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갈족은 누구일까?...1

미연시다운족 작성일 07.02.01 17: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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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어느정도 말갈에 대해서 접근해볼수 있는 문제이고.. 아직도 말갈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는 만큼 속단하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합니다.
말갈에 대한 또다른 지식이 되시기를..

삼국지 읍루전과 삼국사기의 숙신

말갈족에 대해서 간단한 글을 올리습니다.
3년전에 써놓고도 아직까지 활용못한 글인데,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나서 올려보겠습니다. 글 전체는 아니고, 부분부분 떼내어 만주의 말갈부분에 대해서 이해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말갈은 만주와 한반도에 살았는데, 한반도의 말갈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이것은 다음에 한번도 내 생각을 정리한 후에 올려보겠고, 우선은 만주의 말갈에 대해서만 올려보겠습니다.
물론 말갈에 대한 완전한 논문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몇가지 빠진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말갈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가지는데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말갈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유념해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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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말갈을 중국 기록에서 찾아보면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로 시대마다 서로 다르게 부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말갈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들의 선조라고 여겨지는 부족들에 대한 기록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지』〈읍루(挹婁)전〉으로 276자 분량이다. 『후한서』〈읍루전〉은 232자 분량으로 『삼국지』를 거의 옮겨 적어 사료(史料)적 가치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 기록들은 『위략(魏略)』이란 책을 많이 인용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책은 245년 위(魏)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환도성까지 쳐들어 올 때 얻었던 동방사회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여기서 읍루는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 여리 밖에 있는데, 큰 바다에 닿아 있으며,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고 있다고 하며, 언어가 부여, 고구려와 다르다고 했다. 읍루인은 숲에서 살면서 돼지치기를 하고, 동굴에서 주거생활을 하는 동방지역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종족이라고 했다. 화살과 적색 옥, 담비가죽이 특산물이며, 옛 숙신의 나라라고 했다. 무척 추운 곳에 사는 이들은 대대로 부여에 굴복한 종족이었는데, 부여가 세금과 부역을 무겁게 물리자, 서기 220~226년 사이에 반란을 일으켰고, 부여가 이를 정벌하였지만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고 했다.

이들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숙신(肅愼)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태조대왕 69년(121) 왕이 부여에 가서 태후묘(유화부인의 묘)에 제사를 지내며 머물 때 처음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는 존재로 숙신이 처음 등장한다. 숙신의 위치는 부여의 동쪽인 지금의 우수리강 유역이나 삼강평원지역, 연해주북부 지역을 포함한 흑룡강 하류일대로 볼 수 있겠다. 이곳은 삼림이 우거져 도시가 발달하기 어렵고, 부족 집단이 흩어져 살기에 좋은 지역이다. 지역 내 넓은 평야지역에서는 농사도 지었던 것 같다.

태조대왕이 부여에 가서 고구려의 위세를 과시하자, 부여의 지배를 받던 숙신도 고구려에게 붉은 여우 가죽과 흰매, 흰말을 바치러 왔다. 하지만, 이들이 부여의 지배를 벗어난 이후에는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기도 했다. 서천왕 11년(280)에 숙신이 공격해오자, 고구려에서는 왕의 동생인 달가를 보내 숙신의 추장을 죽이고 적 600가구를 포로로 잡아와서 부여 남쪽으로 옮기고 부락 6~7개소의 항복을 받아 부용(附庸-속민)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고구려는 숙신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된다. 고구려는 이들을 다스리기 위해 동북쪽의 큰 성인 신성(新城)에 왕이 직접 행차를 하기도 하고, 달가로 하여금 숙신부락을 지배하도록 했었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영락 8년(398)에 왕이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식신(息愼) 지방을 관찰 순시하였고, 막□나성, 가태라곡의 남녀 삼백여 명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식신은 고구려에게 조공하고 자신들 내부의 일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식신은 강원도 지역에 있던 예(濊)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이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만약 강원도 지역의 예를 지칭했다면, 『삼국사기』에 표현된 것처럼 말갈로 기록했거나, 아니면 『삼국지』의 기록대로 동예나 예로 표시했을 것이다. 또 『릉비』에 광개토대왕이 자신의 무덤을 수묘해 줄 예(穢)족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따라서 식신은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고구려 동북쪽에 위치한 숙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여기서 고구려가 이들에 대한 행동이 『비문』의 다른 기록처럼 정벌한 것이 아니라, 관찰 순시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숙신은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세력으로 정벌의 대상도 아닌 셈이다. 즉 이들은 영락 20년에 조공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이 군대를 보내 토벌한 동부여보다 더욱 고구려에 굴복한 존재였었다.

김용만 우리역사연구소장 글...
-다음카페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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