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다음의 기록은 순서 상으로는 『진서(晋書)』〈숙신(肅愼)전〉이 있다. 『진서』는 456자 분량으로 『삼국지』의 자료를 비롯해서 『숙신국기(肅愼國記)』『업중기(業中記)』등을 인용하여 『삼국지』보다 다양한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 읍루 대신 고대 중국문헌에 나오는 숙신으로 그들을 칭하고 있다. 하지만, 『진서』는 640년경에 만들어진 것이라 당시의 정보보다는 후대에 편집된 내용이 상대적으로 많아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
이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담은 책은 554년에 쓰여진 『위서』「물길(勿吉)전」이다. 전체 624자 분량의 대부분이 북위에 온 물길의 사신인 을력지(乙力支)를 중심으로 한 사신왕래 기사와 이들이 가져온 정보다. 『삼국지』 내용도 일부 반영되어 있다. 을력지가 북위에 온 것은 470년대이고, 위서에 기록된 물길의 사신은 540년대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물길에 대한 매우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위서』에 따르면 이들은 단지 고구려 북쪽에서 주변의 작은 부락민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던 세력에 불과했다. 『위서』에 등장하는 물길 주변에 12개국이 있어 이들이 각기 사신을 북위에 보냈다고 하는데, 이들 중에 대막로국(大莫盧國)은 부여의 후예인 두막루국(豆莫婁國)을 지칭하며, 구불복국(具弗伏國), 필려이국(匹黎尒國), 발대하국(拔大何國), 욱우릉국(郁羽陵國)은 고구려에 의해 붕괴된 거란8부의 일원인 부족들로 물길 부락이 크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물길의 사신을 통해 고구려 세력권 내부에 여러 다양한 부족들이 있고, 그들이 때로 독립의사를 갖고 있음을 알고 기록한 정도이지, 중국인들이 이곳까지 와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사정을 알아간 것은 아니다. 중국인들에게 고구려 내부를 통과해서 동류송화강, 삼강평원, 우수리강 유역까지 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길(勿吉)이 북위에게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함께 공격하자는 제안을 해온 사실이었다. 고구려와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북위였지만, 내심 고구려를 견제하고 있던 터라 물길의 제안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하지만 물길의 제안은 북위로부터 거절되고 만다. 물길이 고구려를 견제할 만한 세력이 못된다고 북위에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길은 문자명왕 시기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일시 완전 제압을 당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도 틈틈이 북위 등에게 사신을 보내나, 강력한 세력이었다고 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