 것인지, 고통에 못이긴 정씨가 쓴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 순경도 그 글씨를 보았지만, 그 의미를 알아
차리지 못했다.
시체를 조사하던 이 순경은 무릎을 꾸부려 피를 만져보더니 얘기했다.

"정씨네 가족 모두가 당했어요.
제기랄!
피를 만져보니 따뜻한 걸 보니 살인은 바로 전에 자행된 것 같아요.
조심해야 겠어요.
어쩌면 범인은 바로 이 근처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이 순경이 그 말을 끝마치자 동시에, 나는 뒤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밖에는 번개가 쳤는지 번쩍했다.
그 짧은 순간 방 밖에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나는 그것을 보고 견딜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그 시커먼 그림자는 한 손에 낫을 들고 있었다.
그 낫으로 방옆에 힘겹게 기대어 있는 경규씨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나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경규씨! 위험해요!!!!!!!"

하지만 늦었다.
경규씨가 내 말을 듣고 돌아보는 순간,
순식간에 내려쳐진 낫은 경규씨의 머리와 몸통을 분리했다.
경규씨의 머리는 피를 튀기며 떨어져 나갔다.....

....통통거리며 떨어진 경규씨의 머리가 내 발밑으로 굴러왔다.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움직일 수 없었다. 손이 떨리는 바람에 손전
등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 순경도 많이 놀랐는지 손전등으로 그 시커먼
것에게 비추려 했지만, 손이 떨리는지 불빛도 막 떨렸다.
그 놈의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보였
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이 순경은 칼빈 총을 들어 그 놈을 겨누려고 했지만, 한 손에 든 손전등
때문인지, 당황해서 그런지 총을 제대로 겨누지 못하고 있었다. 이 순경이
필사적으로 총을 장전하려고 해서 그런지, 다른 한손에 들린 손전등이 심
하게 흔들렸다. 그래서 온 방안은 흔들리는 불빛으로 가득차고 어지러웠
다. 방안은 지옥같은 아수라장이었다.
언뜻 언뜻 비치는 것은 피범벅이 된 시체들이고, 파리하게 질린 이 순경
의 얼굴, 그리고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였다.
이 순경은 총을 제대로 잡으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
다음 순간 이 순경도 결국 손전 등을 떨어뜨렸는지, 방안은 갑자기 두줄
기 손전등 불빛만이 밝히고 있게 되었다.
나는 벽에 등을 붙이고 문쪽을 뚫어지게 보았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옆에서 이 순경이 거친 숨소리를 내
면서 노리쇠를 잡아 당기며 총으로 앞을 겨누었지만, 역시 그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 놈은 확실히 방안으로 들어왔지만, 손전등이 비치는 범위안에는 보이
지 않는 것이었다.
방안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귀를 기울였지만, 밖에서 떨어지는 빗소
리에 가려 아무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1미터 전방앞에 뒹굴고 있는 손전등을 보고 집으려 했다. 야구 방망
이를 꽉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앞을 쳐다보며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최대한 빨리 손전등을 잡았다.
다행히 내게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손전등을 잡아채자 마자 주위를 재빠르게 비추어봤지만,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하고 옆에 있던 이 순경쪽을 비춰보았다.
무시무시한 것이 보였다.
이 순경 앞에는 그 놈이 낫을 들고 이 순경을 겨누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던 이 순경도 내가 빛을 비추는 바람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
너무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이 순경은 들고 있는 총의 방아쇠도 당기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할 겨룰도 없이 들고 있는 야구 방망이로 낫을 들고 있는 그 놈
의 손을 쳤다. 한손으로 휘둘렀기 때문에 힘이 충분히 실리지 않았지만,
그 놈이 들고있던 낫을 정통으로 맞추었다.
그 낫을 그 놈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몸을 제대로 일으키고 방망이
를 제대로 쥐고 그 놈을 향해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 놈이
한손으로 나를 쳤다.
무시무시한 충격이 느껴지며, 내 몸은 붕하고 공중으로 떴다.
다음 순간 다시 한 번 등에 큰 충격을 느끼며 벽에 부딛치고 떨어졌다.
아찔하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질어질한 내 눈에는 비친 것은 이 순경이 총을 쏘려고 하다가 그 놈에
게 들려 저쪽으로 던져지는 것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던져진 충격이 남았는지 몸이
말을 안 들었다.
나는 양손을 휘저으며 떨어진 손전등을 들어 비추어보았다.
그 놈은 저쪽에 쓰러져있는 이 순경에게 휘적거리며 다가갔다.
이 순경도 던져진 충격에 아직 회복되지 않았는지 앉은 채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이 순경에게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이 순경은 처절할 정도로 정신을 추스르려고 했지만, 그 놈이 더 빨랐다.
그 놈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 순경의 발목을 잡아서 들어올렸다.
순식간에 이 순경은 뒷다리를 잡힌 개구리처럼 거꾸로 들어 올려졌다. 그
놈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그러고는 몸부림치는 이 순경을 끌고 방밖으로 나갔다.
내가 겨우 몸을 일으켰을때는, 이미 그 놈이 이 순경을 끌고 방밖으로 나
갔을때였다.
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다.
나는 그 놈의 얼굴은 커녕 입고 있던 옷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나는 손전등을 들고 이 순경이 떨어뜨린 총을 집어 들었다.
최대한 빨리 방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그 놈은 멀리 못 갔다.
이 순경은 방밖으로 끌려나가다 경규씨가 떨어뜨린 총을 집어들었는지 한
손에 총을 들고 있었다.
진흙투성이 마당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이 순경은 총으로 그 놈의 등을
쏘려고 했다. 나는 생각할 새도 없이 들고 있던 이 순경 총으로 그 놈을
겨누었다. 손이 덜덜떨려 제대로 겨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었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강한 반동이 느껴졌다.
이 순경을 끌고 가던 그 놈이 멈칫거린 것을 봐서는 명중한 것 같았으나,
아무렇지도 않게 이 순경을 끌고 갔다.
나는 비맞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 놈의 뒤를 따라갔다.
이 순경은 겁에 질렸지만, 온갖 욕설을 그 놈에게 퍼부으면서 필사적으로
바둥거렸지만 그 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놈은 무슨 이유인지 이 순경은 끌고 시체들을 보관해 놓은 창고로
들어갔다.
나는 그 놈의 뒤를 따라 그 창고까지 따라갔으나, 문앞에 설 수 밖에 없
었다. 그 어두운 곳에 따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솔직이 무서웠다.
창고안에서는 이 순경의 처절한 소리가 들려왔다.

"개새끼, 죽어라! 죽어!
이 개새끼, 죽여버릴꺼야! 죽어!
죽어! 죽어!!!!!"

욕과 비명 소리와 함께 몇발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시체들의 창고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총소리가 한 번 들리더니, 창고안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긴장된 채로 총을 창고안으로 겨누며, 그 안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
다. 칠흙같은 암흑속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나 소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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