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의 묘한 낙서

꼴통돼지 작성일 07.03.20 07:3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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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민이가 이 재수없는 화장실을 오게 된 건 순전히 그의 직업때문이었
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그는 조그마한 무역회사에서 영업을 맡고 있
는데 그 영업이라는 것이 외국인들 접대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이 화장실에 오게 된 이유와 무슨 관계가 있는고 하니...

우리나라 영업중... 접대라는 것에는 꼭 술이 들어가게 마련이고 그 놈의
술이 형민의 허약한 위장과 창자를 더욱 괴롭혀 심심하면 설사가 주르륵
나오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급하면 눈에 띄는 아무 화장실에나 드나
드는 것이 그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이 화장실도 그런 이유에서 오게
된 것이다.

즉...

이 화장실은 현재 형민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 지하 1층에 위치한... 그
러니까 공용 화장실이라고 부를만큼 개방적인 곳인데... (두칸짜리  자그
마한 화장실이며, 흔히 볼수 있는...)

요즈음 더욱 잦아진 접대... 그러니까 연일 연거퍼 먹은 술때문에 찌들대
로 찌들은 그의 위장을 며칠 동안만이라도 공복으로 달래지는 못할 망정
또 다시 부어들인 소주 몇잔이 그가 사는 오피스텔 5층까지 올라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오늘 밤,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자가용을 간신히 몰아 오
피스텔 건물 앞까지는 잘 도착했는데 내리자마자 창자가 요동을 치며 금방
이라도 누렇고 묵직한 것이 쏟아져 나올 듯이 엉덩이 쪽이 욱씬거렸던
것이다.

결국 형민은 큰게 튀어 나오려는 거스리지 못할 다급함 때문에 어기적
거리는 걸음으로 평소 지나다니며 보기만 했던 바로 이 화장실에 오고
만 것이었다.

처음 어두 컴컴한 복도 끝에 위치한 (지하 1층은 창고처럼 쓰는 곳이었다.)
이 화장실의 퇴색한 문짝을 보자 다급함이 조금은 수그러들기도 했다.
(천장의 전등은 이미 깨져 불도 들어오지 않았고 밖의 외등 불빛으로
간신히 화장실 내부가 보였기에... 왠지 두려움과 무서움이...)

그러나 이곳에서 해결하지 못했다가는 초등학교때 단 한번 저질렀던 사건..
(옷을 입은 채 똑바로 서서 큰 것을 본다는... 어마어마한 낭패감과
부끄러움...)을 다시 재현할까봐 무작정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누구나 그렇듯이 평소 어두운 화장실에 혼자 들어가서 일을 본다는 것은
무척이나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물론 급한 마음에 떨리는 손으로 바지를
내리고 좌변기에 앉아 '뿌지직~'하는 시원한 소리와 향긋한 냄새를(?)를
느낀 후에 말이다. (그전까지야... 급한 마음에 이것저것 생각할 틈이
없으니...)

형민도 물론 같았다. 처음에 머리속에는 오직 일을 치루어야겠다는 간절
함으로 꽉차서 잘 확인도 안하고 화장실로 뛰듯이 들어왔지만 어느정도
아픈 배가 진정되자 변기에 덩그마니 앉아 어둠 속에서 힘만 잔뜩 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애당초에는 급한대로 한, 두덩이만 변기에 떨구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처음 화장실로 들어올 때부터 형
민의 주머니에는 휴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에 대한 대비책이
영 없는 것도 아니었다.

종종 일어나던 일이었기에 (아까도 말했지만... 장이 약한 그로서는 설사
가 3일에 한번 꼴로 나왔으므로...) 밑을 닦을 것이 없다해도 그 대응책
은 얼마든지 있었다.

즉, 변기 주위에 놓인 휴지통에서 남이 한번 사용한 휴지 중에 깨끗한
것을 잘 골라 사용한다든지 재수가 좋으면  남이 보던 새 신문이 화장실
에 놓여 있을 수도 있고... 또는 수도가 화장실 안에 같이 있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깜깜해 잘 안보여도 두눈을 크게 뜨고 혹시라고 그런 행운이 자
신에게 올까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버린 휴지나 신문, 수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점점 초조한 마음에 변기에서 반쯤 일어나 한참을 고민
했다. 그냥 대충 말리고 나가 집에 가서 새 속옷으로 갈아 입을까 아니
면 손으로라도 해결을 할까 하고...

