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가 죽은 지 벌써 3년이 흘렀다. 영희 생각만하면 오빠가 너무나 밉다. 그날도 오늘처럼 부슬비가 내리는 우울한 날이었다.
우리는 꿈 많은 여고 2학년이었다. 영희가 별 이유없이 우리집에 잘 놀러왔음은 지금은 군에간 우리 오빠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영희가 올 때마다 오빠를 내 방으로 불렀다. 영희와 만나게 하기 위한 나의 배려였다. 처음에는 싫어 하는 기색이 없었던 오빠가 나중에는 마지못해 내 방으로 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빠를 자꾸 불러 수학도 물어 보고 영어 해석도 물으며 행복해 하는 영희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무척이나 기뻤다. 오빠가 자기를 별로로 생각하는 것을 알면서도 오빠만 보면 정신을 못차리는 영희가 한편으로는 불쌍한 생각도 들었다. 그날도 이층에서 공부하는 오빠를 내 방으로 불러 내렸다. 오빠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 오더니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곤 문을 꽝 닫고 이층으로 정신없이 뛰어 올라가 버렸다.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라 나와 영희는 멍하니 서로 마주볼 뿐이었다. 잠시 후 침묵을 깨고 영희가 수학 정석을 가방에 넣고 일어 났다. 미숙아 그만 가볼께 영희의 표정에 슬픔이 가득했다. 톡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주루룩 흐를 것만 같았다. 문앞까지 바래다 주고 나는 오빠방으로 쳐들어갔다. 오빠 ! 아무리 싫어도 그렇게 벌레 취급할 수 있어.오빠 너무했어. 정말 오빠 수준이 그 정도야 매너 좋기로 소문난 오빠는 담배만 연신 피워 대며 아무 말이 없었다. 아직도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는 것 같았다.
그 다음날, 영희가 자살했다는 소리를 듣곤 말을 잃었다. 그날 새벽 목을 맸다는 것이다.
오빠는 살인자나 다름 없어. 그 때 문을 닫고 뛰어 나가지 않았어도 .. 영희가 얼마나 소심한 아인데 ... 오빠가 영희를 죽인거야.
오빠는 아무 말없이 또 담배만 피웠다. 사실 내 책임도 일부 있다는 생각에 괴로왔다. 슬프게 날 쳐다보는 영희의 꿈도 여러번 꾸었다. 그 때 오빠를 부르지만 않았어도.. 오빠 역시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 후론 3 년동안 영희 얘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다.
오늘 오빠가 첫 휴가를 나왔다. 저녁 때 온 식구가 오랜만에 즐거운 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오빠와 커피를 한잔하면서 창 밖을 내다보니 마당에 그 날처럼 부슬비가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영희 생각이 났다. 난 혼자말로 조용히 속삭였다. 기집애, 아무리 마음이 여리다고 하지만 바보같이 목을 매. 미숙아 ! 영희 생각하니 난 깜짝 놀랬다. 3년만에 처음으로 오빠가 영희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이다. 미숙아 !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 나도 무서움이 많이 없어졌어. 아니 오빠가 무서웠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사실 영희는 나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야. 그 앤 죽을 운명이었어.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오빠는 계속 말했다. 내가 그날 뭘 본 지 알아. 문을 열고 들어가니 너와 영희가 앉아 있는데 영희 뒤에 흰 옷을 입은 여자가 영희를 뒤에서 끌어 안고 있잖아. 창백한 얼굴의 그 여자가 날 보고 씩 웃는데 난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어. 어렸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할머니 옆에 앉아 있던바로 그 흰 소복의 여자야. 그 때 아무도 못보고 나만 봤잖아. 헛소리한다고 얼마나 핀잔들었니. 바로 그 여자가 또 나타난거야.
영희는 이미 죽을 운명이었던거야. 나 때문에 목을 맨 것이 절대 아니야. 그 여자 때문이야.
할머니도 목을 매셨잖니. 오빠는 휴가가 끝나고 돌아갔다. 며칠 후 오빠에게 편지가 왔다.
미숙아 ! 그 흰 옷입은 여자가 어제 내 꿈에 보였어. 너 조심해라. 너무나 섬짓한 내용이라 소름이 쫙 끼쳤다. 난 갑자기 편지를 그대로 탁 놓치고 말았다. 누가 뒤에서 오빠 편지를 쳤기 때문이다.