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발생한 연쇄 살인 이야기..

비애리 작성일 07.10.30 14: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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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6년(1603)년에 한양에서 4회에 걸쳐 잔인하게 살해당한
여인들의 시신들이 발견되 큰 혼란을 주었습니다..
여성들의 온몸은 상처 투성이 였고  사타구니 부분이 불에 지져 있는등
그야말로 끔찍하게 죽어 있었습니다..


당시 포도대장 변양걸(邊良傑, 1546~1610)이 사건 해결에 착수 했으나
범인의 윤곽 조차 잡지 못했습니다..
죽은 여성들은 몇달전에 실종된 평민층 부녀자와 기생들로 목격자를
탐문 했으니 별다른 성과가 없었습니다..


이후 한달후 다시 여인의 변사체가 발견 되는데 애생이라는 당시 최고의
기생 이였습니다..
애생의 변사체가 발견되자 그녀를 사모하던 많은 유생들과 관리들이
범인을 잡으라는 독촉을 해서 사건이 엄청 커집니다..


게다가  일주일후 나라를 혼란하게할 사건이 발생 합니다..
포천 부근에서 도승지 유희서(柳熙緖1559(명종 14)∼1603(선조 36)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사건때문에 선조가 직접 범인을 잡으라는 명령을 합니다..


처음엔 앞의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과 유희서 사건은 별개의 사건으로 보였으나
유희서의 아들 유일이 유희서와 애생은 서로 사모하는 관계였고
애생이 비참하게 살해 당하자 분개한 유희서가 범인을 찾고 있었다는 증언을
했기 때문에 변양걸은 이 사건 역시 부녀자 연쇄 살인의 범인이 저지른 것으로 보고
조사에 착수 했습니다..


조사 결과 유희서를 죽인 용의자 4명이 채포되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사건을 해결될듯 보였으나 다음 날 포도청 안에서 용의자중 김덕윤,설수가
누군가에게 칼에 찔려 죽은체로 발견 됩니다..


이일로 인해 포도청의 관리들이 줄줄이 잡혀와 신문을 당하고 파직되었지만
수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변양걸의 파직은 미뤄졌습니다.


변양걸은 초조해 졌으나 유일한 증거인 용의자중 2명은 죽고나자
이들의 배후자인 진범을 찾는건 어려워 졌습니다..


변양걸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영의정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습니다..
이덕형은 한가지 방법을 말하는데 바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을 찾아가 보라는 거였습니다..


야사에선 이항복은 선척적으로 귀신과 얘기하고 다를수  있을정도로
강력한 영능력을 타고난 인물로 나오는데
본인 스스로 사대부인 자신이
귀신을 보는걸 엄청 꺼려 했기 때문에 이항복의 신비한 능력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변양걸과 유희서의 아들 유일은  반신반의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항복을 찾아가
자초지정을 얘기하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항복은 말없이 있더니 손가락에 명주실을 묶고
그 실을 붓에 묶어 놓고는 종이를 펴고는 의식을 집중 했습니다..


그러자 붓은 움직이더니 종이에 뭔가를 적기 시작 했습니다..
변양걸은 놀라면서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지금 오신 분은 누구 십니까?]


그러자 붓은 한번 떨리더니 글을 적기 시작 했습니다..
[경승(敬承-유희성의 호)..]


[그럼 대감을 죽인 범인은 누구이니까?]
이 말을 듣자 붓은 세차게 흔들리더니 거칠게 글을 적었습니다..
[임해군..]


이글을 본 변양걸은 놀랄수 밖에 없었습니다..
임해군(臨海君, 1574~1609)은 선조의 큰아들이었습니다.

선조는 슬하에 적자는 없고 모두 후궁을 통해 손을 보았는데
그중 임해군은 광해군과 더불어 공빈 김씨의 소생이었습니다.


임해군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많은 고생을 했는데,
이때문인지 울폭증(鬱暴症)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조가 남달리 애정을 쏟았으나 학문은 하지 않고 부녀자를 겁탈하거나 하인들을 죽이는등
숱한 비행을 저질러, 장자이면서도 세자에 책봉되지 못한 인물
이였습니다..


게다가 임해군은 가학을 즐기는 변태적인 성욕을 가지고 있었다는데
궁녀에게 상처를 내며 즐거워 하기도 했다하고,
죄인들의 고문을 자신이 직접 할정도로 남의 고통을 즐기는 인물 이였습니다..


변양걸과 유일은 임해군의 주위를 탐문 수색 했고 그 결과 임해군의 하인들이 한 여인의 시신을 매장하는
현장을 잡게 됩니다..
하녀는 온몸이 찢기거나 불로 지져진체 죽어 있었고 변양걸은 이들을 몰래 심문해
임해군이 하녀를 고문해 죽였고 그의 사주로 시신을 파묻으려 했다는 진술을 받았습니다..


변양걸은 공식적으로 사건의 결과를 발표 했고 많은 대신들 역시 임해군을 죽이고 민심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 했으나 선조는 오히려 거짓을 얘기 한다며 상소한 대신 들을 귀향 보내거나 파직 시켰습니다..


또 선조는 포도청을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고,그 결과  포도대장 변양걸이 심문을 당하게 되고,
유희서의 아들 유일도 무고죄로 붙잡혀 의금부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결국 유일은  임해군을 모함했다는 거짓 자백을 하고 말았습니다.
선조는 유일에게 임해군을 모함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했지만 신하들의 반발로
목숨은 건질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 선조는 가뭄에 대한 구언(求言)을 신하들에게 청했습니다.
구언이란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임금이 신하의 바른 말을 구하는 것으로
이때 신하가 어떤 직언을 해도 처벌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덕형과 이항복은 구언을 기회로 삼아 유희서 살인사건 결말에 대한 부당함을 언급했습니다..


그는 변양걸에 대한 사면을 주청하고, 임해군의 잔인한 살육에 인해 억울하게
죽은 백성들의 원한이 나라에 가뭄을 불러들였다고 설토했습니다.
이덕형과 이항복의 구언이 나오자 대신들은 자신들도 입을 다문 죄가 있다며 줄줄이 파직을 청했습니다..
선조는 부들부들 떨었으나 신하들이 무슨 말을 해도 그들을 탓할 수 없었습니다..


이덕형의 구언으로 인해 변양걸은 몇 년 후 다시 복귀되어 수원 유수 등을 지내게 되고 유일 역시 풀려 납니다..
하지만 사건의 범인 임해군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으나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을 받게 됩니다.
임해군은 광해군이 즉위하자 역모를 일으키려다 귀향을 가고 그곳에서 사약을 받게 되죠..


사실 조선 시대에 양반들이 평민층이 부녀자를 윤간하거나 죽이는 일은 그리 드문게 아니 였습니다..
심지어는 벌건 대낮에 하인들을 죽이는 일도 있었죠..
이 사건이 커진건 임해군이 공신인 유희서를 죽인 일 때문 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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