마침내 형민은 대충 말리고 집으로 올라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담배나
한대 피울 셈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순간 화
장실 왼쪽 편 벽에 붉은 글자로 어떤 낙서가 씌여 있는 것이 눈에 '확'
띄었다.

마치 묽은 잉크로 쓴 것처럼 글자는 아래쪽으로 흘러 얼룩덜룩했고 그 내
용 또한 낙서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었기 때문이었는데...  까짓거...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편히 생각하고 이 글이나 다 읽어야겠다고 다짐하
며 혹시라도 읽는 도중 누군가 들어와 새하얀 휴지를 반쯤 뜯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졌다.

형민은 왼쪽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허리를 돌려 얼굴을 낙서가 씌여진
왼쪽 벽에 들이대고는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글자들 위에 담배불을 천
천히 대어 한 줄씩 옮기며 읽기 시작했다. 처음은 흔히 볼수 있는 음란
한 내용의 화장실 낙서로 시작됐다. 그리고 중간, 중간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지워지거나 흐릿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바로 이 오피스텔 건너편 아파트 3층, 그녀
의 집 앞에서였다. 나는 그때 그녀의 옆집에 짬뽕을 배달하러 가는 중이
었는데... (그렇다...  나는 흔히들 얘기하는 철가방이다.) 갑자기 그녀
가 문을 열고 튀어나오는 바람에 그녀의 어여쁜 다리를 철가방으로 치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녀는 깜짝 놀라며 몇발자욱 뒤로 물러섰는데...
내눈에는 오직 그녀의 매끈한 다리만 들어올 뿐이었고... 그녀의 두 다리
를 감싸고 있던 검은 스타킹의 올이 나가 버린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어쩌죠?"

그녀는 샐쭉한 표정을 짓다가 스타킹의 올이 나간 것을 알자 울상이 되어
다급히 집으로 들어가 버렸고... (아마도 중요한 외출이었던 것 같았다.
말쑥한 정장 차림이었으니...)  나는 그녀의 어여쁜 다리와 샐쭉한 얼
굴이 뱅뱅 머리속에 감돌아 멍하니 그녀의  집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

..........................

나의 끈질긴 집착에 드디어 그녀가 넘어왔다. 매일같이 그녀의 집 앞에
서 기다리고 전화하고 애원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녀가 만나자고
연락이 온 날 나는 거의 정신이 나가서 만사를 제쳐두고 약속 장소로
뛰어나갔다.

.....................

나쁜년... 그럴줄 알았다. 그년은... 자신의 예쁜 다리만 믿고 나같이
하찮은 인간은 상종도 안한다니... 그렇게 열심히 사랑고백을 했건만...
나를 배신하고 떠나겠다니...

.............................

얼마나 고민을 했던지...  그 XX같은 년을 죽일 생각에... 밤잠도 제대로
못자며 그 년을 죽이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결국 오늘 나는... 그녀를
어둠속에서 기다리다가 상큼한 얼굴로 걸어오는 그녀에게 다가가....... ]


반쯤 읽다보니 재미도 없는 데다가 어법도 이상하고 내용도 말도 안되는
흔한 낙서인 것 같아 저으기 실망을 하며 화장실 벽에 가져다 대었던 담배
를 다시 입에 물고 한모금 빨았다. 머리 속에서는 어서 아무나 화장실로
들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런데 그때였다. 형민이가 앉은 칸 옆에서 '툭'하는 소리와 함께 이상한
인기척이 났다. 그는 놀라움 반, 반가움 반으로 구세주라도 만난 기쁨에
왼쪽 벽을 손으로 조용히 노크를 했다.

"저기... 죄송한데요... 혹시, 휴지...가지신 거 있으시면... 조금만 나눠
주실 수..."

형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장실 밑으로 하얀 손이 '쑥' 나왔다. 전혀
예상도 안 했던 일인지라 깜짝 놀라 두 발을 들며 소리쳤다.

"허억~ 깜짝이야. 아니 말씀도 안 하고 갑자기 그러시면... "

어둠속에서 꼼지락거리는 하얀 손은 무척이나 희고 창백했다. 더욱이 그
손에는 아무것도 (그러니까 그가 원하는 휴지가...) 들려 있지 않았다.
형민은 왠 싱거운 사람이 다있나 생각하며 허리를 굽히고 피던 담배불로
그 하얀 손 언저리를 비추며 살펴 보았다.

"앗... 이... 이건..."

그 손은 여자 손이었는데 손목 언저리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너무
놀라 어쩔 줄 몰라하며 거친 숨만 내 쉬고 있는데 옆 칸에서 또 한번 '툭'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번에는 검은 물체가 자신이 앉은 화장실 바닥으로
'떼구르르' 굴러 들어왔다.

"아~악~"

그것은 길다란 머리칼을 한 여자의 일그러진 머리통이었다. 목아래는 뜯
겨진 듯 너덜거리며 짤려 있었고 반쯤 튀어나온 두눈은 분노가 가득 서린
눈길로 형민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더욱이 피로 얼룩진 입술은 무엇
을 말하려는 듯 오물거리기 시작했는데...

형민은 들고 있던 담배를 그 자리에 떨어뜨리며 숨을 몰아 쉬더니 바닥
에 쓰러지고 말았다.

                     *************************

"아이고 배야... 어디... 화장실 없나?"

자정이 가까워 온 시간... 오피스텔 관리인으로 첫 출근한 진한은 1층 복
도 후미진 곳에 위치한 관리실에서 안절부절하며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젠장, 지하 화장실은... 그저께 김형민이라는 사람이 심장마비로 죽어서
통제하고 있으니 갈 수도 없고...  윗층으로 올라갈까? 아냐... 그러다가
또 자리 비웠다고 핀잔들으면... 에라 모르겠다. 그냥 지하로 가자..."

진한은 책상 위에 놓인 휴지를 둘둘 말아 손에 움켜 쥐고 컴컴한 지하
화장실로 뛰듯이 들어갔다. 그리고는 화장실 두칸 중에 오른쪽으로 들어
가 황급히 바지를 내리고 시원하게 볼일을 봤다.

"휴~ 이제야 살 것 같군. 그나저나...  이놈의 화장실... 전등부터 수리를
해야 겠어. 이거야 원... 당최 어두워서..."

진한은 가래침을 '퉤'하고 바닥에 뱉고는 왼발로 문지르며 담배를 한대
꺼내 피웠다. 발그스름한 담배불로 인해 화장실 안이 다소 환해졌다.

"어? 이게... 무슨 낙서지? 화장실 벽이 온통 빨간 색으로... 무슨 내용
이야?"

진한은 화장실 왼쪽 벽에 씌여진 낙서 글자들 위로 담배불을 천천히 가
져다 대며 읽기 시작했다.


[이틀전... 이곳에서 내가 죽고 난 후... 억울한 내 영혼은 이 화장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한 여자에게 미쳐서 그녀를 토막 살인해 갈기 갈기 짤라 이 화장실 변기에
버리고 자살한 철가방 놈이나... 죽임을 당하고 이 화장실에서 떠도는
혼령이 되었다가 내게 나타났던 그녀나...

모두... 복수를 하려해도... 지금 그들의 혼령은 내 곁에서 같이 있으니...

나도 혼자서 허무하게... 죽기에는 억울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앉아 있
던 자리... 바로 이 화장실에 오는 사람... 아무나... 데려가야겠다.

훗... 아마도...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일 듯... 한데.......   ]


진한은 숨이 멈춰 질 듯 깜짝 놀라 움찔하는데 낙서 글자들 끝, 화장실
벽이 조그맣게 구멍이 뚫려진 것이 보였다. 진한은 벌벌 떨며 그곳에 담
배불을 가져다 대어 자세히 살펴 보는데...

"엇? 아악~~~~~~~"

그곳... 뚫어진 구멍사이에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핏발 선 형민의 두 눈동
자가 화장실 옆칸에서 처음부터 진한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듯 눈망
울만 이리저리 굴리며 껌벅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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